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성기호설(性嗜好說)과 그 논거분석
1. 머리말
조선 중·후기 조선사회의 내·외적 요인으로 인한 심각한 혼란은 당시 일단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性理學에 대하여 진지하게 반성하게 하였다. 이 때 상황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성리학을 순수 이론적 측면에서 더 철저히 천착穿鑿하는 경향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경세사상經世思想을 중시함과 아울러 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연구의 경향이었다. 이 후자의 경향이 이른바 실학實學이다. 실학자들은 다양한 관점으로 성리학을 비판하거나 새롭게 연구하기도 하고 당시 전래된 서구의 사상과도 접목을 시도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인성人性이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어서 현실에서 구체적 실현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도덕이론의 정립을 시도하였다. 자세히 말하면, 다산은 성리학의 인성론에서 ‘성즉리性卽理’라는 기본명제가 근본적으로 타당한 명제가 아니라고 보고, 인간의 본성을 ‘자연의 원리’에 근거해서 볼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정서나 욕구’를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다산은 성기호설로써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고, 이를 토대로 도덕윤리의 문제를 설명한다.
이 글에서는 성리학적 이론체계의 관념성을 비판하고 실학적 사유를 통하여 인간의 도덕적 선악문제를 설명한 다산의 이론을 정리하고, 이러한 이론의 논리적 정합성과 철학적 의미 등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실학의 철학사적 성격에 대한 평가는 ‘반성리학反性理學’과 ‘성리학의 연장’이라는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필자는 정약용의 철학에 대한 ‘반성리학’, ‘성리학의 연장’ 등의 고정된 시각을 배제하고, 다산이 성기호설에서 도덕적 선의 개념과 그 근거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으며, 그것을 설명하는 논리적 맥락과 그 실현방법 등이 어떤 논리적 정합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2. ‘성즉리’에 대한 다산의 이해
1) ‘성즉리’와 리理·태극太極·천天(天命)의 개념
‘성즉리’의 리는 성리학의 본체론本體論을 설명하는 이기론理氣論의 리를 의미한다. 이 리 개념은 “역易에 태극이 있고 이것이 양의兩儀를 생生한다”는 말에서의 태극 개념에 근거한다. 이 태극에 대하여 성리학의 기초를 정립한 주돈이周敦頤(濂溪, 1017~1073)는 “무극無極이면서 태극이고, 태극이 동動함에 양陽이 생하며, 동動이 극에 이르면 정靜하고 정靜함에 음陰이 생한다.”고 하였다.
성리학의 이론적 기초를 완성한 정이程頤(伊川, 1033~1107)는 이 태극의 개념으로부터 천리天理의 개념을 도출하였다. 정이가 말한 천리의 개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⑴ 각각의 사물이 가진 존재법칙과 운동변화의 원리이다. 이천伊川은 “성性은 곧 리理다. 이른바 리理라는 것이 이 성性이다.”라고 하였다. ⑵ 우주만물의 본원本源이다. 즉 ‘천리’는 만물을 초월하며 만물을 통괄하는 본체다. ⑶ 천리는 만물이 가진 각각의 법칙이자 사회윤리도덕社會倫理道德의 총체적 규범이다. 본래 자연계의 규율에 속하는 ‘리理’를 윤리도덕의 범위에서 운용하여 윤리도덕의 속성을 ‘천리’의 주요내용으로 삼았다. 이천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무릇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다. 아비는 자애로움을 갖추고, 자식은 효도를 갖추며, 임금은 인仁을 갖추고, 신하는 공경심을 갖추며, 만물과 만사는 각각 그 마땅함[方所]을 갖추지 않음이 없으니, 그 마땅함을 얻으면 안정되고 잃으면 도리를 잃게 된다. 성인이 세상을 이치대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사물을 위하여 법칙을 만들 수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그 각각의 마땅함을 행하기 때문일 뿐이다.
⑷ 천리는 천명天命이다. 이천은 천天의 자연스러운 법칙을 천도天道라고 하고, 이 천도가 각각의 사물에 갖추어진 것을 천명이라고 규정하였다. 유서遺書에는 “천天의 스스로 그러함을 말하면 천도라고 하고, 천이 만물에 부여附與한 것을 말하면 천명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즉 천리를 ‘천명’과 동일시함으로써 천리를 사실상 천명의 대명사로 삼았다. 이 천리의 개념으로부터 이천은 ‘성즉리’라는 명제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그는 성리학의 정립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그 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1130 - 1200)는 정이의 ‘성즉리’를 좀더 체계화함으로써 성리학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먼저 주자는 이 태극에 대하여 “태극은 단지 하나의 리라는 글자다.”라고 풀이하였다. 이 때의 리는 ‘우주자연宇宙自然의 원리’이면서 ‘사물의 이치[自然法則]’이며 ‘변화하는 사물의 불변의 본질”이다. 그리고 주자는 ‘존재의 원리[所以然之故]’와 ‘도덕적 당위[所當然之則]’를 종합하여 그것을 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즉리’라는 명제는 인간의 도덕적 본성은 우주의 원리인 리에 근거하므로 ‘순선純善’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주의 존재원리가 도덕적 당위규범으로 전환된다.
정리하면 ‘성즉리’라는 성리학의 핵심명제는 태극 = 천리 = 리의 개념으로부터 확립된다. 태극은 천지만물의 존재론적 근원이며, 천리 혹은 리는 천지만물의 근원이자 생성변화의 원리가 되며 동시에 그 생성변화를 주재主宰하는 개념이다. 천지자연의 존재론적 근거와 그 변화의 원리를 설명하는 개념인 리가 인간의 도덕윤리적 본성을 설명하는 가치론적 개념인 성선性善으로 전환된다. 즉 존재원리가 가치원리로 전환한 것이며, 동시에 존재원리와 가치원리가 일치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이 성리학의 가장 큰 특징이기는 하지만, 형식논리로 보면 존재원리와 가치원리는 범주가 다르다.
