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집 오므라이스가 내 인생을 바꿔 놓은 까닭은?
내 인생의 소울 푸드-안동장의 오므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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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늦가을
어스름 저녁, 서울 을지로3가 중국집 ‘안동장’. 고2 남녀 학생 둘이 들어섰다.
학생들보다 대여섯 살 많아 보이는 남자
종업원이 자리 안내를 마치자 물었다.
“뭘 드릴까요?”
경북 북부 지방의 투박한 억양으로 남학생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오므라이스 두 개 주소.”
여학생과 종업원의 안색이 동시에 바뀌었다. 낭패한
표정과 아예 눈까지 내리깔고 한껏 한심해 하는 표정. 남학생이 영문을 몰라 좀 더 큰소리로 말했다.
“오므라이스 두 개
달라꼬 안 캤습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학생이 나지막이 주의를 줬다.
“여기는
중국집인데….”
남학생은 그 말을 듣고도 뜻을 알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 고향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한 번도 수학여행을 가보지 못한 수준의 가정형편이라 외식의 기억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진학한 이후에는 여유가
생겼다. 클래스메이트가 공부친구로 맞아줬고 그 시절 가정교사에 준하는 용돈도 받았으니까. 그러나 일부는 모아뒀다가 방학 때 동생들 옷가지
장만하는 데 쓰고 대부분은 헌책방에 갖다바쳤다. 6·25전쟁 직후로 지금 메디컬센터 뒤편에 있던 기다란 헌책방 골목에는 엄청나게 좋은 책들이
엄청나게 나와 있었다.
남학생은 손짓으로 여학생의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영성루에서는 오므라이스
해준다!”
영성루란 고향에 있던 유일한 중국집 이름이었다. 물론 거기에서 먹어본 적이 없으니까 이건 그냥 짐작으로 한
말이었다. 규모가 큰 식당이면 이것저것 다양하게 만드는 게 당연한 이치라 확신했던 것이다.
종업원이 한숨 섞인 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여기서는 오므라이스 주문하면 안 돼요. 여긴 중국집이거든요.”
그때 정말 바로
그때였다. 입구 쪽 카운터에 앉아 있던 풍채 좋은 주인이 풍채만큼이나 넉넉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오므라이스 해요.
맛있게 만들어 드리….” 종업원을 손짓으로 부르면서 말을 이어갔다. “맛있게 만들어요.” 그리고 종업원을 끌고 뒤편으로
사라졌다.
의기양양해 있는 남학생과 달리 여학생은 밥이 나올 때까지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대망의 오므라이스를 보더니
이번에는 대경실색했다. 까닭은 1년쯤 후 클래식 오므라이스와 대면하고 나서야 밝혀졌다. 그놈은 안동장에서 봤던 것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였다.
둘이 밖으로 나왔을 때 밤공기는 상쾌하다 못해 향기로웠다. 제 것 다 먹고 몇 숟갈 뜨다만 여학생 것도 듬뿍
덜어서 먹은 뒤라 남학생은 육신도 행복했다. 우스운 얘기, 잘난 척하는 얘기를 늘어놓으며 걷다가 헤어졌다. 여학생은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
같았지만 기분이 너무 좋아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나중에 여학생이 직접 들려줬다. 대학에 들어간
첫학기 봄날이었다. 늘 그랬듯이 그날도 여학생은 누나 같은 말투였다.
“두 가지 얘기를 할 텐데, 오늘 하나, 내일
하나씩 할게.”
태능 숲길은 햇볕이 이미 따가웠다. 걸으면서 얘기하고 앉아서
쉬면서도 얘기했다. 안동장에서 있었던 일을 영화 한 편으로 보여주듯이 들려준 다음 그녀가 물었다.
“식당에서 나와
걸으면서 내가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가볍게 눙치고 지나가고 싶어 남학생이 얼버무렸다.
“시골
촌놈이 개뿔도 모르면서 우기는 데는 뭐 있더라. 그런 생각?”
‘지혜롭게 빛나는 눈’으로 정평 있던 여학생이 바로 그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무슨 일을 하건, 나중에 어떤 자리에 있게 되건, 안동장 주인처럼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자, 그거였어.”
여학생은 말을 이어가고 이어갔다. 천지를 모르는 남학생이 중국집에 와서 오므라이스를 달라고
떼를 썼을 때 종업원은 분명 망신을 줄 기세였다. 주인은 그걸 구해주려고 주방에 가서 특별 주문을 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대륙형 거대
오므라이스였던 거다.
“네가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또 계속 노력하면 그런 대로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바로 그런 때에 안동장 주인처럼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본인도 행복해질 거야.”
남학생은
짧게 대꾸했다. 아니, 감동이 너무 커서 말이 짧아졌다.
“네가 울었을 때보다 오늘이 더 기분
좋다.”
여학생이 딱 한 번 운 적이 있었다. 맛있는 음식 말이 나왔을 때, 어린 시절 일을 들려준 게 화근이었다.
어머니가 저녁 먹으라고 불렀고 양은솥에는 보리죽이 끓고 있었다. 간장 한 국자를 넣고 휘휘 젓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는 그저 그런 내용이었다.
한껏 재미있게 얘기했는데 여학생은 울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목을 얼싸안고 흐느꼈다.
남학생은 당황했지만 자기를 아끼는 증거라는 생각에 행복했다.
감동과 막연한 불안감으로 잠을 설친 바로 다음 날, 남학생은
그녀의 두 번째 얘기를 듣기 위해 집으로 찾아갔다. 여학생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어제 내가 한
부탁, 꼭 지켜줘.”
그리고 뒷걸음질로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나 이제 그만
만나기로 했어.”
남학생은 그때 처음으로 하늘이 노래질 수 있다는 걸 경험했다. 살을 에는 고통과 함께 단발머리 그녀의
초상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나중에 깨달은 일이지만 새겨진 건 초상만이 아니었다. ‘안동장 주인의 배려’가 늘 함께
떠올랐다.
흙길 위에 드리워진 선명한 나무 그늘만 봐도, 빨간 바탕에 금빛 글씨 간판만 봐도, 대문 앞에 서 있던 단호한
모습의 실루엣만 떠올라도, 먹먹하고 아득해지는 고통이 왔다. 한데 신기하게도 그 고통에 차츰 변화가 일었다. 고마움이, 달콤한 향기가 감도는
고마움이 당의정처럼 고통을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세월의 힘인가 했다. 우연히라도 마주친 적 없이 흘려보낸
세월의 힘이려니 했다. 아니었다. 10년쯤 지나서 깨닫고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은 너무도 분명하게 그 이유를
안다.
‘안동장 주인의 배려’라는 여학생의 마지막 부탁이 안겨준 선물이었다. 슬기로운 사람을 일찍 만난다는 건 헤어짐의
아픔이 아무리 컸더라도 크나큰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