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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패러데이의 전자기학 연구

작성자러브인|작성시간14.08.12|조회수438 목록 댓글 1

 

패러데이의 전자기학 연구

 

 

 

패러데이는 과학계의 주요 인물 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경우이다. 서른 살 이전까지는 별로 중요한 연구를 하지 못하다가 마흔이 넘어서야 최고의 연구를 해낸 그는 그의 세대(실은 모든 세대를 통털어서도) 어떤 사람보다도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까지 최고의 연구를 활발히 한 과학자들의 예(물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아주 확실한 예이다)는 매우 드물지만, 그런 사람들도 이미 20대에 비범한 능력의 조짐을 보였다.

나이가 든 후에 남긴 업적을 고려해볼 때, 패러데이 역시 젊어서도 훌륭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는 환경 때문에 25세가 될 때까지 과학 연구는 시작도 해보지 못했다. 아인슈타인 : 아보가드로 수, 브라운 운동, 하늘은 왜 파랄까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25세에 벌써 원자에 관한 연구뿐 아니라 특별 상대성이론과 나중에 노벨상을 안겨준 연구도 했다.

 

 

 

패러데이는 잉글랜드 북부의 웨스트몰랜드 출신이다. 마이클의 아버지 제임스는 대장장이였는데, 아내 메리와 어린 두 아이들(1788년에 태어난 로버트와 1787년에 태어난 엘리자베스)과 함께 1791년에 일을 찾아 남쪽으로 갔다. 패러데이 가족은 당시 서리 주에 속하는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런던으로 편입된 뉴잉턴에서 잠시 산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1791년 9월 22일에 마이클이 태어났다. 가족은 곧 런던으로 이사하여 맨체스터 광장 근처 '제이콥스 웰 뮤스'의 마차 차고 위층에 숙소를 잡았고, 그곳에서 1802년에 마거릿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훌륭한 대장장이였지만 건강이 나빠 일을 할 수 없는 날이 많았고, 그 때문에(그는 1810년에 사망했다) 아이들은 기본적인 읽기, 쓰기, 산수 이외의 교육(그것조차도 당시 극빈층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에 쓸 돈도 없는 궁핍함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가족들은 서로 사랑했으며, 1730년대 스코틀랜드 장로교에서 나온 샌디먼파(Sandemanians)의 일원으로서 신앙에서 큰 힘을 얻었다. 그들이 지녔던 구원에 대한 강한 믿음은 지상의 어려운 삶을 잘 참아낼 수 있게 해줬다. 그 교파는 겸손함, 겉치장 또는 과시에 대한 혐오, 드러내지 않고 자선을 베풀 것 등을 가르쳤는데, 이 모든 것이 패러데이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마이클은 열세 살 때 패러데이 일가가 살았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블랜드퍼드 가에 가게를 가지고 있는 서적상이자 제본업자, 신문판매업자였던 조지 리보의 심부름을 하기 시작했다. 일년 뒤 그는 리보의 견습생이 되어 제본일을 배웠고 곧 가게 위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후 4년간 패러데이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당시 리보가 거느렸던 세 명의 견습생 중 하나는 직업 가수가 되었고, 또 하나는 나중에 음악홀의 코미디언이 되었으며, 패러데이는 가게에 있었던 수많은 책들을 지칠 줄 모르고 읽고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리보의 가게가 행복한 가족적인 분위기였다는 것(그리고 고용주로서 리보가 지녔던 자비심)을 조금이나마 알게 해준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패러데이가 훗날 과학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 전기 분야에 처음으로 푹 빠지게 된 것은 리보 가게에서 제본을 하기 위해 준비 중이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3판에 실린 전기에 대한 글을 읽고 나서였다.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1810년1), 패러데이는 시립물리학회(City Philosophical Society) 회원이 되었다. 그 단체는 (이름은 거창하지만) 자기 계발에 열심인 젊은이들이 모여 과학 분야의 흥미진진한 새로운 발견들을 포함하여 당시 주요 화제에 대해 토론하고 서로 돌아가면서 특정 주제에 대해 강연을 하는 모임(1실링이었던 패러데이의 회비는 대장장이로 일하면서 이제 막 가장이 되려던 형 로버트가 내주었다)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토론과 서신 교환을 통해 패러데이는 과학 지식은 물론 문법, 철자법, 구두법 등을 향상시키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학과 전기에 대한 실험을 하면서 그 내용을 동료 회원들과 토론했고, 모임에서 토론했던 주제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한 뒤 정성들여 제본을 했다.

