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백암의 격물치지설 비교 연구 -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분리문제를 중심으로
Ⅰ. 서 론
조선 후기 이래 가장 큰 문화충격은 서양문명의 전래였다고 생각한다. 서학을 비롯한 서양문명은 조선 후기 이래 서세동점의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전반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서학은 크게 종교와 과학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종교적 문제는 여러 가지로 마찰이 있었지만, 과학은 새로운 세계관을형성해 나가는 데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유학적 입장에서 보면 서학을 포함한 서구 근대문명은 전혀 다른 사유구조였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할 것인가는 조선후기 이래로 사상적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이는 동시에 당시 지배이념이었던 주자학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맥을 같이 하였다. 즉 주자학에 대한 비판은 사회 내부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외부적인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본다.
매킨타이어가 지적했듯이,1) 전혀 다른 사유체계를 이해하는 일은 어려운 작업이다. 더욱이 그것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면한 현실문제 해결을 위해 재구성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특히 근대과학의 특징인 객관세계에 대한 가치중립적 인식은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을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주자학적 인식체계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없지 않았다. 박은식은 견문지와 본연지라는 개념을 통하여 근대 서구과학의 효용성을 수용하면서도 과학지식에 대한 도덕적 성찰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체계가 가능했던 사상적 기저는 실학사상이라고 보여진다. 박은식은 정약용과 직접적인 사승관계는 없지만,2) 자연 인식에 있어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다. 물론 이를 근거로 실학이 개화 및 자강운동으로 바로 연결되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사상적인 영향이 없었다고 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3) 조선 후기 이래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여전히 유학적 사유 안에서 서양 문명을 이해하고 수용하고자 했던 흐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본 논문에서는 그 흐름의 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 다산과 백암의 격물치지설을 중심으로 자연 인식에 있어 사실판단과 가치판단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였으며, 그것이 서구 자연과학 수용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다산의 격물치지설과 자연인식
1. 다산 격물치지설에서 ‘사물’ 인식
다산은 주자학이 이념적으로 더욱 강화된 시대에 살았다. 그는 주자학적 토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洙泗學을 근간으로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주자학적 세계관과 다른 사상체계를 이루었다. 다산은 大學에 있어서도 대학고본을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격치설도 대학고본을 바탕으로 하여 주자학과는 다른 해석을 통하여 나름의 독특한 사상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는 착간과 궐문이 있다고 한 주자의 주장을 부정하고, “명나라 나여방이 ‘대학은 단지 일장으로 된 글이다.’라고 한 말을 통유의 쾌론”이라고 하였다.4) 다산은 대학 을 제왕의 適者와 國子가 학습할 수기치인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였다.5) 대학 을 治者의 修身을 위한 책으로 보았으니, 격물치지설 또한 주자와 다를 수밖에 없다. 다산은 우선 ‘격치6조’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주자가 8조목으로 본 것을 옳지 않다고 여겼다.
글 자체는 비록 8번 전환하고 있지만 일은 오직 6조 뿐이니 격물치지가 이 8의 수에 끼는 것은 부당하다. 이를 ‘격치6조’라고 이름해야 名實이 서로 어울릴 것이다.6)
다산이 8조목을 격치6조로 본다면 격물치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다산은 ‘物有本末 事有始終’을 토대로 하여 격물치지를 해석하였다. 다산은 物有本末 事有始終에서 물이란 자립하여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하며, 물의 구체적인 대상은 意心身家國天下라고 보았다. 그리고 事란 행위하는 것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誠正修齊治平을 가리킨다.7) 이어서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6條를 物의 本末과 事의 終始로 분석하는 동시에 致知의 先後로써 분석하고 있다.
물이 심 신 가 국임이 확실히 설정되면 이어서 三蒼 爾雅 說文의 모든 훈고를 가지고 我와 物에 부합한 것을 취하여 격물을 해석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8)
물이 심 신 가 국 천하를 의미한다면 격물은 무엇인가? 다산은 格을 量度으로 정의하여 격물이란 ‘물에 본말이 있음을 헤아리고 재는 것9)’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치지는 물의 본말과 사의 시종에 따라 선후를 밝히는 공부이니, 먼저하고 뒤에 할 바를 지극히 아는 것이다.
