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문화권의 귀신관 (鬼神觀)
『황제음부경』에는 ‘사람들은 신 (神)의 신령스러움은 알지만 그 神이 神이 된 바는 알지 못한다(人이 知其神之神하고 不知其神之所以神이라)’는 구절이 있다. 천지자연이 조화 (造化) 작용을 하는 신묘한 이치를 깨우쳐 아는 것이 곧 신(神)을 아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은 마치 神을 자연적 현상을 뛰어넘는 기이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유가 (儒家)에서는 신 (神)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주역』과 공자를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공자가 『주역』 십익전(十翼傳)에서 神에 대해 두루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사전이나 설괘전에는 神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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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에서는 陰의 작용은 鬼가 되고, 陽의 작용은 神이라고 한다. 즉 “음양으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신이라 (陰陽不測之謂 神이라)” 하였다. 또한 數(양수와 음수)의 변화 또한 음양의 변화로 보고 “天地의 수가 55니, 이것으로써 변화하며 귀신을 행한다 (凡天地之數 五十有五니 此所以成變化하며 而行鬼神也라-계사상전 제9장)”고 하였다.
천지자연의 이치가 곧 신(神)이다
妙神文(묘신문)이라고도 불리는 설괘전 제6장에서는 神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神이라는 것은 만물을 묘하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만물을 움직이는 것이 우레보다 빠른 것이 없고, 만물을 흔드는 것이 바람보다 빠른 것이 없고, 만물을 말리는 것이 불보다 말리는 것이 없고, 만물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연못보다 기쁘게 하는 것이 없고, 만물을 적시는 것이 물보다 적시는 것이 없고, 만물을 마치고 시작하는 것이 산 (艮)보다 성한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물과 불이 서로 따르며, 우레와 바람이 서로 거스르지 아니하며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한 후에야 능히 변화하여 만물을 다 이루느니라.
(神也者妙萬物而爲言者也動萬物者 莫疾乎雷撓萬物者 莫疾乎風燥萬物者 莫.乎火說萬物者 莫說乎澤潤萬物者 莫潤乎水終萬物始萬物者 莫盛乎艮故水火 相逮雷風不相悖山澤通氣然後能變化旣成萬物也).”
천지자연이 변화작용을 통해 만물을 이뤄가는 현상, 즉 만물을 묘(妙)하게 하는 것을 神이라 한 것이다. 신묘 (神妙)하다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유가에서 조상과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모 자식 관계가 대대로 이어지는 것을 신묘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천지자연의 이치를 신묘한 것으로 보고 제사와 경의를 표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즉 자식은 부모의 신 (神)이 아니면 나올 수 없고, 만물은 천지의 神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모두가 천지자연의 지극히 정미롭고도 신묘한 변화작용이라는 이치에 의한 것이다.『주역』은 바로 그러한 천지자연의 이치를 밝혀 놓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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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정성이 곧 신(神)이다 (至誠如神)
이에 자사 (子思)는 『중용』에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鬼神之爲德이 其盛矣乎인저(귀신의 덕됨이 성대한저)”라고 하였다. 이어 『시경』 大雅 억(抑)편의 “神之格思不可度思矧可射思(신지격사 불가탁사 신가역사 : 신이 이르는 것을 가히 헤아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가히 싫어하랴, : 思 어조사 사 度 헤아릴 탁 矧 하물며 신 射 여기서는 싫어할 역)”를 인용하여
“夫微之顯誠之不可揜如此夫(부미지현 성지불가엄 여차부 : 대저 미미한 것이 나타나니 정성을 가히 가리지 못함이 이와 같은저)”라고 하였다. 즉 神은 ‘미미한 것의 드러남 (微顯)’으로,至誠如神(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다)이라고 하였다 .
『논어』 팔일편 12장을 보면 공자는 “제사를 지낼 때 마치 조상이 앞에 계신 것처럼 하였고, 신에게 제사지낼 때에는 신이 마치 앞에 있는 것처럼 하였다 (祭如在祭神如神在)”고 제자들이 기록하였다. 제사를 지냄에 나의 정성이 중요함을 일깨우고 있다.
또한 『중용』16장에서 神은 신묘하여 “視之而弗見聽之而弗聞體物而不可遺(보려 해도 보이지 아니하며,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아니하되 물건에 체화되어서 가히 버리지 못하느니라)”며 神이 마치 옆에 있는 듯 정성을 다하라고 하였다. 종합한다면 한자문화권에서 말하는 神은 천지자연의 조화작용으로 만물을 생장수장 (生長收藏)하는 작용이지, 서구 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