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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한때 남성들의 액세서리였던, 하이힐의 기원

작성자스토리|작성시간15.01.09|조회수656 목록 댓글 0

 

하이힐의 기원
한때 남성 액세서리였던 하이힐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이아생트 리고의 1701년 作 ‘루이 14세’.(HyacintHe Rigaud/waRtbuRg.edu. Licensed undeR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3.0 via wikimedia commons)

 

유럽 귀족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신고 있는 하이힐을 본 후
이를 받아들였고, 마침내 남성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의 하이힐은 여성을 위한 전유물이다. 하지만 하이힐 역사는 이러한 사실이 이전에도 항상 같았던 것은 아니다. 반대로 많은 시대에서 남성 역시 하이힐을 신었던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심미적 목적을 위해 신지만 과거에는 좀 더 실용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이힐을 신은 그리스인

 

하이힐이 처음 발명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고대 그리스 배우들이 이를 신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코토르니(kothorni)’는 적어도 기원전 200년 이전 시기 신발로 높이가 7~10였고, 밑창 재질은 코르크였다. 신발 높이는 무대에서 묘사되는 다양한 인물들 사이의 사회적 지위와 중요도를 구분하는 용도로 사용됐다고 알려졌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굽이 있는 형태의 신발이 실용과 심미적 용도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연극배우 등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신었던 장신구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이힐이 등장하는 그 다음 시기는 유럽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는 남성 과 여성 모두가 서양식 나막신의 일종인 패튼(patten)을 신었다.


중세 유럽 도시의 거리 대부분은 진흙으로 덮여 있고 악취가 심했다. 당대의 신발은 주로 손상되기 쉽고 고가인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손상을 막기 위하여 남녀 모두 땅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돕는 덧신인 패튼을 신었다.

 

50굽을 자랑하는 초핀을 신은 여인들은
균형 유지를 위해 시종의 도움이 필요했다

 

베네치아의 하이힐

 

패튼이 실용적인 부분을 주로 담당했다면, 또 다른 종류의 유럽식 신발은 실용성과 상징성을 두루 갖췄다. 초핀(chopine)은 패튼과 연관된 신발 종류로 15~17세기에 베네치아 사회의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초핀이 높을수록 그 착용자의a 계급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그 예로 높이가 50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그렇기에 신고 걸어 다니기에 그다지 실용적인 종류의 신발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초핀을 신었던 여성들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시종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신발 높이뿐만 아니라 보행 중 시종이 이를 도와야 한다는 사실 자체도 부와 계급을 보여주는 형태였을지 모른다. 패튼과 초핀 모두 발의 높이가 땅에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하이힐보다는 플랫폼 슈즈와 좀 더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현대 하이힐과 좀 더 가까운 모습의 신발을 찾기 위해서는 중세 시대의 거리를 떠나 좀 더 동쪽에 위치한 페르시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동양에서 하이힐이 사용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페르시아 도자기 그릇에 그려진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그림을 통해 약 9세기 이후 신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페르시아의 기병들은 하이힐을 신음으로써 등자에서 발이 빠지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얻었다. 16세기 말에서부터 17세기 초 페르시아의 왕인 압바스 1세는 공공의 적인 오스만 튀르크에 맞서 싸울 동맹을 찾기 위해 유럽으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 후 유럽 귀족들은 페르시아인들의 하이힐을 본 뒤 빠르게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마침내 기마를 위한 실용적인 목적과 계급을 나타내는 상징에서 남성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여성의 전유물이 되다

 

17세기에 들어서며 남성 패션을 여성 복식에 차용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여성들 역시 하이힐을 신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한 패션 유행으로 볼지, 남성의 힘을 빌어 평등을 얻기 위한 여성들의 의식적 행보로 해석할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상관없이 하이힐을 향한 남성들의 집착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사라졌다. 계몽주의 시대가 남성들의 사고뿐만 아니라 옷을 입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이성적인존재로서 남성이 그들의 무뚝뚝한 의복을 통해 나타났다.


이로써 하이힐, 메이크업, 과도한 의복은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흥미롭게도 여성들 역시 점차 비효율적인 형태인 하이힐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모델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하이힐만 신고 사진 촬영을 하기 시작하면서 현대적인 형태의 하이힐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하이힐과 여성성이 합쳐진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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