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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역사

[스크랩] 북한의 `고난의 행군` (1995년~1998년)

작성자라이크|작성시간13.12.05|조회수490 목록 댓글 0

북한의 '고난의 행군' (1995년~1998년)

 

 

 

원래 고난의 행군이라는 단어는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김일성의 항일 유격전에서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가며, 유격전을 수행하던 시기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1990년대 북한의 괴멸적인 경제난과 대기근으로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한 시기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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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afe.daum.net/mughua/4XXY/501  무궁화꿈나라 「고난의 행군」

 

수백만 명의 적대계층을 없애는 방법으로서 식량배급의 중단이라는 기묘한 술책을 생각해 낸 김정일, 그러나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무대장치와 수단이 필요하였다. 주된 전장이 될 북동부, 함경남북도 도민에 대한 아사를 그럴듯하게 위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선전포고 없는 전쟁」「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허구를 설정하고 그 환상의 전쟁을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이라 이름 하였다. 김정일의 인민살육전쟁을 제국주의 여러 나라에 포위되었다는 허구의 전쟁으로 슬그머니 바꿔치고 경제는 봉쇄되고 식량은 들여올 수 없다고 허위선전으로 국민을 속인 것이다.

「고난의 행군」이란 1938년 12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일찍이 김일성이 중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고 있을 때 100일 간 눈 속을 행군한 고사에 관련시킨 말이다. 일본군의 토벌에 쫓기게 된 게릴라 부대는 중국 동북부 몽강현에서 압록강 연안에 도착할 때까지 퍼 붓는 눈 발 속을 식량도 없이 풀뿌리를 씹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면서 기아를 극복하는 고난의 도피 행각이 되었다. 이 시기의 고난을 생각게 하고 지금 우리 인민은 제국주의 나라들의 포위와 봉쇄 속에서 곤란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으나 불요불굴의 혁명정신으로 견뎌내라는 캠페인이었다.

이것 또한 하나의 교묘하고 교활한 기책이었다. 일반적으로 김정일의 「고난의 행군」은 1996년 정월 초하루 날 조선노동당기관지인 「노동신문」「조선인민군」「노동청년」(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기관지) 등 세 신문의 공동사설 「붉은 기발을 높이 들고 신념의 진군을 힘차게 밀고 가자」에서 처음으로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당과 혁명 앞에 무거운 과제가 제기되고 있는 이 때 우리 당은 전 당원과 인민군 장병 및 인민이 백두의 밀림에서 창조한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살고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들은 지금 가장 곤란한 환경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혁명을 최후까지 완수하는 자력갱생, 간고분두의 혁명정신이며 심한 곤란의 역경 속에서도 패배주의와 동요를 모르며 난관에 맞서 이를 돌파하는 낙관주의 정신이며 여하한 안락도 바라지 않고 간고 분투하는 불굴의 혁명정신이다.」

제5장에서 인용한 노동신문의 정론 「우리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에서 「고난의 행군」은 1995년 원단의 아침 김정일이 최전선의 인민군 초소를 위문하기 위한 방문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버지 김일성이 급사한지 5개월 뒤 자기를 제약하는 모든 것이 없어진 상황에서 김정일은 생각대로 자기의 전략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게 된다. 식량배급을 1994년부터 중단시켰다. 주민은 산과 들에서 초근목피를 구하고, 해변에서 해초와 어깨를 잡으며, 얼마 되지 않은 가재도구를 암시장에 내다 팔아서 필사적으로 연명하였다.

기력이 떨어져서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전 지역이 특히 함경남북도가 곧 바로 고난의 도가니로 변했다. 선배들의 「고난의 행군」을 생각하라. 이만한 일로 약한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라고 당의 간부들은 인민을 질타하였다. 사체가 여기저기 깔려 있는 침상이 되풀이 되었다. 그 일단을 탈북자 증언에서 인용하기로 한다. 25세의 함경북도 청진출신 어느 남자 대학생이다. “1994년부터 식량난이 심각해지고 해가 거듭될수록 더 심하게 되어, 어떻게 하면 살아갈 수 있겠는가! 나도 장사를 해 보려고 함흥에 간 일이 있었으나 그 곳 사람들의 굶주리는 상황은 처절하여 가족의 시체를 매장할 힘도 없었습니다.

