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텍문명(Aztecan civilization)의 역사
13세기부터 에스파냐 침입 직전까지 멕시코 중앙고원에 발달한 인디오의 문명
멕시코에는 예로부터 몇 개의 고도로 발달한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그 중 가장 영향이 강했던 테오티우아칸 문화는 7세기경 멸망하고, 그 뒤를 이은 톨텍문화가 12세기에 수도 투라에서 멕시코 중앙고원의 텍스코코 호반으로 옮겼을 때, 영향을 받아 많은 도시국가가 성립되었다. 그 중에 가장 강력했던 것은 텍스코코와 타쿠바였다. 13세기에 북멕시코에서 이동해온 수렵민족인 아즈텍족이 텍스코코호(湖)의 작은 섬에서 신의 계시를 받아 테노치티틀란이라는 도시를 구축하였다(1325년) 그리고 아즈텍이라는 이름 대신 멕시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때 받은 신의 계시는 독사를 물고 날아간 독수리가 선인장위에 앉으면 그곳에 도시를 세우고 정착하라는 것이었다. 독수리가 내려 앉은 곳에 세워진 테노치티틀란은 텍스코코와 타쿠바와 더불어 강대해졌고 3자간에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3자는 서로 협력하여 멕시코 중앙고원을 중심으로 한 여러 도시를 정복하고 그들로부터 조공(朝貢)을 받아 부(富)를 삼분(三分)하였고 아즈텍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텍스코코, 타쿠바와 삼각동맹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멕시카(아즈텍)의 목테수마 1세가 제국을 통치하면서 점차 주변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15세기 말부터 아스텍은 갑자기 군사와 정치력을 증강하여 수도로 삼을, 섬 북쪽의 상업도시 토라테로르코를 1473년에 합병하고 이어서 1500년까지 텍스코코와 트라코판을 완전히 제압하였으며 거대한 아즈텍 제국의 주권자가 되었다. 1502년 목테수마 2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삼국동맹에서 절대군주제로 바뀌었고 주변의 광범위한 지역을 통치하였다. 아즈텍 제국은 주변의 복속국에서 바치는 풍부한 공물과 노동력으로 유지되었으며 이러한 공물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점차 먼곳까지 원정을 가게되었다. 이는 제국을 번성하게하는 원동력이기도 하였지만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가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아즈텍족은 수렵민이었으므로 문화수준이 낮았다. 그들은 주변의 여러 문화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특히 그들이 국가형성을 이룬 뒤에 만들어낸 종교체계나 천문 ·역법(曆法) ·문학 등은 주로 텍스코코를 통해 받아들인 톨텍계(系) 문화에 바탕을 두었다. 그들의 우주관(宇宙觀)은 툴라족의 톨텍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세계를 네 부분의 수평(水平)으로 구분하며 수직면(垂直面)으로서는 9층씩의 천상세계와 지하세계를 설정하였다. 하늘은 대지를 둘러싼 물과 함께 일종의 통(筒) 모양의 천장을 형성하고 거기에는 커다란 대들보에 의해 서로 격리된 궤도(軌道)가 층을 이루고 달 ·별 ·혜성(彗星) 등이 지나다닌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모든 것 위에는 신들의 영역이 있고 다시 그 위에는 이원성(二元性)의 장소인 오메요칸이 위치하여 거기에 이원신(二元神)인 오메테오톨이 최고신으로 존재하였다.
