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문명 어디까지 왔나
사실 문화와 문명의 구분은 쉽지 않다. 원래 문화는 'culture'를 번역한 것으로 경작, 재배를 뜻하는 말이고, 문명은 'civilization'을 번역한 것으로 도시화, 시민화를 뜻하는 말이다. 어원상으로 볼 때는 둘 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조작, 개발을 뜻하는 것이지만, 문화보다는 문명이 더 고도로 발달된 형태를 일컫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문명이란 인간 외부의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끔 개발 변형하기 위해 고안해낸 산업, 기술, 경제 및 사회제도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문화란 인간의 내면적 가치를 계발하기 위해 만들어낸 학문, 종교, 예술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문명이 물질적인 측면이 강하다면 문화는 다소 정신적인 측면이 강하다.
둘을 종합해볼 때 문명이라는 말 속에는 진보나 발달의 측면을 강조하는 느낌이 많이 들어 있고, 문화라는 말 속에는 그 고유의 특징을 강조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음식이나 의복과 같은 영역에는 문화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고, 과학이나 기술 등에는 문명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문화와 문명을 이렇게 확연하게 구분하지 않고 통용하기도 한다. 문화사를 다루면서 과학이나 기술 등 문명에 관련된 부분도 다루기도 하고, 문명을 이야기하면서 종교나 사상을 다루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이처럼 구분하기 애매한 부분이 많지만 대략 이 정도면 문화와 문명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문화를 중심으로 전개했지만 이 장에서눈 문명을 중심으로 논의를 펼치고자 한다.
아득한 고대 인류가 채취와 수렵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문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인류는 다른 초식동물처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열매나 잎, 뿌리 등을 채취하기도 하고 육식동물처럼 사냥을 하면서 먹을거리를 마련했다. 이때의 인간의 삶은 그냥 자연의 일부였다. 그러다가 농경과 목축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조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문명이 움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농경과 목축 가운데서 인류문명의 발달에 더 큰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역시 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농사라고 하는 것은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결실을 거둘 수가 없다. 그리고 결실을 거둔 농산물 가운데 좋은 씨앗을 남겨두지 않으면 이듬해 다시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농경을 시작하면서 인류는 시간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또한 농경을 통해 비로소 생산물을 비축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사람들은 임시거주지가 아니라 오랫동안 머물 튼튼한 집을 짓기 시작했고, 농경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게 되면서 자연에 대한 개발과 조작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자연의 개발을 위해서는 협업과 분업이 훨씬 더 효율적임을 알게 되어 초보적인 형태의 촌락이 형성되었고, 여러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유지 관리하기 위한 정치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울러 자신들이 직접 생산하기보다는 때로는 다른 집단이 생산하여 비축한 잉여생산물을 약탈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초기의 농경 수준은 그다지 높지 못했다. 기껏해야 돌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갈아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생산량도 그리 많지 않았고 겨우 자급자족할 수 있는 단계에 머물렀다. 정치형태도 씨족공동체 또는 부족공동체 정도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철을 이용할 줄 알게 되면서 농기구의 획기적인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크게 증가했다. 생산력의 증가는 잉여생산물을 낳게 되었으며 이 잉여생산물을 교환하기 위해 시장이 형성되었다.
시장의 형성은 바로 도시의 형성을 가져왔다. 도시의 형성은 인류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도시화는 집중화를 뜻한다. 도시는 흩어져 있는 생산물이 한 군데로 모이는 곳이다. 나아가 정보와 인력이 모이는 곳이고 정치 군사적 힘이 모이는 곳이다.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초보적인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고대국가의 형성은 인적 물적 자원의 집중과 관리를 좀더 쉽게 해주었으며 이에 따라 인간의 자연에 대한 통제력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문명이 크게 도약했던 것이다.
