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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로마-카르타고, 포에니 전쟁

작성자라이크|작성시간14.04.17|조회수336 목록 댓글 0

 

로마-카르타고, 포에니 전쟁

 

포에니라는 말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을 가리킨다.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둘러싸고 BC 3세기 중엽에서 BC 2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전후(前後) 3차에 걸쳐 있었던 고대의 세계적 전쟁이다. 이른바 동서 결전(決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포에니전쟁

 

시칠리아를 무대로 한 전장(戰場)이다. 시칠리아 북동단(北東端)의 그리스 식민시 메시나를 에워싼 싸움이 발단이 되어 로마군은 시칠리아 남안(南岸)의 아크라가스를 점령한 후, 새로 강력한 해군력을 길러 BC 260년 시칠리아 북안의 해전(海戰)에서 카르타고 해군에게 대승을 거두었으며, BC 256년 로마는 대함대를 거느리고 아프리카로 원정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전장은 다시 시칠리아 서부로 옮겨져 시칠리아 서단(西端) 아이가테스해전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를 무조건 항복시켰다. 이 전쟁의 결과로 로마는 거액의 배상금을 얻는 한편, 카르타고 세력은 시칠리아에서 일소되어 시칠리아는 로마의 속주(屬州:프로빈키아, 해외속주의 시작)가 되었다. 이어 로마는 사르데냐·코르시카를 제2의 속주로 하였다.

▲ 포에니 전쟁에서의 로마군


제2차 포에니전쟁


한니발전쟁이라고도 한다. 용병의 반란을 진압한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스는 이베리아반도의 경영에 착수하였고, 그의 사위 하스도르바르와 아들 한니발이 뒤를 이어 세력을 기른 후 한니발이 로마의 동맹시(同盟市) 사군툼을 공격, BC 218년 다시 로마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대군을 거느린 한니발은 남프랑스를 석권한 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침입, 반도의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티키누스 전투). 특히 BC 216년 8월 2일 남이탈리아의 칸나에전투에서는 용병(用兵)의 묘(妙)를 발휘한 한니발이 로마군을 포위·섬멸하였으나, 반도에 있는 로마의 동맹시는 로마에서 이반(離反)하지 않았다.

카르타고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 및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었으나, 로마는 이를 게릴라 전법으로 교묘히 저지하여 전선(戰線)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끝내 굽히지 않고 마침내 퇴세(退勢)를 만회한 로마군은 BC 206년 카르타고군의 거점인 이베리아반도를 완전히 평정한 대(大)스키피오(아프리카누스)의 인솔하에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BC 202년 자마전투에서 한니발군을 격파, 두 번째의 전쟁도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카르타고는 해외영토를 모두 잃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한니발은 동방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 곁으로 도망했다가 다시 비티니아왕에게 의탁하여 재기(再起)를 꾀하였으나 허사로 끝났다.

▲ 포에니 전쟁에서의 카르타고 전투


제3차 포에니전쟁

카르타고의 숨통을 완전히 끊은 전쟁이다. 카르타고와 그 이웃 나라인 누미디아의 마시니사전투에 끼어든 로마가 BC 149년 전단(戰端)을 열어 소(小)스키피오가 인솔하는 로마군이 마침내 카르타고를 포위하여 이를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3차에 걸친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카르타고의 옛 땅은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속주가 되었다.

200년 이상에 걸친 전쟁의 범위가 서지중해 전역에 걸쳤을 뿐만 아니라 제2차 포에니전쟁 때의 카르타고와 동방 마케도니아의 동맹이 보여주듯이, 이 전쟁은 고대에 있어서 세계대전의 양상을 띠었다. 따라서 민족적 시련을 극복한 로마가 일개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세계 전체에 걸친 세계제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장군

 

 

개요

 

고대의 위대한 군사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 때 로마에 대항해 카르타고군을 지휘했다.

 

초기생애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위대한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이었다. 그의 생애에 관한 주된 라틴어 사료인 폴리비우스리비우스의 저서에 따르면 한니발은 그의 아버지가 스페인에 데려가서 이른 나이에 로마에 대해 적개심을 갖도록 키웠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BC 229(또는 228)년부터 BC 183년경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한니발의 생애는 로마 공화정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가 가장 최초로 지휘권을 받은 것은 카르타고의 속주였던 스페인에서 하밀카르의 사위이며 후계자인 하스드루발로부터였다. 그는 성공적인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BC 221년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하자 군은 나이 26세에 불과한 그를 총사령관으로 선포했으며 카르타고 정부는 신속하게 그의 야전 사령관직을 승인했다. 한니발은 즉각 카르타고의 스페인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데 관심을 집중했다. 그는 스페인의 공주인 이밀케와 결혼하고 다양한 스페인 부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올카데족과 싸우고 그들의 도읍인 알타이아를 점령했으며 서북부의 바카이이족을 평정했다. BC 221년에는 항구도시 카르타헤나(카르타고 노바, 카르타고령 스페인의 수도)를 기지로 삼아 타호스 강 지역에 있는 카르페타니족을 상대로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다.

