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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분석

고구려의 언어에 대하여 : 1

작성자신으로|작성시간16.04.13|조회수323 목록 댓글 0

 

 

고구려의 언어에 대하여

임 병 준

 

. 머릿글

 

. 고대국어 연구의 선결문제

 

. 고구려말의 음운체계

 

. 차자표기의 구체적 분석

 

. 고구려말의 어휘와 특징

 

. 맺는 글

 

. 머릿글

 

이 논문은 고구려의 언어를 표기한 차자표기 자료를 분석하여 고구려말의 음운, 어휘의 특징에 대해 정리한 논문이다. 이는 곧 고구려시대에 고구려지역에서 쓰인 말에 대한 연구라는 점에서 하나의 공시언어학이다. 이 연구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자로 차자표기 된 고구려말의 자료에 대해 음차자와 훈차자를 가려내어 그 당시의 음과 새김을 과학적으로 귀납·복원하고 그로부터 자료가 나타내는 고구려말 어휘를 밝혀낸다.

 

둘째, 분석된 어휘자료들로부터 고구려말의 어휘와 음운체계의 특징을 논의하고 고구려 말에 대한 전반적인 기술을 시도한다.

 

셋째, 이러한 고구려말 자료들이 고대국어의 단일성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를 고찰하고 중세 및 현대국어에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그 역사적 연계에 대한 가능성을 조명한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연구의 대상은 고구려말을 표기한 문헌자료로서 [삼국사기] 35, 37에 나타난 고구려 지역의 땅이름 자료들을 주된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고대 국어를 연구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자료의 특수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분석이 필요하다. 고대인들은 한자를 가지고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월의 순서를 우리말 순서에 맞추어 적는 방법, 한자를 새김으로 읽는 방법, 그리고 한자의 고유한 의미와 무관하게 중국어에서 차용한 한자의 발음만을 끌어다가 우리말을 적는 방법 등을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이로부터 발생한 고유한 표기체계에는 홀이름씨 표기, 이두, 향찰, 구결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을 통틀어 넓은 의미로 '차자표기'라 부른다. 천소영(19902)에서는 이러한 고대국어의 차자표기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 바 있다.

 

문예문 향찰(鄕札)

 

창작문

 

1. 문장표기 실용문 이두(吏讀)

 

차자표기 번역문 구결(口訣)

 

2. 어휘표기 차명(借名)

 

고구려말에 있어서는 현재 남아있는 자료의 한계를 감안하여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차명'을 가리켜 좁은 의미의 '차자표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 고구려말의 차자표기라 함은 바로 이 '차명'을 가리킨다.

 

[삼국사기] 35, 37의 고구려 관계 지명 자료에는 한 지명에 대하여 원래의 고구려 지명과 경덕왕이 중국식으로 고친 이름, 고려 초 김부식이 살던 시대의 지명, 그리고 같은 지명의 다른 표기 등이 나타나 있어서 각 표기의 연관성이 가지는 대응관계를 분석해 볼 때 비교적 믿음직한 언어 자료를 얻어 낼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水城郡 本 高句麗 買忽郡 景德王 改名今 水州

 

이 자료에서 한자식으로 고친 이름 '水城'과 원래표기 '買忽'과의 관계로부터, 고구려말에서 ''의 발음과 ''의 새김이 대응하며, ''의 발음과 ''의 새김이 대응함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한 가지 자료만으로는 쉽게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표기자료들에서 그와 동일한 대응 예가 발견되는지 샅샅이 찾아야만 좀 더 믿음직한 대응을 세워내게 된다. 이 연구에서 논증의 중심은 바로 이러한 대응의 규칙을 세워내는 것이다. 즉 비록 트기식 문자를 썼지만 일정한 체계에 의하여 당시의 언어를 '기록'한 것이 분명한 만큼, 삼국시대를 문자표기시대로 보고, 이를 바탕으로 [삼국사기]의 고구려 지명들을 분석하여 고구려말의 어휘를 보다 믿음직한 사실적인 언어자료로 복원시키는 것이 분석의 목표이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문헌에 없는 언어를 친근어와의 비교와 내적 회고의 방법에 의해 추정하는 '재구'는 원칙적으로 행하지 않았다. , 이 연구에서 나오는 '재구'라는 용어는 글자 그대로 '다시 얽어내는 것' 즉 한자로 표기된 우리말 자료를 표기 당시 한자음으로 복원시킴으로써 표기하고자 했던 원래의 언어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한다.