의 심 신 가 국 천하에는 분명히 그 본말을 알 수 있으니 곧 물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성 정 수 제 치 평에는 분명히 그 선후하는 바를 인정할 수 있으니 곧 지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 일이 시작되는 까닭에 지가 이른 후에야 의가 성하게 된다고 할 것이다.10)
그는 일의 전체적인 本末 始終 先後를 헤아리는 과정을 격물치지로 이해하고 있다. 格物致知에서 앎의 대상은 일의 本末과 선후로서,11) 객관적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일과는 무관하다. 이런 측면에서 다산은 주자가 격물의 격을 至라고 해석한 것은 정당하지 못하며 오히려 양명이 격물을 正物로 해석한 것이 옳다고 보았다.12) 따라서 격물 치지는 성의 정심 이하를 실천하는 데 앞서 별도로 사물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두 단계가 아니다. 따라서 그는 성의 이전에 격물치지와 같은 또 다른 공부가 필요 없다고 하였으니, 格物致知를 誠意 전 단계로 보아 이를 두 층으로 본 주자학과는 다르다. 다산은 주자가 성의 앞에 격물치지라는 두 층의 공부를 덧붙여 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성의가 원래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생하고도 즉각적인 실천성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고 보았으며,13) 격치장의 보망이 불필요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수신을 함에 있어 성의를 착수처로 삼아 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성의 이전에 어찌 두 층의 공부(격물치지)가 있겠는가? 오직 천하만사는 깊게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깊게 생각하고 자세하게 살피는 것이 공부를 시작하는 방법이다.14)
다산이 성의 이전에 두 층의 공부가 따로 있지 않다고 한 것은 그만큼 격물치지를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수기치인을 선후의 순서에 따라 실천해 가는 공부 방법 즉 실천과정에서 생각하고 헤아리는 공부로서 실천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15) 그러므로 다산은 대학에서 성의와 정심을 가장 중요한 조목이라고 하였다.
옛 성현들의 치심 선성은 항상 행사에 있었으며 행사는 인륜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진실한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이 성의 정심으로 孝를 이룬 것이며, 진실한 마음으로 어른을 섬기는 것이 성의 정심으로 弟를 이룬 것이며, 진실한 마음으로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이 성의 정심으로 慈를 이룬 것이다. 성의 정심으로 제가하고 성의 정심으로 치국하고 성의정심으로 평천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의 정심은 항상 행사에 있었던 것이며 성의 정심은 항상 인륜에 붙어 있으니 한갓 뜻만 가지고서는 성할 수 없으며 한갓 마음만 가지고서는 정할 수 있는 법이 없다. 행사를 버리고 인륜을 떠나서 마음의 지어지선을 구하는 것은 성인의 본래법이 아니다.16)
다산은 이와 같이 성의 정심으로 천하 만사의 시종 본말을 헤아려 실천하는 것을 중요시하면서, 성의 정심과 행사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인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즉 격물치지를 중심으로 대학을 이해한 주자와 달리 다산은 성의 정심을 중심으로 대학을 이해한 것이 특징이다. 그가 주자학을 비판한 것은 당시 성리학자들이 덕을 형이상학적 실체로 가두어 둠으로써 그 실천력을 급격히 상실하고 종국적으로는 사회적인 통합력마저 잃어버린 것에 기인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다산은 명덕은 효제자로 실행을 통해 구현되는 덕이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일용지간의 실천 속에서 성취해 나가는 덕성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인의예지는 行事로 얻어진 이름이지 마음에 있는 이치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인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상대하여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마음속에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행하지 않으면 덕이 있을 수 없다17)는 주장이다. 이는 조선 후기 주자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상생활의 장인 현실을 보다 중시하고, 인간과 인간인간과 사물의 관계성 및 실천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다산의 ‘자연만물’에 관한 인식; 推萬理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다산은 격물치지를 주자에 비해 윤리 실천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성의 위에 다시 격물치지의 두 층차를 두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개개 사물에 대한 이치를 궁구하는 즉물궁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천하의 物은 대단히 많고 매우 넓으므로 교묘히 歷探하여도 그 핵심을 窮究할 수 없고 博物하여도 그 이치를 통할 수 없다. 비록 堯舜과 같은 지성의 소유자에 彭祖와 같은 수명을 주어도 그 所以然을 모두 알 수 없다. 이 物의 格함과 이 知의 이름(至)을 기다려 그 이후에 비로소 誠意하고, 비로소 修身하려 하면 또한 너무 늦다18)
