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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아메리카의 고대문명

작성자스토리|작성시간20.02.17|조회수1,334 목록 댓글 0


아메리카의 고대문명

 

. 시작 말

 

고대 아메리카의 문명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부스의 위대한 모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대양이라는 장벽에 의해 다른 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 번영했다. Columbus의 신대륙 발견 이전의 사람들이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간 무대는 광대하며 남북 양극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들은 아메리카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들은 13만년 전에 바닷물의 결빙에 따라 수위가 내려가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육교가 된 베링 해협을 건너왔다. 차고 냉혹한 땅을 거쳐 살기 좋은 땅을 찾아 전진을 계속한 끝에 남아메리카에 이르러 세력을 화장했다. 이들 원주민들은 기원전 6000년 전의 초기 수렵시대로부터 농경 생활을 시작했고 기원전 1500년경에 촌락생활을 거쳐 기원전 1200년경에 최초의 문명이 나타나게 되었다.




 

중부 멕시코에서부터 온두라스, 과테말라를 거쳐 니카라구아까지 펼쳐진 지역을 통틀어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라고 한다. 이는 지리적 구분일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최초 문명이며 이후 모든 문명에 어머니적 역할을 한 올메까 문명에서 거대 제국을 건설했던 아즈텍 문명과 마야 문명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세력 범위를 나타낸다.

 

메소 아메리카의 발전문화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뉘어진다. 첫째로 형성기는 BC 1500년경에서 AD 300년까지이며 이 기간동안 올메까 문명이 나타난다. 고전기는 AD 300년에서 AD 900년까지이며 이 시기에는 멕시코 중앙 고원의 떼오띠우아깐 문명과 과테말라, 남멕시코와 벨리세 지역 등의 전기마야 문명이 번성하였으며, AD 900년에서 스페인의 신대륙 발견 전까지의 후기 고전기에는 똘떼까, 아스떼까와 후기마야가 발전하였다.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모체 문명인 올메까에서 출발한다. 이후 올메까 문명은 멕시코 중앙 고원의 떼오띠우아깐, 똘떼까와 아스떼까와 유까딴을 비롯한 남부지역의 마야문명에 영향을 끼친다. 각 문명은 기나긴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많은 특징적인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다. 메소아메리카인에 있어서 종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가장 큰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종교는 메소아메리카에 문명을 만들어내고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종교는 또한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제국 아스떼까가 스페인에 의해 굴욕적인 정복을 당하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본론에서는 각 문명의 흥망성쇠와 그들의 사회와 종교에 대해서 다루어 보겠다. 특히 아스떼까인의 종교적 우주관을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그들의 멸망의 한 원인을 서술하겠다




 


II. 본문

 

2.1. 형성기

 

1) 올메까(Olmeca) 문명

메소아메리카에서는 BC 4000년 전후로 옥수수 재배가 시작되었고 재배가 본격화되자 본격적인 정주 촌락이 각지에서 확립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BC 2000년부터 BC 1500년경에 걸쳐 멕시코 각지에서는 결정적인 농경기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그 후 수백 년이 지나 문명이 대동하기 시작한. 그 최초의 문명이 올메까 문명으로서 이는 마야 문명보다도 시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앞선다. 이후 메소아메리카에서 흥망성쇠 하는 모든 문명에 중심적 모체로서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온 올메까 문명은 3000년전 멕시코만 남해안의 베라크루스와 따바스꼬(Tabasco)의 습한 소택지에서 번성했다. 전쟁과 정복으로 세력을 멀리 확장해 나아가 동으로는 마야 족의 땅, 서로는 사뽀떼까(Zapoteca)족의 나라 몬떼 알반(Monte Alban)에까지 떨쳤다. 이윽고 그 세력은 중앙 멕시코지역에 퍼졌으며, 이 땅에 남긴 그들의 문화 유산은 후일 이곳을 점령하는 떼오띠우아깐과 또또나꼬(Totonaco)족에 의해 계승된다.