한편 성性은 인간의 천부적 본성이자 도덕적 본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중용 수장首章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으로 설명된다. 이 성性이 곧 리며, 리는 순선純善이므로 성선性善이다. 이로써 성리학의 가장 큰 난제難題인 도덕적 가치와 우주론의 논리적 연결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른바 성리학의 체계가 완성되었다.
2) 리·태극·천天(天命)에 대한 다산의 이해
다산은 ‘성즉리’의 명제를 부정한다. 왜냐하면 다산은 성리학자들이 천지만물의 운행질서라든지 사물의 근원 혹은 인간의 구체적 욕구나 정서 도덕감 등을 모두 리理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생각하고, 유학의 중요개념들인 리·태극·천天(天命) 등의 개념을 성리학과는 다른 개념으로 이해한다. 이 절에서는 이들 개념에 대한 다산의 이해를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다산은 ‘성즉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성리학의 궁극적 목표인 성인聖人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이론체계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사람들이 성인이 되고자 하지만 될 수 없는 것은 세 가지 사실 때문이다. 첫째는 천天을 리로 인식하는 것이며, 둘째는 인仁을 만물을 생성하는 리라고 여기는 것이며, 셋째는 용傭(=庸)을 일상의 일(平常)로 여기는 것이다. 만약 신독愼獨으로써 하늘을 섬기고, 힘써 서恕(推己及人)를 행함으로써 인仁을 추구하며, 또 영원히 쉬지 않으면 이것이 성인이다.
다산의 이 말이 그의 인성론의 종지宗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째 천天은 리가 아니라는 말은 천天은 단지 존재 그 자체이지 이법理法이나 법칙法則 혹은 원리原理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성리학의 중심개념인 리에 대한 다산의 이해가 성리학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인仁이 사물을 생성하는 리가 아니라는 말은 인仁이 단순한 도덕적 개념일 뿐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기준인 중용中庸의 용(傭=庸)이 평상平常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신독으로써 하늘을 섬김[愼獨以事天],’ ‘힘써 서恕를 행함으로써 인仁을 구함[强恕以求仁],’ ‘(求仁의 노력을) 영원히 쉬지 않음[恒久而不息]’ 이 세 가지가 성인聖人이 되는 기본 구도이자 강령이라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성性의 개념과 도덕성의 형이상학적 근거에 관한 다산의 입장을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이제 다산이 생각하는 리, 태극, 천(天命)등의 의미를 통하여 그 사유의 유형을 알아보고자 한다.
(1) 리理
주지하듯이 리는 성리학의 핵심개념으로서 우주자연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이자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윤리 도덕적 선善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다산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구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산은 리는 단지 무형의 내용 없는 것일 뿐 인간의 특성인 성性과는 무관한 개념이라고 보았다.
무릇 리란 어떤 것인가? 리는 애증도 없고 희로喜怒도 없으며, 아무런 내용도 없고[空空] 흔적도 없으며[漠漠] 이름도 형체도 없는 것인데도, 우리 인간이 이로부터 성性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역시 그것이 말이 되기 어렵다.
다산이 보기에 존재론적 원리로서 리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나 정서가 없는 공허한 개념이다. 이에 따라 다산은 “성性은 리가 아니다. 리라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自然]으로 귀속된다. 저절로 그러함이 어찌 성性이 될 수 있겠는가? 만물이 생겨남에 모두 그 시작이 있는데 무릇 어찌 본래 그러함[本然]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성性은 리가 아니다’고 단정한다. 즉 다산에게서 리는 단지 존재론적 개념이지, 도덕윤리 특히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대표하는 개념이 될 수 없으며, 단지 자연 그 자체일 뿐이다. 왜냐하면 만물은 처음 생겨날 그 때부터 각각의 특성이 있는데, 미리부터 어디엔가 그 각각의 특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자는 “태극은 단지 하나의 리라는 글자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태극은 만물의 시원始原을 의미하며, 리는 천지만물의 생성과 운행원리를 대표하는 개념이다. 리에 관한 다산의 이해는 태극에 대한 이해로부터 비롯된다. 즉, 다산은 태극의 존재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리理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 점이 성리학의 이해와 매우 다른 것이다.
태극은 천지가 아직 분화되기 이전의 혼돈 상태이며, 음양의 배태이고 만물의 태초太初이다. 그 이름은 도가道家에서 비로소 보일 뿐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글에서는 없는 말이다. 감히 천지天地보다 앞서 이 태극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른바 태극은 유형有形의 시초인데 그것을 무형無形의 리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염계濂溪 선생이 일찍이 이것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무릇 형체가 없는 것은 그릴 수가 없다. 리를 그릴 수가 있겠는가?
다산은 성리학의 중심개념인 리에 대한 이해를 전혀 달리한다. 위 글의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 태극은 만물의 시원으로 천지가 분화되기 이전의 혼돈 상태를 의미한다. 물질의 근원에 대한 탐구는 다양하게 진해되어 왔으나 성리학에서 이것을 태극이라는 관념적 개념으로 정립하였다. 둘째 태극은 ‘무無’가 아니라 ‘유有’라는 것이다. 태극이 비록 천지보다 먼저 있지만 무형의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태극이 ‘관념적 실체’가 아니라 ‘구체적 실재實在’라는 말이다. 셋째 다산은 이 태극이라는 개념은 도가道家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며, 정통의 공맹유학孔孟儒學의 개념이 아니라고 보았다. 넷째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太極圖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무형의 사물을 그림으로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산에게 있어 태극은 단지 존재의 근원 그 자체일 뿐 우주만물이 생성 변화하는 원리로서의 개념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나아가 다산은 리에 근거하여 성性을 설명하는 것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자사子思가 중용을 지으면서 분명하게 말하기를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며, 맹자는 ‘그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그 성性을 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제 심心·성性·천天 세 글자를 합쳐서 하나의 리라고 하면 모씨毛氏(毛奇齡)가 말한 것처럼, ‘리가 명한 것을 리라고 한다’는 말은 지나친 말(佻語)이 아니다. 당연히 맹자의 말도 역시 ‘그 리를 다하는 사람은 그 리를 알며, 그 리를 알면 리를 안다’는 말이 된다.