 

. 고대국어 연구의 선결문제

 

이 장에서는 고대국어 연구에 있어서 쟁점이 되어 왔던 사항 즉 삼국의 언어가 서로 다른 개별언어였는가 하는 문제와, 비교 연구를 통한 언어의 재구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 차자표기가 한자로 된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 한국한자음의 문제 등을 논의하도록 하겠다.

 

1. 삼국의 언어상황

 

고대국어에 대한 논의의 일각에서는 고대 삼국의 언어가 방언 이상의 차이를 가진 개별 언어였으며, 특히 고구려의 언어는 백제와 신라의 그것과 매우 많은 차이점을 가진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일찍이 이기문(1961, 1968, 1972) 등에서는 고대 삼국의 언어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이들 논문에서는 '고구려어'를 별도로 분리시켜, 지명어휘에서 추출한 언어자료를 고대일본어와 비교함으로써 두 나라 언어의 계통에 관하여 논급하였다. '고구려어'라는 명칭은 이기문(1968), 김완진(1968), 송민(1966) 등에 의하여 기정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논의는 고대국어의 단일성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표하며, 한국어 계통론과 관련하여 '고구려어'는 알타이 제어와 남방한어를 연결시키는 고리 구실을 했고, 그것은 고대 일본어와도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는 논지를 전개한다.

 

그러나 70년대 이후에 이르러, 차자표기의 면밀한 분석과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이러한 견해는 점차 수정되는 추세에 있다. 즉 세 나라의 언어가 단순히 방언적 차이만을 가진 단일어였다는 인식하에 삼국의 지명 자료를 동일선상에 놓고 다루는 연구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김방한(1983)에서는 한반도의 남북간에 계통을 달리하는 근본적인 언어차는 없었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고, 차자표기자료를 면밀하게 분석한 여러 학자들은 삼국의 언어차 뿐만 아니라 남북간 방언차까지도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추세에 있다. 이병선(1982)는 그 대표적인 예로, 한반도의 언어는 고대에도 동일했다는 관점에서 고대사와 관련되는 모든 지명을 망라하여 해독하였다.

 

여기에는 고대국어가 열린음절로 이루어졌다는 전제 아래, 국명 및 지명어휘를 몇 개의 기원어의 범주로 묶어 고찰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김방한(1983)에서 확대되어, 지명자료뿐만 아니라 보다 폭넓은 비교언어학적인 연구방법을 통해 고대 삼국의 언어가 동일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더욱이 근래에 소개된 북한의 김병제(1984), 류렬(1990), 김수경(1989) 등의 여러 논저들에서도 고대국어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태도를 견지한 근래의 연구물로는 이근수(1982), 천소영(1990), 최남희(1996, 1997, 1999)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면 실제 자료를 통해 삼국의 언어를 서로 다른 개별 언어로 볼 수 있는지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우선 이기문(1968)과 박병채(1968)에서 분석된 고구려말 어휘자료들에는 중세국어와 이어진다고 본 어휘가 각각 44%, 68%였다. 이는 오히려 삼국의 언어가 공히 중세국어에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며, 단일어라는 전제가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당시의 언어상황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는 중국 사서들의 기사에서는 삼국의 언어가 방언 이상의 차이를 가지지 않았음을 증언하고 있다. 먼저, 고구려에 대한 중국측 기록은 부여와 그 언어가 같았음을 증언한다.

 

"(고구려는)동이족들이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인 까닭에 언어와 법제가 많이 같다고 한다.“

 

"동이의 옛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해서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더불어 많이 같다.“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많이 같은데, 그 성질과 의복은 다른 데가 있다."

 

이로써 고구려와 부여의 언어가 같았음이 중국인의 눈에서도 확인된 바, 이것은 사실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또한 옥저에 대한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동옥저는)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

 

"그 언어는 고구려와 더불어 대부분 같고 때때로 약간 다르다.“

 

이는 고구려와 옥저 사이의 방언차를 드러내 주는 기사로 해석된다. 역시 고구려와 옥저는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음이 입증된다.

 

한편 예()에 대한 다음의 기록에서도 고구려와 예가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예의) 늙은이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한다. 언어와 법속이 대개 서로 유사하다.“

 

"언어와 법속이 대개 고구려와 같다

 

다음으로 남쪽의 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산다. 성곽과 의복은 다 같은데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사는데. 또한 성곽이 있다.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더불어 같고 언어와 법속이 서로 비슷하다."