 

지금까지 탐사된 4개의 유적- Laguna de los Cerros, San Lorenzo, Tres Zapotes, La Venta-중에 라벤따(La Venta)는 가장 크기가 컸으며 종교의 중심지였다. 라벤따의 도시배치는 이후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종교 도시 계획의 원형을 이룬다. 그 곳에는 가장자리에 현무암 기둥을 둘러 세운 장방형 앞마당을 가진 조그만 계단식 피라밋이 서 있고, 그 근처에는 두 개의 도로가 마주 보고 있는데, 그것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신성한 구기경기장의 경계선일 것이다. 종교 의식용으로 건설된 듯한 이론 구역 안에서 조각석판과 더불어 올메까 예술의 가장 경이로운 예술품이라고 할 거대한 현무암 인두상이 발견되었다.

 

올메까는 무엇보다 먼저 종교 문명이었다. 그것은 방대한 수의 농민 신앙을 결집하여 많은 사람들의 힘에 의해 거대한 비석과 제단과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올메까의 종교예술의 주제를 검토해 보면 거기에는 수신 신앙이 깊이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이 수신의 모습은 재규어로 나타나는데 때로는 인간과 동물의 혼혈아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그들에게는 인신공희의 풍습이 있었을 듯하다.

 

올메까인은 뛰어난 조각가였을 뿐 아니라 놀라운 옥돌 세공장이기도 해서, 그것을 깎아 소상(小像), 보석장식, 도끼 같은 것을 제작했다. 메소아메리카의 다른 문명과 같이, 올메까인도 수학과 달력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마야족이 물려받은 기수법은 그들이 고안한 것으로 여겨진다.

 

올메까는 BC 400내지 BC 300년경에 쇠퇴하는데 그 멸망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현재로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올메까가 이후 메소아메리카 문명에 끼친 영향은 명백하다. 메소아메리카의 모든 문명은 올메까 문명을 뿌리로 두고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발전해 나간 것이다. 실제로 올메까의 구기운동, 인신공희 풍습과 수신에 대한 찬양 등은 메소아메리카 문명에서 공동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2.2. 고전기

 

1) 떼오띠우아깐(Teotihuacan)문명

 

올메까 문명이 BC 300년경에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을 무렵, 중앙고원에서는 올메까의 영향을 받은 여러 신전 중심지가 생겨나 촌락을 형성하였다. 그중 떼오띠우아깐은 세력을 확장하여 규모가 커지더니 드디어 전 멕시코 문화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AD 150년경에 이르자 태양의 피라미드를 비롯한 많은 신전을 중심으로 20의 넓은 도시로 확장되었으며, 인구는 3만 명의 규모를 가지게 되었으며, 최번성기에는 10만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드러나 있는 것은 지난날의 화려하고 웅장했던 떼오띠우아깐의 지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의 90%가 아직 땅 속에 묻어 있고, 게다가 발굴해야 할 떼오띠우아깐은 하나만이 아니다. 이 도시는 오랜 역사를 지내면서 건물들이 정기적으로-아마 100년마다- 다시 세웠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생겨나던 그 순간부터 놀랄 만큼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것 같다. 이로 미루어 이 곳의 문명이 아무 것도 없던 과거로부터 갑자기 솟아났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올메까가 떼오띠우아깐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떼오띠우아깐을 계승한 문명들에 관해서는 많은 사실이 알려져 있으나, 어떤 사람들이 이 도시를 세웠으며, 살았고, 그들이 왜 갑자기 사라졌으며, 어디로 갔느냐 하는 것은 아직 정확히 밝히지 못했다. 다만 떼오띠우아깐 계곡의 주민들과 멕시코 계곡의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00년이 흐른 뒤 아스떼까가 그 일대를 정복했을 때에는 이 도시는 이미 웅장한 폐허로 변해 있었다. 거리와 광장들은 텅 비어 있었고, 궁전에는 인적이 끊겨 있었다. 그러나 이 웅장한 아름다움에 감동한 아스떼까인은 "신들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도시"라는 의미의 이름을 붙여 경의를 표했다. 6세기 말경 그 전성기를 맞았던 떼오띠우아깐은 멕시코의 정신적인 중심지이고 광대한 제국의 수도였으며, 경이로운 도기 계획-정확하게 격자형으로 설계된 넓이 20의 도시-의 걸작이었다. 아스떼까인들은 이 거대한 도시를 똘떼까인이 세웠다고 믿었다. 하지만 똘떼까족의 역사는 10c 후반에 시작되었고, 그때에는 이미 떼오띠우아깐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스떼까족은 똘떼까란 말을 '위대한 장인'이라는 뜻으로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떼오띠우아깐의 웅장한 건축이나, 멕시코의 고전 시대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수준의 훌륭한 장례 가면과 도자기를 몇 세기에 걸쳐 만들어낸 떼오띠우아깐인에게는 아주 잘 들어맞는다.

