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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사상

다산의 인(仁)개념의 인식과 실천

작성자스토리|작성시간16.07.28|조회수95 목록 댓글 0

 

 

다산의 인()개념의 인식과 실천

 

1. 개념 인식과 실천과제

 

󰡔논어󰡕를 통해 제시된 공자의 가르침에서 핵심의 주제는 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자가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었다[吾道一以貫之.<이인里仁>]”라고 발언한 데 대해, 제자인 증자曾子선생의 도는 충서忠恕일 뿐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규정하였는데, ‘충서忠恕가 바로 다산의 해석처럼 인의 실현방법이라면 공자의 하나로 꿰뚫은 도이라 하여도 아무 문제될 일이 없을 것이다. 공자는 사람이 인하지 않으면 예법은 무엇에 쓰겠는가? 사람이 인하지 않으면 음악은 무엇에 쓰겠는가?[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팔일八佾>]”라고 말한 것도 예·의 기본적인 교화敎化기능도 인이라는 인격의 도덕성을 전제로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은 공자에 의해 도덕적 규범의 중심개념으로 제기되고 있는 만큼, 󰡔논어󰡕를 통한 도덕론의 이해는 인개념의 인식과 실현의 문제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고 실상에 밀착될 수 있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다산이 󰡔논어󰡕의 해석에서 의 문제를 해명하고 있는 것은 그의 경학사상이 지닌 핵심적 과제의 하나라 할 수 있고, 개념을 통한 인간관의 새로운 정립은 그의 사상 전반에 깊이 연관되고 있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의 문제에 대한 해명에서 다산은 인의 성립근거요, 실현기반으로서 인간의 ’(성품)개념 해석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주자의 해석에서 벗어나 개념을 독자적으로 정의하면서, 그 개념적 의미를 다양하게 입증해가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실제로 다산의 사상적 전체면모는 그가 어떻게 인개념을 정의하고 실현방법을 제시하는지를 이해할 때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은 󰡔논어󰡕의 해석을 통해 를 중심으로 하는 인의 실현방법을 해명하는 데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이 여러 도덕규범의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도덕규범의 중추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 위치가 확인되는 만큼, 사실상 도덕적 실현은 인을 중추로 하는 다양한 도덕규범의 실천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 그만큼 인의 실현에서는 효···을 비롯한 도덕규범들의 실천이 함께 가는 것임을 주목하고 있다. 곧 인과 다양한 도덕규범들의 연결 관계가 확인된다면, 의 실현이 바로 도덕의 실현이 되고, 다산의 󰡔논어󰡕해석에서 행인론行仁論이 바로 도덕론道德論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핵심적 도덕규범으로서 개념을 해명하면서 다산은 특히 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성립하고 실현되는 것임을 주목하였다. 따라서 인의 실현은 단순히 도덕적 인격의 실현을 위한 과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사회적 질서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곧 인간의 개인적 도덕성과 사회적 질서는 별개의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처음부터 서로 연결되고 서로 침투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개념에 대한 다산의 이해는 언제나 개인의 내면적 인격성과 사회의 공동체적 질서를 향하여 양방향으로 열려있는 것이요, 동시에 양쪽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바로 이 점에서 다산의 󰡔논어󰡕해석체계가 지닌 전체적 구조를 보면, 개인내면성에 좀더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인격론人格論과 학행론學行論의 문제는 행인론行仁論(도덕론道德論)을 열결 고리로 하여 사회질서 속으로 좀더 넓게 퍼져있는 예악론禮樂論과 치도론治道論의 문제와 사이에 서로 핏줄과 근육이 뻗어나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만큼 의 문제는 󰡔논어󰡕의 핵심문제요, 또한 다산의 󰡔논어󰡕이해에서 중심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의 근거로서 인성

 

1) 인성 개념의 인식

 

인성 개념-성상근性相近과 습상원習相遠의 해석

 