주자학에서 理는 所以然之故인 物理와 所當然之則인 道理의 두 측면을 모두 갖는다. 道理와 物理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이는 가치판단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구축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卽物窮理의 개념이 도출된다. 그런데 다산은 만약 셀 수 없이 많은 물에 대해 낱낱이 그 이치를 탐구한 이후에 비로소 앎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窮理는 반드시 무한한 理의 심연에 빠져 전체적인 파악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격물치지는 평생토록 공부한다 하더라도 부족하여 실행할 수 없다고 보았다. 다산의 격물치지설은 주자학의 ‘物理卽道理’ 논리를 극복하고 있으며, 物理와 道理를 일치시키려 하였던 주자학과는 달리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여 인식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다산이 격물치지설에서 객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卽物窮理的 측면을 탈각시키고 윤리 실천적 측면을 보다 강화시켰다면, 이른바 객관사물세계에 대한 인식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그는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자연과학적 인식을 격물치지 대신 窮理推萬理라고 불렀다. 다산은 도덕국가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 못지않게 물질적 풍요를 제고할 수 있는 자연에 대한 이해 역시 중요시하였다. 다산은 물질적 자연을 초자연적 관념의 원리로 인식하기를 거부하고 감각과 경험을 통한 직접 관찰로 인식하고자 하였다. 사실과 가치의 분리는 근대학문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 실학사상은 한국사상사에서 이러한 전환을 최초로 시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19)
다산이 주자의 性卽理 개념을 부정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즉리 개념을 부정한 것은 사물의 형이상학적 보편 동일성을 부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경험적 세계의 자연만물은 애초에 사물들이 부여받은 리가 다르기 때문에20) 그 성도 다르다는 것이다.21) 따라서 자연만물에게 동일성으로서의 본연지성은 사라지고, 차별성으로서의 본연지성만 남게 된다. 그에게 있어 추만리한다는 것은 객관사물의 드러난 자취를 관찰하여 대상이 지닌 특수성 즉 차이를 찾아내는 활동이다. 차이성의 탐구에서 개별사물에 대한 경험적 탐구는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경험적 토대를 상실한 사변은 공허한 것에 불과하므로, 사물 인식은 철저하게 경험적 관찰을 토대로 해야 한다. 그에게 있어 실재하는 것은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구체적인 물질이며, 물질의 특성은 형체가 있고 변화한다는 점에 있다. 형체와 변화가 있는 사물이야말로 차별성 그 자체이며, 차별적인 개별사물에 나가 그것들의 특성을 경험적체험적으로 인식 해야 한다. 체험과 실험을 중시하는 학문 태도는 오행에 대한 비판과 지구설 수용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다산은 오행을 만물생성의 원질이 아니라 구체적 물질로 이해하였으며, 기존의 천원지방설을 버리고 지구설을 수용하였다. 이것은 실재하는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관찰과 실측을 중요시한 결과였다.
경험적 탐구에 있어 감각기관은 사물과 사람이 만나는 통로이니, 감각기관을 통해 마음이 사물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과 달리 지각을 통한 단편적 기계적 인식 이외에 적극적 통합적 인식 능력인 영명성을 지녔다고 보았다.22) 만물의 이치를 추론한다고 한 ‘推理’ 혹은 ‘推萬理’는 이러한 경험적 명제를 이용한 지식의 확장이다. 그는 확실히 증명될 수 있는 경험지식을 전제로 하여 제2, 제3의 지식을 추론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논리는 만물의 동일성(理一)에 근거하여 개별사물과 현상을 해석하는 주자학과는 다르다.23) 즉 다산은 자연 이치( 物理-사실판단의 영역)와 인간의 도덕적 이치(道理-가치판단의 영역)를 일치시켰던 주자학과는 달리 인간과 자연사실과 당위를 분리하였다.24) 따라서 다산은 객관적 사물은 인간이 향유하고 이용하는 대상으로서, 향유하고 이용하는 사물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가치판단과 무관한 물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25)
다산은 이러한 객관사물에 대한 탐구를 통하여 실제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용적인 기술과 기계를 개발하고자 하였다. 성호는 서양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모든 기계와 수학의 법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더 정교하다고 하여, 과학기술이 후대로 내려올수록 발달한다는 보았다.
