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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르네상스의 産室 피렌체 산책

작성자변강쇠|작성시간14.06.03|조회수75 목록 댓글 0

 

르네상스의 産室 피렌체 산책

 

⊙ 단테, 마키아벨리, 조토,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다빈치 등 희대의 천재들 배출, 메디치 등
巨商들의 지원받으며 르네상스 開花
⊙ 르네상스 미술의 寶庫 우피치 미술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소장한 아카데미아 미술관
⊙ 단테, 브루니,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등의 묘소가 있는 산타크로체 교회,
‘살아 있는 르네상스 미술관’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

 

산 미니아토 교회에서 바라본 피렌체 전경. 한가운데 두오모의 쿠폴라와 종탑이 보인다. 맨 왼쪽이 팔라초 베키오, 오른편 끝이 산타 크로체 교회다.

 

르네상스(Renaissance)가 태어난 시기에 대한 논란은 있어도 태어난 장소가 피렌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14세기의 맹아(萌芽)든 15세기의 개화(開花)든 르네상스를 선도한 인물들은 거의 피렌체와 그 인근 출신이다. 건축과 미술 분야가 많이 알려져 그렇지 분야에 관계없이 적용할 수 있는 얘기다. 언어, 문학, 사학, 철학 등 인문학은 물론 수학, 화학, 지리, 천문 등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분야에서 그렇다. 단테를 위시해 브루니를 거쳐 피코 델라 미란돌라에 이르는 문사(文士)·철인(哲人)·사가(史家)들, 조토에서 마사초를 거쳐 보티첼리에 이르는 화가들,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에서 베로키오에 이르는 건축·조각가들만이 아니다. 레오나르도나 미켈란젤로 같이 분류가 마땅찮은 불세출(不世出)의 전인(全人)급 거장도 여럿이다. 현대 정치학은 그 자체가 이 시절 피렌체 사람(마키아벨리)의 저서 한 권에서 비롯한 것으로 간주한다. 같은 때에 거상(巨商)들도 속출해 학예활동에 든든한 물적 토대가 돼주었다. 바르디, 페루치에서 시작해 사세티, 토르나부오니, 메디치, 파치, 스트로치, 루첼라이 등 명단이 길다. 그중 메디치 가문은 특출하다. 몇 차례 공백이 있었으나 1434년 노(老) 코시모(Cosimo il Vecchio, 1389~1464, 피렌체 공화국의 국부로 추대) 이래 1737년 후대(後代)가 끊길 때까지 근 300년을 집권하며 피렌체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단테와 조토가 생각에 잠겨 가로지르던 광장이 있고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가 함께 고대 건축 공부하러 로마에 가자고 의논하던 교회가 있는 곳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보티첼리, 페루지노 등이 재간을 가다듬던 베로키오의 공방(工房)이 있고, 레오나르도와 마키아벨리가 함께 근무하던 정부 청사가 있는 곳이다. 르네상스 건축의 이론을 세우고 실기를 시범한 알베르티가 후에 개명(開明)교황으로 활약하는 니콜라스 5세와 함께 스트로치 집안의 가정교사를 지낸 곳도 피렌체다. 이 둘은 더불어 볼로냐대학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이기도 하다.

도시 하나에서 이럴 수가 있나 싶다. 르네상스 당시 피렌체의 인구를 8만~9만명 정도로 추산할 때 실로 경이로운 역사적 현상이다. 영국의 페이터(Walter Pater)는 메디치 시절의 피렌체를 두고 페리클레스 시절의 아테네 말고는 인류사에 유례가 없다고 했다. 각 분야의 인물들이 속출해 풍성한 볼거리와 얘깃거리를 남겨준 것만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봐도 낯설지 않은 자본주의적 경제시스템과 공화주의 정치 체제를 정비하고 실행해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예감케 한 것도 피렌체다. 한때 피렌체의 화폐 피오리노(fiorino)는 전 유럽이 선호하는 국제통화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럽 주요국가의 궁정과 교황청, 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에 상주 사절을 파견해 근대국가 간 외교관계 수행의 모델을 개발한 것도 피렌체였다. 중세 천 년을 뒤로하고 근대로 가는 큰 문이 열린 것이다. 이런 곳을 어찌 무작정 배회하랴. 잠깐 세계관광여행 약사(略史)라도 살펴보자.



피렌체에 대한 괴테의 찬사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유럽 대륙에 구체제가 복구되자 서유럽의 각국은 외견상 안정을 회복한다. 산업혁명 효과의 축적으로 도시 부르주아 층이 커졌다. 이들 유한(有閑)계급은 새로 얻은 여가를 문화취미에 활용해 귀족층의 전유물이던 음악과 미술의 애호층이 두꺼워진다. 역사학과 구분된 미술사학이 관심을 끌고 문학도 소설을 중심으로 단단한 작가군과 그에 못지않은 독자층이 형성된다. 이러한 추세는 20세기 초에 일단 정점에 이른다. 미술 분야만 보더라도 19세기 말의 후기 인상파에 이어 프랑스의 입체파, 독일의 표현주의, 이탈리아의 미래파, 벨기에의 아르누보 등 백화가 만발하는 호시절을 맞는다. 넓게 자리 잡은 신흥 애호층의 뒷받침이 컸던 결과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국을 맞을 때까지의 이 10여 년을 프랑스 사람들은 그리움을 담아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부른다.

해외여행도 비슷한 경로를 간다.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관심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과거 신고전주의(neo classicism) 시기 ‘그랜드 투어’는 로마와 고대 로마의 유적이 주된 목적지였고 그때만 해도 귀족 자제들의 교양교육 차원이었다. 빙켈만(J.J. Winkelmann)의 유적 답사기와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가 교재(敎材)였다. 이제는 계몽사상과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여행의 목적도 다양해졌다. 자신들(부르주아)의 시대를 열어준 철학과 과학과 역사와 예술의 부흥의, 즉 르네상스가 일차적 관심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오늘에도 유효하여 피렌체는 늘 방문객들로 가득하다. 괴테 같은 인물이 먼 길을 와서는 단 한마디(“한눈에 보아도 피렌체가 상당히 번성했었고 훌륭한 정부를 가졌던 것을 알겠다”)를 남기고 로마를 향해 떠나가는 사례는 영영 과거지사가 되었다.

20세기 초 영국의 인기 작가 포스터(E.M. Forster)가 쓴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이란 소설이 있다. 양갓집 젊은 처자의 피렌체 여행을 다룬 소설이다. 지난 80년대에 영화화되어 오스카상도 수상하고 큰 인기를 끌었었다. 이 소설에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여주인공 루시가 피렌체 시가지를 돌아보다가 촌티나는 일군의 영국 관광객을 마주한다. (‘문화’와 관계없는 듯한) 많은 관광객으로 여행의 특별성이 손상된 것으로 느낀 어린 마음이 “피렌체 여행 오겠다는 사람들은 모두 시험을 치게 해서 떨어지는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발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1908년에 나온 소설이다.

그로부터 100여 년. 피렌체는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해외 관광이 몇 차례 큰 폭의 성장세를 기록한 때문이다. 2차 대전 후 1950~60년대의 미국인 관광객, 점보 제트기 개발에 이은 70년대 일본인의 유럽 관광 러시가 있었다. 냉전 구도가 해체된 90년대에는 중국인, 러시아인들까지 대거 이 대열에 합류하면서 이제 피렌체 시내에 인파로부터 안전한 곳을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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