다산은 인간이 인을 핵심으로 하는 도덕규범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도덕성을 지향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고, 바로 이 근거를 성이라고 본다. 󰡔논어󰡕에는 요가 순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면서 그 중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允執其中.<요왈堯曰>]”고 훈계한다. 여기서 다산은 이란 하늘이 명한 성이다. 사람의 성은 지극히 선하니, 이 성을 붙들어 지킬 수 있으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고 밝혔다. 곧 천명天命으로서 지선至善한 성(인성人性)을 지킴으로써 천하에 인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성에 근거하여 실현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다산에서 드러나는 인개념 인식의 특성은 그의 인성人性개념에 대한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논어󰡕해석에서 다산이 보여준 인성론의 견해는 공자가 성품은 서로 가깝고, 관습은 서로 멀다[性相近也, 習相遠也]”라는 말과 오직 상지上知와 하우下愚는 옮겨지지 않는다[惟上知與下愚, 不移.<양화陽貨>]”라는 말을 연결된 말로 보고,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석하는 집중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성품)개념이 ’(관습)과 대비되고 있는 것은, 대조적인 두 개념의 비교를 통해 성개념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다산은 본심本心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本心之好惡]’이라 하고, ‘듣고 봄의 익숙함[聞見之慣熟]’이라 정의하여, 본심과 감각적 경험의 차이로 확인하면서, “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성품은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이 모두 같으니 이 때문에 본래 서로 가까운 것이지만, 현인賢人과 친하게 지내는지 소인小人과 허물없이 지내는지의 습관은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르니 이 때문에 끝내는 서로 멀어지는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천명天命으로서의 선천적인 인간의 성품[人性]은 사람에 따라 차등이 없다는 인성동일설人性同一說과 사람이 생활 속에서 후천적으로 경험하는 데 따라 익숙해지는 관습은 사람마다 얼마든지 달라지게 된다는 관습부동설慣習不同說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산이 본심本心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라 정의한 것은 성을 성질의 측면으로 파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질인 의 주체가 되는 본심이 무엇인지 함께 밝혀져야 할 문제로 제기된다. 여기서 다산은 옛 경전을 점검하여 대체大體’·‘도심道心’·‘의 세 가지 연관개념을 제시한다. 옛 경전에서는허령虛靈함의 본체本體로 말하면 대체大體라 하고, 대체가 발현하는 것으로 말하면 도심이라 하고, 대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말하면 성이라 한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한다는 것은 하늘이 사람의 태어나는 처음에 허령虛靈한 본체本體의 속에다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성을 부여한 것을 말하는 것이요, 을 본체本體라 이름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것은 󰡔맹자󰡕에서 제시한 대체大體를 인간의 본심으로서 영명靈明함의 본체라 하고, 󰡔도경道經󰡕(󰡔순자󰡕에서 인용됨)에서 말하는 도심道心을 대체大體의 작용이라 하고, 여러 경전에서 말한 을 대체大體의 성질로 규정하여 본심本心의 존재양상을 세 가지 영역으로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산은 이란 기호嗜好와 염악厭惡로 명칭을 세운 것이다라고 하여, 이 본체(실체)로서 대체大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체大體가 덕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기호嗜好로서 성질을 가리키는 것임을 강조하고, 그 덕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기호嗜好가 천성天性(타고난 성질)임을 경전에서 성을 언급한 여러 구절에서 입증하고 있다.

 

습상원習相遠의 양상-상지上知·하우불이下愚不移의 해석

 

다산은 습상원習相遠’(관습은 서로 멀다)의 구절과 유상지여하우부이惟上知與下愚不移’(오직 상지上知와 하우下愚는 옮겨지지 않는다)는 구절을 긴밀하게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상지上知는 비록 악인惡人과 더불어 서로 친숙해도 오염되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우下愚는 비록 선인善人과 더불어 서로 친숙해져도 훈도薰陶되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것이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란 친밀해져 익숙해지는 것이요 배어들어 익숙해지는 것이지, 자신이 선을 함에 익숙하게 되거나 악을 함에 익숙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이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이나 익숙해진 주위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수동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을 수동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상지上知·하우下愚의 부이不移를 수동적 의미로 한정함으로써, 인간의 능동성에서 고착되어 변하지 않는 부이不移를 거부하는 입장을 명확히 밝히는데 의도가 있다. 그는 와 우란 지혜의 우열이다. ·는 성이 아니다. ······ 상지上知와 하우下愚는 그 성품에서는 서로 같고, 다만 그 지혜에 우열이 있을 뿐이다라고 밝혀, 상등의 지혜로운 사람으로 상지上知와 하등의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우下愚는 성품에 따르는 구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도모하는 방법에서 무엇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아는 능력의 차이로 규정한다. 이 점에서도 상지上知·하우下愚의 차이란 단지 지혜와 능력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일 뿐이요, 성품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로 확립하고 있다.