이것은 옛 성인에 의해 진리가 완전하게 구현되었다는 믿음을 묵수하지 않고 새로운 기술과 지식의 진보를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북학파와 다산에서 뚜렷하게 계승되고 심화되었다. 다산도 기예가 많은 사람과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진보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중국의 새로운 방법과 교묘한 제도가 날로 진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옛날에 배워온 방법에 안주하여 수 백년 동안 다시 배우지 않는 나태함에 빠져있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그는 성현이 이미 밝혀 실천이 요구되는 효제의 도리와 후세로 가면서 진보하는 이용후생의 기예를 다음과 같이 대비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효제의 도리는 천성에 근거하고 성현의 글에 밝혀져 있으니, 진실로 확층하고 닦아서 밝히면 예의로 풍속을 이룰 것이니, 이는 바깥의 것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후세 사람에 의지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용후생에 필요한 百工과 技藝의 능력은 후세에 나오는 제도에서 찾지 않으면, 어리석고 고루함을 깨뜨리고 이익과 혜택을 일으킬 수 없다.26)
이것은 도덕성을 실천하는 수양공부가 기예를 배우고 계발해 가는 과학기술 공부와는 방법적 차이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며, 이용후생의 과제를 위해서는 밖으로부터 배워야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27) 그리고 다산은 서학도 선진 기술 도입을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과학적 인식은 서양과학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28) 더 나아가 인간과 짐승의 차이를 기예의 유무에서 찾고 있다. 그는 인간은 짐승과 달리 발톱이나 뿔은 없지만 知慮와 巧思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예를 익힐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의 지려나 교사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 인구가 많아질수록 진보 발전하였다고 보았다.29)
이러한 경향은 최한기에 가면 더욱 두드러진다. 최한기는 ‘自然’을 인간의 의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자연은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며 인간과 무관하게 운동 변화한다. 때문에 자연은 도덕성을 본질로 하지 않는다. 최한기는 자연의 이치라는 뜻으로 ‘物理’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에는 道學的인 의미의 理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주자학적 사유의 특징인 자연과 인간의 성에 있어서의 理의 連續性은 이미 정약용의 단계에서 분해되고 있었지만, 최한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와 같은 분해를 기초로 하여 인간을 인식의 주체로서 정립하였다.30)
이와 같이 다산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들은 전통적인 자연 인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연을 도덕과 분리하여 객관적 대상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자연 인식은 서구의 과학기술을 비롯하여 사회진화론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내적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은식은 실학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정약용의 제자인 申耆永과 丁觀燮을 찾아가 정약용의 저술을 접하였다고 한다.31) 정약용의 문인들과의 접촉은 정약용의 학문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사상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하며, 그의 사상적 변동에 실학이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박은식이 실학사상을 긍정적으로 본 것은 당시 실학사상에 대한 긍정적 관심과 실학사상가들의 저술을 많이 간행했던 시대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32)
옛날 정조 때 성호와 다산 및 연암 등 여러 사람이 학계에서 혁신사상을 가지고 이상적인 空談을 버리고 정치와 경제의 實用을 연구하며 西法을 참고하여 그 장점을 취하고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그 뜻을 얻어 널리 펴고자 하였다. 곧 우리나라 維新이 동아시아에서는 일찍이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33)
이와 같이 박은식은 실학사상이 實用을 연구하고 西法의 장점을 취하였다고 하면서, 유교가 근대사회에 맞게 維新할 수 있는 모범을 實學에서 찾고 있다. 그는 서양 신학문 핵심을 이용후생과 경제문제로 이해하고 신학문을 수용하여 自强自立의 기초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용후생의 방편인 서양 신학문을 수용하기 위한 철학적 기초는 역시 객관적 자연 이해라고 하겠다. 서구 근대 자연과학이 과학기술 발전의 기초라고 인식한 박은식은 과학적 사유인 ‘사실과 가치의 분리’를 보다 체계화하였다.
Ⅲ. 백암의 격물치지설과 ‘物質學’
1. 격물치지설에 대한 과학적 이해
格物致知說에 국한시켜 보면 주자의 학설이 객관 사물의 이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서구 근대과학사상과 더 유사한 측면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은식은 서구 근대과학사상을 수용하면서 어떠한 이유에서 양명학을 사상적 근저로 삼았을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그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근대물리학을 ‘격치학’ 또는 ‘격물치지학’이라고 불렀다.34) 易言35)의 서양학을 수용하자는 논의 가운데서도 격치지학을 가르쳐야한다고 하면서 객관사물이 어떻게 변화하고 어떻게 생겨나는지 등등 各物을 격한다는 표현이 있다.36) 그리고 1907년에 간행된 簡明物理 敎科書 서문에서는 우리도 지연의 이치와 사물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격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저 물리란 무엇인가? 무릇 지구상의 물질 형기 성광 화전은 그 작용이 무궁하고 변화가 일정치 않기 때문에 그 이치를 탐구하고 그 묘함을 추론하는 것이 어찌 물리학이 아니겠는가? (중략) 저 서양 사람들은 일찍이 스스로 그 이치를 강구하여 발명했던 까닭에 그 운용에 참여하고 그 실제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37)
