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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그리스-로마의 연결로가 된 福者의 도시, 근처에는 2만여년 벽화 그려진 코스케 동굴 있어

작성자러브인|작성시간14.06.02|조회수180 목록 댓글 0

 

 

그리스-로마의 연결로가 된 福者의 도시, 근처에는 2만여년 벽화 그려진 코스케 동굴 있어

 

 

 
  
 

프랑스 지중해지역을 일컫는 PACA(프로방스-알프스-코트다쥐르)는 고대부터 육지와 해양 세력이 머무르는 곳으로 복합문화가 형성되고 확산된 곳이다. 여러 민족의 공존과 상호 접촉은 고대 지중해의 독자적인 토착문화와 異 문화 간 접변 현상을 야기했으며 발굴된 역사적 유물을 통해 구체적인 정황을 유추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고대의 역사 흔적뿐만 아니라 망통, 니스, 생-라파엘, 마르세유, 이스트르 등의 해안가와 아비뇽, 오랑쥬, 아를 등의 도시들 주변에 여러 유물과 유적지가 발굴돼 인근 선사시대 박물관을 형성했기 때문에 인류와 문화의 기원과 정체가 가지 형태로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구석기와 중석기의 사냥과 채집에 이어 공동 주거의 형태에서 이뤄진 농업, 목축과 제련 활동이 밝혀졌고 노천 주거와 死者의 세계에 대한 가정도 증명됐다. 상이한 도시들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된 선사문화는 청동기의 야금술과 후빙기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연속성을 갖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1991년 공개된 해저 동굴의 眞價

 

 
 ▲ 코스케 동굴 단면. 입구는 수면으로부터 37m 아래 있으며, 175m 길이의 긴 해저 동굴을 지나면 도달할 수 있다. 사진 출처 http://www.lavisitedescalanques.com/uk/grand-public/calanques.php 

1991년 마르세유와 카시 인근에서 잠수 전문가인 앙리 코스케(Henri Cosquer)는 끝을 알 수 없는 해저 동굴의 입구를 발견(실은 1985년 발견했지만, 그 내용은 잠수부 3명이 죽을 때까지는 공개되지 않았다)함으로써 봉인된 새로운 선사시대를 여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후 쿠르탱의 책임 하에 전문가들이 모여 논의를 시작한 이후 2001년에 이르러서야 정확한 지형도를 복원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할 수 있었다. 코스케 동굴 입구는 수면으로부터 37m 아래 있으며, 175m 길이의 긴 해저 동굴을 지나면 도달할 수 있다. 1991년과 1998년 사이에 27차례 방사성 탄소를 이용한 연대 측정을 실시했다. 그 결과 2만 여 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물의 흐름이 큰 폭으로 이동해 형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일부에서는 이곳의 역할을 놓고 지중해의 聖所라는 주장도 제기했다.


코스케 동굴의 역사적 가치만큼 중요한 예술성은 벽화에 있는 흔적으로 말, 들소, 사슴, 메가세로스, 야생 염소 등의 11종 177마리의 동물들과 65개의 손 모양 및 20개의 미확인 형상과 216개의 표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은 인류의 공통된 현상임을 입증하듯 인류 최고의 동굴벽화에서도 예술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코스케 동굴 발견 이후 가까운 마르세유에서도 신석기 시대의 유물을 발굴하는 등 과거로의 여행에 즐겁게 동참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의 통로…‘福者’의 의미 지닌 도시
적어도 2천6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마살리아(현 마르세유)는 고대 지중해의 영향권에 있던 교역의 중심 항구도시로서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이 중첩되기도 했는데, 특히 마살리아의 동남쪽에 위치한 올비아(Olbia)의 유적에서 여러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상업 항구도시이자 노천 고고학 박물관으로 유명한 올비아(Olbia de Provence)는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어 ’′Oλβια에서 유래됐는데, ‘la bienheureuse’(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 즉, ‘福者’를 의미한다.
고대 서지중해 연구자인 바트(M. Bats)는 이 도시가 기원전 6세기의 마살리아의 영향으로 기원전 325년경에 생겨났으며 49년 세자르에 의해 로마화 됐고 그리스의 도시 마살리아로 향하는 인적·물적 이동과 교류의 연결 통로였다고 설명한다.


이 도시 역시 19세기에 아주 우연히 동쪽 성벽 일부가 관찰되면서 발굴되기 시작했다. 1909년 마을 정령을 위한 봉헌글이 적힌 대리석으로 된 작은 상이 발견됨으로써 이곳이 주거 밀집지역이며 지중해의 교역을 위한 일시적인 체류지라기보다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 지속되고 확산된 곳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마르세유 근교에서 발굴된 도기에서는 갈로-그리스 병용 표기법이 발견됐다. 올비아의 금석문에는 그리스신이 언급돼 있었으며, 봉헌물을 넣는 도기에서도 신의 이름과 350여개의 헌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인근 앙티폴리스의 10여개 유적지에서도 동일한 유형의 봉헌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미뤄 일대의 언어사회에 그리스의 영향이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세기부터 갈로-로마 시대를 지나 7세기까지의 유적을 담고 있는 올비아 발굴에 공헌한 역사학자 쿠프리(J. Coupry)는 수년간(1947~1951, 1956~1971) 연구팀을 구성해 발굴 작업을 계속했다. 그의 제자인 바트가 연구를 이어받아 두 차례(1982~1989, 2002~2008)에 걸쳐 스승의 발굴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 결과 지역의 한정성과 시기의 단편성을 벗어나 올비아에서 마살리아까지 주변의 도시들을 포함해 다양하고도 자유롭게 그리스-로마의 문화가 통섭되고 병존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올비아의 집단 주거지를 근거로 도시의 유형화를 살펴볼 수 있는데 그리스어로 기록된 부분이 처음으로 발견된 동쪽영역과 교회영역, 중앙교차로영역, 서쪽영역, 북쪽영역에서도 지속적으로 그리스-로마의 영향이 중세 도기의 상업적 유통에까지 영향을 미친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고대 지리학자 스트라본 가라사대…
일찍이 17권 분량의 유명한 저서 『지리학(Geographica)』을 썼던 스트라본(Strabon, 기원전 63/64년 ~ 기원후 24년경)은 마살리아 도시를 앙티폴리스, 니스 등 지중해 해안가와 올비아, 트로이스 전역까지 포함해 설명한 바 있다. 올비아는 마살리아와 마찬가지로 상업과 시장 기능이 활발했던 항구 도시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2세기까지는 그리스식의 도시 성벽을 이루고 있었고, 로마 정복이후 로마식 계측법이 도입돼 도시 구획이 이뤄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쿠프리는 올비아의 유적지를 통해 마살리아에서 비롯된 그리스 도시 계획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한편 로마의 해안 식민지의 사례도 밝혀냈다. 바트는 올비아의 주거 양식과 주민들의 활동을 토대로 당시 인구를 밝혀내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의 작업은 최초 올비아 거주민들의 예술 활동과 일상생활을 증명한 것으로 주목받았다. 쿠프리와 바트의 연구를 통해 드러난 올비아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명명했던 것처럼 ‘福者’ 즉, 신으로부터 축복받은 곳임에 틀림없다. 올비아의 역사적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이 도시의 중세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베치온과 정부와 교회의 협조로 다른 여러 연구가 활발하게 이어졌다. 이러한 연구는 올비아를 단편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프랑스 지중해지역(PACA) 전체의 문화를 조명하는 차원에서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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