성리학은 리를 심·성·천의 본질과 작용을 설명하는 최고범주의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다산은 이것을 리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하여 이해하였기 때문에 심·성·천을 리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동어반복으로서 논리적 모순이 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다산이 보는 천天과 천명天命의 개념은 어떤 것인가?
(2) 천天(천명)
천天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관점이 있었고, 또 고대의 천에 대한 관념을 분류하는데도 다양한 견해가 있다. 문제는 종교적 신처럼 창조성과 인격성이 있는가의 여부다. 천天에 대한 다산의 견해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다산의 천天과 천명의 개념에 대하여 금장태 교수는 “이 중용강의에는 천주교 교리의 영향이 다각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중용의 주석에서 천·상제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인간의 심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 및 사물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천·지·인의 세계 구조에 대한 성리학적 인식을 전면적으로 변혁하면서 자신의 시야를 열어가는 이론적 배경으로서 천주교 교리서의 세계관으로부터 상당히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유先儒가 말한 천天에는 본래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땅으로부터 위에 있는 것을 천天이라고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푸르고 푸른 거대한 환圜을 천天이라고 한다. 만약 창창蒼蒼한 천을 논하면 그 바탕은 비록 모두 청명淸明하더라도 역시 음양의 두 기를 갖추고 있다.
여기서 지상地上의 의미는 인간이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풍風·우雨·천둥·번개 등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창천蒼天은 곧 천문학적 우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천天의 의미는 분명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천天에 대한 다산의 인식은 단순하게 물리적 자연에 머물지는 않는다. 다산은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 위에 분명히 그것을 견제牽制하는 천天이 있다. 그런데 이제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도체道體의 근본으로 여긴다면 옳겠는가?”라고 하였다. 성리학의 천天 개념에도 분명히 주재성主宰性의 의미가 있으며, 다산도 천天에 사물의 생성과 변화를 주도하는 주재성을 부여하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성리학의 천天 관념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다산이 근본적으로 유학이나 성리학의 천天 혹은 자연自然 관념과 다르게 이해하는 부분이 있다.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체道體의 근본으로 여길 수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주역 「계사전繫辭傳」의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에서 도道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다산은 “일음일양”은 그 자체로 음양의 운동일 뿐 그 운동을 음양보다 상위개념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산의 이 뜻은 도道를 리로 보아 그것을 관념적으로 해석하여 최고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성리학적 사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다산의 이 부분이 논리적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도道라든지 리와 같은 개념은 ‘일음일양’하는 운동 그 자체를 설명하는 개념이지 그것의 상위개념으로 범주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산은 천天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상제上帝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문제는 이 상제의 개념에 종교적 창조자인 신神의 의미를 포함되어 있는가이다. 다산은 “천天의 주재主宰가 상제다. 그것을 천天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천天의 주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재의 의미는 ‘어떤 일을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함’의 뜻이다. 이 외에 ‘지배하다,’ ‘장악하다’ 등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천天의 주재’ 즉 상제의 역할은 ‘천天이 인간과 사물의 생성과 변화를 주관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다산이 말한 상제는 “창조자의 의미가 있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다음 인용문을 보면 더 자세히 나타난다.
상제의 본체는 형체도 없고 형질도 없어 귀신鬼神과 그 덕이 같다. 그것이 감통하여 이르고 하나하나 비추어 주는 것으로 말하기 때문이 귀신이라고 한다.
상제의 본체가 구체적인 형체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형질形質이 없다는 말은 태극을 유형의 사물로 인정한 것과는 자못 다르다. 관념론은 일반적으로 정신, 이성 등을 물질적 현상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이것을 중심으로 우주의 본질과 현상을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이렇게 보면 다산이 말한 상제 개념에도 귀신의 작용과 같은 관념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물을 주재하는 천天의 주재력主宰力이 인간에게는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이것이 이른바 천명이다. 중용 수장首章에서는 “하늘이 명命한 것을 일러 성性이라 하고, 그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며, 도道를 수양하는 것을 배움이라고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脩道之謂敎)”라고 하였다. 여기서 ‘천명’은 인성人性과 관련한 대표적 개념이다.
다산도 “천명은 생명을 품부稟賦받은 순간부터 이 성性을 부여받을 뿐만 아니라, 원래 무형無形의 체體로써 묘용妙用의 신神이며, 종류로써 서로 받아들이며 더불어 감통한다.”고 하여 성리학의 체계와 마찬가지로 천명을 인성이 확립되는 근거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여기서 천명을 ‘하늘이 명령한 것’으로 해석하는가 아니면 ‘하늘의 명령’으로 해석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조금 다르다. 전자는 하늘이 명령을 내리는 동작이 강조되며, 후자는 하늘이 내리는 명령의 내용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 성리학에서는 전자의 의미에 가깝다고 한다면, 다산은 후자의 의미에 가깝다. 그것은 다산이 “천명의 성은 인성이며, 솔성率性의 도道는 인도人道며, 수도修道의 교는 인교人敎다.”라고 설명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즉 천명으로 주어진 내용이 사람에게서는 인성人性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천天이 자신의 운행원리인 리를 조금도 어그러지거나 모자람이 없이 완전하게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을 천명의 명命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다르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구체적 사물에 내재해 있는 리’와 ‘귀신의 공능을 가진 상제’는 크게 다른 의미가 아니며, 또한 이것은 양자가 다 원리·법칙 등과 같은 우주만물의 본질을 설명하는 관념적 개념이다.
