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 306~324년
I. 4황제 공동 통치체제(tetrarchy)와 콘스탄티누스의 대두
반세기 넘게 지속된 내우외환의 악순환 고리를 끊은 것은 발칸 북부 출신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였다. 그 역시 군대의 추대로 황제에 올랐지만, 여러 가지 혁신정책을 펼쳐 잠시나마 황제권과 제국을 정상화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중점을 뒀던 바는 황제권력의 안전을 강화하는 방안들이었다.
(1) 4황제 공동 통치체제의 확립(286~293년)
황제권을 안전하게 하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구상의 해법은 왕조체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뭔가 새로운 형태의 왕조체제가 필요했으며, 4황제 공동 통치체제가 그의 해법의 핵심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가 된 지 2년 뒤(286년), 막역한 고향 친구 막시미아누스에게 자신과 대등한 황제(Augustus) 지위를 부여해 제국 서부의 통치를 맡겼다.
그로부터 6년 뒤(293년), 두 황제 각각의 휘하에 부황제(Caesar) 한 명씩을 두고, 그들에게 제국 서부와 동부를 다시 분할해 다스리게 했다. 제국은 크게 두 황제와 두 부황제, 모두 넷이 다스리는 체제가 된 것이다. 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사이에는 부자 관계에 상응하는 권위의 서열이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서부와 동부의 황제-부황제는 모두 장인-사위 사이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부황제로 삼으면서,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고, 서부의 부황제인 콘스탄티우스에게는 전처(Helena)와 이혼하고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딸(Theodora)과 혼인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우정과 결혼으로 결속된 아주 특이한 왕조가 탄생했고, 4황제 공동통치체제는 바로 이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체제가 성립될 무렵, 콘스탄티누스는 20세를 갓 넘은 때로, 부친 관할지의 수도 트리어의 궁정이 아니라, 마치 인질 같은 존재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에 머무르고 있었다.
(2) 콘스탄티누스의 대두(305년)
4황제는 4명 모두 발칸 북부 출신으로, 다뉴브 하류 전선의 군대를 배경으로 출세한 자들이었다. 304년 말 두 번째로 로마를 방문하던 중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중 병을 얻었고, 병약해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결단을 내리기에 이른다. 4황제 체제의 순탄하게 작동하려면 두 황제가 즉위 20년 만에 퇴위하고 두 부황제가 그 후임자가 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언제나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순종했던 막시미아누스는 마지못해 퇴위에 동의했고, 동부와 서부에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황제 지위에 올랐다. 그들의 부황제로 콘스탄티우스의 아들(30대 초반의 콘스탄티누스)과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이자 갈레리우스의 사위(20세가량의 막센티우스)가 유력한 후보로 올랐다. 그러나 갈레리우스의 반대로 결국 갈레리우스가 직접 추천한 두 명이 부황제에 올랐다. 갈레리우스의 오랜 군대 동료였던 세베루스와 양자로 들인 자신의 조카 막시무스 다이아였다.
이렇게 2차 4황제체제가 마무리될 무렵, 서부의 황제 콘스탄티우스는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계속 인질로 붙잡아두려 했으나 콘스탄티우스의 거듭된 호소에 못 이겨 결국 콘스탄티누스와 부친의 해후를 허락했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 셈이었다.
| ▲ 콘스탄티누스 상 | ||
II. 기독교 대박해 동안의 변화들 : 303~312년
(1)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302~304년)
기독교는 3세기 중엽의 데시우스 박해를 지나, 특히 갈리에누스 황제가 박해 중단 칙령(260년)을 포고한 이래, 장기평화를 누려왔다. 평온은 빠른 교세 성장의 자양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4세기 초 동부 황제에게 경각심을 줘 다시 박해정책을 펴게 하는 자극제가 됐다.
이는 기독교에 대한 최후의 대박해로, 반세기 전 데시우스 박해 때와 비슷했다. 기독교 박해가 좀 더 심각한 국면을 맞은 것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개선장군으로 돌아온 부황제 갈레리우스가 황제에게 더 강경책을 제안하면서부터였다. 성서몰수, 교회파괴, 기독교도 고위공직 박탈, 성직자 구금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302~3년), 마침내 모든 제국주민에게 제사를 강제하는 칙령이 반포됐다.
(2) 갈레리우스의 관용칙령(311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칙령은 당연히 교세가 강한 지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박해칙령은 갈레리우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지위를 계승한 뒤에도 계속 유효했다. 그러나 기독교 대박해는 갈레리우스가 죽기 직전 극적 반전을 겪었다. 그의 명의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칙령이 반포된 것이다.(311년) 첫째,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그들의 공공집회를 허용하니 대신 치안을 어지럽히지 말 것. 둘째, 예배 중에 황제(들)의 안녕과 로마제국을 위해서도 기도해줄 것. 관용칙령은, 기독교 박해가 제국의 안전과 평화에 그리 효과적이지 않음을 깨달은 매우 현실적인 타협책이었다.
(3) 콘스탄티누스의 태양신 숭배
312년 전후로, 콘스탄티누스가 태양신 숭배라는 이교적 일신교를 중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다. 갈리아의 이교도 웅변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장인의 음모를 물리친 직후(310년), 아폴로 신전을 찾아 예배했다고 한다. 그리고 312년 로마 전투에서의 승리를 ‘신의 가호(instinctus divinitatis)’ 덕이라 말하고 있는데, 그 신 역시 아폴로와 동일시되는 태양신이었다고 짐작된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후 계속(320년대 초까지) 황실 조폐창에서 제작하는 주화에 ‘불패의 태양신(Sol Invictus)’이라는 글자와 이미지를 새겨 넣었다.
III.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정책 : 313~324년
이교에 관련해 말하자면, 콘스탄티누스의 태도는 다소 전통을 벗어나고 있었다. 즉위 10년 기념제 때, 로마에서 이교 제사의 분향 행위에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그렇다고 이교 숭배와 축제를 문제 삼지 않았다. 희생 제물의 내장으로 점을 치는 장점 제관(腸占 祭官, haruspex)에 대한 일련의 규제(316~321년)가 있었지만, 그것은 흑색 마술을 경계하던 옛 황제들의 관행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이교 제사에 대한 부분적인 거부감은 아마도 자신의 고유한 태양신 숭배와 연관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한편 기독교에 대한 입장은 그동안 콘스탄티누스의 몇몇 법령들이 명백하게 친 기독교적인 것이라 해석되곤 했으나, 실은 그 취지가 그리 분명치 않다. 우선, 첫째는 교회 성직자에게 공공봉사 및 특정 세금을 감면해준 조처는 전통적으로 이교 사제들이 누려온 특권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다. 둘째, 일요일 즉 태양일(太陽日, dies Solis)을 안식일로 정한 법령 역시 반드시 기독교적인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셋째, 혼인과 출산을 강제하던 로마의 오랜 법규를 폐지한 것도 기독교적 독신을 장려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적어도 공식적 차원에서 기독교도를 특별 배려하는 정책은 없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