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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천국으로 가는 도시 ‘코르도바’가 품은 세계 역사 유적의 비밀

작성자변강쇠|작성시간14.06.27|조회수163 목록 댓글 0

 

천국으로 가는 도시 ‘코르도바’가 품은 세계 역사 유적의 비밀
지중해이야기_ 메스키타, 동서양의 결정체

 

 

▲  하늘에서 내려다 본 메스키타 사진

 

 

 

많은 스페인 사람들은 ‘안달루시아 지방’을 자신들의 ‘정신적인 고향’ 또는 ‘스페인 문화의 시발점’으로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문인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 소설이 뮤지컬로 무대에 올려졌을 때, 여주인공 에스메랄다는 집시들의 고향인 안달루시아를 그리워하며 서글프게 읊었던 노래에서 ‘보헤미안들의 안식처’로 표현했다. 이처럼, 스페인 남부에 위치한 안달루시아는 집시문화와 이슬람 잔향이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행여 그곳을 스치는 자들은 마음을 빼앗기고 매료돼 쉽사리 빠져 나갈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안달루시아는 세비야, 그라나다, 말라가, 코르도바 등의 개성이 강한 도시들이 있다. 그 가운데 코르도바는 도시 전체에서 풍기는 은근한 매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행정 도시답게 차분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이 도시는 시대를 넘나들며 때때로 문학 장르의 구분 없이 오페라, 시, 소설 등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스페인의 명장인 까를로스 사우라(Carlos Saura) 감독이 다큐멘터리 영화 「이베리아」를 만들어 아이작 알베니즈(Isaac Albeniz)라는 음악가를 기념하고자 했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코르도바 장면에서는 아랍 복장을 한 여자수석무용수가 얼굴윤곽이 투명하게 비춰지는 차도르로 얼굴을 가리고 이슬람 문화와 접목시킨 음악에 맞춰 플라멩코를 선보였다. 영화에 흠뻑 취하다 보면 어느 새 알 안달루스(Al-Andalus, 스페인 이슬람왕국)의 역동적이면서 웅장했던 코르도바의 칼리파 시대 안으로 들어간다.


수도 마드리드의 아또차 기차역에서 시속 250km로 내달리는 아베 초고속열차를 타고 2시간 남짓 남쪽을 향해 달려가면 스페인의 동양적 정체성이 느껴지는 코르도바에 도착한다. 페니키아어로 ‘풍요롭고 귀한 도시’라는 의미를 지닌 ‘Kartuba’에서 유래하는 코르도바는 무려 8세기 동안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로서 당시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 가장 앞선 문화를 꽃 피었던 지역이다. 한 이슬람 작가가 이 코르도바의 아름다움을 두고 ‘안달루시아의 신부’라고 찬양한 이 도시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세계 역사 유적’으로 유명한 ‘메스키타’ 회교사원이 있다.


서고트 시대 말기 왐바 가문의 요청으로 이베리아에 첫 발을 들인 무어인들이 다마스쿠스에 위치한 칼리프국의 원정군 사령관 격인 에미르 체제에 머물러 있을 때만 해도 알 안달루스는 이슬람 제국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20세 젊은 나이의 압데라만 왕자가 아바스왕조가 저지르는 대량학살과 추적을 피해 알 안달루스로 피신해 왔다. 그는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고 에미르라는 지방국가의 명칭을 거부하고, 전 세계에 자신의 왕조가 무함마드의 정통성을 이어간다는 자부심과 신앙심을 알리기 위해 메스키타의 건립을 추진했다. 이 사원을 토대로 장차 코르도바 칼리프국의 명성을 얻고자 한 것이다.


그 이후, 뒤를 이은 군주들 압데라만 2세, 3세를 거치면서 3회에 걸친 확장사업을 통해 신도 2만 5천여 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매머드 급의 규모인 메스키타가 완성됐다. 원래 로마인들과 서고트인들이 세웠던 교회를 무너뜨리고, 교회의 주춧돌, 기둥, 말발굽 건축양식 등을 고스란히 이용해 동서양이 혼합되면서도 전형적인 회교사원을 만들었던 것이다. 메스키타를 통해 위상을 더 높힌 코르도바는 동칼리프국의 바그다드 명성에 도전장을 던졌다. 코르도바는 명실상부 서칼리프국의 수도로서 그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할 만큼 위세가 하늘을 찌르듯 당당했다.