BC 219년에 한니발은 에브로 강 남쪽에 있는 이베리아의 독립도시 사군툼을 공격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241)에 뒤이어 로마와 카르타고가 체결한 조약에서 에브로 강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르타고 세력권의 북방 한계로 설정되었다. 사군툼은 실상 에브로 강 남쪽에 있었지만 로마인들은 그 도시와 '친선'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실제적인 조약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함) 그 도시에 대한 카르타고의 공격을 전쟁행위로 간주했다. 사군툼 포위전은 8개월간 지속되었으며 그 와중에서 한니발은 심한 부상을 입었다. 카르타고에 항의하는 사절단을 보낸 로마인들은(그들은 사군툼에 지원군을 파견하지는 않았음) 사군툼이 함락된 이후 한니발의 항복을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로마측에서 선포했으며 카르타고측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한니발이 주도해서 싸웠다.

 

자마 전투의 상상도

 

갈리아 진격

 

한니발은 BC 219년부터 BC 218년 겨울까지 카르타헤나에서 보내면서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서 전쟁을 벌일 준비를 했다. 동생인 하스드루발에게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의 방위를 위한 상당수의 병력을 맡겨놓고 그는 BC 218년 4(또는 5)월에 에브로 강을 건너 피레네 산맥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로마인들은 이 소식을 듣기 직전에 전쟁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9만 명의 보병과 1만 2,000명의 기병, 그리고 상당수의 코끼리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폴리비우스의 수치는 아마도 과장된 것이며 총병력은 4만 명 정도로 추정됨). 피레네 산맥에서 그의 군대는 피렌 부족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이 저항과 일부 스페인 병력의 이탈로 군사가 크게 줄어들었으나 그는 갈리아 남부의 부족들로부터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론 강에 당도했다. 한편 로마의 장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반란 때문에 북부 이탈리아에 붙들려 있었던 그의 군대를 바다를 통해 마르실리아(마르세유)로 파견했다. 스키피오는 론 강 우안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하다가 한니발이 이미 강을 건너 좌안에서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갈 계획인 것 같다고 깨달은 스키피오는 북부 이탈리아로 되돌아가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론 강을 건넌 이후 한니발의 자세한 행적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폴리비우스는 바다로부터 행군하여 4일 걸리는 거리에 있는 강이 아직 한 줄기로 흐르는 지점에서 그가 강을 건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알레스 맞은편에 있는 포우르케스가 그 지점인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그는 이제르 강과 론 강의 합류점 북쪽에서 도강을 했을 수도 있다. 한니발은 이 지역에서 징발한 가죽배와 보트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 강 안쪽으로 잔교(棧敎)를 만들고 거기서 흙을 덮은 뗏목에 코끼리를 태워 건너게 했다. 말들은 커다란 배에 싣거나 수영해서 건너가게 했다. 도강작전을 수행하는 중에 적대적인 갈리아 부족들이 맞은편 강둑에 나타나자 한니발은 한노를 지휘관으로 삼아 분견대를 보내 멀리 상류에서 도강하여 그들을 배후에서 공격하게 했다.

 

카르타고군은 강을 건넌 뒤에 북부 이탈리아의 보이족을 우두머리로 하는 우호적인 갈리아 부족 지도자들을 영접했다. 보이족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는 통로에 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니발의 계획에 귀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후에 카르타고군은 뒤랑스 강(또는 더 정확하게는 아비뇽 부근에서 론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그 강의 지류)을 건너 '섬'이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 지역이 정확하게 어디인가를 밝히는 것은 한니발의 육상이동로를 파악하는 데 관건이 된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그곳은 산악과 론 강, 그리고 아이게스 강 아니면 이제르 강을 경계로 하는 비옥하고 인구가 밀집한 3각형의 지역이었다. '섬'에서는 두 형제 사이에 내분이 벌어지고 있었다(어느 부족인지는 분명하지 않음). 형 브랑쿠스는 한니발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카르타고군에게 보급품을 제공했다. 카르타고군은 카르타헤나로부터 4개월간 1,207km를 행군한 뒤였으므로 극도로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알프스 횡단