이런 정치 경제적 변화에 발맞추어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하여 인도, 중국, 그리스, 중동 등의 각 문명권의 사상계에서도 폭발적인 발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인도에서는 석가모니와 마하비라, 그리고 『우파니샤드』의 많은 사상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여 변화하는 현상세계 너머의 궁극적인 실재를 탐구하고 카르마(業報)와 생사윤회를 넘어서는 개인의 궁극적 해탈을 추구하는 인도사상의 학풍을 형성했다.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등장하여 어떻게 하면 어지러운 천하를 통합할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자연의 순리를 좇는 삶인가를 고민하면서 정치와 도덕을 중시하는 중국철학의 학풍을 형성했다.
그리스에는 초기에는 탈레스와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등의 철학자와 수학자들이 던진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만물은 변화하는가 불변하는가 등의 자연철학이 유행했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이르러 인간 중심의 윤리학, 논리학, 정치학 등과 감각세계 너머의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탐구가 진행되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자연과학에서 인문과학, 사회과학을 통합하는 종합적 철학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그리스철학의 가장 큰 특징은 논리적 합리적 사유를 중시한다는 것에 있다.
이에 비해 중동 지방의 페르시아에는 조로아스터가 등장하여 세계를 선악의 투쟁으로 파악하고 초월적 신의 의지를 좇을 것을 강조하는 계시적 종교의 맹아를 싹틔웠다. 조로아스터는 철학자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인해 우리에게는 짜라투스트라라는 발음으로 더 친숙하다.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종교는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조로아스터교라고도 하고 불을 숭배하여 흔히 배화교(拜火敎)라고도 하는데, 그 자체로는 그리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지만 이 지역에서 나온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고대 이스라엘은 기원전 6세기 무렵 바빌론에 멸망당하고 바빌론은 다시 페르시아에 멸망당한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동안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유대교 속의 천사장, 천국과 지옥, 부활, 종말 등의 종교적 개념들은 바빌론유수 시절 이전에는 없던 것으로, 바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으로 새롭게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상당 부분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그대로 전해진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인류 역사의 축(軸)의 시대라고 불렀다. 이 시대를 축의 시대라고 부른 이유는 이 시대에 성립된 중요한 사상들이 오랜 세월에 걸친 인류사상사의 가장 중심적인 축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 이렇게 아득히 동떨어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위대한 사상들이 흥기했다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일이다.
사실 축의 시대에 등장한 위대한 사상들은 거대 문명권의 출현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자그마한 국가 단위로 흩어져 있던 지역문명들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좀더 큰 단위의 문명권으로 통합되는 과정에 있었다. 즉, 기술력과 정보력, 조직력을 바탕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하나의 강력한 정치권력이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는 시대가 열리기 직전이었다. 이런 새로운 변화에 맞추어 먼저 사상적으로 이전의 자그마한 국가나 민족 단위의 편협한 사상을 훨씬 뛰어넘어 보편적인 인류애를 바탕으로 하는 거대한 사상이 필요했던 때였다.
이렇게 등장한 위대한 사상들은 뒤이어 나타난 강력한 고대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든든한 힘이 되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게 된 제왕들은 사회적 통합을 위해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채택된 사상은 고대제국의 통치지역을 넘어서 이웃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그 뒤에도 정치적 분열과 상관없이 그 문명권 전체의 보편적인 사상체계로 남을 수가 있었다. 사상의 전파력은 정치적 영향력보다 훨씬 크고 오래가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에서 융합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로마제국 밖의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고,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지금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교사상 또한 중국의 강역을 벗어나 한국, 일본, 베트남에까지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축의 시대에 등장했던 위대한 사상은 그 전파력이 매우 강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종교사상의 전파력은 더욱 대단했다. 그들에게는 높고도 험난한 산맥과 가혹하리만큼 황량한 사막도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돈황의 동굴에서 발견된 그리스도상과 장안에 세워진 기독교 교회에 대한 기록들, 인도의 한쪽 구석에 남아 있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흔적, 그리고 유럽에 남아 있는 불교의 흔적들을 보면 그 옛날에도 종교사상의 전파는 무척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규모의 전파는 역시 불교의 전파다. 근대 이전까지 가장 넓은 범위의 영향을 미쳤던 것은 불교다. 갠지스강 중류에서 시작된 불교는 인도 전역에 펴졌을 뿐만 아니라 한때 아시아 전역에 걸쳐 전파되었다. 특히 인도문명권에 결코 뒤지지 않았던 중국문명권이 불교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은 근대 이전의 종교사상의 교류사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축의 시대에 등장한 사상들은 근대 이전까지는 서로 부분적인 교류는 있었고 상당한 범위로 확장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대체로 지역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변화했다. 새로운 변화는 유럽문명권에서 시작되었다.