이와 같은 우주관은 아즈텍의 사회생활을 전면적으로 규제하고 있었다. 즉 오메테오톨은 많은 신들을 자식으로 거느리고 있는데 그들은 대지 ·공기 ·물 ·불 등 4요소에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저마다 태양이 되어 우주의 네 구역에서 행동을 일으켜 세계에 변화와 갈등과 진화를 가져다 주면서, 탄생과 사멸의 주기(週期)를 되풀이하며 역사의 각 시대를 구성한다고 생각하였다. 아즈텍인들은 세상은 4번의 창조 활동이 있었고 각 세상마다 그 세상을 지키는 태양이 있었으며 그 태양들은 모두 명망하였고 자신들은 5번째 태양신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다. 아스텍은 자기들이 지진(地震)을 나타내는 제5의 태양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태양이 사멸하고 우주(宇宙)가 멸망하는 것을 막고 신이 창조한 우주가 지속적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적인 인신공양(人身供養)를 행했던 것이다. 즉 세계의 본질인 허무의 암흑과 싸우는 태양에게 인간의 피와 심장을 바쳐, 여기에 활력을 주어 영원히 아스텍 시대를 지속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스텍은 인신공양를 행하기 위한 여러 개의 대신전을 수도에 세웠고, 엄격하게 지키고 있는 달력에 의해 제일(祭日)을 정하여 각종 의식을 행하였다. 또한 산 제물을 잡아다가 끊어지지 않고 바치기 위하여 강대한 군사조직을 만들었다. 전쟁으로 정복한 지역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살아있는 사람의 가슴을 절개하여 심장을 꺼내고 살아있는 심장을 신을 위한 제물로 바쳤다. 1년에 약 2만명의 포로를 잡아다가 재물로 바쳤으며, 이런 포로를 잡기위한 전쟁을 꽃의 전쟁이라고 불렀다. 아즈텍은 이렇게 공포정치를 행하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지배수단이기도 했다. 많은 종속도시로부터 완비된 세제(稅制)에 의해 받아들인 방대한 양의 공물은 모두 이와 같은 종교 ·사회기구를 확장하고 기능을 확대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사회조직면에서 아즈텍은 카르프리라는 공동체 조직을 단위로 하는 계급사회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공동체적인 토지 보유의 형태가 보이는 한편, 그 도시생활에 있어서는 사회 계층과 직능에 따라 거주구역의 행정조직이 이루어져 있었고 자치적인 경찰과 사법(司法) 조직도 발달해 있었다. 직업도 여러 갈래로 분화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포추테카라고 불리는 상인(商人) 계층이었다. 그들은 토라테로르코 ·초르라 그 밖의 도시에서 큰 시장을 개설하였고, 그들 집단은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지방을 널리 여행하며 교역을 행하였다. 또한 귀족 ·평민의 교육기관도 발달해 있었다.
이처럼 발달한 아즈텍문명은 1520년 갑자기 나타난 에스파냐의 에르난 코르테스가 거느린 수백 명의 군대의 침입으로 수개월에 걸친 외교교섭과 격렬한 전투 끝에 멸망하였다. 그러나 그 문화의 모습은 정복된 후 건너온 가톨릭교 성직자들 중의 유지와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아즈텍 시대에 텍스코코 등에서 만들어진 인디오의 그림 몇 가지가 소멸을 면하였으며, 또한 에스파냐 식민지시대에 복제(複製)된 그림도 상당히 있으므로 아즈텍 문화의 상세한 점이나 그 왕조의 역사는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구경거리의 사회
아스텍족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했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 신이 창조한 우주가 지속적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 역시 '생명력의 원천'인 인간의 심장에서 나오는 피를 신들에게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신들이 이 우주의 생명을 계속 유지시키고 정기적으로 비를 내리게 해서 자신들의 토지를 비옥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스텍족은 보다 많은 포로를 획득하여 신들의 생명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사명감을 갖고, 정복전쟁을 통해 1년에 무려 2만 명에 달하는 포로를 신에게 바쳤다. 수도 테노치티틀란 중앙광장에서 수천 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신에게 바쳐졌다거나, 어떤 인신공양 의식에 희생될 사람들이 도시 외곽까지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데만도 며칠이 걸렸다고 하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이처럼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간 도살'이었던 인신공양은 대규모의 제사의식을 통해 거행되었다. 제사의식이 진행될 때 사제들과 희생자들은 신의 형상을 하고 등장했다. 이는 신과 인간이 한 몸에 결합됨으로써 제사의식을 지켜보고 있는 군중 앞에 신적 권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인신공양은 제물로 바쳐질 사람들을 제단에 발가벗긴 채 한 줄로 늘어서게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집행자가 제물이 된 사람의 다리를 각각 하나씩 잡고, 다른 두 사람은 각각 손 하나씩을 붙들었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이 뾰족한 돌을 찔러 그의 등을 고정시켰다. 그리고서 또 다른 한 사람이 그의 목에 목걸이를 던지고, 최후의 집행자가 흑요석으로 만든 끝이 뾰족하고 넓적한 칼로 그의 가슴을 절개했다. 그리고 손으로 심장을 꺼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심장을 태양을 향해 들어 보이고 그 온기를 태양에게 바쳤다. 그리고 꿀로 반죽된 근대와 옥수수나무로 만든 우상의 얼굴을 향해 그 심장을 집어던지는 것으로 의식을 끝냈다. 그리고는 희생된 사람의 몸을 층계로 굴렸다. 이러한 방식으로 늘어선 모든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이러한 제사의식을 통해 수많은 포로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중요한 통치수단 중 하나였다. 공포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들을 쉽게 통치할 수도 있었고, 정복한 지역의 위험한 인물들을 처형할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이 아스텍 제국의 사회는 정복한 자의 잔인함과 냉혹함을 통해서 거창한 볼거리를 제공했던 '구경거리의 사회'였다.