3. 다산의 성기호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은 매우 다양한 관점이 있다. 예를 들면 노동력, 사회성, 정치성, 도구를 이용하는 능력, 도덕윤리성 등을 중시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인간의 도덕적 측면(Homo-moralis)을 강조한 것이 성선설性善說이다. 성선설은 맹자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립된 이래 유학사儒學史에서 일관된 종지宗旨로서 변함이 없었으며, 성리학은 이 성선설을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재정립하였다. 다산도 성선설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성선性善을 원리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을 반대하고 성性이 가진 구체적 기호嗜好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이 절에서는 다산이 말한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성선을 논증하는 방법과 그 실천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1) 기호로서의 성性
다산은 성性을 형이상학적 개념인 리로 설명하지 않고 마음[心]에서 생겨나는 구체적인 정서나 감성·정감·도덕감 등으로 규정하였다. 즉 성性은 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산은 이러한 ‘실심實心’은 마음이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좋아하는 감정’인 기호라고 보았다. 이것이 성기호설이다. 먼저 다산은 성性은 마음[心]이 가진 좋아하고 싫어하는 구체적인 기호라고 이해하였다. 다산은 기호에 대한 이해를 정情으로부터 출발한다. 다산은 이 정情에 대하여 “정情은 참이며 실實이다. 그것을 마땅히 그 실정을 안다는 실정實情으로 읽어야 한다. <논어에 말하기를 그 정을 알면 슬프고 불쌍히 여기되[哀矜] 기뻐하지 말라고 하였다> 성정性情의 정情이 아니다.”라고 설명하였다. 다산에게 있어 이러한 정情이 성性의 내용을 의미하는 기호가 된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性이란 대체大體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마음 안에 있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치를 가리켜 따로 정한 이름이다.
성性이 대체大體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말은 다산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대표하는 개념이 성性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다산의 이 내용은 성性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이해한 주자의 견해와 다르다. 주자는 일찍이 자신의 심성론을 정립함에 정이의 ‘성즉리’와 장재張載의 ‘심통성정心統性情’을 중심명제로 삼았다. 주자는 심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음은 신명神明이 머무는 곳으로 한 몸의 주재이다. 성性은 곧 많은 도리이니 천天으로부터 그것을 얻어 마음에 갖춘 것이다. 알고 인식하고 염려하는 곳에서 발發한 것은 모두 정情이다. 그러므로 심心이 성性과 정情을 통섭統攝한다고 한다.
이 때 ‘심통성정’은 심心이 성性과 정情을 통섭하는 행위의 주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주자는 어디까지나 ‘성즉리’처럼 성선의 핵심적 근거가 되는 것은 심이 아니라 성이라고 본 것이다. 이에 주자는 “심은 두 가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성은 심의 체體이며, 정情은 심의 용用이다. 성은 뿌리이며, 정은 싹이다.”고 하였다. 곧 성이 심의 본체라는 말이다. 그러나 다산은 “심은 인간의 대체를 가리키는 말이며, 성은 심의 ‘즐기고 좋아하는 것’(기호)이다.”라고 하여 성을 ‘심의 기호’로 규정하였으며, 동시에 심과 성을 이원론二元論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다산이 말한 심·성의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다산은 심을 크게 성性(기호), 권형權衡(의지), 행사行事(행위)로 구분하고, 이러한 심의 개념은 혈기血氣를 주관하는 기관器官의 기능으로 이해한다.
옛날 경전에는 심은 대체의 대명사가 아니었다. 오직 그것이 내재하여 함축하고 있는 것과 외부로 운용하는 것을 심이라고 불렀다. 진실로 오장五臟 가운데 혈기를 주관하는 것이 심이다. 신神과 형形이 묘합妙合하여 그것이 발용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혈기와 서로 수반한다. 이에 혈기가 주관하는 것을 빌려서 인간 내면의 통칭通稱으로 삼았다.
‘심통성정心統性情’에서 심은 의미의 성과 정을 통섭하는 것인데, 다산은 ‘오장의 혈기를 주관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다산은 심이 작동하는 형태를 ‘신神과 형形이 묘합한다’라고 설명한다. 오장의 혈기라는 것은 폐장肺臟·간장肝臟·신장腎臟·비장脾臟 등 곧 인간의 육체적 욕구를 말하는 것이다. 이 육체적 욕구들이 곧 기호이다. 이에 다산은 성리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성을 마음의 본체라고 보았기 때문에 결국 마음[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보았다.
성性이란 인간의 기호다. 선유先儒들은 언제나 성을 마음의 본체[靈體]라고 보니 그것이 어긋나고 틀림이 없겠는가? 마음의 본체를 논함에 그 본체가 편견이 없고 밝아[虛明] 악하게 될 수 있는 이치가 없는데도 다만 그것(本體)이 육체[形氣]에 깃들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악이 어지럽게 일어나 본체를 교란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설이 부득불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유가 인식한 성은 맹자가 인식한 성과는 서로 다르다.
여기서 선유先儒는 대개 송유宋儒 혹은 성리학자들을 의미한다. 즉 성리학자들이 성性을 오로지 마음의 본체(靈體: 靈은 마음을 의미하는 靈臺)라고 보았기 때문에 마음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기호는 어떻게 인간의 마음에 갖추어지는가? 다산은 천명으로부터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사물은 각각 하나의 성을 갖추고 있으며, 기호가 있게 함으로써 그 성性을 간직하게 하는데 이것이 천명이다. 천명은 언제나 자연과 같다. 그러므로 자연이라는 것을 천성天性이라고 한다.