유럽문명권의 양대 조류는 합리적 이성과 인본주의를 중시하는 헬레니즘과 절대적 신앙과 신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헤브라이즘이다. 그리스에서 피어난 헬레니즘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에 의해 거대한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이어서 로마에 계승되었다. 헤브라이즘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예수 이전까지는 유대인들의 민족종교에 그쳤다. 예수 이후 2∼3세기 동안의 순교의 역사를 거쳐 마침내 로마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1천여 년 이상 유럽 전역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 15세기의 르네상스 이후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헬레니즘이 다시 피어나게 되었다. 처음에 문화와 예술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합리적 이성을 중시하는 사상운동으로 나아갔고, 그 파급력은 급속도로 정치, 경제, 과학, 기술에도 미치기 시작했다.
중세 때의 유럽문명은 다른 문명권보다 우위에 있지 못했다. 과학기술과 생산력에서 중국문명권에 비해 열세였던 것은 물론 아랍문명권보다도 낙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문명의 재발견을 통해 근대에 진입하면서 그들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유지되어오던 반농 반유목의 장원경제체제에서 벗어나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을 발달시키고 아울러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국에서 먼저 발명된 화약과 나침반을 이용하여 총과 대포를 만들고 대항해와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특히 18세기 이후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문명의 본격적인 팽창을 불러왔다. 상당 기간 동안 진행된 자본의 축적과 과학기술의 진보가 어우러져 나타난 산업혁명은 단순히 유럽문명사에 그치지 않고 인류문명사 전체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대사건이었다. 산업혁명은 인류의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통과 통신의 발달을 촉진하여 큰 블록으로 나누어져 있던 여러 문명권들을 하나의 문명권으로 통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유럽의 문명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것이다.
흔히 말하기를 근대 서구문명의 힘은 과학과 민주주의라고 한다.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규모로 자연을 개발하고 조작하여 물질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피를 흘려가며 이룩했던 시민혁명은 인류를 구속하던 여러 가지 억압과 불평등을 떨쳐버리고 인류 사회에 어느 정도의 자유와 평등을 가져왔다. 그들이 만든 민주주의제도는 지금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정치형태다.
물론 근대 서구문명에 어두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팽창 과정에서 실로 탐욕에 가득 찬 제국주의적 침략과 약탈을 일삼았고, 그로 인해 비유럽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좀더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근대 서구문명의 팽창의 역사는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산업화의 중심지였던 유럽 내에서도 계층간의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찍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기하 급수적으로 더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밖에 팔 수 없는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특히 산업화의 과정에서 황폐화된 농촌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은 도시빈민이 되어 기본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세기 후반부터는 자본가들을 타도하고 노동자 중심의 균등한 분배를 주장하는 경제체제에 대한 이론들이 나왔다. 사회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과 계몽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인류의 진보를 확신하던 서구문명은 20세기에 이르러 크나큰 위기에 부닥쳤다. 20세기 전반에 진행된 두 차례의 세계전쟁은 서구문명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들이 그렇게 찬양하고 믿어왔던 합리적 이성의 힘은 그들을 중세의 종교적 광기와 봉건 신분제도의 억압에서 해방시켜주기는 했지만,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가장한 파시즘의 횡포는 막지 못했다. 그리고 인류의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삶에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을 제공하던 과학의 힘은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치명적 살상무기를 생산하는 데 이용되면서 인류에게뿐만 아니라 자연에도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다.