견습 기간도 끝나가고, 그의 나이도 21세가 되어가고 있던 1812년에 이르러 이렇게 제본된 책은 네 권이나 되었는데, 직원 중에 젊은 과학자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관대한 리보는 이 책들을 친구와 고객들에게 자랑하며 보여주곤 했다. 그런 고객 중 한 명이었던 댄스는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 책들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여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아버지 댄스 씨 역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1812년 봄에는 패러데이에게 차표를 주면서 왕립연구소에서 열리는 험프리 데이비의 화학 강연 시리즈(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데이비가 왕립연구소에서 행한 마지막 강연이었다)를 듣도록 해주었다. 패러데이는 이 강연 내용도 그림과 함께 정성들여 기록하여 책으로 묶어 댄스 씨에게 보여주었고, 댄스 씨는 그 보답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 강연이 과학자가 되려는 패러데이의 끓어오르는 욕망을 확인시켜주긴 했지만 그 꿈이 실현될 길은 없어 보였다. 견습 기간은 1812년 10월 7일에 끝났고, 드 라 로슈가 운영하는 제본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우리가 보기에 드 라 로슈는 까다로운 고용자였던 것 같지만, 아마도 그는 직원들이 일에만 전념하길 바라는 평범한 사업가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패러데이는 그런 직원은 아니었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답장은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왕립학회 회장 조지프 뱅크스를 포함하여) 편지를 써서 어떻게 하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좋으니 과학과 관련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몇 주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될 행운을 만나게 되었다. 실험실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로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게 된 데이비가 화학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고 며칠 동안만 비서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고, 패러데이가 그 일을 하게 되었다(아마도 댄스 씨의 추천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어떻게 시간을 내어 이런 일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가 그 일을 해낸 것으로 보아 우리가 가끔 듣는 것처럼 드 라 로슈가 그렇게 나쁜 사람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데이비가 회복된 뒤 원래의 직업으로 되돌아가야 했던 패러데이는 데이비에게 자신이 봄에 들었던 강연 내용을 묶은 책을 보내면서 왕립연구소에서 가장 단순한 일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는(거의 구걸하는) 편지를 동봉했다.

왕립연구소에 일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때 두 번째 행운이 찾아왔다. 1813년 2월, 왕립연구소 실험실 조수이자 술을 좋아하던 윌리엄 페인이 기구 제작자를 폭행하여(왜 싸웠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해고를 당하게 되었다. 데이비는 "과학은 가혹한 애인과도 같으며, 금전적으로 그녀에게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도 돌아오는 것은 보잘것없다"2)는 경고와 함께 패러데이에게 그 자리를 주었다. 패러데이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주당 1기니에, 앨버말 가에 있는 왕립연구소 건물 꼭대기에 있는 방 두 칸짜리 숙소와 초, 연료 등을 받기로 하고(사실 제본일로 버는 것보다 약간 적은 급여 조건이었다) 그 일을 맡았다. 그는 1813년 3월 1일부터 그 일을 시작했고 (다른 무엇보다도) 말 그대로 험프리 데이비의 '병 씻는 사람'(bottle washer), 즉 잡일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잡일꾼 이상의 역할을 했고 데이비가 왕립연구소에서 은퇴할 때까지 그의 모든 실험을 함께했다.

조수로서 패러데이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나 하는 것은, 그가 일을 시작하고 겨우 6개월쯤 지났을 때 데이비가 그에게 자신과 아내의 유럽 여행에 과학 조수로 함께 동행을 요청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프랑스 사람들이 데이비 일행에게 기꺼이 여권을 내준 이유는 그 여행이 과학 탐사 여행, 무엇보다도 화산 지역에 대한 화학적 조사를 하기 위한 여행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 탐사 여행이었지만 데이비 부인이 동행했기 때문에 일종의 신혼여행 같은 분위기이기도 하여 그 때문에 패러데이는 약간의 곤란을 겪었던 것 같다.

데이비의 하인이 마지막 순간에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로 여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바람에 패러데이는 화학 연구는 물론 하인 몫까지 이중으로 일을 해야 했다. 데이비가 아내를 동반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게 합리적으로 잘 해결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데이비 부인이 여주인과 하인 관계를 너무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가끔은 패러데이를 너무 힘들게 한 탓에 그는 탐사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견뎌냈고 그 여행은 그의 인생을 더 좋은 쪽으로 바꿔놓았다.