객관세계의 원리를 탐구하고 추론하는 학문을 ‘물리’ 내지 ‘격치’로서 번역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사물에 대한 인식을 격물치지라고 부르는 것만 보면 주자학의 격치설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주자의 격물치지가 꼭 서구 근대 자연과학적 사유와 유사하다고 볼 수는 없다. 객관화된 사물에 대한 인식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분리하지 않는 주자학의 格物致知的인 인식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주자학에서 理는 복잡한 사물이나 현상을 간단하게 설명하거나 분석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법칙이나 원칙 같은 것은 아니며, 더욱이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여 이해하지도 않고 자연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리해 주는 경계가 없다.38) 반면 서구 근대 자연과학은 인간 주체와 분리된 객관적대상적 사물을 대상으로 하며, 근본적으로 도덕성이 배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道理와의 연관 속에서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주자학의 物理 개념과는 별개이다. 주자학의 物理 개념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당위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격물치지’라는 용어는 근대 공간에서 재해석되어 사용되지만, 이는 곧 자연에 대한 탐구 내지는 인식의 틀로서 종래의 주자학적 사유틀이 무너지고 객관적 사물 인식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박은식도 당시대를 과학의 실용을 요구하는 시대라고 파악하고, 당시대의 學問은 各種科學이 곧 格物窮理의 공부라고 하면서,39) 자연에 대한 객관적 탐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물에는 기선이 있고 육지에는 기차가 있으며, 전기를 밝히고 전신을 가설하여 만리의 먼 거리가 지척과 같이 가까워진 것은 모두 格致學의 功效이다”40)고 하여 格物致知를 자연에 대한 탐구와 그에 기초한 과학기술의 발달로 보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格物窮理해야 한다고 하였다.41)
둘째는 근대에 대부분의 유림들은 주자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려는 입장에서 현실문제와 서양을 인식하였다. 척사위정파와 같이 서양을 禽獸로 여기거나 혹은 동도서기론자들과 같이 서양의 기술문명을 수용하되 동도는 우월하다는 입장은 서양의 문화 전반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수용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근대적 지평에서 보면 도덕성의 物的 基盤에 대한 이해 부족과, 사회현실과 괴리된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불변적인 도덕성을 강조한 것은 일정 부분 생명력을 상실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주자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사회의 붕괴 자체만으로도 유학의 ‘보편 도덕성’이 지도력을 상실해가고 있던 상황에서, 주자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면서 서구 근대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학적 기반을 벗어나 맹목적으로 서구자연과학을 수용할 수 없었던 박은식은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양명학에 대한 근대적 해석을 통해 유학을 근대에 맞게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박은식의 격물치지에 대한 이해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분리를 전제로 한 서구 근대 과학 수용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박은식은 주자의 대학에 관한 문제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서 양명의 견해를 적극 수용하였다.
나는 주자의 大學에 의심스러운 점이 세 가지 있다. 첫째, 中庸과 大學이 모두 禮記』중에 전하는데, 어찌하여 中庸은 일체 착간이 없는데 大學의 착간은 이처럼 많은가? 둘째, 大學의 致知는 誠意의 근본이 되는데, 補亡章에서는 窮格衆物을 致知의 공부를 삼으니 또한 절실하지 않은 것 같다. 셋째, 物有本末 일절은 원래 해석할 수 없는데 聽訟章으로 本末을 해석 하는 것 또한 견강부회인 것 같다.42)
박은식은 新本에 의심할만한 것이 있다면 차라리 大學古本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양명과 같이 誠意를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자의 격물치지설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양명의 격물치지가 본심과 물리를 아우르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선생의 학이 本心之知를 제출하였기 때문에 世俗儒가 禪과 가깝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禪은 오로지 本心을 구하고 物理를 버리지만, 선생은 本心과 物理를 합하여 하나로 삼은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43)