모든 사물은 각각 그 고유의 자연적 본성[性]을 갖추고 있는데, 개개의 사물은 기호로써 자신의 고유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기호는 천명에 근거하여 갖추어진 것이며, 이 천명도 인위적인 분배에 의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된 것[自然]’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사물이 가진 성性은 달리 말하면 ‘천명에 따라 스스로 그렇게 된 성性’ 곧 ‘천성天性’이다. 다산은 이 천성이 바로 사람이 잉태되자말자 갖추게 되는 영명하고 무형의 본체라고 하여 “인간의 배태胚胎가 이루어지면 천天은 영명하고 무형의 본체를 부여하는데 이것(本體)은 선을 즐기고 악을 싫어하며 덕을 좋아하며 오욕汚辱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이것을 성선性善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즉 기호의 본질은 ‘선을 즐기고 악을 싫어함[樂善惡惡],’ ‘덕을 좋아하고 오욕을 부끄럽게 여김[好德恥汚]과 같은 성품이라는 말이다. 기호에 대한 다산의 생각은 아래 인용문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성性이란 기호를 위주로 말한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면 사안석謝安石이 성악聲樂을 좋아하는 성품, 위정공魏鄭公이 검소함을 좋아하는 성품, 혹은 산수山水를 좋아하는 성품, 혹은 서화書畵를 좋아하는 성품이 있는데 모두 기호를 성性으로 여긴 것이다. 성性이라는 글자의 뜻은 본래 이와 같다.
결국 사람의 마음이 좋아하는 구체적 감정의 종합이 기호라는 말이 된다. 다산이 예를 든 기호의 내용은 성악聲樂·검소儉素함·산수山水·서화書畵 등을 좋아하는 성품이다. 이에 따라 다산은 맹자도 기호를 중심으로 성性을 설명하였다고 주장한다.
맹자는 성선의 이치를 논함에 언제나 ‘즐기고 좋아하는 것[嗜好]’으로써 설명하였다. 공자는 ‘떳떳한 윤리를 지키고 덕을 좋아한다’는 시를 인용하여 인성人性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기호를 버리고서 성性을 언급하는 것은 공맹유학[洙泗]의 옛 것이 아니다.
다산의 이 말 속에는 성리학자들이 이 구체적 감정을 버리고 관념적 개념인 리를 중심으로 성性을 설명한 ‘성즉리’에 대한 비판이 전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공자와 맹자의 유학에서는 직접 이 구체적인 기호를 가리켜 성을 논증하였기 때문이다. 원시 공맹유학의 회복이 바로 다산의 학문적 목표이자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산철학을 ‘수사학洙泗學’이라고도 평가한다.
다산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정서 혹은 감정을 포괄하는 기호의 개념은 그 자체가 한정적이고 구체적인 그러면서도 추상적인 내용을 포함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즉 다산이 보기에 사단四端은 네 가지 단서일 뿐 그 자체가 최고선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단의 뜻은 맹자가 친히 스스로 풀어 설명하기를 ‘마치 불이 처음 타는 것, 샘물이 처음 흘러나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시始자는 명백하게 시작이 되는 실마리[端緖]임이 또한 이미 분명하다.
성리학에서는 사단은 성선의 구체적 내용이자 도심道心의 본질로서 인간의 성性에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다산은 사단을 단지 하나의 구체적 덕목인 인仁·의義·예禮·지智(四德)를 실천하기 위한 ‘바른 실마리[端緖]’라고 보고, 그 자체가 지선至善이나 최고의 가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자칫 다산이 유학과 성리학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성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다산도 성선을 주장하지만 성리학과는 그 내용과 관점이 다르다.
2) ‘도심道心의 기호’로서 성선性善
인간의 도덕적 가치는 내재적·선천적인가 아니면 외재적·결과적인가? 그리고 인간의 도덕적 선악 혹은 가치규범은 인간의 심성에 내재된 가치로부터 나오는가 아니면 외부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공동체적 합의에 의해 창출된 가치인가의 논쟁도 같은 맥락의 철학적 문제다.
성리학에서는 사단四端과 같은 도덕가치가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으나, 다산은 도덕가치의 내재성을 부정하고 한편으로 다른 의미의 내재성을 주장한다.
다산은 성性은 기호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기호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가지는 욕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접촉하는 대상에 대하여 느끼는 호오好惡도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다산이 말한 기호에는 사리사욕私利私慾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즉 기호에는 육체적(形軀) 기호도 포함된다. 이에 다산은 인성人性에는 도의道義와 기질氣質 두 가지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보고, 금수禽獸의 성性은 오직 기질지성氣質之性뿐이라고 하였다. 만약 기호에 기질지성이 포함되어 있다면 성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다산도 성性을 내재적 도덕가치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분명히 성선을 주장하며, 이에 대한 논증도 기호로부터 출발한다.
맹자는 성性을 논함에 반드시 기호로써 말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입은 맛으로 즐겨하는 것이 같으며, 귀는 소리에 대하여 좋아하는 것이 같으며, 눈은 색깔로 기뻐하는 것이 같다’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성이 선善을 좋아하는 것이 같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성性의 본의本義가 기호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구절은 맹자가 고자告子와 논변하면서 성선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설명한 내용의 일부다. 맹자는 이耳·목目·구口·비鼻의 각 기관이 감각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에서부터 마음은 리理(道理)와 의義를 좋아한다는 논증을 하였다. 그렇다면 다산은 어떠한가?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다산은 기호의 의미를 ‘선善을 좋아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다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기호는 단순한 감각적 기호가 아니라 ‘도심道心의 기호’라고 규정한다.
상서尙書 「소고召誥」에서는 ‘성을 절제하여 오직 날마다 매진한다’고 하였다. 왕제편에서는 ‘육례六禮를 수양하여 백성의 성을 절제시킨다’고 하였다. 맹자는 ‘마음을 움직임에 성性을 인내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성性은 인심人心의 기호다. 서경書經의 조이祖伊는 ‘천성을 헤아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자사子思는 ‘성性을 따른다(率性)’라고 하였으며, 맹자는 ‘성선’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성性은 ‘도심의 기호’이다. 비록 말하는 바는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기호로써 성性을 삼은 것은 같다.