 

따라서 다산은 덕에 나아가고 학업을 닦는 일에서는 상지上知의 성인聖人도 나날이 진보해가야 하는 것이지 잠지도 정지할 수 없는 것이며, 하우下愚의 경우도 나날이 악으로 빠져들고 있어서 잠시도 정지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그만큼 상지上知나 하우下愚가 태어나면서 고정된 품성을 지녀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견해를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다만 상지上知는 악을 보고도 악에 빠져들지 않는 지혜를 이루었고, 하우下愚는 선을 보고도 선으로 나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기 때문에 악에 물들지 않거나 선에 나가지 못하는 불이不移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곧 성품은 성·과 지·에 따라 차이가 없는 동일한 성품이며, 인간은 선이나 악으로 향하여 얼마든지 향상과 타락을 할 수 있는 가변적 존재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지上知가 불이不移한다는 것은 악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의미 일뿐 태어나면서 덕이 완성되어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며, 하우가 불이不移한다는 선의 훈도에 따라가지 못한다는 의미일 뿐 태어나면서 선으로 향해 옮겨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은 아니라 본다. 곧 노둔하지만 덕을 이루어 상지上知에 올라간 자도 있을 수 있고, 총명하지만 덕을 상실하여 하우下愚에 떨어진 자도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다산은 그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상지上知라 하는 것이지, 상지上知이기 때문에 옮겨지지 않는 것은 아니요, 그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하우下愚라 하는 것이지, 하우下愚이기 때문에 옮겨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란 자신을 도모함에서 교묘하고 졸렬한 것이지 어찌 성품의 등급이겠는가. ‘성품이 서로 가깝다는 것은 단지 한 등급일 뿐이니, 어찌 상··의 세 등이 있겠는가. ··3등급의 이론은 천고千古의 큰 장애물이니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불이不移’(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상지上知나 하우下愚라는 인격을 이루는 근본적 조건이 아니라 단지 상지上知나 하우下愚의 행동양상이 지닌 특징의 한가지임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상지上知·중인中人·하우下愚로 인간의 성품을 나누고, 상지上知와 하우下愚는 불이不移하지만 중인中人만이 위로 오르거나 아래로 떨어지는 이동移動이 가능한 것이라 하여, 성품을 3등급으로 나누는 견해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다산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성품을 3등급으로 나누어 놓는 것은 인간이 타고나는 성품을 등급화 함으로써 자신의 노력이나 행동에 의한 변화가능성을 막아버리는 심각한 폐단이 있다는 것이다.

 

2) 본연·기질설의 비판과 성의 선악설에 대한 검토

 

본연本然·기질설氣質說의 비판

 

주자는 성상근性相近의 성기질氣質을 겸하여 말한 것[兼氣質言者]’이라 하고, 본연지성本然之性은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가깝다고 할 수 없지만 기질지성氣質之性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 지적함으로써, 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이중구조로 해석하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다산은 우선 주자가 본연本然·기질氣質의 설로서 심체心體를 곧바로 가리켜 은미隱微한 이치를 밝혀냄으로써 인간이 자기인식을 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공로가 크다고 본연本然·기질설氣質說에 기초한 인성론人性論이 지닌 의의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본연本然이라는 명칭이 실리實理에 어긋난다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주자의 인성론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늘이 속마음을 내려준 것은 반드시 신체가 잉태된 이후에 있는 일이니 어찌 본연本然이라 할 수 있겠는가. 불가佛家에서 청정淸淨한 법신法身은 스스로 시작하는 때가 없으며 본래 스스로 존재하고, 하늘의 제조製造함을 받지 않아서 시작도 없고 끝남도 없으므로 본연本然이라 이름붙이니, ‘본래本來의 자연自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체는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시작이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성령性靈은 하늘로부터 받았으니 시작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시작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면 본연本然이라 말할 수 없으니, 이것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허령虛靈한 본체本體는 맹자孟子대체大體라 했으니, 이것이 그 바른 명칭이 되지 않겠는가.”