 

떼오띠우아깐 시기에 들어와서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기본적인 신관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떼오띠우아깐의 유적지에는 깃털뱀, 껫살꼬아뜰의 신전이 우뚝 서 있다. 껫살꼬아뜰(Quetzalcoatl)은 껫살(Quetzal)과 꼬아뜰(Coatl)의 합성어인데, 껫살이라는 새는 하늘과 정신적인 힘을 상징하고, 꼬아뜰이라는 뱀은 땅과 물질적인 힘을 나타낸다. 껫살꼬아뜰은 우주 창조, 하늘과 땅의 결합 그리고 정신과 물질의 하나됨을 표현하는 거대한 상징이다. 또한 수신의 영향도 대단했다. 인신공희를 위한 꽃들의 전쟁(Guerra florida)이 시작되었다.

 

당시 메소아메리카의 종교적 중심지였던 까닭에 수많은 사람들은 성지인 떼오띠우아깐을 순례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무역이 발달하게 되었고, 당시 최대의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떼오띠우아깐 특유의 삼각 주발, 얇은 오렌지 토기, 신전을 본 뜬 뚜껑 달린 향로 등은 멀리 1,000나 떨어진 과테말라와 벨리세 지방에서조차 오늘날 출토되고 있다. 즉 떼오띠우아깐인은 마야 지방까지 진출하여 교역을 벌였던 것 같다. 또한 마야 고전기 전기문화형성에 있어 떼오띠우아깐 및 그 상인이 큰 역할을 했다. 아마도 떼오띠우아깐의 방대한 인구와 번영을 지탱하게 한 것은 이들 많은 지방과의 교역이었고, 그러므로 떼오띠우아깐을 중심으로 마야 지대까지 포함했던 이 광범한 통상망은 아마도 메소아메리카 문화권의 통일성을 창출하는 데 있어 크게 공헌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AD 500년경에 떼오띠우아깐은 절정기에 달해 있었다. 시 주변의 농경인구의 대부분이 흡수되어, 떼오띠우아깐은 분지 인구의 90%가 시내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AD 750년경에 떼오띠우아깐에는 대화제가 일어나는데, 그 때문에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떼오띠우아깐의 멸망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고도의 조직적인 방화로 미루어 보아 내분이 일어났거나 외적이 침입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외적 침입설은 북방의 수렵 민족이었던 야만족 치치메까(Chichimeca)인이 농경지대로의 진출을 위해 무력으로 떼오띠우아깐을 정복했다는 것이다.

 

2) 전기마야(Vieja Maya)

 

기원전 수세기전에 메소아메리카의 나우아(Nahua)족이 남쪽으로 이주를 계속하였다. 이들은 수렵시대를 거쳐 농경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원시적인 농촌은 점점 도시화되기 시작했고 이윽고 세련된 문명이 탄생할 준비가 되었다. 오늘날의 멕시코와 벨리세, 콰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의 일부 호근 전역에 걸쳐 있었으며, 자연적인 지형에 의해 세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광대한 열대림으로 덮인 페텐 지구, 다른 하나는 역시 빽빽하게 수목이 들어찬 우수마신따분지와 빠시온 강 지구,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관목으로 덮인 유까딴의 저지대 지구이다. 마야족은 지금의 벨리세 지역에 형성되어 있던 아사빠 문명을 받아 들여 이른바 고대 마야제국을 건설했다.