 

여기서 '다른 점이 있다''서로 비슷하다'의 상반되는 기록에서 추정되는 사실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두 사서의 기록자가 실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책이 다른 한 책을 베낀 데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후한서의 기록자가 이 지역의 방언차를 목격하고 '다른 데가 있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변진과 진한의 언어차를 증명하는 기사로 볼 수는 없다. 더욱이 신라에 대한 다음의 기록에서, 한반도 남부에 존재한 언어는 단일어였음이 실증된다.

 

"(신라의)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뒤에야 (중국과) 통한다"

 

이는 당시에 중국 사람들이 신라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려면 백제 사람이 통역을 해 주어야 한다는 기사이다. 즉 이 기록은 백제말과 신라말이 단일어였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시대에 백제말과 신라말이 같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백제말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지금에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은데, 다닐 때 두 손을 맞잡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이 다르다.“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다."

 

따라서 고구려말과 백제말이 같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백제말에 대하여 이기문(19723637) 및 김형규(197529)에서는 [주서]의 다음 기록을 들어 백제는 지배층의 언어와 피지배층의 언어가 달랐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백제)왕의 성은 부여씨이고 '어라하'라 부르는데, 백성들은 '건길지'라고 부른다. 중국말로는 다 ''이다."

 

그러나 이 기사 하나만으로 그러한 단정을 내리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왕을 가리키는 호칭이 다르다고 해서 지배층과 백성들의 언어가 달랐다고 한다면, 우리는 조선왕조 때에도 지배층 즉 관료들은 임금을 '주상' 또는 '전하'라고 부른 데 대하여 백성들은 '상감마마' 또는 '임금님', '나랏님' 등으로 불렀으니까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언어가 달랐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언어 상식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사료들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와 부여, 옥저, 예의 언어가 같았고, 한의 언어 즉 백제와 신라의 언어가 같았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언어가 같았으므로 결국 고대 우리 민족의 언어는 단일했다는 확정을 내리게 된다. 이는 중국 측 기록들이 한결 같이 고구려 판도 안에 섞여 살았던 말갈, 읍루 등의 종족들에 대하여 고구려, 부여와 더불어 언어가 '달랐다'고 증언한 데서 더욱 신빙성 있는 기사라 할 수 있다.

 

"그 사람 생김새는 부여와 비슷한데, 언어는 부여, 고구려와 더불어 같지 않다.“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의 동북 천여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 옥저와 인접해 있는데 그 북쪽 끝은 알 수 없다. 토지는 험준한 산이 많고 사람 생김새는 부여와 비슷한데, 언어는 각각 다르다.“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옛날 숙신국이다. 언어는 유독 (고구려와) 다르다.“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말갈'이라고도 한다. 언어가 유독 (고구려와) 다르다."

 

이는 우리 민족과 혈통과 언어를 달리하는 종족이 만주와 한반도 북방에 걸쳐 살았음을 증언하는 기사이다. 이 종족은 퉁구스족의 한 갈래이며, 뒤에 발해의 지배를 받다가 발해의 멸망과 함께 우리 민족의 영향권에서 떨어져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되는데, 훗날 여진족으로 불리다가 금,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조상인 것으로 역사학에서 논의되고 있다. 변진과 진한에 대해 '有異'라 표현한 것과 달리, 이들에 대해 '不同', '各異', '獨異'라 표현한 것은 퉁구스어와 고대 한국어와는 근본적인 언어차가 있었음을 드러내는 기사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 논의한 차자표기 자료에서와, 기존의 연구물에서, 그리고 중국사서들의 기록들에서 삼국의 언어는 단일어에 뿌리를 둔 하나의 언어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대국어의 공간적 범위는 한반도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설정하여야 하며, 고구려말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신라, 백제의 표기자료들을 표기체계나 방언적인 차이만을 염두에 둔 동일 선상에 놓고 연구하여야 한다.

 

2. 차자표기 한자음의 성격

 

먼저 우리나라가 한자를 수입한 기원에 대하여 문헌자료와 고고학 유물자료를 검토한 결과, 우리가 한자를 접하게 된 것은 아무리 늦잡아도 전국시대이며, 이 시기 중국 한자음은 상고음 시기로 구분된다. 따라서 한국한자음의 기원이 된 것은 상고음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고구려에서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그 초기부터 이미 풍부한 서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속에 이르기까지 학문으로 즐길 정도로 한학이 융성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조서를 내려 고사를 줄여 신집 5권으로 만들게 했다. 국초에 처음부터 문자를 사용할 때에 기사(記事) 100권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유기], 이에 이르러 보수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에는) 서적에 [오경], [삼사], [삼국지], [진양추]가 있다.“