일부 선구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근대 서구문명이 얼마나 야만스럽고 탐욕스러운가에 대해서 처절하게 자각하고 반성하기 시작했으며 근대 서구문명 전체의 틀에 대해서 회의하고 고민하면서 새로운 틀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근대 서구문명을 문명발달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던 우월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겸허한 마음으로 다른 문명권과 대화하고 배우려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근대 서구문명의 병폐를 치유하는 대안으로 동양적 직관주의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소수의 움직임이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도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은 계속되었고, 기성의 정치권력은 그럴듯한 구호 아래 여전히 사회적, 정치적 약자에 대한 폭압과 착취를 자행했으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경제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자원의 낭비와 환경의 파괴는 더욱 거대한 규모로 진행되었다.
이에 1960년대 후반에는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성의 정치권력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자행되는 추악한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른바 68혁명이다. 68혁명은 정치운동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근대 서구의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 자체를 반대하고, 인간과 인간이 더 깊게 만나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 영향으로 환경운동, 생명운동, 새로운 영성운동, 신과학운동 등의 이른바 뉴에이지 운동이 등장했고, 소수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거론되던 탈근대주의도 점차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은 근대 서구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새로운 대안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반성과 모색의 움직임은 아직은 너무나 미미한 편이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던 새로운 진보적 흐름은 1980년대 이후에 미국을 중심으로 다시 거세게 불기 시작한 보수화의 바람으로 그 세력이 주춤해졌다. 이에 비해 그나마 자본주의를 견제하는 세력이었던 사회주의가 1990년대에 들어 몰락하게 되자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아무런 제지도 없이 거침없는 독주를 계속하고 있다.
최근에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바람은 겉으로는 그럴듯한 구호와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본력과 기술력에서 절대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일부 선진국들이 후진국들을 더욱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 속으로 편입시키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너도 나도 오로지 이익을 추구하는 장사치의 마음밖에 없다. 이제는 후진국들도 가만히 있지 않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오랫동안 사회주의의 장막 속에서 잠자던 중국이 세계시장으로 뛰어들면서 생긴 여파는 실로 만만치가 않다.
자본주의 문명의 성장신화 뒤에는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있다. 산업혁명 이후에 나타난 문명의 이기들은 인류의 삶의 질을 크게 바꾸었다.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문명의 이기 가운데서 인간의 삶에 가장 심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은 역시 교통과 통신 수단들이다.
인류 역사에서 최대의 영토를 자랑했던 몽골제국이 그 방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교통과 통신의 발달 때문이었다. 그들은 방대한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 말을 바꾸고 사람이 쉬어갈 수 있는 역참을 두어 교통의 편의를 도모했으며, 급한 일이 있을 때는 4천 킬로미터, 1만 리의 먼 길을 열흘 안에 달려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화를 통해 수만 리 밖의 소식도 즉시 접할 수가 있다. 그뿐인가?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의 대중매체의 발달로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세상 소식을 다 알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인터넷의 발달은 전 지구의 정보를 책상 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했다. 최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이동통신 기기들은 전화, 텔레비전, 인터넷을 통한 정보들을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옛날에는 먼 길을 가려면 최소한 몇 달 동안의 기나긴 여행을 각오해야 했다. 장안에서 실크로드를 거쳐 로마로 가는 길은 1년 가까운 대장정이다. 그러나 이제는 비행기를 타면 지구촌 어디라도 하루 만에 갈 수가 있다. 아직은 일상화가 되지는 않았지만 우주를 여행할 날도 멀지 않았다. 모두 눈부신 과학기술의 덕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과학기술에는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만들어진 핵무기는 전쟁을 빨리 끝나게 해주었지만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위협을 인류에게 안겨다주었다. 지금 인류가 가지고 있는 핵무기는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를 다 절멸시키고도 남을 정도다. 물론 그 파괴력이 워낙 가공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사용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어떤 선택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인류가 발달시켜온 과학기술은 지구 환경에는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20세기가 끝나가던 1999년 세계의 많은 석학들은 앞으로 지구촌이 해결해야 할 여러 가지 과제 가운데 가장 시급한 과제로 지속 가능한 경제발전과 환경오염 문제를 꼽았다. 지속 가능한 경제개발은 자원과 환경문제와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인류문명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은 환경문제다.