 

한니발의 군대는 콜드그리몬 또는 콜드카브르 계곡에서 알프스산에 접근해 뒤랑스강 분지를 지나거나 아니면 주네브르 관문 또는 몽스니 관문을 지나 포 강 상류 계곡으로 들어갔다가 적대적인 타우리니족의 영토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한니발은 그들의 도읍(지금의 토리노)을 습격했다.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에 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일부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알로브로게스족이 한니발의 대열 배후를 공격하여 위협을 가했다. 횡단로의 중간지점에서는 다른 켈트 부족이 짐 나르는 가축들을 공격하는 한편, 높은 곳에서 아래로 돌을 굴려 사람과 짐승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가파른 길에서 실족하게 만들었다. 한니발은 대응조치를 강구했으나 이로인해 엄청난 병력손실을 입었다. 3일째 되는 날 그는 갈리아 부족의 마을을 점령하고 창고를 털어 2~3일분의 식량을 군대에 공급했다. 한낮에 높은 곳에서 지키는 갈리아 부족의 공격에 애를 먹은 데다 갈리아 부족 안내인들의 충성심도 믿음이 가지 않아 한니발은 드러나 있는 거대한 암벽에서 야영을 하면서 야간에 자신의 말들과 짐 나르는 동물들이 아래쪽의 계곡으로 통과하는 것을 엄호했다. 통행로 정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이 더욱 위험했다. 전 해에 내린 눈이 굳어진 단단한 얼음 바닥 때문에 병사들이나 짐승들 모두 미끄럼질을 하면서 새로 내린 눈 속을 굴렀다. 산사태가 일어나 좁은 통로를 봉쇄했으며 그 길을 치우는 동안 군대는 하루종일 발이 묶여 있었다. 마침내 15일째 되는 날 카르타헤나로부터 5개월간 행군한 2만 명의 보병과 6,000명의 기병, 그리고 코끼리 38마리 중 남은 소수를 이끌고 한니발은 이탈리아로 내려왔다. 그는 기후와 지형의 어려움,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부족들의 게릴라 전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족과 언어가 다양한 부대를 이끌고 잘 적응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커다란 난관을 이겨낸 것이었다.

 

이탈리아 전쟁

 

한니발의 부대는 이제 스키피오의 군대를 대적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스키피오의 군대는 최근에 창설된 플라켄티아(지금의 피아첸차)와 그레모나의 로마 식민지를 보호하기 위해 포 강으로 돌진해왔다. 양군 사이의 최초의 접전은 티치노 강 서쪽 평원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누미디아 기병대가 우세를 보여 스키피오는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로마군은 플라켄티아로 퇴각했다. 2번째 집전을 유도하기 위한 몇 차례의 기동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와 스키피오의 연합군은 플라켄티아 남쪽의 트레비아 강 좌안에서 한니발을 맞이했으나 크게 패배했다(BC 218. 12). 이 승리로 갈리아족과 리구리아족이 모두 한니발의 편에 붙었고 그의 군대는 켈트족 신병들을 모집해 상당히 보강되었다.

 

혹독한 겨울을 보낸 뒤(이때 한니발은 눈병에 걸렸음) BC 217년 봄에 멀리 아르노 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로마의 2개군이 출동하여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그는 아레티움에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군대를 책략으로 제압하고 파이술라이(지금의 피에솔레)와 페루자에 당도했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계획대로 플라미니우스의 군대는 무방비의 전투에 이끌려 들어왔다. 그들이 트라시메네 호의 북쪽 언저리와 맞은편의 언덕 사이를 지나갈 때 한니발의 부대는 준비된 위치에서 공격을 가해 수천 명을 살해하고 나머지는 호수에 빠져죽게 만들어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가이우스 켄테니우스가 이끄는 약 4,000명의 기병대 증원군은 도착하기도 전에 중도에 습격을 받고 역시 궤멸당했다. 그러나 카르타고군은 너무 지쳐서 승세를 몰아 로마로 진군할 기력이 없었다. 게다가 한니발은 이탈리아의 로마 동맹세력들이 이탈하여 내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한니발은 피케눔에서 쉬면서 217년 여름을 보냈으나 나중에 풀리아해와 캄파니아를 공격해 파괴했다. 한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쿵크타토르가 이끄는 로마군은 지연전술을 구사하여 양군 사이에서 소규모 접전만이 벌어질 뿐이었다. BC 216년 초여름에 한니발은 갑자기 남쪽으로 이동하여 아우피두스 강변에 있는 칸나이(지금의 몬테디칸네)의 대규모 보급기지를 장악했다. 그곳에서 8월초에 칸나이 전투가 벌어졌다. 한니발 부대의 중앙선에 배치된 갈리아와 이베리아 보병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 보병대의 돌진을 막아내지 못하고 대열은 유지한 채 밀려났지만 리비아 보병대와 양 진영의 기병대는 굳건히 버티면서 로마군의 공격대열을 중복시키고 배후에서 포위하는 작전을 통해 승리한 로마 군단 병사들을 오히려 추격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육상전의 대승리는 바라던 효과를 가져왔다. 많은 지방들이 이탈리아 동맹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로 진격하지 않고 BC 216~215년 겨울을 카푸아에서 보냈다.