 

"고구려의 풍속에……[오경]을 읽을 줄 안다.……

 

"(고구려의) 풍속에 서적을 좋아하여 천한 사람의 집에 이르기까지도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짓고 '경당'이라 부른다. 자제가 혼인하기 전에 밤낮으로 이곳에서 책을 읽고 무술을 익힌다. 그 책에 [오경][사기], [한서], 범엽의 [후한서], [삼국지], 손성의 [진춘추], [옥편], [자통], [자림], 그리고 [문선]이 있어서 더욱 애지중지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볼 때, 고구려의 한자 문화는 이미 고조선 시대에 우리 것으로 소화된 숙련된 문화를 계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말의 차자표기에 사용된 한자음은 상고음을 기층으로 정착된 고구려한자음이며, 이를 복원하는 데는 중국의 상고음 재구 성과물이 기본적인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3. 알타이어족설과 관련된 고대국어의 문제

 

일반에 널리 알려진 이른바 '알타이어족설'에 대하여 우리는 좀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국어학은 물론 기존의 역사학에서조차 이 학설은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래 이것이 마치 '정설'이라도 된 것처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리하여 이 학설을 전제로 알타이 제어(몽골, 퉁구스, 터키어 등)와의 비교에 의해 고대 한국어의 어휘를 추정해 내는 행위가 공공연히 진행되곤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방한(19764)에서는 "여기서 한국어의 알타이어족 귀속을 가정하게 되며 또한 여기에는 그럴만한 근거도 있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연구는 실제로 이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을 가정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마치 하나의 확정된 사실인양 착각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람스테트와 포페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고 경고하였으며, 이기문(19789697)에서도 "그러나 필자는 최근에 와서 상당히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비관론은 결코 아니지만, 이 연구가 어느 정도 확고한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여러 난관을 극복해야 할 것임을 느끼게 된 것이다."고 하여 한국어의 알타이어족설은 가설과 추정의 단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시인하였다.

 

이처럼 지금까지의 한국어 계통론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 볼 때, 고대국어 연구에 있어서 문헌에 없는 언어를 친근어 와의 비교와 내적 회고의 방법에 의해 추정하는 '재구''알타이어족설''정설'로 입증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 실증성을 확보할 수 없음이 자명하다. 이에 따라 글쓴이는 고구려말을 연구함에 있어서 고대국어 자체의 내적 분석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개별 언어의 명확한 분석 없이는 언어의 비교 연구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며, 증명되지 않은 어족설을 근거로 다른 언어들과의 섣부른 비교를 통해 고대국어의 빠진 부분을 기워 내려는 것은 비과학적인 태도라고 보기 때문이다.

 

. 고구려말의 음운체계

 

고구려말을 차자표기한 자료들은 대부분 고구려 국가가 존재하던 시기, 특히 고구려 전성기(광개토태왕비 건립, 5세기 초)로부터 멸망시기(A.D.668)의 사이에 기록된 자료들로 여겨지므로, 이는 전기고대국어에 해당한다. 따라서 고구려말의 상한선과 하한선은 고대국어와 마찬가지로 보되, 그 대표적인 기록시기를 전기고대국어로 편입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의거하여, 고구려말의 차자표기자료는 전기고대국어의 대표적 방언인 것으로 인정한다.

 

1. 음절의 구성

 

전기고대국어의 음운체계에 대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국어가 기본적으로 열린음절로 구성된 언어였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실제로 고대국어를 차자표기한 자료들을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당시 우리말에 받침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글쓴이가 찾아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끝소리 [t] 또는 [r]이 무시되는 경우

 

 忽縣 (一云 首泥忽)

 

三陟郡 本 悉直國悉直郡 (一云 史直)

 

大丘縣 本達句火縣

 

今武縣 本百濟今勿縣

 

蔚珍郡 本 高句麗 于珍也縣

 

諱乙弗(或云憂弗)<삼사17고구려>

 

-2. 끝소리 [t] 또는 [r]의 뒤에 홀소리를 붙여 발음된 경우

 

單密縣 本武冬彌知(一云曷冬彌知)

 

大山郡 本百濟大尸山郡 景德王改名 今泰山郡

 

咸悅縣 本百濟甘勿阿縣

 

屑夫婁城 本 肖利巴利忽

 

述川郡 (一云 省知買)

 

戍城縣 本 高句麗 首 

 

閼英井(一作娥利英井)<유사1혁거세왕>

 