 

마야 문명이 약진하고 있던 BC 50년부터 AD 250년까지의 기간은 멕시코 중앙 고원에 있어서 대도시 떼오띠우아깐 문명이 번성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떼오띠우아깐의 교역망은 과테말라의 마야지대에까지 뻗쳐 있었으며 마야의 문화적 성숙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마야문명은 사회 경제제도, 천문학과 수학의 발달 그리고 뛰어난 예술성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통해 스페인 정복 이전에 존재했던 가장 뛰어난 문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화전농법을 이용하여 옥수수를 주로 경작하던 마야족은 농지를 공유하면서 수확의 일부를 성직자와 비상 식량의 비축을 위해 할당하고 나머지는 가족별로 공평하게 분배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마야족의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비상한 능력과 신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과시하기 위해 일식과 월식 현장 같은 천체의 변화에 대해서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또 주 생산물인 옥수수 경작을 위해서도 기후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어 마야 시대에는 자연히 천문학의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마야인들은 지구가 둥글고, 태양의 주의를 돌고 있으며 또 위도와 경도의 개념, 일식, 월식의 변화 그리고 금성을 포함한 가시성좌의 이동법칙 등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마야인들의 달력은 세계 어느 지역에서 사용하던 것보다 더 발전된 것이다.




 

또한 마야족은 세계에서 0의 개념을 이해하고 이를 최초로 사용한 부족이었다. 그들은 0을 얼굴, , , 그림 등으로 표시했다. 마야문명의 우수성은 예술, 특히 건축술에서 단연 돋보였다. 마야인들은 석회암이나 단단한 나무로 만든 대들보 등을 이용하여 수많은 신전, 궁전 및 공공건물들을 축조했다. 마야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유적은 멕시코의 유까딴 반도와 과테말라의 일부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세기경에 이르러 마야족은 점차 척박해지는 농지와 카리브족의 빈번한 침략 등으로 그들의 신전을 버리고 내륙지역으로 계속 이동하여 마야문명은 더 이상 번영할 수 없었다. 전기 마야의 멸망에 대해서는 현재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




 

2.3. 후기고전기

 

1) 똘떼까(Tolteca)

떼오띠우아깐의 멸망 후 멕시코 중앙 고원의 정세는 매우 혼돈스러웠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새로운 통일을 창조하고 메소아메리카 전체에 걸쳐 통신망을 재편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강대한 세력의 출현이 필요하였다. 떼오띠우아깐의 멸망 후 2세기 동안 그런 실력자는 나타나지 않은 듯 했으나, 드디어 AD 9세기 말엽에 치치메까의 일족인 똘떼까가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발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똘떼까 왕국의 중심을 뚤라(Tula)였다. 그곳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것은 똘떼까-치치메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 말 자체는 모순된 용법이었다. 우선 똘떼까란 또얀(Tollan)이라는 전설적인 도시 출신자를 뜻하였고, 높은 교양과 능력을 지닌 사람을 지칭하였다. 거기에 비해 치치메까란 개의 자손을 의미하였고 멕시코 북부의 건조지대와 거기에 뻗어있는 농경 전선사이에서 이동생활을 영위하는 수렵민을 일컬었다. 즉 뚤라에는 떼오띠우아간 이래의 도시 문명의 전통을 잇는 문화 수준이 높은 사람들과, 문명을 그리워하면서 모여든 수렵민 출신의 전사(戰士)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뚤라에는 이질적인 두 개의 집단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도시적인 교양인과 용맹스런 전사인 것이다. 껫쌀꼬아뜰(Quezalcoatl)추방의 전설은 이와 같은 대립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똘떼까 시기에는 전사계급이 신분상승을 이루게 된다. 똘떼까 사회는 점차로 군국주의화 되어갔다. 재규어와 독수리 전사들의 규칙과 인신공희 의식이 자주 행해졌다. 많은 조각작품 속에서 무사의 모습이 등장하고 죽음이라는 지배적인 주제를 담은 작품이 등장한다.