아스텍 문명(Aztec)은 지금의 멕시코 지역에 존재하던 제국이다. 수도는 멕시코 중부의 텍스코코 호 중앙의 인공 섬에 있던 테노치티틀란이었다. 마야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아스테카 문명(Azteca)은 지금의 멕시코 지역에 존재하던 제국이다. 수도는 멕시코 중부의 텍스코코 호 중앙의 인공 섬에 있던 테노치티틀란이었다. 마야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1519년 11월 8일, 에스파냐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들어갔다. 아스테카 제국의 통치자였던 몬테수마 2세는 백인인 코르테스와 그의 무리를 아스테카 문명의 전설에 나오는 깃털 달린 뱀 케찰코아틀로 여겨 환대했으나 내부의 정치적 위기를 이용한 코르테스의 계략으로 1521년, 코르테스의 군대에게 정복당했다.
아즈텍이란 이름은 나후아틀어의 아즈틀란(나우아틀어: Aztlān)에서 유래하였다. 아즈틀란은 아즈텍 신화에 등장하는 애초에 아즈텍인들이 살던 곳이다. 전해 오는 전설에 따르면, 아스텍 인은 신의 나무에서 과일을 따 먹는 바람에 신의 노여움을 샀다. 그 벌로 그들은 중앙아메리카를 방황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1300년대 초에 멕시코에서 비옥한 골짜기를 발견했는데, 그곳 원주민은 아스텍 인을 가리켜 '낯선 사람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1]
아스텍 인은 자신들을 멕시카(Mexica)라고 불렀다. 원래 멕시코 북부에 살다가 1200년대에 남쪽으로 거주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의 정복 이후 이주민들이 자신들을 멕시코인이라 부르면서 이전의 선주민들을 아즈텍인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아즈텍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초기 역사 (1200년~1345년)
1200년에는 톨텍 족이 멸망하고 톨텍의 수도였던 툴라도 폐허로 변했다. 그래서 북방에 살던 민족들이 멕시코로 이주하게 된다. 이 중 가장 늦게 이주한 종족이 바로 아스텍 인이다. 그들은 싸움에 능해서 1300년부터 한동안 콜오우칸에 살던 톨텍족의 노예가 되었으나 톨텍 족의 공주를 살해한다. 그래서 그들은 마을에서 쫓겨나 늪지의 섬에 살게 된다. 그러다 그 섬에서 선인장 위에서 뱀을 먹고 있는 독수리를 보고 신의 뜻으로 생각하여 그 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1345년, 섬 주위에 있던 진흙뻘들을 개척해서 땅으로 만들고, 테노치티틀란(지금의 멕시코시티)이라는 새 수도를 만들게 된다.