-1. 끝소리 [k], [p]가 무시된 경우

 

寶城郡 本百濟伏忽郡

 

屈旨縣(一云屈直)

 

于烏縣 (一云 郁烏)

 

金海小京 古金官國(一云伽落國 一云伽耶)

 

-2. 끝소리 [k], [p]의 뒤에 홀소리를 붙여 발음한 경우

 

習谿縣 本 高句麗 習比谷縣

 

化寧郡 本答達匕郡(一云沓達)

 

多斯只縣(一云沓只)

 

甘蓋縣 本古莫夫里

 

張保皐(羅紀作弓福)<삼사44열전>

 

-1. 끝소리 [m], [n], [ ]이 무시된 경우

 

述川郡 (一云 省知買)

 

溟珍縣 本買珍伊縣

 

分嵯郡(一云夫沙)

 

昆湄縣 本百濟古彌縣

 

-2. 끝소리 [m], [n], [ ]의 뒤에 홀소리를 붙여 발음된 경우

 

溟珍縣 本買珍伊縣

 

甘蓋縣 本古莫夫里

 

蔚珍郡 本高句麗 于珍也縣

 

咸悅縣 本百濟甘勿阿縣

 

그 밖에 우리말 표기의 경우

 

文峴縣 (一云 斤尸波兮)

 

龍山縣 本古麻山功木達 (一云 熊閃山)古模耶羅城<태왕비>고마(熊津)<15>

 

이들의 예에서 보듯이 고대국어의 음절 구조는 V, CV의 짜임새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으며, 선학들의 여러 논의를 종합해 볼 때, 시기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열린음절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고구려말의 음절 짜임새는 끝소리에 닫음소리가 올 수 없는 열린음절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2. 닿소리 체계

 

고구려말의 닿소리체계에는 거센소리 및 된소리가 존재하지 않았고, 목구멍 갈이소리/(h)/, 붙갈이소리/( )/도 음소로 존재하지 않았다. 첫째로, /h/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다음을 들 수 있다.

 

聖德之兄孝照 名理恭 一作洪<유사13탑상>

 

日谿縣 本熱兮縣(或云泥兮)<삼사34신라>

 

父骨正(一作忽爭)<삼사 2신라본기>

 

解禮縣 本皆利伊<백제지명>

 

伊伐飡(或云伊罰干 或云于伐飡 或云角干 或云角粲 或云舒發翰 或云舒弗邯)<삼사38직관>位號曰居瑟邯(或作居西干)<유사1기이>酒多後云角干

 

二曰大舍(或云韓舍)<삼사38직관>

 

 (一作漢祇)<삼사39김양>

 

漢州 本高句麗漢山郡 今廣州<삼사35고구려>大山韓城<태왕비>

 

獐項口縣(一云古斯也忽次)泉井口縣(一云於乙買串)穴口郡(一云甲比古次)楊口郡(一云要隱忽次) <삼사37고구려>

 

에서 ', , 谿, , , , , '의 첫소리가 통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글자들의 상고음 첫소리는 각각 'k-, -, k -, -, k-, x-, -/k-, k-'였다. 이는 전기고대국어에서 [k], [k ], [x], [ ]가 변별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자료로 볼 수 있다.

 

에서는 ', , , , '', , '의 뜻을 가진 고대국어의 표기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계림유사]'大曰黑根', '祖曰漢 '<조선관역어>'星多 別二哈大', '大風  把論', '大雨  ', '大河  ' 및 중세국어 '-', '-'에 이어지는 말임이 확실하다. 여기서도 ', , , , '의 상고음 첫소리는 각각 'k-, -, -, -, x-'로서 이들 글자들이 통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에서는 '', ''을 뜻하는 고구려말이 '忽次''古次'로 표기되고 있어 [k][x]가 첫소리에서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첫째는 고대국어에서 /h/이 존재하지 않아서 상고음의 [k], [x]가 하나로 합류되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과, 둘째 고대국어의 //은 지금말 처럼 목구멍 갈이소리 [h]가 아니라, 여린입천장 갈이소리 [x]여서 /k/와는 터짐과 갈이의 자질로 대립하는 짝이었고 이 음소들은 홀소리 사이에서 대립을 잃고 [- -]로 합류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전기고대국어의 /h/의 존재는 상당히 불확실하다는 해석이 나오게 된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우리말 닿소리 ''은 전기고대국어 /k/로부터 발달되었고, 고대국어를 전후기로 나누어 생각한다면 그 전반기에는 /h/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올 수 있다. 고구려 말을 표기한 이 자료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대국어 전기에 해당하므로 /h/을 닿소리체계 안에 넣을 수 없다.