박은식은 양명이 선과 달리 결코 物理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주자의 格物致知가 物에 얽매였던 점을 바로 잡았다고 보았다.44)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당시 격물치지학은 자연과학을 지칭하였으며, 그것은 객관사물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었다. 그런데 과학적 자연 인식에서는 서양이 유학보다 훨씬 앞선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것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가 급선무였다. 따라서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주자학의 격물치지 즉 중물지리를 궁구하는 것은 이미 서양근대과학으로 대체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박은식이 왜 양명의 격물치지가 물리와 본심을 아우르는 것으로, 물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강조한 것일까? 양명에게서 物은 의념의 所在로서, 이미 인간 의식이 작용하여 의식의 영역 안에 들어온 존재이다.45) 양명의 物은 인간 의식과 무관하게 외재하는 지식이 될 수 없다. 양명학은 객관사물 세계에 대한 사실판단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사실판단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가치판단과 연관성 속에서만 그 본래적 의미를 드러낸다는 측면을 부각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의념이 간 바의 所在로서의 물’의 의미이며, ‘내 마음의 양지를 각각의 사물에서 실현한다’는 격물치지의 본의이다. 인식주체는 의념이 간 바의 자리에서 그에 적합하게 응하기 때문에 (隨感隨應), 인간이 마주한 대상에 따라 양지의 실질내용이 달라진다. 따라서 실제적 경험세계인 대상물에 대한 경험적 실증적 측면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陽明學에서 ‘心外無物’은 객관 대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 사물 세계이든 인사이든 인식 주체를 떠나 독자적인 범주를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박은식은 양명의 이런 견해를 활용하여 과학지식과 인간 내지는 사회와의 관계성에 주목하고 있다. 즉 도덕과 분리된 객관 사물의 탐구를 인정하지만, 사물과 인간 주체와의 관계성을 문제삼으면 과학지식의 도덕성을 되물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바로 虛靈한 本覺인 良知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객관적 자연을 탐구하고 활용하는 것은 견문지의 영역으로, 견문지가 확장되어야만 生利競爭에서 이기기 위한 부국강병과 자본주의의 발달을 도모할 수 있다. 동시에 자연과 인간의 관계성에 주목하게 되면 과학지식의 도덕성과 競爭의 公正性을 묻고 文明新化의 구체적 내용을 문제삼는 것은 본연지의 영역 또한 가능하다. 견문지식과 기계를 이용하여 자본주의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물질문명을 추구한다면 일제의 힘을 빌어서라도 문명개화를 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도 있다. 박은식도 여느 자강론자들처럼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여 文明新化가 시대적 요구임을 인정하지만, 文明新化가 국권회복과 민족 발전의 수단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물질문명의 발달 못지 않게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과학지식과 인간사회와의 관계성에 주목하여 ‘生利’와 ‘道德’ 개념으로써 자본주의의 발달과 유교의 근대적 활용이라는 당시대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양명학은 보편적 리와 전통적 권위에 묶이지 않고 현실에 대한 주체적 판단과 그 판단을 실천할 수 있는 역동성을 강조하였다. 양명학에서는 객관적 定理보다는 상황에 따라 개체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중시한다. 박은식은 이러한 양명학적 특징을 근대 실정에 맞게 재구성하고 있다. 그는 기존 체제와 이념 및 사유에 대한 반성과 대안을 양명학을 통하여 찾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객관적 사실판단을 인정하면서도, 다시금 그것이 궁극적으로 인간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를 ‘양지’개념을 통해 재구축하였다.
2. 견문지의 영역 : ‘物質學’
박은식은 학문의 영역을 크게 철학(정신문명)과 과학(물질문명)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다른 표현으로 智育과 德育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46) 즉 그는 자연과학은 물질문명즉물궁리견문지지육을 가리키며, 철학 내지 정신문명은 심리학본연지덕육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이분법적 이해는 문제가 있지만 이러한 구분을 통해서 그는 서양 근대과학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유학의 역할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는 당시 이미 서양 근대과학이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것을 적극 수용할 필요가 있었던 역사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박은식은 당시는 문명경쟁 시대이며, 문명경쟁의 근간은 물산경쟁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문명이란 지적물질적 진보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연과는 대비적 개념이다. 즉 자연이란 개념은 물질을 의미하여 ‘인공을 가한 것’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으며, 더불어 nature와 culture의 구분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物産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物産이란 우리 생활의 原素이다. 그 나라의 物産이 풍요하면 그 국민의 생활이 풍족할 것이다. 생활이 풍족하면 종족이 번성하는 것은 또한 한결같은 원리이니, 물산은 곧 우리 인간의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다. 물산을 풍족하게 할 방법은 물품의 제조를 급속히 개량하여 옛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 첫째 法門이다.47)
이러한 物産으로 生利를 발달하게 하는 것이 富厚曲盛한 나라를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48)
생활의 원소인 物産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물품을 제조하고 개량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물품을 제조하고 개량하기 위해서는 물질49)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물질의 이치를 탐구하는 ‘물질학’은 산업 발달을 가능하게 하였던 근대 자연과학을 의미한다. 물질학은 객관 사물에 내재한 理를 연구하여 지식을 開廣하는 과학이다. 이를 박은식은 ‘見聞知’라고 보았다.