 

시간이 갈수록 카르타고군의 전투력은 점차 약해져갔다. 파비우스가 제안한 전략이 실행되었다. 그 내용은 로마에 충성을 바치는 도시들을 방어하고 기회가 닿으면 한니발에서 함락된 도시들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되, 적군이 싸우자고 할 때 싸우지 말고 카르타고군을 항상 모든 전장에서 긴장상태로 있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니발은 병력의 열세 때문에 로마군을 상대하기 위해 자기 부대를 산개시킬 수도 없고 집중된 병력으로 결정전을 벌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공세를 벌이지 못하고 조심스러운(항상 성공적이지는 못한) 수세에 밀렸으며 카르타고의 본국 정부로부터도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로마의 제해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익한 지구전을 벌이기 위한 지방 보급원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야 했다.

 

타렌툼(지금의 타란토)을 점령한 것을 제외하면 한니발은 보잘 것 없는 승리를 거두는 데 그쳤다(BC 215~213). 카르타고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BC 213년에 카실리눔과 아르피(한니발이 BC 216~215년 겨울에 점령했던 곳)가 로마군에게 수복되었으며 BC 211년에 한니발은 로마군에게 포위당한 카푸아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해야 했다. 한니발이 강력하게 요새화된 로마의 성벽에서 4.8㎞ 이내까지 빠르게 행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푸아는 그해에 함락되었으며 시칠리아에서는 시라쿠사가 무너졌고 BC 209년에는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이 다시 로마의 수중에 넘어갔다.

 

스페인과 아프리카 전쟁

 

한편 스페인에서 로마군은 큰 전과를 올려 그곳의 카르타고 권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BC 208년에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 주력군에서 분견대를 차출하여 한니발을 지원하러 가기 위해 아마도 형이 넘어간 길을 따라 알프스를 횡단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한니발의 군대와 합세하기 전에 북부 이탈리아의 메타우루스에서 패배했다(BC 207)(→ 색인 : 메타우루스 전투). 이렇게 해서 중부 이탈리아에서 형세를 만회하려던 마지막 희망마저 무산되자 한니발은 자신의 병력을 브루티움에 집중하고 그곳에서 남아 있는 동맹세력의 지원을 받아 이후로도 4년 더 로마의 압력에 저항하면서 버텼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북아프리카를 타격하여 카르타고의 주요동맹세력인 마사이실리아의 누미디아인들을 분쇄하고 카르타고를 위협했다.

 

위험에 빠진 자기 나라를 지원하러 가기 위해 한니발은 BC 203년에 이탈리아를 포기했다. 이미 예비적인 휴전협정이 선포되었고 카르타고군은 스키피오가 제시한 가혹한 조건들을 받아들인 상태였지만(BC 204~203 겨울) 한니발은 카르타고 군의 나머지 병력을 하드루메툼(지금의 튀니지 수시)에 집결시켰다. 예비적인 평화협정 제안을 가지고 로마에서 사절들이 돌아오고 있던 그 순간에 카르타고군은 휴전협정을 파기했다.

 

뒤이은 전투에 관한 설명은 사람에 따라 크게 다르다.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모두 각기 자신들의 누미디아 동맹세력과 합세하기 위해 바그라다스 강을 따라 자마레기아 지방으로 올라갔다. 이때 한니발은 기병대가 없었고 전열의 용병부대와 제2열의 아프리카 보병대가 한꺼번에 패배했다(→ 색인 : 자마 전투). 스키피오는 정예병사로 이루어진 한니발의 제3열이 전혀 손실을 입지 않은 것을 보고 자기 전열을 재편하는 한편, 자신의 누미디아인 동맹세력인 마시니사 기병대를 카르타고군의 배후로 올려보냈다. 한니발은 2만 명의 병력을 잃고 패배했으나 자신은 마시니사의 추격을 벗어나 몸을 피했다.