 

뚤라 안에 충만한 산 제물의 암시는 물과 농경을 지배하는 껫살꼬아뜰신의 신앙보다 더욱 높았으며, 이것은 우주와 인간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산 제물의 사상이 똘떼까인에 의해 내세워졌던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껫살꼬아뜰은 추방되었다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우주의 안전도 중요하지만 농경과 물도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똘떼까인들은 그 종교 체계 내부에 평화와 전쟁, 문화와 투쟁, 산 제물에 대한 부정과 적극적인 긍정의 두 사상을 간직하게 되었다. 즉 똘떼까의 종교는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똘떼까족은 회화, 벽화, 조각을 창안하였고, 나무껍질이나 용설란 종이에 흠을 파 나타낸 상형문자를 사용하였다. 또한 그들은 장엄한 왕궁의 건축가로서, 여러 가지 색깔의 깃털을 모자이크하여 방패와 장신구를 멋지게 장식하는 걸출한 장인이었다.

 

뚤라와 똘떼까인의 세력이 미쳤던 여러 중심지는 12세기 중엽에 와해되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똘떼까족은 북쪽에서 몰려드는 야만족과 더 이상 융화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상황이 이처럼 변화하자 새로 이주한 야만족들과 똘떼까족 사이의 균형이 파괴되어 똘떼까족은 뚤라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일부는 멕시코 계곡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똘떼까족의 유산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새로운 도시국가들을 세웠다. 또 다른 부류는 뿌에블라 계곡의 촐룰라(Cholula)로 이주하거나, 마야 문명의 세력권인 유까딴 반도의 치첸니사(Chichen Itza)까지 옮아갔다.




 

2) 아스떼까(Azteca)

똘떼까 문명의 멸망 뒤 멕시코 중앙 고원은 여러 도시국가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그 중에는 꿀루아깐(Culhuacan), 떼스꼬꼬(Texcoco), 아스까뽀살꼬(Azcapozalco), 그들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여러 선진 민족들이 이미 강력한 세력을 펴고 있었다. 13세기 중엽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혈통을 가진 새로운 부족인 메시카(Mexica)족이 멕시코 계곡으로 들어왔다. 호수 근처 차뿔떼에 잠시 머물던 그들은 아스까뽀살꼬인이 적의를 보이자, 1299년경 호수 남쪽, 꿀우아깐의 세력권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끌우아깐에서 환대를 받은 그들은 띠사빤(Tizapan)에 거주지를 분할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꿀우아깐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띠사빤에 창궐하던 독사들이 메시카족을 남김없이 물어 죽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운은 따르지 않았다. 메시카족은 뱀을 잡아 구워 먹었던 것이다. 몇 년간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메시카족은 똘떼까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1323년에 또다시 쫓겨난 그들의 호수의 늪지대에서 지내다가 1325년 오랫동안 기다리던 징조를 발견했다. 선인장에서 홰를 치고 있던 독수리가 그들의 정착지로 떼노치띠뜰란(Tenochtitlan)을 가리켰던 것이다. 메시카족은 점차 그들의 세력범위를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메시카족은 정복한 주변 부락의 군주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끌어들였고 1428년에는 떼노치띠뜰란, 떼스꼬꼬와 따꾸바(Tacuba)가 영구동맹, 즉 이른바 삼각동맹을 체결했다. 이 삼각동맹이라는 정치적 기본 구도로 후에 '아스떼까'라는 대제국이 건설되었다.

 

떼노치띠뜰란은 광대한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많은 시장과 사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시는 고도로 조직화되어 갔고 신분의 계층화가 뚜렷해 졌다. 왕을 비롯한 신관과 귀족들, 전투 엘리트들과 부유한 상인들은 아스떼까의 지배계급이었다.