중기 역사 (1345년~1517년)
목테수마(Moctezma, Montezuma)라고도 불리며, 1502년부터 1520년까지 아스텍을 통치한 제9대 황제이다. 그가 군림하던 시기에 에스파냐가 본격적으로 아스텍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몬테수마는 같은 이름의 몬테수마 1세의 증손자이자 6대 왕 악사카야틀(Axayacatl) 왕의 아들이자 티조악, 아우이트소틀의 조카였다. 1502년 숙부인 아우이트소틀의 뒤를 이어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당시 제국의 영토는 최대로 커져 오늘날 온두라스와 니카라과까지 뻗어 있었다. 그러나 종교의식에 쓰이는 제물과 조공을 종속 부족들에게 점점 더 많이 요구했기 때문에 그들의 분노를 사 제국의 세력은 약해졌다. 그는 방대한 정복 계획을 세웠지만, 신(神) 우이트실로포치틀리에 대한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이 신은 점성가를 통하여 몬테수마 황제에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일종의 숙명론을 주입했다.
아스텍인들은 언젠가는 턱수염을 가진 백인 신 케트살코아틀(깃털달린 뱀이라는 뜻)이 돌아와 제국을 통치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면서도 이를 기대하고 있었다. 백인 신 대신에 턱수염을 가진 백인 코르테스가 나타났다. 코르테스는 이런 두려움을 알고 있었고 멕시코 횡단 원정에 이것을 이용했다. 몬테수마는 그를 매수하려고 했으나 스페인 정복자는 아스텍의 지배를 싫어하던 종속 부족들과 동맹을 맺었다. 몬테수마는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코르테스를 유인했으나 함정임을 눈치챈 코르테스에게 오히려 포로로 잡혔다. 그는 황제가 포로로 잡혀 있는 한 아스텍인들이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몬테수마가 스페인 정복자에게 굴복하자 백성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스페인의 기술에 따르면, 황제는 백성들에게 연설을 하려고 하다가 돌과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어 그로부터 사흘 뒤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스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이 그들의 황제를 죽였다고 여겨, 밤을 틈타 테노치티틀란 시를 빠져나가려던 코르테스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코르테스는 잠시 퇴각했다가 다시 돌아와 재정복, 몇 년 동안 멕시코를 지배했다.
아스텍 제국의 멸망 (1517년~1522년)
코르테스는 유카탄 반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탐험대장으로 내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승승장구를 두려워한 총독 벨라스케스가 이를 번복하자 1519년 병사 508명과 말 16필을 11척의 배에 나누어타고 독자적으로 유카탄 반도에 상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베라크루스라는 도시를 건설하였고 유카탄 반도의 마야족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부족들을 점령해나갔다. 말이나 대포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틀락스칼라인들은 한번의 전투후 코르테스에게 항복하였다. 코르테스는 원주민을 통해 아스텍 왕국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하였다.
코르테스는 아스텍 왕국에 들어갔으나 아스텍 황제 몬테수마 2세가 베라크루즈를 기습해 오히려 황제를 사로잡을 구실을 만들어주었고, 황제는 궁에갇히고 포로신세로 변하게된다. 그의 행동을 좋지않게본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가 판필로 나르에바스에게 900명의 에스파냐인과 500명의 흑인노예를 주어 코르테스를 토벌하라고한다. 결국 수비대장 후안 데 에스칼란데가 전사하면서 그는 이일이 보통일이아니라고 판단, 그는 그의 부관이자 친구였던 알바라도에게 100명의 군대를 남겨주고 테노치티틀란을 떠난다. 알바라도는 신중한 인물이 아닌듯했다. 그는 우이칠포로치틀리 봄축제를 즐기는 아스텍귀족들이 반란을 모의한다고 판단, 군대를 이끌고와서 귀족 1만명을 학살했다. 코르테스일행이 승리를거두고 돌아왔을때 분위기가 심상치않았다. 그래서 알바라도에게 좌초지종을 물었더니, 그가 대답을 하자 그는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 도시를 빠져나가려하지만 포위당한다. 그래서 황제로 하여금 설득하라고하지만, 황제는 흥분한 관중들의 돌과 화살을맞고 사망한다. 이설에는 다양한설이있다. 이게 6월 25일에 일어난 슬픔의 밤이란 사건이다.
코르테스는 일행을 데리고 6월 30일 탈출을 시도하지만, 아스텍인들의 공격으로 대부분 사망하고, 석궁과 대포, 철갑옷, 철검, 철투구, 아르퀘버스등의 무기들을 탈취당한다. 군마도 23마리만 남고 만다. 동맹국 틀락스칼라까지 150마일의 지옥의 행군을 해야했다. 그들은 7월7일 오툼바에서 테노치티틀란-텍스코코-타쿠바 아스텍 삼각동맹군 4만을 보게된다. 모든병사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상태였고, 석궁이나 아퀘버스도 없었다. 에스파냐인 400명과 1~2000명의 틀락스칼라인뿐이었다.