그 아름답던 대지도 오염되어가고 하천도 썩어가고 있으며 심지어는 바다도, 하늘도 심각한 오염에 시달리고 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산화탄소 과다 배출로 인한 오존층 파괴와 지구 온난화다. 이미 이삼십 년 전부터 많은 환경학자들이 오존층 파괴와 지구 온난화현상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했고 지금 그 효과는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지구 전체의 기온이 점차 올라감에 따라 온대기후인 우리나라의 기후도 점차 아열대기후로 변해가고,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점차 상승하고 있다. 이로 인한 이상기후로 해마다 지구촌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기업들은 여전히 경기위축에 대한 걱정 때문에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일 틈이 없다. 그나마 환경주의자들의 강력한 경고 때문에 1992년에 리우에서 지구환경회의를 개최하고, 1997년에는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해서 온실효과를 낳는 가스 사용을 억제하는 교토의정서를 채택했다. 교토의정서는 선진국들이 먼저 솔선하여 온실효과를 가져오는 가스량을 감축시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에너지 소비국이자 인구 당 에너지 소비량이 다른 나라를 압도하고 있는 미국은 교토의정서를 탈퇴했다. 얼마 전 멕시코만 일대에서 불어닥친 초강력 허리케인 때문에 엄청난 수해를 입었지만, 미국은 아직도 교토의정서를 거부하고 있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다. 미국은 만약 미국이 교토의정서에 가입하게 되면 단기적으로 미국경제는 30% 가까이 규모가 축소될 것이며 수백만 개의 일자리가 감소하고 삶의 질이 크게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가입할 수 없다고 변명하고, 또한 최근의 기후변화가 반드시 온난화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미국은 환경문제에서 경제성장은 방해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해결책이며, 경제가 계속 성장하면 장기적으로는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는 신기술을 개발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초지일관 경제성장 우선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선두주자인 미국이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그 뒤를 쫓아가는 후발주자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 경제개발에 여념이 없는 중국 사람들은 환경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거대한 동아시아 대륙 전체가 경제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썩어가고 있고 그 여파는 우리나라에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을 탓하고 제재할 수 있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
사실 과학기술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인류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고, 치명적인 해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을 사용하는 인류의 의식 수준에 있다. 그 사이 인류는 물질적 능력에서는 엄청난 진보를 해왔지만 정신적 능력에서는 아직도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근대 이후의 계몽주의는 봉건적 신분제도의 억압과 불평등을 타파하기는 했지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불균형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지금 세계는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빈부 차이가 날로 심해가고 있으며 계층과 계층 사이에도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분명히 장기적으로는 국가와 국가, 계층과 계층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켜 인류문명의 발전을 가로막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부를 더욱 더 확장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들먹이면서 국가와 국가, 기업과 기업, 개인과 개인의 무한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겉으로는 화려한 미사여구가 있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질적 이익에 대한 탐욕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금융자본주의시대다. 전 세계 경제의 흐름은 소수의 금융자본가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고 자본의 논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켜주고 사회를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종교는 급작스러운 물질문명의 발달을 좇아가지 못하고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 사람들에게 물질적 탐욕을 넘어서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탐구하게 해야 하는 종교는 아직도 맹신과 기복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던 문명권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지구촌시대라는 새로운 환경에 걸맞은 공존과 화합의 장을 제공하기는커녕 배타적 교리로 인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냉전이 끝난 뒤에 일어난 지구촌 분쟁의 상당수가 종교간의 갈등에서 말미암은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지금 인류문명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미래에는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새로운 에너지원이 개발되고 환경문제도 해결되며 더 많은 문명의 이기와 편의시설로 물질적으로도 더욱 풍요로울 뿐만 아니라, 많은 인류가 서로 화합하며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특히 환경전문가들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강조하는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이 근본적으로 변혁되지 않는 한 인류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이상기온 현상, 그로 인한 물과 식량의 고갈, 아울러 오존층의 파괴와 천연림의 감소로 인한 산소의 부족과 같은 문제에 부딪혀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빈부 격차나 종교간의 갈등과 같은 문제들 또한 인류평화를 크게 위협하는 요소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지금 인류문명은 갈림길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