見聞의 知는 外面的 事物의 原理를 연구하여 지식을 開廣하는 것이니, 멀리 바깥 사물에서 앎을 얻는 것(遠取諸物)이다.50)
見聞知는 객관사물의 원리를 연구하여 지식을 확충하는 것이므로 사물 자체의 도덕성을 묻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확충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사회생활의 진보를 가져온다. 물질학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知力의 발달이 필요하며, 인간의 지력은 객관적 자연을 대상화하고 탐구하는 일을 담당한다. 박은식이 말한 ‘물질학’ 개념은 엄밀한 의미에서 19세기 자연과학이라기보다는 서구의 ‘과학기술’의 의미가 강하다.51) 물질에 대한 탐구는 도덕세계의 실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연 속에 존재하는 사실적 연관을 파악하여 그 결과를 생활에 이용함으로써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존재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를 일치시켜 강한 도덕실천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사실적 인식을 통해 구체적인 실생활에 쓰이는 도구를 생산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물질 연구란 ‘人工(인간의 노동생산성)을 수백 배로 증가시키는 것’52)이라고 정의하는데, 이는 자연(물질)을 경쟁과 진화의 원동력으로 도구화한 서구 근대 자연과학의 관점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자연은 조작할 수 있는 객체로서 경험세계 속에 실재하며, 자연법칙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인식된다는 견해를 내포하고 있다. 물질에 대한 탐구는 곧 과학기술의 혁신과 새로운 기계의 개발로 이어져, 경제 발전과 국력 증강에 기여한다고 생각했다. 물질을 이용한 제조업의 발달이 부국강병의 제일 요소가 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인정한다.53)
박은식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인 영국을 예로 들어 ‘物質學’의 중요성과 효용을 논증하면서, 물질학의 효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英國은 유럽 여러 나라 가운데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文明의 發達과 國力의 膨脹이 뭇 나라보다 앞서 수십 년도 못 되어 植民地 開拓이 수 만 리이며 국민이 수 천 만으로 증식되었다. 이것은 國民 學術界의 物質文明이 다른 나라보다 앞서서 實業의 利權이 非常하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중략) 영국인이 이러한 물질문명으로 국력의 천 백 배를 증가시키고 세계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문명을 발전시켰으니, 物質學의 效力이 어찌 신령스럽지 않으며 어찌 넓고 크지 않은가.54)
그는 영국의 문명 발달과 실업 발전이 모두 물질학에 기인하며, ‘물질’에 관한 연구는 사람의 노동생산성(人工)을 수백 배로 증가시키고 국력 또한 천백 배로 증가시킨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유는 서구의 과학기술을 ‘풍요와 진보의 원천’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객관적 자연의 탐구는 보고 듣고 만지는 등의 감각적 작용과 심리적 인식작용을 통한 직접적인 실험과 실습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실습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들이 천하 사물에 대해 實地的인 實習이 없이 단지 推想硏究만으로는 사물의 이치를 진정 알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하나의 오이가 있으니, 반드시 씹어서 맛보아야만 오이의 달고 쓴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처음에 그것을 맛보지 않고 달고 쓴 것을 단정함은 역시 妄想입니다.55)
박은식은 초경험적 推想硏究보다는 실제적인 실험과 경험을 진리 탐구의 중요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학문 탐구가 現實과 實地를 떠나서는 실효를 거둘 수 없다고 보고, 서양의 선진 물질학과 과학적 연구 방법을 적극 수용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탐구는 자연과학 및 실업 발달을 가져와 국권 회복과 독립의 강력한 수단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3. 見聞知에 대한 本然知的 反省
박은식은 물질문명 발달에 필요한 각종 과학과 인격의 본령을 수립하는 本領學問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본다. 과학적 실용을 요구하는 시대이지만 인격의 본령을 수양하고자 한다면 철학을 폐할 수 없다고 한다.56) 철학은 가치판단 문제에 대해 올바른 방향과 준거를 제시한다. 이런 인식은 박은식이 인간의 삶에 필요한 물질의 영역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서구의 자연과학을 십분 활용하되, 인간의 도덕적 문제는 양명학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각종 학술이 다투어 진보하며 날로 고도화되지만 모두 물질문명을 극단화한 것이요 도덕을 밝히는 것은 아니다. 인격의 본령을 수립하며 인심의 陷溺을 구제하자면 왕학의 간이직절이 필요하다. 天德王道之學은 인류 평화를 근본으로 하는 것인데 천하의 형세는 그와 반대이므로 이 시기에 도덕을 밝히고 인도를 유지하며 백성에게 행복을 주고자 하면 양지의 학인 양명학에 의거해야 한다.57)
양명학을 통해 물질문명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인식은 서구 자연과학의 충격을 완화시켜 주는 완충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서구사상에 매몰되지 않는 구심점 역할을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박은식은 객관적 사물 인식 문제는 서구의 자연과학적 사유방식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동양철학은 인격의 본령을 수양하는 영역을 담당할 수 있으니, 이를 ‘本然知’라고 하였다.