어느 집에서는 가족이 죽어도 집 앞에 내 버리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구조대가 할 수 없이 실어다가 매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목격한중에 가장 비참한 일은 집단매장이었습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굶주려 죽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사체를 가져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외에 휘발유도 없고 차도 운행하지 않았으니 사체를 한 곳에 모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매장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큰 도시에서는 구조대라는 조직이 있어서 돌아다니면서 시체를 모아오게 됩니다. 한번은 군 간부들이 우리들을 역전 광장으로 집합하라는 통지를 냈습니다.

가보니 나를 포함해서 30명 정도의 청년이 모였습니다. 간부들은 청년들에게 삽이나 곡괭이를 들게 하여 산으로 올라가서 큰 구덩이를 파라고 하였습니다. 파고 나니까 성분이 좋은 10명 정도를 대기시켰습니다. 벌써 밥이 깊었습니다. 밤 10시 경에 시체를 가득 실은 트럭 3대가 도착했습니다. 실어온 시체를 그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묻어 버렸습니다. 그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 구덩이 위치를 남모르게 기억해 두었습니다. 언젠가는 발굴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래 예수 믿갔시오」한국도서출판진흥 2000년)

「고난의 행군」의 1996년도 지나갔다. 그 해에 100만 명이 아사했다고 황장엽 씨는 말했다. 다음해 1997년은 「고난의 행군」을 승리 속에 매듭짓기 위한 최후의 돌격전의 해로 규정하였다. 국민들에게는 더한 고난이 찾아왔다. 그때 나는 재일조선인 친구로부터 북한 귀국자 가족의 편지를 손에 넣었다. 형제자매 8명이 「지상의 낙원」을 꿈꾸며 집단 귀국하였는데 함경북도에 살고 있는 그 중 한 사람으로부터의 편지였다. 글안에 OO은 안전 때문에 사용했다.

‘누님, 조국에서는 적의 고립말살, 경제봉쇄 책동으로 4년째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으며 「포성 없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 대단한 난관을 오로지 경애하는 장군님을 믿고 풀뿌리를 캐어 먹어도, 풀로 죽을 쑤어 먹더라도 놈들과의 대결에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를 위해서 서로 도우면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4년간 누님의 원조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일생 잊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들 형제자매 중에 「고난의 행군」의 시기에 누이동생이 폭발사고로 죽었으며 O누님의 가족 (주인과 아이들 2명)이 모두 죽었습니다.

OO누님은 고난의 행군의 최후까지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것입니다. 주인은 (자형) 9월 중순 결핵으로 사망하고 아이들은 행방을 몰랐었으나 죽었다는 것입니다. OO누님은 겨우 살아 있으나 앞으로 며칠 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누님이 일본에서 보내주신 5,000엔으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1997년 12월 4일) 「포성 없는 전쟁」이라고 쓴 말에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 있다. 이 편지의 필자는 당 조직의 말단 간부(세포)를 맡고 있는 사람이다. 상부에서는 인민에 대해서 이와 같이 설명하라고 하였을 것이다. 1997년에 이 말 (포성이 없는 전쟁)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고난의 행군」을 승리 속에 마무리 짓기 위한 최후의 돌격전』이란 1997년 7월 22일자 노동신문 사설을 인용한다.

이 돌격전은 「자주냐 예속이냐, 부흥이냐 망국이냐의 첨예한 결사전이다. 제국주의자들의 악랄한 고립압살책동과 경제적 봉쇄, 반복되는 자연재해로 일찍이 없었던 경제적 난관에 의해 우리 인민이 겪고 있는 시련은 측량할 길이 없다. 난관에 앞에 굴복하고 일보 뒤로 물러서게 되면 10보, 100보 뒤로 물러서게 되는 것이며 망ㄱ구노의 몸이 될 것이다.」지금이라도 미국이 공격하여 노예의 몸이 될 것 같이 말하고 있다. 20일 전인 1997년 7월 1일에는 WFP(유엔세계식량계획)의 지원식량을 적재한 배가 피해가 심한 함경북도 청진항에 처음으로 입항했다는 것은 제5장의 2에서 말한바 있다. 지원의 손길을 뿌리치고 완강하게 출입을 허가하지 않았던 지역이다.

김정일의 말살정책을 한결 같이 숨기고 흰 것을 검다고 국민에게는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불교운동본부 조사에서도 이 1997년이 최악의 해로서 20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였다라고 하였다. 한국의 박관용 국회의장도 그의 저서 「나의 생 나의 꿈 그리고 통일」 (한국, 중앙 M$B 2003년)이라는 책에서 「고난의 행군」시기에 2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라고 쓰고 있다. 죽은 것이 아니다.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은 확실히 김정일의 살육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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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생존전략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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