아스텍군은 심지어 탈취한 스페인무기 [물론, 아퀘버스나 석궁은 사용법을 모른다.]로 무장하고 있었다. 코르테스는 단단한 사각진형을짜고 에스파냐인 뒤에 틀락스칼라인들을 배치했다. 틀락스칼라인들은 크게 환영했는데, 그들은 슬픔의밤이후로 아스텍군을 크게 두려워했고, 에스파냐군과 전투를한적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무기의 강력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보병은 부관에게 맡긴뒤 자신은 23기의 대부분 부관출신으로 이루어진 기병대를 이끈다. 그는 후방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시우아코아틀[나우나틀어로 군사지휘관]을 눈여겨 보았다. 시우아코아틀은 코르테스에게 갈기갈기 찢겨 살해되고, 나머지 아스텍 부관들은 그의 기병대가 살해했다. 시우아코아틀이 죽은걸안 아스텍군들은 모두 달아나기 바뻤다. 코르테스는 이전투에서 2번이나 아스텍 돌팔매에 맞았으며, 슬픔의 밤때난 손가락상처가 악화되어 2개의 손가락을 쓸수없게되었다.
대부분의 사상자는 부상자들이었으며, 애초에 아스텍군은 포로를잡기위해 상대를 죽이지않아, 보통은 달려들어서 묶기바빠서 대부분 한번에 찔러죽이라는 코르테스의 말에따라 죽었다. 사상자는 정확히 언급되지 않으나, 몇천명에 이를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코르테스와 부관들이 죽인 지휘관들은 몇안되는 나머지 아스텍 귀족들이므로, 아스텍의 피해는 매우컸다. 그 이후 9월에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에 의해 옮겨진 천연두가 창궐하자 아스텍 인들이 죽어나갔고 심지어 황제마져 죽고 마지막황제 쿠아우테목이 즉위한다. 그는 몬테주마의 직계도 아니었고 몬테주마의 자식들을 죽여 많은귀족들의 반감을 사게 된다.
쿠아우테목은 틀라텔롤코에서 최후의 항전의지를 보이고 모든국경수비대를 모두 불러들이고,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길목을 모두 파괴하고 한개만남긴다. 하지만 텍스코코 호수를 관장하던 텍스코코가 코르테스에 항복하면서 호수의 소유권도 코르테스군이, 게다가 텍스코코인들도 아스텍에대한 반감때문에 코르테스에 군대를 지원하게되고, 결국 1521년 8월 13일 아스텍은 항복하고, 테노치티틀란은 점령당하게 된다.
아스텍인을 포함해 그 어떤 원주민도 스페인인들을 신으로 믿지 않았으며, 신으로믿은 부족이 있더라도 금방 깨달은게 보통이었다. 에스파냐인들이 원주민들을 쉽게 이길수있었던것은 원주민들의 총에 대한 공포심이 매우 강했으며, 말과 군견, 돼지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스텍족 [Aztec, ― 族]
나와틀어(語)를 쓰는 종족.
15세기부터 16세기초까지 지금의 멕시코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 큰 제국을 지배했다. 아스텍이라는 부족명은 멕시코 북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들의 발상지 아스틀란('흰 땅')에서 나왔다. 테노츠라는 시조(始祖)의 이름을 따서 테노치카족이라고 했고, 텍스코코 호의 신화적인 명칭 메츨리아판('달의 호수')을 따서 멕시카족이라고도 했다. '테노치카'에서 테노치티틀란이라는 아스텍족의 대도시 명칭이 생겨났다. 또한 '멕시카'에서 아스텍의 수도를 대신하게 된 도시와 주변 계곡을 가리키는 멕시코라는 이름이 생겨났는데, 뒤에는 현대의 멕시코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들 스스로는 멕시코 계곡에서 가장 문명화된 종족의 중심지인 콜우아칸과 연관을 짓기 위해 쿨우아멕시카라고 했다.