인격을 수양하는 本領學問은 本然知의 영역이요, 德育이다. 本然의 知는 虛靈의 本覺으로써 事物을 照燭하는 것이니, 이는 가까이 자신의 몸에서 취하는 것(近取諸身)이다. 天地(의 사물)가 비록 멀리 (객관적 인식의 대상으로서) 있으나 나(인식 주체)의 虛靈이 가히 通하고, 萬物이 비록 많으나 나의 虛靈이 가히 應한다.…虛靈한 本覺은 참으로 造化의 精靈이오 萬物의 主宰이다.58)
그는 본령 학문을 德性에 관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은 개개인의 양지를 실현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서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사물에 대한 탐구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인식 주체의 허령한 양지가 있어야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양명학이 物理와 本心을 아우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과 상통한다. 20세기 세계 인류가 물질문명으로 생활을 요구하고 優勝을 경쟁하는 시대이므로 과학의 연구가 우리 學者界에 가장 시급하고 긴요한 공부라 할지라도 인격의 본령을 樹立하고 人心의 陷溺을 구제하려면 철학의 眞理를 발휘하는 것이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하였다.59)
그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제국주의 침략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군국주의 침략의 부도덕성을 1920년 저술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지난 시대의 文明이란 인류가 서로 다투는 데 이용하였지 결코 人道와 平和를 위한 사업은 아니었다. 適者生存의 논법만이 유일한 진리였고, 우세한 자가 이기고 열세한 자는 패한다는 弱肉强食이 세계의 일반적인 관례였으며, 軍國主義의 침략 정책이 생존의 목적이 되었다. 소위 문명화된 민족들이 그 생각과 지력을 다해 지극히 교묘한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은 오직 살인하기 위한 무기나 나라를 도둑질하기 위한 간사하고 능청스러운 책략을 얻기 위함이었다.60)
사실 현대 과학은 자본주의가 산업화에 부과한 방법과 수단에 관련되어 있다. 과학의 발전은 생산과정과 밀접하고 생생하게 관계하고 있던 때에만 성장 진화해 왔다. 즉 과학의 번영기는 경제 활동 및 기술 진보 시기와 일치한다. 기술의 개선은 대체로, 그것이 특정 개인이나 계층을 이롭게 하고 때로는 다른 개인과 계층에게는 전쟁의 경우처럼 파멸시키는 데 직접 이용된다는 자극하에서 일어났다.61) 박은식은 과학의 본질과 그것의 사회질서와의 관계를 제국주의의 침략을 통해 이해했다. 그리고 대안으로 과학지식의 도덕성을 문제삼았으며, 더 나아가 인도와 평화를 위한 大同思想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인도주의와 평화주의만이 强暴無法한 군국주의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민족의 도덕이 부패하거나 문명 정도가 유치하거나 독립 자격이 완전치 못하면 우리 국민의 生脈을 우리 손으로 끊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62) 즉 과학기술의 발전에 근거한 문명의 발달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보편이념과 도덕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박은식은 본연지로서 과학지식의 도덕성을 문제삼은 점이 여느 자강운동가들과 다르다.
Ⅳ. 결 론
조선 후기 이래 근대는 서학을 수용하면서 사상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서구 과학은 주자학적 인식론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인식체계를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실학자들의 경우 서학을 충분히 숙고하는 시간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서구 자연과학만을 수용하든 천주교까지 수용하든 주체적으로 취사선택을 할 수 있었으며, 서학 수용은 일정하게 실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 서양이 근대 과학기술에 기반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동아시아를 침략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서양의 충격’은 전면적으로 수용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그 영향력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자강운동기에는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제국주의 침략을 인식하면서 부국강병과 독립을 위한 다양한 대안이 시도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실학사상과 자강사상의 대표적 사상가인 다산과 백암의 격물치지설을 통하여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분리 문제를 중심으로 서구 근대과학의 수용 문제를 다루었다. 다산은 주자와 달리 ‘격치6조목’이라 하여 윤리적 실천문제로 격치설을 이해하였으며, 객관사물의 인식에 있어서는 ‘추만리’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객관적 경험적 인식을 추구하였다. 이는 가치 판단과 사실 판단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철학사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요, 동시에 근대 서구과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기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서구 근대과학처럼 과학지식의 가치중립성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산과 백암은 궁극적으로 명덕의 실천 내지는 양지의 구현이라는 도덕적 삶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박은식은 근대과학을 서구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서구 자연과학을 적극 수용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서구 자연과학을 수용하면서도 실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양명학에 대한 근대적 해석을 통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박은식은 도덕과 분리된 ‘객관적 자연 탐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과학지식과 인간사회의 관계성에 주목하여, 과학지식의 도덕성을 문제삼았다. 이러한 까닭에 군국주의의 침략성과 물질문명의 폐해를 비판할 수 있었다. 그는 과학기술이 살인하기 위한 무기나 제국주의적 침략의 도구로 사용되는 측면을 분명히 비판하고 있다. 물론 그의 이러한 견해가 근래의 과학지식의 가치중립성 문제를 체계적으로 심도 있게 논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은식이 가치와 사실을 분리하면서도 관계성에 주목하여, 과학지식의 도덕성을 문제삼고 바른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자 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원으로서의 자연 이상의 자연관을 재정립하는 데 나름의 시사점이 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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