 

둘째로, / /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烏兒縣 本百濟烏次縣<백제>

 

次次雄 或作慈充<유사3흥법>

 

十四曰吉士(或云稽知 或云吉次)<삼사38잡지>

 

火王郡 本比自火郡(一云比斯伐)<신라>

 

異次頓(或云處道)<삼사4신라>

 

母城郡(一云也次忽)<고구려>

 

買召忽縣(一云彌鄒忽)<고구려>

 

官狀(一云官昌)<삼사5신라>

 

成忠(或云淨忠)<삼사28백제>

 

欽春(或云欽純)<삼사47열전>

 

欽春(春或作純)<삼사5신라>

 

 陳純(一作春)<삼사6신라>

 

選干(一作撰干)<삼사40잡지>

 

에서는 ', , , , , '가 통용되고 있어서 이들 글자들이 같은 첫소리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에서는 '異次'''의 대응에서 ''의 새김 '이시-', '-'을 찾아낼 수 있어서 ''의 첫소리가 /s/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고구려말 자료에서의 '''也次'의 대응에서 ''의 고구려말에 중세국어 ' '와 이어지는 낱말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에서 변한 것임은 자명하다. 더욱이 의 자료에서도 첫소리에 / //s/이 변별되어 쓰이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료들 중에는 삼국 말엽에 생존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는 삼국 말엽까지 고대국어 닿소리에 / /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따라 고구려말에는 붙갈이소리 / /, 목구멍소리 /h/, / /이 음소로서 존재하지 않았으며, 흐름소리 /r/, /l/의 변별도 되지 않아서 대표음소 /r/로 통합된다. 따라서 고구려말의 닿소리는 'k, t, p, s, n, m, , r'8 닿소리 체계이다.

 

3. 홀소리 체계

 

이기문(197271)에서는 전기중세국어의 홀소리 체계를 토대로 고대국어의 홀소리 체계에 거슬러 올라가는 과장을 거쳐 재구하고, 다른 편으로는 고대의 홀이름씨의 표기체계와 한국한자음을 검토하여, 그 합치점을 찾는 방법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일곱 홀소리 체계를 수립하였다.

 

i() () u()

 

() ()

 

() a()

 

이에 따르면 고대국어도 전기중세국어와 같이 일곱 홀소리 체계로 생각하였다. '' / /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는 고대에서 입술 둥근 소리일 것으로 보아 / /로 보았다. 전기중세국어의 ''/ /에 대응하는 홀소리는 중고음 [ ]에 대당된 것으로 보아 //, ''/u/''/ /는 각각 '', '' 등으로 표기되었으며, 앞의 것은 중고음의 [u], 뒤의 것은 [ u]에 주로 대당된다. 중세국어 ''/e/에 대당되는 홀소리는 중고음의 [ ]에 대당한다.

 

한편, 박병채(1971323)의 고대국어 홀소리 체계는 운류(韻類)에 대한 한국한자음의 내부구조 분석에서 얻어진 운섭(韻攝)별 음운대응표를 제시하고, 그 음운대치법을 중심으로 귀납한 결과 다음과 같은 여덟 홀소리 체계를 재구하였다.

 

입술둥근홀소리계= // , //, // , /ㅣα/i

 

입술안둥근홀소리계= //a, // , //u , /ㅣβ/

 

고대국어의 ''/i// /의 둘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 이와 같은 여덟 홀소리 체계는 '주요모음 류운 음운 대치현상' 중 지섭(止攝)' i+e'의 반사를 / /로 추정한 때문이다. 또한 ''와 같은 등운도에 속한 글자의 한국한자음이 '/'의 둘로 반영되는 점으로 보아 ''를 두 가지 홀소리로 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고대국어의 임자씨 파생어 중 '풀이씨+'형의 다른 용례에서는 '-'로만 나타나는 점과, 지섭의 음운 대치도 '- i/-i+ /e>'로 반사되기 때문에 실질적인 중심홀소리를 /-i/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들어, 최남희(19965557, 1999, 1999)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곱 홀소리 체계를 수립하였다.

 

i() () u()

 

() ()

 

() a()

 

글쓴이는 이 일곱 홀소리 체계를 우선 수용하고, 고구려말 표기자료의 분석으로부터 도출되는 홀소리 체계상의 특징을 뒤에 다시 종합·귀납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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