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음과 붉음
- '불'에서 나온 갖가지 친척 말들 -
셋째 시간 벨이 울리자, 교실 안의 아이들은 모두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번 시간은 미술 시간. 아이들은 제각기 준비해 온 그림그리기 도구들을 책상 위에 챙겨 놓고 있었다.
스케치북, 그림물감, 그림붓, 물감통, ---
그러나, 아이들의 책상 위에는 그림물감에서 모두 세 가지 색들만 준비돼 있었다. 이번 미술 시간에는 그림물감에서 삼원색만 준비해 오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는 삼원색만 가지고도 어떤 색의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다들 준비해 왔지. 우선 삼원색엔 어떤 것이 있는지 각자 그림붓으로 도화지에다 써 보기로 하자."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선생님은 아이들이 써 놓은 것을 돌아가면서 살펴보았다.
"자, 삼원색이 무슨 색, 무슨 색이지?"
"빨강, 파랑, 노랑요."
아이들이 입에서 거의 모두 같은 대답이 나왔을 때, 늘 장난기 섞인 말을 하기 좋아하는 순돌이가 혼자 나서 불쑥 말을 던졌다.
"선생님, 그럼 전 틀렸네요. '빨강', '파랑', '노랑'이라고 안 썼거든요."
"뭐라고 썼길래?"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이라구요."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 댔다. 선생님도 너털웃음을 흘리시더니 한 말씀 하셨다.
"자, 여러분들. 순돌이가 삼원색을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이라고 썼다는데, 이 답이 틀릴까요?"
"아아뇨."
아이들이 얼굴에 웃음을 지은 채 순돌이쪽을 보며 일제히 대답을 했다.
□ 빛깔 이름 탄생한 이름씨들
우리말에는 같은 뜻을 가진 말이 여러 가지로 나오는 것이 무척 많다. 특히, 빛깔을 나타내는 말에 그런 것이 많다.
빨강색만 경우만 예로 들어 보자.
빨간색-빨강색-붉은색
빨갛다-뻘겋다-새빨갛다-시뻘겋다
붉다-불그스름하다-불그레하다-불긋불긋하다
발갛다-발그스름하다-발그레하다-발긋발긋하다
벌겋다-벌그스름하다-벌그레하다-벌긋벌긋하다
그렇다면, '빨강'과 관계되는 이런 말들의 원뿌리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원뿌리는 하나일까?
학자들은 붉다는 말이 원래 '불'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우리말에서 움직씨(동사)나 그림씨(형용사)의 말들 중에는 이름씨(명사)에서 나온 것이 아주 많다.
그 예를 들어 보자.
길-길다 (※길게 뻗어 있는 길)
꾀-꾀다 (※그 사람을 꾀려면 꾀가 있어야---)
널-넓다 (※널판지가 넓다)
되-되다 (※쌀의 양을 알려면 되로 되어야--- )
띠-띠다 (※허리에 띠를 띠고---)
물-묽다 (※팥죽물이 너무 묽다)
발-밟다 (※발로 밟다)
불-붉다 (※불이 붉게 타오르고---)
신-신다 (※신을 신었다)
틀-틀다 (※새끼를 틀려면 틀이 있어야 한다)
풀-푸르다 (※풀이 푸르다)
품-품다 (※품 안에 품고---)
그렇다면, '빨강'과 관계되는 이런 말들의 원뿌리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원뿌리는 하나일까?
학자들은 '빨강'이라는 말이 '불'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한아비들은 '불'을 보고 '붉다'는 빛깔을 생각했다. '풀'을 보고 '푸르다'는 말을 생각했듯이 '불'을 보고 그런 색까지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불'이라는 말에서 그와 비슷한 소리를 가진 '붉다'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 불에서 나온 많은 친척말들
이 '붉다'는 말은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여러 가지 친척말들을 만들면서 위에서 본 바와 같은 '불그레하다', '불그스름한' 같은 여러 가지 말을 낳아 놓은 것이다.
'불'이라는 말은 '붉다'는 말 하나만 낳은 것이 아니다.
'밝다'는 말도 '불'에서 나왔다. '불'이라는 음은 꼭 '불'이라고만 했던 것이 아니다. '블'이라고도 했고 '발'이라고도 했다. 우리의 옛 책에 보면, '불'이 '블'로 된 것도 있고 '븕'으로 된 것도 있다. 또, ' '이나 ' '으로 된 것도 있다. ' '이나 ' '은 '발'이나 '밝'과 비슷한 음으로 읽는다.
결국 '불'을 뿌리로 한 '밝'에서 '밝다'는 말이 나왔다.
'불'을 뿌리로 한 '발'에서는 또 '바르다'는 말이 나왔다. '바르다(숨김이 없다)'는 것을 '환하다(어둡지 않다)'는 말과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이런 말이 '불'에 바탕을 두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고 할 것이다.
'불'이라는 말은 이처럼 무척 많은 친척말을 낳아 주었다.
불이 붉다
발(불)처럼 바르다
밝(불)이 있어 밝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 생각해 보자.
'불'에서 '붉은'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하면 '밝'이라는 말에서는 '밝안(밝은)'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음을 알 것이다.
그 '밝안'이라는 말을 소리나는 대로 적으면 '발간'이 될 것이고, 이것이 된소리로 되면 '빨간'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밝+은(안)=밝은(밝안)
밝안>발간>빨간(색)>빨강(색)
우리말은 아름답다. 그리고, 같은 말을 나타내는 데도 그 깊이를 잘 생각하여 그에 꼭 맞는 말을 잘 찾아 썼다.
불그레한 노을
발그레한 아기 뺨
시뻘건 피
빠알갛게 피어난 꽃
이것은 다른 나라 말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말만의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