 

망명과 죽음

 

자마 전투 이후 1년이 지나 체결된 로마와 카르타고의 평화조약은 한니발의 필생의 목표를 좌절시켰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무기를 들고 로마와 싸우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비록 전쟁을 잘못 치루었다는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그는 수페트(민간 행정관)가 되었으며 아울러 군지휘권도 그대로 보유했다. 수페트의 지위에 있으면서 그는 카르타고의 과두적인 통치세력을 타도하고 일정한 행정적·정치적 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카르타고 귀족계급 내의 일부 세력과 사이가 나빠졌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를 부추겨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만들려고 한다는 혐의로 로마 당국에 고발당했다고 한다. 한니발은 에페소스에 있는 안티오코스의 궁전으로 피신했다(BC 195).

 

처음에는 로마와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던 안티오코스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전쟁수행에 관해 그가 타당한 충고를 하는 것이 점차 말썽의 원인이 되자 그는 안티오코스를 위해 함대를 마련하고 지휘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페니키아에 있는 도시로 가야 했다. 그러나 해전에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팜필리아의 시데 앞바다에서 로마 함대에게 패배했다. 육지에서 안티오코스는 190년에 마그네시아에서 패배했으며 로마인들이 그에게 내건 요구조건의 하나는 한니발을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색인 : 마그네시아 전투). 이 지점에서 또다시 한니발의 뒤이은 행적에 관한 설명은 여러 가지이다. 그는 크레타를 거쳐 비시니아의 프루시아스 왕의 궁정으로 달아났거나 아니면 아르메니아의 반군세력에 가담했던 것 같다. 결국에 그는 프루시아스에게 피신처를 구했다. 프루시아스는 당시에 로마의 동맹세력인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와 전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한니발은 이 전쟁에서 프루시아스를 도왔으며 해상에서 에우메네스와 전투를 벌이던 중 뱀이 가득 들어 있는 큰 솥들을 적군의 배에다 던져 승리를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로마인들은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과정을 통해 한니발의 항복을 요구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번에는 피신할 길이 없게 되자 한니발의 비시니아의 리비사라는 마을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색인 : 아나톨리아).

 

인품

 

한니발에 관해 쓴 로마 전기작가들이 그를 공정하게 다루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폴리비우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최소한 편견 없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마 전기작가들은 그의 잔혹성에 관해 비난하고 있지만 그는 실상 파비우스와 포로 송환에 관한 협정을 맺기도 했으며, 죽은 적장들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BC 215 콘술)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BC 216)의 시체를 정중하게 대우하는 면모도 보였다. 그가 탐욕스럽다는 또다른 비난에 관해서는,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장수들이 불가피하게 하는 행동 말고는 달리 그렇다고 볼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파비우스의 농장을 약탈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에 관해 제기된 많은 비난(예를 들면 폴리비우스가 말하는 식인행위 같은 것)은 휘하 장군들의 개별적인 과오에서 연유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과오가 있었는지조차 불확실하다. 그의 용맹성은 잘 알려져 있었으며 절제력과 금욕생활은 사람들이 칭찬하는 바였다.

 

그의 지도력은 그가 장기간 지휘했던 복잡한 혼성부대 내에서 전혀 소요사태나 불협화음이 없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알 수 있다. 그가 자기 병사들과 아울러 코끼리와 말에 대해 쏟은 배려는 그의 인정 많은 성격을 증명해준다. 로마인들이 말하는 '카르타고인의 신의'(punica fides), 곧 그가 신의가 없다는 비난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전쟁에서 풍부한 지략과 대담한 책략을 구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의 기지와 교묘한 말솜씨에 관해서는 많은 일화가 남아 있다.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유창하게 했으나 그의 전기들에는 좀더 개인적인 정보가 빠져 있다. 그의 생김새를 알려주는 초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가 장군으로 선출된 BC 221년에 주조한 카르타헤나의 은화로 턱수염이 없고 쾌활한 젊은이의 용모를 담고 있다.

 

 

 

▲ 고대 카르타고의 도시 모습

 

 

카르타고 [Carthage]

 

BC 814년 티레의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 북쪽해안에 전통적인 양식으로 건설했으며, 지금은 튀니스 시의 교외 거주구역이다.