데이비 일행이 1813년 10월 13일 출발하기 전 패러데이는 런던 중심가에서 20킬로미터 이상을 나가본 적 없는 순진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일년 반 뒤 귀국했을 때 그는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에서 수많은 주요 과학자들을 만났고, 산과 지중해(갈릴레오가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할 때 사용한 망원경은 물론)를 보았고, 데이비의 단순한 조수가 아니라 과학적 협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프랑스어로도 충분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향상된 능력은 왕립연구소로 돌아왔을 때 즉시 인정받았다. 사실 그 여행을 떠나기 전에 패러데이는 예전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재고용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고 왕립연구소의 일자리를 6개월 만에 그만두었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기구 관리자 겸 연구실과 광물학과의 조수가 되었고, 주급은 30실링으로 인상되었으며 왕립연구소에서 더 좋은 방을 갖게 되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데이비가 왕립연구소의 일상적인 업무에서 물러나게 되자 패러데이의 위상은 높아졌고, 아직 탁월함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견실하고 믿음직한 화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아갔다. 그는 30세이던 1821년 6월 12일, 샌디먼파 신자인 사라 바너드와 결혼(샌디먼파 신자들은 결혼 상대를 그리 먼데서 찾지 않는 듯하다. 5년 뒤 마이클의 누이 마거릿도 사라의 형제인 존과 결혼했다)하여 1862년까지 앨버말 가에 있는 '가게 위,' 즉 왕립연구소 사무실 건물 위에서 함께 살았다(그들에겐 평생 아이들이 없었다). 이 무렵, 패러데이는 처음으로 전기 현상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후 십 년 동안 전기에 대한 후속 연구는 하지 않았지만 그 연구는 장차 그를 유명하게 해주었다.

1820년 덴마크의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Hans Christian Oersted, 1777~1851)는 전류에 자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자기를 띠고 있는 나침반 바늘을 전류가 흐르는 도선 위에 놓으면 바늘이 도선과 엇갈리며 직각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즉, 도선 주위에 원(또는 일련의 원들)의 형태로 자기력이 작용한다는 의미로서, 막대자석들이 서로를 당기고 밀치는 힘, 또는 정전기와 중력의 직선으로 잡아당기는 힘(정전기의 경우 밀어내는 척력도 마찬가지)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뉴스가 유럽 전역에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실험을 되풀이해보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보려고 했다.

그중 한 사람이 윌리엄 울러스턴이었는데, 그는 전류가 마치 나선 모양으로 된 미끄럼틀을 내려가는 아이처럼 도선을 따라 나선 모양으로 흘러 내려가며, 이렇게 꼬인 전류 때문에 원형의 자기력이 발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전류가 흐르는 도선이 자석에 근접했을 경우, 축을 따라 회전해야만 한다(아주 얇은 팽이처럼). 1821년 4월, 울러스턴은 왕립연구소를 방문하여 이 효과를 찾아내기 위해 데이비와 함께 실험을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패러데이는 그 실험을 참관하지는 않았지만 그후의 논의에는 참여했다.

1821년 후반, 패러데이는 〈물리학연보(Annals of Philosophy)〉라는 잡지사로부터 외르스테드의 발견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그 여파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철저한 성격이었던 그는 그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기고문에 쓰려고 했던 모든 실험들을 직접 실시해 보았다. 그러던 중 그는 전류가 흐르는 도선을 고정된 자석 주위에 나선형으로 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에 따른 실험과 전류가 흐르는 도선을 고정시키고 그 주위에서 자석을 움직이는 실험을 고안해냈다. 그는 "도선은 항상 (자석) 막대기와 직각을 이루며 움직이려 하고 확실히 그 주위를 원형으로 돌게 된다"라고 썼다. 이는 울러스턴이 얘기한 (존재하지 않는) 효과와는 매우 달랐다.

그러나 1821년 10월, 패러데이의 글이 발표되자 울러스턴의 연구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던 어떤 이들은(더 잘 알고 있었어야 할 데이비까지) 패러데이가 울러스턴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거나 또는 울러스턴이 한 연구의 공을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데이비는 1824년에 패러데이가 왕립학회 회원이 되는 것을 막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패러데이가 압도적인 다수로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은 더 많은 수의 통찰력 있는 과학자들이 패러데이 연구의 중요성과 창조성을 충분히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전기 모터의 기본을 이루는 그 발견 덕분에 패러데이의 이름은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그 발견이 얼마나 중요했나를 보여주는 것이며, 당시 기술 변화의 속도를 보여주는 징표였다. 패러데이가 자석 주위에 전선 하나를 감은 장난감 같은 모형으로 시범을 보여준 뒤 60년이 지나 독일, 영국, 미국에서는 전기 기차가 달리게 되었다.