여기서 ‘성을 절제한다’거나 ‘성을 인내한다’한다는 것은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호를 절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절제하고 인내하는 행위 등을 ‘천성을 헤아리지 않음,’ ‘성을 따름,’ ‘성선’이라고 하며 이 때의 성이 곧 도심의 기호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도심은 어떻게 갖추어지는가? 다산은 “하늘의 목소리[喉舌:天命]는 도심에 갖추어져 있으니, 도심이 경계하고 깨우치는 것[儆告]은 곧 황천皇天이 명령하고 경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는 “도심과 천명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도심이 인간의 마음에 선천적으로 내재된 구체적 도덕가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선善으로 향하는 선택적 기능을 가질 뿐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도덕적 가치의 근거를 말할 때 도덕적 가치가 선천적으로 인간의 내부(心 혹은 性)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 또 사회적 관념 혹은 통념에 따라 교육받은 가치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도 있으며, 한편으로 종교에서는 어떤 절대자의 명령과 의지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다산은 비록 성性에 선천적 도덕감의 내재성을 부정하지만 성선으로 인도하는 기능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성선을 증명하는 다산의 입장도 내재설內在說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도심이 언제나 인간의 기호를 선善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역할기능은 바로 천명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비록 (천명이) 심성에 부여되었지만, 선을 향하고 악을 멀리하도록 하는 것은 진실로 천명이다. 날마다 이것을 굽어 살펴 복되고, 선하고, 화를 입고, 음란하게[福·善·禍·淫] 되는 것도 또한 천명이다.
그리고 “천명은 생명을 품부받을 처음부터 이 성性을 부여받을 뿐만 아니라, 원래 무형의 체體로써 묘용의 신神이며, 종류로써 서로 받아들이며 더불어 감통한다.” 그러므로 천명이 특수한 개인들 혹은 일부에게만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보편적이고 공통의 이상과 도덕적 가치를 함께 추구할 수 있다.
천은 나에게 덕을 좋아하는 정을 주고 선을 가리는 능력을 주었다. 이것이 비록 나에게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본래 천명이다. 보통사람들은 자기의 본성이라고 여겨 게을리 한다. 그러나 한번 유추하여 연구하면 이 성은 본래 천부天賦와 관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밝고 밝은 천명이다. 이 성이 욕구하는 것을 위반하고, 이 성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행한다면 이것은 천명을 게을리 하는 것이며, 천명을 거슬리는 것이니 그 죄는 하늘에 통할 것이다.
성리학은 분명히 사단이라는 선천적으로 내재된 가치로부터 도덕적 행위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다산은 선천적 가치의 내재를 부정하였다. 다만 천天이 인간의 마음으로 하여금 선을 향하도록 명령하였다고 하였다. 이 두 말의 차이는 의미상 내재적 가치관의 인정과 부정에 있지만 결국은 천이라는 존재가 선을 향하도록 하는 것 그 작용은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다산의 견해도 다만 내재한 내용이 구체적 도덕가치인가 아니면 기능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 도덕적 선善의 원천은 결국 마음에 내재된 기능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성性의 실현방법: 사친事親·사천事天
다산의 인성론도 수양론修養論을 통하여 완성된다. 다산의 수양론에서도 역시 어떻게 이 선善을 실현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다. 성리학에서 수양론은 인간의 본성[性]에 내재된 사단[道心]을 잘 확충하여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이 성선을 실현하는 길이며 동시에 성인聖人이 되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성리학에서는 격물궁리格物窮理나 거경함양居敬涵養, 정좌靜坐 등의 방법을 제시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들 보다는 다산 수양론에서 공부의 체계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다산은 “군자의 학문은 사친事親에서 시작하여 사천事天으로 끝난다.” 고 하였다. 이 사친事親의 친親은 인륜人倫을 의미하며, 사친은 곧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말한다. 다산은 “친친親親은 그 종족宗族을 친하는 것이며 사친事親이 아니다. 사친은 수신修身의 가운데 있다.”라고 하였다. 사친은 성인이 되기 위한 수신의 종합적 기초라는 말이다.
이 사친의 중요내용이 대학大學 삼강령三綱領의 명명덕明明德이다. 다산은 명덕明德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경詩經에서 ‘나는 명덕明德을 품었노라’하였고, 역易에서는 ‘스스로 명덕이 밝아진다’고 하였으며, 주서周書에서는 ‘명덕만이 오직 향기롭다’하였고<좌전左傳을 보라>, 춘추전春秋傳에서는 ‘명덕있는 이를 골라 세워 주周나라를 지키는 울이 되게 하였다’고 하였고, 또 노공魯公에게 ‘대로大路와 대기大旂를 나누어 주고 주공周公의 명덕을 빛내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어찌 이 말들이 모두 다 마음의 본체를 이르는 말이겠는가? 무릇 덕행이 신명神明에 통한 것을 명덕이라 한다. 마치 신에게 제사지내는 물을 명수明水라고 하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방을 명당明堂이라 하는데, 효제孝弟의 덕은 신명도 통하므로 그것을 명덕이고 한다. 하필이면 허령虛靈한 것이어야 명明이라 하겠는가?