 

다산은 먼저 하늘이 내려준 속마음[]’, 곧 성은 신체가 생겨난 다음에 부여되는 것임을 밝힌다. 이에 비해 본연本然은 불교의 용어로서 시작도 끝도 없는 본래本來의 자연自然이니, 충충[]을 본연本然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산은 인간 마음의 허령虛靈한 본체本體[]’를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 일컫는 것은 실상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맹자가 말한 대체大體를 그 바른 명칭으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다산은 허령虛靈한 본체本體로서 인간의 심체心體의 명칭을 대체大體라 하고, ‘대체大體의 좋아하고 싫어함이라 규정하고 있는 만큼, 의 개념을 해명하기에 앞서 대체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맹자는 대체大體를 따르면 대인大人이 되고, 소체小體를 따르면 소인小人이 된다[從其大體爲大人, 從其小體爲小人.<고자상告子上>]”라고만 말하였지만, 다산은 이 대체大體의 개념을 영명靈明함의 본체[靈明之本體]’라 규정하였다.

 

우선 다산이 인간의 본심으로서 대체大體의 개념을 해명하기 위해서 인간과 다른 사물의 존재양상을 비교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는 모든 살아 있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존재 곧 생명체를 3등급으로 구별하여, 초목草木생활함은 있으나 지각이 없고’, 금수禽獸지각이 있으나 영명함이 없고’, 사람의 대체大體이미 생활함이 있고 지각이 있으며 또 영명함의 신묘한 작용이 있다고 그 차이를 밝힌다. 이처럼 인간의 대체大體는 초목의 생활[]’과 금수禽獸의 감각적 지각[]에다 더하여 이성적 인식능력이라 할 수 있는 영명함의 신묘한 작용을 누적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산이 생명체의 존재양상을 이렇게 3등급으로 구별하는 견해와 매우 긴밀한 유사성을 보여주는 이론으로서, ① 󰡔순자󰡕(왕제王制)에서는 수화水火(유기이무생有氣而無生초목草木(유생이무지有生而無知금수禽獸(유지이무의有知而無義(유기유생유지역차유의有氣有生有知亦且有義)로 나누었고, 17세기 초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천주교선교사로서 마테오리치(Mateo Ricci)󰡔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심을 수심獸心·인심人心으로 구분하고 성을 형성形性·신성神性으로 나누면서, (anima)을 생혼生魂(초목草木각혼覺魂(금수禽獸영혼靈魂(인간)으로 나누어 Aristoteles의 영혼론에 따라 혼삼품설魂三品說을 제시하였으며, 카발레라(Caballera)󰡔천유인天儒印󰡕에서 생성生性(초목)각차생지성覺且生之性(금수)영이차각생지성靈而且覺生之性(인간)의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제시하고 있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다산은 인간존재가 식물도 지닌 생명과 동물도 지닌 지각과 인간만이 고유하게 지닌 영명함을 갖추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존재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곧 인간존재의 현실은 모든 사물을 포함하여 빠뜨림이 없고, 모든 이치를 유추하여 깨달음을 다할 수 있으며,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함이 양지良知에서 나오니, 이것이 금수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이다. 다만 그 산천과 풍속이나 부모의 정기와 혈액을 받아 기질이 되니 맑고 혼탁하며 중후하고 경박한 층차가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대체大體는 이 기질에 갇히니 따라서 지혜롭고 우둔하며 소통하고 막히는 달라짐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산은 인간의 대체大體는 타고나면서 지닌 지각능력인 양지良知에 따라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성질을 지닌 동시에, 이 대체가 환경[山川風氣]과 유전[父母精血]의 요소에 따르는 기질氣質의 맑고 혼탁하며 중후하고 경박한 층차[無淸濁厚薄之差]에 얽매이면서 인간존재에는 지혜롭고 우둔하며 소통하고 막히는 달라짐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대체의 본래 모습으로서 영명靈明함과 기질의 