 

아스떼까는 이전 어느 문명보다도 강력한 종교국가였다. 아스떼까인의 신은 우이찔로뽀치뜰리(Huitzilopochtli)로 그는 수렵의 신이며 달과 별을 뒤쫓는 태양이기도 했다. 똘떼까인으로부터 전승된 태양신 또나띠우와 겹쳐져 산 심장을 필요로 하는 우주의 중심적 신격으로 모셔졌다.

 

아스떼까와 동시대의 멕시코 중앙 고원의 여러 도시국가에서는 민족의 접촉이 증대됨에 따라 차츰 복잡해지는 신들의 관계와 종교체계를 정리하기 위하여 많은 신학적 노력을 기울였다. 아스떼까의 신학자들이 시도한 노력 가운데 하나는 떼스까뜰리뽀까(Tezcatlipoca)와 껫살꼬아뜰의 서로 대립되는 두 신을 화해시키려는 우주론의 체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아스떼까 신학자들의 조화와 화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종교체계 속에는 떼스끼뜰리뽀까와 껫살꼬아뜰의 근본적 모순은 해결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 대립은 우주와 세계의 안전에 중대한 위협이었다. 그리하여 아스떼까인의 마음속에는 어떤 심층 심리적인 불안감이 항상 존재하였다. 그들은 태양의 건전한 운행을 기원하며, 산 제물을 바치면 바칠수록 마음의 불안은 누를 길이 없었던 것이다.

 

아스떼까인에게 심리적 불안정을 준 또 하나의 원인은 그들의 우주 진화론이었다. 우주는 정체하지 않고 항상 운동하며 진화한다. 이것이 아스떼까인의 근본적인 신념이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오는 동안 세계는 4번 멸망되었다. 4개의 세계에는 각각 하나씩의 태양이 있어 서로 대응한다. 1의 태양은 재규어에게 잡아 먹혔고 제 2의 태양은 바람에 의하여 날아가 버렸다. 3의 태양은 화산의 용암 때문에 멸망되었다. 4의 태양은 홍수로 인하여 사멸되었다. 그들은 지금 제 5의 태양(El Quinto Sol) 속에 살고 있으며 이것 역시 언젠가는 명망될 운명에 있다는 것이다. 예언에 의하면 제 5의 태양의 파멸은 지진에 의하여 초래하게 되어 있었다. 화산 지대에 있는 멕시코에서 지진은 결코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지면의 진동이 일어날 때마다 아스떼까인이 이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무서움에 떨었을 것이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기에 아스떼까인에게 있어서 인간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은 잔인한 살인 행위가 아니라 우주를 구하기 위한 신성한 종교행사였다. 그들은 정치적 실력을 증대시키고 부를 축적하면 축적할수록 신들을 위한 웅대한 신전을 중축하고 더욱 많은 이간을 산 제물로 바치기 시작했다. 1489년 떼노치띠뜰란의 중심부에 우이찔로뽀치뜰리와 뜰락록을 제사지내 대신전이 완성되었을 때, 이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한다.

 

이런 대규모의 인신공희(人身供犧)를 위한 산 제물을 구하기 위해 아스떼까는 끊임없이 주변 지역을 정복하였고 이것은 많은 속국의 불만을 사게 되어 훗날 아스떼까 멸망의 한 원인이 된다.

 

아스떼까의 마지막 왕인 목떼수마 2세는 지독한 숙명론자이고 미신을 믿었다. 그는 당시 일어나고 있는 기후적인 불길한 징조들이 껫살꼬아뜰이 돌아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리하여 정복자 꼬르떼스를 끝까지 껫살꼬아뜰의 재림으로 믿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근심과 고민 속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이나 사상 문제가 아니라, 그가 대표하는 아스떼까의 종교 자체 속에 포함된 종말론적 우주관에 근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수 백년을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에서 군림해오던 아스떼까는 1521년 스페인 군인인 꼬르떼스에 허망하게 멸망하고 만다.