허령은 ‘마음에 어떤 막힘이나 편견이 없이 어떤 사물이든 맑고 밝게 드러내는 기능’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산은 마음이 비록 ‘맑고 밝아 어둡지 않다[虛靈不昧]’고 할지라도 구체적인 내용이 없으므로 명덕을 가리키는 내용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다산은 “심체心體가 담연湛然하고 허명하다고 어찌 덕德이 있겠는가? 심心에 본래 덕德이 없는데 하물며 인仁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다산에게 있어 명덕은 허령불매虛靈不昧한 본체가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구체적인 덕목이다. 이에 다산은 명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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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孝者所以事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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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明德 |
| 弟者所以事長 |
| 天子庶人修身爲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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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慈者所以事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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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효孝·제弟·자慈는 바로 사친事親의 구체적인 내용이며, 사친은 천자天子로부터 보통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결같이 수신의 근본이 되며 이것이 곧 인륜이다. 그런데 다산의 공부방법에서 사천事天이 문제다. 사천은 ‘하늘을 섬긴다’는 뜻이므로 종교적 의미로 생각하기 쉽다.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거경함양居敬涵養은 늘 사심私心이나 사욕私欲에 빠지지 않게하고 순수한 도심道心을 온전하게 간직하여 언제나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심신을 긴장하여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는 공부를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다산이 말한 사천은 성리학의 거경함양과 내용상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이 사람의 선악을 관찰하는 바는 항상 인륜에 있고 인륜을 잘 하면 하늘을 섬길 수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산도 사천이 종교적 신을 신앙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심本心에서 천명을 구하는 것은 성인이 하는 밝은 일[昭事]의 학문이다.”라고 하였다. 천天을 초월적 신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현실적 도덕윤리와 선악의 판단과 기준을 거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또 “인仁은 인륜人倫의 명덕明德이니, 곧 효·제·자를 총괄한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종합하면 다산의 수양론은 사친을 사천의 방법으로 본 것이며, 성리학에서 리理가 천리天理-인仁-성선性善을 연결하는 개념인 것에 비하면 다산은 명덕과 인륜과 인仁을 일치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산은 이 사천의 공부가 유학의 본래적 수양공부라고 보았다.
옛 사람들은 실심實心으로 하늘을 섬기고, 실심으로써 신神을 섬긴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할 때나 하나의 생각이 싹터 남에 혹 성실하기도 하고 혹 거짓되기도 하며, 혹 선하기도 하며, 혹 악하기도 하니, 그것을 경계하여 ‘날마다 이것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계신戒愼·공구恐懼하여 신독의 절실함이 진실하고 절실하며 돈독敦篤하고 성실하여 그로써 천덕天德에 도달한다.
다산은 실심實心이라는 용어를 쓴다. 심心에 실심實心과 허심虛心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다산의 의미를 살려보면 사친事親과 사천事天의 임무를 자각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실심이란 단순한 원리나 관념적 사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하나의 사려思慮에 따라 그것의 선악과 성실함 여부를 항상 공부의 중심문제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자의 중화설中和說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희의 중화설은 미발未發일 때는 존양으로써 성선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이발已發일 때는 성찰省察로써 인욕과 사욕을 제거하여 중화中和에 도달하는 것이 중심문제로, 이 미발과 이발의 존양과 성찰에서 일관되게 유지해야 하는 자세가 경敬이다. 그런데 경敬으로써 존양과 성찰을 주관하는 것은 물론 심心이다. 주자의 이 심心과 다산의 실심은 사실 이름만 다를 뿐 그렇게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다산의 생각은 언제나 실재적, 실용적, 구체적, 현실적, 실현가능성에 있었다.
4. 철학사의 관점에서 본 다산의 성기호설性嗜好說
다산의 성리학의 인성론에서 중심명제인 ‘성즉리性卽理’를 비판하고 ‘성기호설’을 중심으로 자신의 인성론을 확립하였다. 이 때 다산의 논거는 성리학이 공자나 맹자의 본래유학과 다르다는 것이며, 또한 사서四書를 중심으로 한 고경古經의 본래 의미를 회복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다산의 성기호설의 내용과 그 이론구조를 정리하고, 그것을 성리학의 내용과 비교하여, 이를 통하여 철학사적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첫째, 리에 관한 문제다. 리는 성리학의 중심개념이다. 성리학은 리를 중심으로 심心·성性·천天의 본질과 작용을 설명하는 최고범주의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다산은 이것을 리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하여 이해하였기 때문에 심·성·천을 리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동어반복으로서 논리적 모순이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다산의 철학체계와 천관天觀이 성리학과 다르기 때문이다. 유학이나 성리학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전제하에 성립된 이론이기 때문에 천天과 인人을 하나로 통합하여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의 정립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의 필요성은 다산의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다산의 만물일본설萬物一本說이 그것이다. 다산은 “백신百神이 천명을 받아서 (만물과 人事의) 변화와 육성育成을 보좌輔佐하고 보우保佑하니, 만물이 하나의 근본[一本]임을 여기서 징험徵驗할 수 있으며, 이것은 귀신에게 질정質正해도 의심이 없다.”고 하였다. 즉 다산은 만물일본을 중심으로 자신의 철학을 정립하는데 이것은 결국 그의 사천학事天學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천인합일과 만물일본은 의미가 다르다. 천인합일은 인간과 천(혹은 자연)이 하나의 원리로 이루어지며 동시에 양자가 동등함을 중심으로 성립되는 명제다. 그러나 만물일본은 자연과 인간이 모두 천天 혹은 상제에 근원한다는 말이다. 다산의 천관天觀에 대하여 금장태는 “천(상제)의 존재에 대한 다산의 인식은 그가 세계관과 인간관을 재구축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는 것으로, 천天을 리로 규정하는 성리설의 형이상학적 인식을 벗어나 천天의 초월적 성격과 더불어 신명으로서 인격신적 성격을 확인함으로써, 경전의 천관을 재확인하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천天의 인격신적 성격’이 곧 상제다. 이것은 인간과 우주만물의 한 층 위에 상제의 주재主宰가 있다는 말이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인간을 천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성리학은 인간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선해질 수 있는 존재로 보고, 개개인의 자주성과 존엄성을 강조할 뿐 상제의 주재를 요청하지 않는다. 양보해서 상제의 주재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따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의 의지력인 것이다.