제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 상황의 이중성으로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다산은 인간존재가 마음과 신체의 결합인 것처럼, 인간의 마음에서도 영명한 대체와 신체적 욕구인 소체小體를 대립적으로 파악하면서 현실의 인간은 대체와 소체가 오묘하게 결합되어 분리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그 체를 논한다면 다만 하나의 체이지만, 오직 하나의 대체大體 가운데 초목草木처럼 생활을 포함하고, 금수禽獸처럼 지각하며, 또한 역상易象을 궁구하고 역수曆數를 계산하여 신묘神妙하고 영통靈通하니, 하나의 체가운데 세 가지 성(··)이 정립鼎立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하나의 체가운데 세 가지 성이 정립鼎立한다면 사람은 반드시 영묘靈妙가 이미 끊어졌어도 오히려 촉각觸覺할 수 있는 자가 있고, 촉각觸覺이 이미 끊어져도 오히려 생활生活할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다. 어느 세상의 사람이든지 살면 전체가 살고 죽으면 전체가 죽는 것이지 이러한 차이가 생길 수 없으니, 그 오묘하게 결합하여 분리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오묘하게 결합하여 분리될 수 없다면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큼직하게 두 개의 체로 확고하게 나눈다는 것은 아마 착오인 듯하다. 하물며 성이란 대체大體의 전체적 명칭이 아니요, 그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치를 붙잡아 별도로 하나의 명칭을 세운 것이니 이것은 두세 가지로 가리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산은 인간 마음의 본체는 그 속에 식물적 생성生性(생활)과 동물적 지성知性(촉각)과 인간고유의 영성靈性(사유)을 포괄하여 하나의 대체大體를 이루고 있는 것이지, 생성·지성·영성의 세 가지가 솥의 세 발처럼 각각 정립鼎立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여기서 그는 이 세 가지 성이 일체를 이루어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에 살거나 죽거나 함께 있지 하나가 죽어도 다른 것이 남아 있을 수는 없다고 본다. 이에 따라 그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갈라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한 성을 대체大體의 기호嗜好[好惡]로 해석하는 그의 성개념과도 적응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다산은 본연지성本然之性을 인간과 사물에 동일하게 부여되었다는 본연지성인물개동설本然之性人物皆同說에 대해 불교에서 끌어온 개념이라 규정하고 정면으로 거부입장을 밝히고 있다. 곧 한 사람의 임금이 내리는 명령도 직급에 따라 다르게 부여되듯이 인간과 사물에 각각의 성품이 부여되었음을 강조하고, 순자荀子가 수화水火의 기, 초목草木의 생, 금수禽獸의 지, 인간의 의를 계층적으로 제시하고 상층의 성은 하층의 성을 내포할 수 있는 것이라 제시한 견해를 합리적인 것으로 본다. 오히려 그는 도의지성道義之性은 사람에게만 있고 사물에게는 없으니 각각 다르게 부여되었지만 기질지성氣質之性은 인간과 사물이 공통으로 부여된 것이라 하여, 주자의 견해를 정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다. 그는 주자의 본연지성인물개동설本然之性人物皆同說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이 동일한 본연지성을 지닌 만큼 사물까지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 하고, “하늘이 세상을 한 집안으로 삼아 사람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고 일월日月·성신星辰과 초목草木·금수禽獸로 하여금 이 집을 위해 받들게 한다고 하여,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이요, 일월日月·성신星辰과 초목草木·금수禽獸는 모두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인간과 동일한 성품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다산의 인물부동성론人物不同性論은 자연은 인간을 위한 도구요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 선악설善惡說에 대한 해석

 