패러데이는 1820년대에는 전기와 자기에 대한 연구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적어도 가끔 잠깐씩 그 주제를 연구하려고 했지만 진전은 이루지 못했다), 화학 분야에서는 확실한 연구를 하여 염소를 액화시킨 최초의 인물이 되기도 했고(1823년), 벤젠 화합물도 발견했다(1825년). 벤젠의 발견은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벤젠이 훗날 케쿨레가 설명한 전형적인 고리 구조를 가지고 있고, 20세기에 생명체 분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1825년에 데이비의 뒤를 이어 왕립연구소 실험실장(그가 왕립연구소를 실질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뜻한다)이 되었으며, 1820년대 후반에는 새로운 인기 강연 시리즈(그가 직접 나서서 많은 강연을 했다)와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강연을 도입하여 왕립연구소의 수입을 늘려주었다. 놀라운 점은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전기와 자기에 대해 전혀 연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와중에도 연구할 시간을 내었다는 것이다. 패러데이는 일찍이 1826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는데, 이는 과학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시간의 일부를 화학 실험에 바치길 원하는 사람이 연구와 관련된 책과 논문들을 다 읽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그 수는 어마어마하게 많다. 또 상당 부분이 재미도 없고, 상상과 오류로 차 있어서 그중에서 몇 안 되는 실험적·이론적 진실을 선별하는 일은 너무나 힘들다. 그래서 실험을 시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읽은 것 중에서 빨리 선택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진짜 좋은 것을 경솔하게 지나쳐버리게 된다.3)

그런 문제는 점점 더 심해졌고, 최고의 과학자들 중 많은 이들(아인슈타인의 경우에서 이미 보았다)은 종종 '문헌을 섭렵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패러데이는 실험실장이라는 직책 이외에도 1833년에 새로운 기부금으로 왕립연구소에 설치된 풀러 화학 교수직에 임명되었다. 이제 40대로 들어선 그는 전기와 자기에 대한 연구로 훌륭하게 복귀했고, 그 연구는 패러데이의 위대한 업적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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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데이의 법칙(Faraday's law, ─法則)

 

 

1833년 발견한 전기분해 법칙과 이보다 2년 전에 발견한 전자기유도(電磁氣誘導) 법칙이 있다. 전기분해 법칙에 의해 물질의 원자구조와 관련해서 전기량에도 최소 단위(기본 전하량)가 존재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예측되었고, 전자기유도법칙은 전자기유도가 일어나는 방식을 밝혀냈다.

전기분해

전기분해를 하는 동안 전극에 흐르는 전하량(전류×시간)과 전기분해로 인해 생긴 화학변화의 양 사이의 정량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법칙이다. 1833년 패러데이가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전기화학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다.

제1법칙:전해질용액을 전기분해할 때 전극에서 석출되는 물질의 질량은 그 전극을 통과한 전자의 몰수에 비례한다. 즉, 전류가 더 많이 흐를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석출되는 물질의 질량은 많아진다.

제2법칙: 같은 전기량에 의해 석출되는 물질의 질량은 물질의 종류에 관계없이 각 물질의 화학 당량에 비례한다. 즉, 1그램당량의 물질량을 전기분해하여 석출하는 데 필요한 전기량은 물질의 종류에 관계없이 96,485.3383C으로 항상 일정하다.  

제1법칙에 의해 석출되는 물질의 양은 전류와 시간의 곱에 비례한다. 그리고 공급되는 전자가 전해질 속의 이온을 원자가 되게 하여 석출되므로, 석출되는 물질의 질량은 원자량에 비례한다. 또한 원자가가 곧 이온 한 개가 원자로 될 때 필요한 전자개수이므로, 석출되는 물질의 질량은 원자가에 반비례한다.  

물질 1그램당량을 전기분해로 얻는데 필요한 전하량, 곧 전자 1몰의 전하량을 패러데이 상수라고 한다. 보통 기호 F로 표시하며, F = 96,485.3383C/mol e-이다. 이 법칙에 의해 물질의 원자구조와 관련해서 전기량에도 최소 단위(기본 전하량)가 존재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예측되었다. 즉, 1F은 전자의 기본전하량(1.602×10-19C/e-)과 아보가드로수(6.02×1023 mol-1)의 곱과 같다. 전하량 1C으로 석출되는 물질의 양은 은 1.118mg, 수소기체 0.010446mg이다. 1C의 전기량에 의해 석출되는 물질의 양을 그 물질의 전기화학당량이라 한다.


전자기유도


전자기유도에 의해 회로 내에 유발되는 기전력의 크기는, 회로를 관통하는 자기력선속(磁氣力線束)의 시간적 변화율에 비례한다. 기전력의 방향을 정하는 렌츠의 법칙과 함께 전자기유도가 일어나는 방식을 나타낸다.

 

 

각주

  1. 1 패러데이의 어머니는 1838년까지 살았기 때문에 아들이 당대에 위대한 과학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 2 Harold Hartley, Humphry Davy (Nelson, London, 1966) 참조.
  3. 3 크라우더(Crowther)의 『19세기 영국의 과학자들(British Scientists of the Nineteenth Century)』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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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영원히 | 작성시간 14.08.21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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