 

3) 후기 마야(Nueva Maya)

띠깔(Tical), 빨렝께(Palenque), 보남빡(Bonampak), 삐에드라스네그라스(Piedras Negras), 욱스말(Uxmal), 샤일(Xahil), 꼬판(Copan) 등의 화려한 제사 중심지를 건설하고 7, 8세기에 크게 번성하였던 전기마야가 원인 모를 멸망을 한 후 마야족은 내륙지역으로 계속 이동하기 시작하여 유까딴 반도에 이르게 된다. 유까딴 반도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신전을 가지고 있던 마야족은 10세기말 똘떼까족의 침입을 받는다. 전설에 의하면 세 아까뜰 꼬삘친이라는 똘떼까족이 유까딴 지대를 정복한 후 소위 마야-똘떼까의 신()마야 문명을 탄생시켰다. 이는 이전의 마야문명과 비교하여 규모나 수준 면에서 다소 후진적 측면을 보였으나, 신마야 문명은 이 시기에 건설된 마야빤(Mayapan)과 치첸잇싸(Chichen Itza)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파되어 번영을 이룩했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서 발생한 치첸잇싸와 마야빤 간의 전쟁 이후, 점차 도시 상호간의 내전이 한층 격화되어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초에 걸쳐 마야족은 각처로 흩어졌다. 따라서 후기마야 문명은 스페인 정복자들의 도착 이전에 이미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III. 맺는 말

 

메소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들은 기원전 1500년부터 시작되었다. 베링 해협을 건너, 수렵에 의존하는 길 외에는 살아갈 방도도 없는 차고 냉혹한 땅을 거쳐서 왔던 것이다. 그들은 살기 좋은 땅을 찾아 전진을 계속하여, 마침내 아름다운 멕시코 분지와 유카탄 반도의 평야에 당도했다. 그들은 거기서 다시 남아메리카로 들어가 깊고 밝은 하늘 아래 기후가 쾌적한 안데스 고지로 올라갔다. 열대토지에는 훌륭한 문화들이 일어났다. 이 모든 문명들은 그들의 뿌리를 모든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뿌리는 올메까에 두고 있다. 그들은 각각 독립해서 발전해 갔지만 그들 모두 이와 같은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다.

 

1) 상형문자와 나무껍질이나 사슴가죽으로 되어 있고, 아코디언처럼 접혔다 폈다 할 수 있는 책의 편찬.

2) 지도 사용.

3) 365일의 태양력 사용.

4) 선진적인 천문학 지식.

5) 종교적인 의미가 담긴 구기 운동.

6) 담배사용.

7) 주신으로 깃털 달린 하얀 뱀, 껫살꼬아뜰 숭배.

8) 주식으로 옥수수, , 호박의 경작.

9) 인신공희 풍습.

 

이러한 문화적 공통점은 공통된 상속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메소아메리카인들의 모든 문화는 틀림없이 올메까 문명이라는 공통의 출처를 지녔다는 것이다.

 

메소아메리카인은 수학, 천문학과 건축학에 그들의 능력을 보였다. 그들은 수많은 토우와 토기들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학문과 예술 창조의 원천은 그들의 종교심에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의 멸망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인신공희까지 하였던 것이다. 메소아메리카 주신으로 대표되는 껫살꼬아뜰은 긴 역사를 거쳐 다양한 문명들이 하나의 공통점을 이룰 수 있었던 매개체였으리라. 그들의 종교적 융화력은 스페인의 정복 시대에도 기독교와의 융화로 잘 설명된다.

 

종교에 대한 그들의 끝없는 경외로움과 더불어 두려움은 아스떼까의 몰락을 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메소아메리카인에 있어서 종교를 별도로 생각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다. 현재도 서구의 기독교와 융화되어 버린 그들만의 독특한 종교가 그들의 국교가 되어 있고, 스페인 식민기간 동안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열망으로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전역에 아름다운 성당들이 가득차 있다. 메소아메리카에서는 수천 년을 거쳐온 그들의 종교-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갖은 종교-가 지금도 다양한 민족과 사회계층을 하나로 엮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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