다산은 성개념을 대체大體가 덕[]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성질로 규정하는 만큼 성은 선하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확고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유교사상사에서는 맹자 당시부터 인성人性의 선·문제가 중요한 논쟁점이 되어왔고,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어 왔다. 다산은 먼저 후한後漢 순열荀悅󰡔신감申鑒󰡕에서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 공손자公孫子의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 양웅揚雄의 성선악혼설性善惡渾說, 유향劉向의 성정상응설性情相應說(성부독선性不獨善, 정부독악情不獨惡)의 다섯 가지를 열거하고 있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맹자孟子·순자荀子·공손자公孫子·양웅揚雄의 네 가지 견해에 대해 각각의 주장이 근거하는 바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여기서 그는 유향劉向의 견해는 이치가 통하지 않는 것이라 하여 제외하였고, 그밖에도 한유韓愈원성原性에서 제시한 성삼품설(상선上善·중가도상하中可導上下·하악下惡)에 대해서도 잘못된 것으로 부정하였으며,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대체大體의 본래 모습을 얻은 것이라 확인하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다산은 인성人性의 선악문제를 분석하는 자신의 이론적 근거를 밝히면서, “사람이란 신(정신)과 형(신체)이 오묘하게 결합하여 혼연하게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발동하여 마음이 되는 것은 도의道義로 인하여 발동한 것이 있으니 도심道心이라 하고, 형질形質로 인하여 발동한 것이 있으니 인심人心이라 한다라고 하여,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이라는 인간의 마음이 발동하는 두 가지 양상을 주목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의 발동이라는 마음의 작용양상으로 성선악설性善惡說의 네 가지 주장을 조명하여, 각각이 지닌 논거와 그 성개념이 지시하는 내용을 분석하고 있다.

 

성선설性善說(맹자孟子): [논거] 도심道心이 있기 때문에 선·을 밝힐 수 있고, 또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할 수 있어서, 마침내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데까지 이른다./ [지시]

 

성악설性惡說(荀子): [논거] 인심人心이 있기 때문에 재물을 탐내고 여색女色을 좋아하며 편안함을 생각하고 높은 벼슬을 부러워하니, 을 따르기는 올라가는 것처럼 어렵고 악을 따르기는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쉽다./ [지시] 성지인형이괴자性之因形而壞者(이 형으로 인해 파괴된 것)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공손자公孫子): [논거] 도심道心을 주장으로 삼으면 선을 하게 할 수 있으나, 인심人心이 그 하늘을 함몰시켜 악을 하게 할 수 있으니, 선악善惡은 행사行事한 다음에 이루어지고 태어나서 고요한 처음에는 아직 정해지지 않는다./ [지시] 성지우형性之遇形, 공죄미분자功罪未分者(이 형을 만났으나 공·가 아직 갈라지지 않은 것)

 

성선악혼설性善惡渾說(양자揚子): [논거]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이 번갈아 발동하여 맞서 싸운다./ [지시] 성지우형性之遇形, 경태교전자敬怠交戰者(이 형을 만나 경·가 서로 싸우는 것)

 