무아지경으로 빠져드는 ‘원주의 숲’


사원 내부로 들어서면 어슴푸레한 빛 속에 넓게 열린 공간이 펼쳐진다. 그 안에서 850여개의 둥근 기둥과 붉은 색, 흰 색 벽돌들이 알록달록 줄무늬를 이루며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광경은 모두를 황홀함에 넘치는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게 한다. 기도소 역할을 하는 장소인 수평적 공간은 마치 야자나무가 우거진 숲처럼 수많은 아치들로 뒤덮여 있어 ‘원주의 숲’ 또는 ‘기둥의 숲’이라는 명칭까지 갖고 있다. 이곳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알라는 위대하시다. 나는 알라 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하노라”라고 메카를 향해 코란을 소리 높여 낭독하고 엎드려 예배드리는 모습을 상상한다면 진정으로 알라는 위대해 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곳이 회교 사원인데 어떻게 두 눈 앞에서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질 수 있을까. 기둥의 숲을 벗어나자마자 무어인들의 잔상이 사라져 버리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희귀하고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메스키타 한 복판에 르네상스 양식의 예배당이 버젓이 존재하는 사실 자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메스키타가 겪어 온 다채로운 역사가 말해주고 있지만, ‘알 안달루스의 신부’로서 그토록 아름다움을 빛내던 코르도바의 영광이 로마제국의 멸망처럼 한 순간에 막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1212년 7월 라스 나바스 데 똘로사(las Navas de Tolosa)에서 회교도군대에 맞선 기독교연합군의 승리는 이슬람세력의 분열을 가속화 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코르도바는 힘없이 기독교군대에게 천국으로 가는 도시의 열쇠를 건네주었다. 한때 11세기 초까지 인구 50만 명으로 당시 유럽 최고의 이슬람 도시로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버금가는 찬란한 문화를 누렸던 코르도바이었건만…….


700여개에 도달하던 사원과 도서관, 50여개의 병원들, 수십 개에 이르는 대학교와 고등학교, 수백 개에 이르는 공중목욕탕의 숫자들은 당시의 코르도바가 어떠한 수준을 지닌 도시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히셈 3세가 사망한 이후 알 안달루스는 정치적 구심점을 잃어 버렸고 여러 소왕국으로 분리돼 쇠퇴의 길목에 들어섰다. 기독교인들의 십자군원정에서 재정복전쟁 동안 이슬람인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생존을 위해 적군인 기독교 왕국에게 비위를 맞추면서 조공을 바치는 신세로 추락해 버렸다.


승리의 깃발을 치켜세우고 코르도바에 입장한 기독교군대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대부분의 사원들을 무차별적으로 철거했다. 코르도바의 상징물이었던 메스키타도 역시 무너뜨려야하는 대상에 올려놓고 새롭게 가톨릭 성당으로 건립하는 계획안도 세웠다. 그러나 메스키타는 단순한 회교사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지역주민들의 사랑과 세계적인 명성을 한 몸에 지닌 유적이었다. 정복자 페르난도 2세도 직접 눈으로 메스키타를 확인한 후 건축의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했다.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메스키타에 그냥 축성을 내리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교회로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묘한 공존


그러나 성당 관련자들의 개축에 대한 줄기찬 요구는 카를로스 1세까지 이어졌다. 결국 메스키타를 보존하는 범위에서 내부의 일부만을 뜯는다는 허락이 내려졌다. 대성당의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처음으로 방문한 카를로스 1세는 메스키타의 매력에 반했다. 그리고 자신의 허락이 큰 실수를 범했음을 인정하듯, ‘당신들은 어디에도 없는 것을 부수고 어디에나 있는 것을 지었다’고 씁쓸한 심경을 토로했다. 결과적으로 메스키타는 한 건물에 두 개의 상이한 종교,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함께 묘한 공존을 이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건축물이 되고 말았다. 원래 승리자들은 명예에 걸맞게 ‘메스키타’ 명칭을 ‘코르도바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으로 부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메스키타 원래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비난과 거부감으로 인해 오늘날 ‘메스키타-대성당’이라는 기존의 명칭이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오랫동안 전쟁을 하는 사이 메스키타는 서로 화해와 포용으로 공존을 추구했던 역사의 산증인이 돼 스페인의 정체성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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