둘째, ‘성즉리’에 관한 문제다. 다산은 ‘성즉리’의 명제를 부정한다. 다산은 성리학자들이 천지만물의 운행질서라든지 사물의 근원 혹은 인간의 구체적 욕구나 정서 도덕감 등을 모두 리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생각하고, 리理는 단지 ‘자연自然’으로서 아무런 내용이 없는 원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선진유학先秦儒學에서 “무릇 인仁한 사람은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도 서도록 하고,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면 남도 도달하게 한다. (이것을) 가까운 것부터 깨달아 가는 것이 인仁을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구절처럼 인仁에 대하여 구체적 개념에 대한 설명과 그에 대한 실천방법을 금언(Aphorism)이나 정언명법定言命法(categorical imperative)으로 해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선진유학에는 바로 이 선善 혹은 최고선으로서의 인仁과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명이 부족하였다. 성리학에서 리는 우주자연의 근원과 그 운동변화를 설명하는 존재론적 개념이며, 동시에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이 리가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선善의 근거를 설명하는 인성론人性論에서는 가치개념으로 전환된다. 이 관계를 대표하는 명제가 ‘성즉리’이다. 즉 성리학은 리를 중심으로 만물의 근원과 자연의 존재론적 원리와 법칙을 설명하고, 그리고 선善과 정의正義 등 인간의 도덕윤리적 문제를 하나의 논리로 설명하였다. 리라는 개념이 원리적 개념이라고 해서 이를 중심으로 인간의 본성을 원리적으로 설명한 이론이 무의미하다고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즉리는 인간의 구체적인 감정이나 정서―기호라고 해도 좋고 칠정七情이라고 해도 좋다.―를 올바르게 표출하고 갈무리하는 법칙이나 기준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어떻게 자식을 훌륭하게 성장하도록 하여 인류사회에 이바지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일일이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내용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랑의 방법도 내용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셋째, 성선과 그 실현에 관한 문제다. 다산은 성性을 마음의 기호라고 하여 그것을 다른 경전들을 인용하여 논증하였다. 인간의 육체나 마음이 수많은 사물들 감정들을 좋아하는 내용을 종합적으로 기호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이 예를 든 공자나 맹자 등은 대부분 성인이거나 충분히 지적 능력이 발전된 사람들의 기호이다. 만약 아직 충분한 수양이 완성되지 않은 유아나 어린이들이라면 그들의 기호도 모두 성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다산도 성선을 인정하였는데 이렇게 되면 다산이 말한 성선은 기호의 선善이다.
도덕적 선善의 근거에 관한 이론은 다양하지만 철학적 도덕형이상학은 인간의 자기 통찰과 직관에 의한 윤리관의 정립을 목표로 한다.
성리학의 윤리관은 그 전형적 이론이다. 일반적으로 성리학자들은 사단四端이 성선의 구체적 내용이자 도심道心의 본질로서 인간의 성性에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다산의 성기호설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논리는 사단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산은 사단을 단지 하나의 구체적 덕목인 인仁·의義·예禮·지智(四德)를 실천하기 위한 ‘바른 실마리[端緖]’라고 보고, 그 자체가 지선至善이나 최고의 가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산의 논리에 따르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측은惻隱은 분명히 마음이 느끼는 감정이므로 측은은 기호라 할 수 있다. 다산의 이러한 견해는 마음에 내재한 내용이 구체적 도덕가치인가 아니면 기능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 도덕적 선善의 원천은 결국 마음에 내재된 기능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다산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 선善한 것은 도심의 기호가 있기 때문이며, 이 도심의 기호는 천명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성선은 상제의 권능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성리학과 다산학의 차이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질(四德)을 유학적 전통 내부에서 확인함으로써 자기철학의 초석을 다지려는 주희와, 그같은 보편의 형이상학적 본질을 부정하고 인간에게 고유한 실제적 본성(四端)만을 긍정한 다음, 그 가능성을 사회적 맥락에서의 실천적 훈련을 통해 실현하고 확장하려는[擴充]”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다산학과 성리학의 관계에 대한 입장의 문제다. 논자는 성리학의 의리적 관점에 의한 경전해석이 경전을 왜곡하였다거나 혹은 입장이 다른 해석을 두고 다른 해석을 극복하였다고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의 오류라고 생각한다. 성리학도 분명히 당말唐末의 사회적 혼란과 도덕적 해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정립된 새로운 학문이었다. 이 점은 다산의 실학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경전에 대한 해석은 각각 그 시대의 학문조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론적 비교검토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방적 주장은 지양되어야 한다. 크게 보면 다산의 수사학적洙泗學的 경학經學도 경전해석의 한 조류며, 성리학의 의리적 경학도 그 하나다.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그 실현가능성을 논하면서 도덕원리나 법칙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유가 없는 것이 이론적으로 완전한 체계를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산이 성선의 실현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의 관념성과 추상성을 배제하는 것은 다산의 비판대상이 성리학을 빌어 사리사욕을 일삼는 당시의 일부 관료나 위군자僞君子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리학과 주자에 대한 다산의 평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성리학은 도道를 알고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스스로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의道義에 힘쓰는 것이다. 역대전易大傳에서 ‘리를 궁구하고 성性을 다함으로써 명命(天命)에 이른다’고 하였으며, 중용에서는 ‘자신의 성性을 다할 수 있으면, 사람의 성을 다할 수 있고, 사람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사물의 성을 다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맹자는 ‘그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그 성性을 알고 그 성을 아는 사람은 하늘을 안다.’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성리학이 근본하는 바이다.
주자는 이것을 근심하여 이에 한대漢代와 위진魏晋시대의 훈고학訓詁學 외에 따로 정의正義를 구하여, 집전集傳과 본의本義로 삼았으며, 집주集注와 장구章句 등으로써 이 도道(儒學)를 중흥시켰다. 그 풍성한 공功은 성대하고 강렬强烈하니 한유漢儒와 비견할 바가 아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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