다산은 맹자가 개념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지만, 다른 경우에는 성의 어떤 특정한 상태를 가리키는데 치우쳐 있어서 성의 본래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는 사람이 사람 되는 까닭은 그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함이니, 이것이 천명天命이요 이것이 본성本性이다. 오직 그 육신이 가두어 선을 가로막고 악으로 빠지는 도구가 되므로, 인심人心이 그 사이에 멋대로 발동하여 도심道心이 빠져들게 되는데, 이것이 어찌 본성本性이겠는가라고 하여, ()을 좋아하는 본래의 성품이 순선純善하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육신의 욕구에 사로잡혀 도심道心이 주도하지 못하고 인심人心이 주장하여 악에 빠지는 마음의 현실적 작용현상을 성으로 보아 성악설性惡說이나 성선악혼설性善惡渾說 등을 주장하는 것과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 다산은 이 선하다[性善]’는 것과 사람이 선하다[人善]’는 것의 차이를 밝혀, “이 선하다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성이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으로 기르면 성대하여 충만하고, 으로 먹이면 불만스러워 굶주린듯하니, 본성本性이 순선純善함이 분명하다. 사람이 선하다는 것은 이 선한 성을 따라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신을 닦아 끝까지 의를 행하고 인을 이루어 그 덕을 온전히 하는 것이다라고 대비시킨다. 곧 성선性善이란 부여받은 바탕이 선을 좋아한다는 심체心體의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요, 인선人善이란 이 바탕에 따라 선을 실행하여 덕을 이루는 도덕적 실행의 성과를 말하는 것임을 밝힘으로써, 현실에서 아무리 사악한 인간이 있더라도 그 성품이 선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만큼 인간이 도덕성을 실현하였는지 못하였는지를 평가하는 성과로서의 선악문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도덕적 실천의 가능근거로서의 성선性善함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산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선을 좋아하는 성[人性]을 부여받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인간존재는 하늘로부터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의지의 자율권[可善可惡之權]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다만 선하지 않을 수 없다면 사람에게 공로가 없다. 이에 또 (하늘은) 선을 할 수도 있고 악을 할 수도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 스스로의 주장을 들어서 선을 향하고자 하면 들어주고 악을 따르고자 하면 들어주니 이것이 공과 죄가 일어나는 까닭이다. 하늘이 이미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성을 부여해놓고서 그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함은 흐름에 따라 그 하는 바에 맡겨두니, 이것이 신권神權의 오묘한 뜻으로 엄숙하고 두려워할 일이다. 왜 그런가하면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이미 분명하니, 이로부터 선을 향하는 것은 너의 공로요 악을 따르는 것은 너의 죄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품이 선을 좋아하는 선한 것이라는 사실은 타고난(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질일 뿐, 그 성질의 실현여부는 전적으로 인간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의지의 발현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선을 할 수도 있고 악을 할 수도 있는 권한[可善可惡之權]’은 도덕적 자유의지를 의미하며, 다산은 성이 선함은 인간의 공이 아니요, 오직 선을 할 것인가 악을 할 것인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데 따라 공과 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은 도덕적 자유의지가 없이 본능에 고정되어 있는 동물과 근본적 차이가 있음을 확인한다. 특히 다산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선한 성품을 부여받은 사실을 넘어서 자주적 결정권한을 부여받음으로 공·가 판정된다는 사실에 대해 엄숙하고 두려워해야할 신권神權의 오묘한 뜻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처럼 그는 인이라는 도덕규범의 근거에 성을 확인하고, 의 근원에 하늘을 발견하며 하늘에 대한 두려움에 도덕성의 근원적 기반을 확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인성人性의 선악문제와 기질氣質의 관계에 대해 다산은 “(기질은) 본성本性의 선·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 선유先儒가 번번이 기질氣質의 청·으로 선을 하고 악을 하는 근본으로 삼으니 착오가 없는 듯하다고 하여, 성리설에서 인성人性의 선·을 기질氣質의 청·에 따른 것으로 설명하는 견해를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곧 다산은 선·악의 행위란 인간의 의지가 결정하는 것인 만큼 타고나는 본성의 선함과도 구별되어야 하지만 역시 타고나면서 주어진 기질의 차이가 도덕적 행위의 일차적 원인이나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개념과 실천원리로서의 서

 

1) 개념의 인식

 

공자는 제자 번지樊遲에 대해 질문하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안연顔淵>]”이라 대답했다. 이에 따라 다산은 을 정의하여, “이란 사람을 향한 사랑이다. 자식이 부모를 향하고, 아우가 형을 향하고, 신하가 임금을 행하고, 수령이 백성을 향하는 것이요, 무릇 사람과 사람이 서로 향하여 애틋하게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언명하였다. 여기서 다산은 을 정의하면서, 공자가 말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란 의미를 사람과 사람이 서로 향하여 사랑하는 것이라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로 그 의미를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남을 향한 사랑으로서 나의 행위 가운데 한 가지 양상일 수 있다면, ‘사람을 향한 사랑이라는 해석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심화된 해석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의 인식은 논어대책論語對策에서도 이미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이란 두 사람이다. 옛 전서篆書에서는 를 중첩시켜 로 삼았다. ······ 이란 사람과 사람의 지극함이다. 자식이 부모를 효도로 섬기니 자식과 부모는 두 사람이고, 신하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니 신하와 임금은 두 사람이고, 형과 아우는 두 사람이고, 수령과 백성은 두 사람이다. 이로 말미암아 관찰하면, 창힐倉頡과 복희伏羲가 문자를 제작한 처음에 원래 행사行事로써 회의會意한 글자이다라 밝히고 있다. 의 글자모양이 과 이두 글자가 결합된 것이요, 옛 전서篆書에서는 인인人人으로 되어 있는 사실을 들어서, ‘가 두 사람 사이에 실행[行事]되는 도리를 의미하는 회의會意문자임을 지적한 것이다.