카르타고의 건설에 관해서 이 도시를 카르케돈으로 부른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가지각색의 전설이 유포되었지만, 로마 쪽의 전설이 〈아이네이스 Aeneid〉로 인해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서사시에는 오빠 피그말리온(역사상의 티레의 왕 이름)을 피해 도망친 티레의 공주 디도가 카르타고를 건설했다고 나와 있다. 그 주민들은 로마인들에게 포에니(Poeni)인으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페니케스(페니키아인)에서 유래했으며, 'Punic'(포에니의)이라는 형용사는 여기에서 파생했다. 카르타고의 건설 연대는 고고학적 자료와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카르타고인들이 과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설상의 건설 연대보다 만 1세기가 지난 BC 8세기 초반 이전 유적으로 발견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튀니스 만 연안의 중앙에 카르타고의 건설을 위해 선정된 부지는 이상적이었다.

 

도시는 낮은 언덕들로 이루어진 3각형의 반도 위에 건설되었고, 배후에는 안전한 정박지가 있고 어류의 공급이 풍부한 튀니스 호가 있었다. 도시의 부지는 잘 보호되어 있어 방어하기가 용이했다. 남쪽에서 반도는 좁은 지협을 통해 본토와 연결된다. 고대의 성채 비르사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 위에 있었다. 카르타고의 가옥과 공공건물의 유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데도 그 언덕에서는 최초의 무덤 몇 개가 발견되었다. 카르타고인들이 누린 문화생활의 수준은 고대 지중 해 세계의 좀더 큰 도시들보다 훨씬 뒤졌을 것이다. 포에니인들의 주요관심은 상업이었다. 로마 시대에 포에니의 침대·쿠션·방석 들은 사치품으로 간주되었으며, 포에니의 소목 세공과 가구들은 다른 곳에서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카르타고의 재정수입 가운데 상당량은 일찍이 BC 800년경에 시작된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지방의 은광 채굴에서 생기는 것이었다.

 

BC 3세기 중반부터 BC 2세기 중반까지 카르타고는 로마와 일련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포에니 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들은 카르타고가 로마에 완전히 패하는 것으로 끝났다. 카르타고가 BC 146년에 최종적으로 무너졌을 때 그 도시는 약탈과 방화로 폐허가 되었고 그곳에 사람이 거주하는 것은 일체 금지되었다. BC 122년 로마의 원로원은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에게 카르타고의 옛 터에 식민지를 건설하도록 위임했다. 그 건설사업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다수의 토지 없는 시민을 보냈으며, BC 29년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 행정중심지로 이곳을 정했다. 그후 이곳은 콜로니아율리아카르타고로 알려졌으며, 알렉산드리아나 안티오크와 맞먹을 정도로 번창하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로마 황제들 중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 도시를 좋아했다. 제국 후기의 이곳 역사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3세기 중엽부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2세기가 끝날 때부터 그리스도교 주교의 소재지가 되었으며, 이곳의 선각자들 가운데에는 그리스도교 교부들인 테르툴리아누스와 성 키프리아누스가 있었다. 4, 5세기에 카르타고는 도나투스파와 펠라기우스파의 논쟁으로 계속 시달렸다. 439년에 반달족의 지도자 가이세릭이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입성해 도시를 약탈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비잔틴 군대가 반달족의 마지막 왕 겔리메르를 데키뭄 부근에서 격파하고 카르타고에 무저항으로 입성했다(533). 카르타고는 705년에 아랍군에게 함락된 후로는 신흥도시 튀니스에 밀려 완전히 빛을 잃었다.

 

로마의 카르타고는 파괴되었지만 그 유적은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많은 요새의 윤곽과 수도교(水道橋)이다. 과거의 비르사 성채 구역은 유노와 유피테르와 미네르바를 모시는 큰 신전으로 장식되었고, 그 근처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친 신전이 서 있었다. 또한 비르사가 있던 자리에는 옥외 주랑(柱廊) 현관이 세워졌는데, 그 현관을 장식했던 카르타고의 가장 우수한 조각작품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밖의 로마 시대 도시의 유적으로는 주악당(奏樂堂), 하드리아누스가 세운 극장,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떠 지은 원형경기장, 수많은 목욕탕과 신전들, 곡마장이 있다. 시내에 있는 그리스도교도의 건물들은 반달족의 건축물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비잔틴 양식으로 되어 있다. 가장 큰 바실리카는 본래 바실리카가 있던 자리에 6세기에 재건된 것이다. 3, 4세기에도 교회들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자취는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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