이 종족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아스텍 전설을 살펴보면 12세기 무렵 중앙 아메리카에 나타나기 전 멕시코 북부 고원지대에 살던 수렵채집인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아스틀란이 전설의 나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스텍족이 남쪽으로 이주한 것은 톨텍 문명이 붕괴함에 따른, 또는 붕괴의 시초가 된 전체적인 이동의 일부였던 듯하다. 텍스코코 호에 있는 여러 섬에 정착했으며, 1325년 중심 도시인 테노치티틀란을 세웠다. 큰 국가뿐 아니라 제국까지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농업제도 덕분이었는데, 정교한 관개시설과 저습지 간척, 이용할 수 있는 모든 토지에 작물을 재배하는 집약농업이 특징이었다. 이러한 농사방법으로 생산성이 높아짐에 따라 많은 인구가 사는 부유한 국가가 생겨났다. 지배자 이츠코아틀 시대(1428~40)에 테노치티틀란은 이웃 국가 텍스코코 및 틀란코판과 동맹을 맺어, 멕시코 중부지역을 지배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그뒤 상업과 정복을 통해 400~500개에 이르는 소(小)국가로 이루어진 제국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전체 제국의 인구는 약 500만~600만 명, 총면적은 20만 7,200㎢에 이르렀다. 절정기에는 테노치티틀란 자체 영토만 13㎢가 넘었고, 인구는 14만 명 이상으로서 중앙 아메리카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가 되었다. 아스텍 제국은 군대가 지배하는 전제주의 국가였다. 여러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으면서도 수직적인 이동이 심하던 아스텍 사회에서는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는 것이 실제로 신분상승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사제와 관료 계급이 제국의 행정을 맡았으며, 사회 맨 밑바닥에는 농노, 하인, 순수 노예계급이 있었다.
종교는 다른 중앙 아메리카 문화에서 여러 가지 요소를 흡수함으로써 절충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이전의 종족들, 특히 마야족의 우주관 가운데 많은 부분을 공유했는데, 예를 들면 현재의 세계는 일련의 세계 창조와 소멸의 과정 속에 자리한 마지막 세계이며, 13개의 천국과 9개의 지하세계로 이루어진 우주체계의 한 부분이라는 관념이 있었다. 아스텍의 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신은 전쟁의 신 우이칠로포치틀리, 태양신 토나티우, 비의 신 틀라록, 날개 달린 뱀 케찰코아틀이었다. 케찰코아틀은 반신반인의 신화적 인물이었다. 일부러 피를 내는 것말고도 인간을 희생제물로, 특히 심장을 태양신에게 바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스텍 종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역법(曆法)이었다. 사제가 담당하는 제의와 의식의 정교한 주기는 아스텍력 (曆)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아스텍력은 중앙 아메리카 대부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했는데, 365일을 주기로 하는 태양년과 260일을 주기로 하는 신성한 해로 이루어져 있었다. 두 주기는 함께 순환하면서 52년으로 된 더 큰 주기를 이루었다. 아스텍 제국은 영토를 확장하는 등 계속해서 사회가 발전하는 도중에 1519년 스페인 탐험가들이 나타남으로써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마지막 황제 몬테수마 2세(1502~20 재위)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포로가 되어 감옥에서 죽었고, 아스텍 제국은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유럽인들에게 순식간에 정복되었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문명
멕시코 800년된 피라미드 (멕시코 아스텍문명)
▲ 멕시코시티 틀라텔롤코 중부지역에 있는 ‘삼문화광장
멕시코에서 고대 피라미드가 새로 발견돼 고고학자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달 2007.12.27일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800년 된 고대 피라미드가 발견됐다.”면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아스텍(Aztec)부족의 유적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아스텍 부족은 ‘멕시카 족’이라고도 불리는데 ‘아스텍 문명’이라는 독자적 문명을 키우며 멕시코 고원에 강대한 국가를 이루었던 고대 부족이다. 높이 11m가량의 이 피라미드는 멕시코시티 북쪽의 틀라텔로코(Tlatelolco) 광장에서 발견되었으며 이곳은 아스텍족의 종교와 정치활동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고고학자 페트리샤 레데스마( Patricia Ledesma)는 “이번에 발견된 피라미드는 1100년~1200년 사이에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기존에 알려진 시기보다 약 한 세기 정도 앞선 것으로 역사서를 수정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피라미드의 정확한 나이와 크기를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며 “이곳에서 발견된 조각품들은 아스텍 족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
▲ 틀라텔롤코의 삼문화(三文化)광장 유적
뒷쪽으로 현대적 아파트가 보이는 산띠아고 교회는 원래 창고로 사용하던 곳으로 현대에 와서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 뒤쪽으로 틀라텔롤코의 삼문화(三文化)광장 유적이 있다. 삼문화(三文化)광장(Plaza de las Tres Culturas)dms 아스타크유적, 스페인 식민시대의 교회, 외무부로 쓰이는 현대식빌딩으로 구성된 고대,중세,현대의 3가지 문화가 공존하는 문화의 다양성의 특징에서 일컫는 말이다. 이 지역은 아스테크인드이 스페인의 코르테스를 상대로 최후까지 저항하던 무너진 곳으로 350년이 지난 1968년 올림픽을 며칠 앞둔 10월 2일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학생과 군경의 유형 충돌로 백여 명의 학생들이 꽃다운 목숨을 잃은 곳으로 더 유명하다. 해마다 이 날은 기념하여 학생들이 행진을 한다. 뜰라뗄로꼬는 1331년 떼노시띠뜰란에 이어 아스떼까의 제 2의 도시로서 세워져 쌍둥이 도시라고 불려졌으나 이미 그 이전부터 중앙아메리카 최대의 물류유통 센터였던 대규모의 시장이었다. 뜰라뗄로꼬 유적지는 아스떼까의 주신 위씰로뽀시뜰리와 뜰라록에 봉헌된 두 개의 신전과 두 개의 겹쳐진 피라미드가 남아 있다. 식민지 시대의 성당인 싼띠아고 성당은 이 신전의 돌을 가져다 지은 것이다. 이 주변은 1985년 대지진 당시 가장 피해가 많은 지역이었다고 한다
▲ 멕시코 외무성 이 서있는 부근의 신전 유적
고고학자들이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 시티 중심부에 위치한 틀라텔롤코(Tlatelolco) 광장에서 고대 피라미드를 발견했다. 이 피라미드는 고대도시(古代都市) 아즈텍 왕국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과 이웃한 이 고대도시가 공식적인 역사책에 적힌 기록보다 더 이전에 세워졌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놀랄만한 증거다. 국제인류역사연구소의 연구팀은 종교와 정치의 중심인 틀라텔롤코에서 만들어진지 800년 이상된 것으로 추정되는 피라미드를 발견했다. 틀라텔롤코는 아스텍 문명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졌던 원주민 집단인 ‘멕시카스’족이 거주했던 곳이다. 이 곳에서 약 15일 전에 발견된 다른 피라미드의 계단은 틀라텔롤코가 1325년에 세워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피라미드는 40년 전 멕시코 좌파세력의 추악한 전쟁 당시 학생들이 학살됐던 삼문화광장(Plaza de las Tres Culturas) 인근에서 발견됐다. 고고학자 패트리샤 레데스마씨는 “이번에 발견된 피라미드는 우리가 이곳에서 발견한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협소한 내부를 가진 가장 오래된 것이다.
▲ 멕시코 800년된 피라미드 (멕시코 아스텍문명)
이것은 테노치티틀란이나 테나유카에서는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레데스마씨와 동료 고고학자인 살바도르 켈림씨는 “이 피라미드의 정확한 연대를 알아내기 위해 2008년에도 발굴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발굴작업은 지난 8월 시작됐다. 아직 확정된 바는 없지만 전문가들은 한달 전에 발견된 높이가 약 10m~11m에 이르는 이 피라미드가 테노치티틀란이 건설되기 훨씬 전인 120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믿고 있다. 이 세기는 멕시코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기 전에 가장 중요한 세기였다. 또한 조사팀은 몇 주전 이 피라미드에서 2~3개의 계량기와 복합주거단지, 그리고 1431년대 것으로 추정되는 5개의 해골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