 

개념은 인을 실행하는 방법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제자 안연顔淵에 대해 질문하자, “자기를 이기고 예법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루에 자기를 이기고 예법을 회복하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 을 하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 말미암는 것이겠는가[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顔淵>]”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대해 다산은 세 단락으로 나누어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자기를 이긴다[克己]’는 것은 자기[,]’에게 대체大體와 소체小體의 두 가지 몸[]이 있어서 대체大體가 소체小體를 이기는 것이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두 가지 마음[]이 있어서 도심道心이 인심人心을 이기는 것이라 해석한다. 하루에 자기를 이긴다[一日克己]’는 것은 하루 동안 자기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분발하여 힘써 행하는 것이라 확인한다. 을 하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는 것이란 인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인을 행하는 것은 나에게서 말미암는 것이요 남에게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며, 두 사람이 함께 인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먼저 다산은 후한後漢의 마융馬融극기克己’(자기를 이긴다)약신約身’(자기를 단속한다)로 해석한 것을 비판하면서, 맹자孟子 이후 도맥道脈이 끊어져 한유漢儒의 경전 해석은 문자文字에서만 훈고訓詁를 하여, 인심人心·도심道心의 구분과 소체小體·대체大體의 차별을 알지 못하며, 인성人性과 천도天道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극기克己에서 수의 유현劉炫이기는 것[]’이라 해석하고, 주자朱子자신의 사사로운 욕심[身之私欲]’이라 해석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송학宋學이 지닌 의미까지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맹자孟子가 본심本心을 산의 나무에 비유하고 사욕私欲을 도끼에 비유하였으니, 산의 나무에 대해 도끼는 큰 원수가 되는 것이다. ‘자기로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무수한 성인聖人과 성왕聖王이 한 가닥으로 대를 이어 전수해주는 오묘한 뜻이요, 긴요한 말씀이다. 이것에 밝으면 성현聖賢이 될 수 있지만 이것에 어두우면 금수가 되고 만다. 주자朱子가 우리 도를 중흥中興한 시조가 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중용󰡕의 서문을 지으면서 이 이치를 발명하였기 때문이다.

 

근세의 학자들이 송·의 여러 유학자들의 기·에 대한 논의와 속으로 선학禪學을 받아들이면서 겉으로 유학儒學을 내세우는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여, 경전을 논의하고 해석함에 한결같이 한·의 학설을 따르고자 하며, 의리가 송유宋儒에게서 나온 곳은 곡직曲直을 묻지 않고 한결같이 반대하는 것을 일삼았다. 그 한두 사람 심술心術의 병통은 버려둔다 하더라도, 장차 온 천하의 사람들이 겨우 얻은 바를 잃게 하고 겨우 밝힌 것을 어둡게 하여, 도도하게 휩쓸어 금수禽獸가 되고 목석木石이 되게 하니 작은 일이 아니다.”

 

다산이 주자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높이는 대목이며, 그만큼 자기로 자기를 이긴다[以己克己]’는 인간내면의 인심人心·도심道心 내지 대체大體·소체小體의 이중적 갈등구조에 대한 인식이 인간존재의 인식에서 핵심의 요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산이 당시 청대淸代 고증학에서 한학漢學(한대漢代 훈고학訓詁學)을 따르고 송학宋學(송대宋代 성리학)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태도에 대해 금수禽獸나 목석木石으로 인간성을 상실하게 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 그가 성리학의 인성론이 지닌 인심人心·도심道心의 갈등구조를 통한 인간 이해를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다산은 주자가 󰡔논어집주󰡕에서 인본심의 온전한 덕[本心之全德]’이라 해석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단호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의 명칭은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다(단지 자기 한사람만 있으면 인이란 명칭은 세울 곳이 없다). 가까이는 오교五敎(오상五常의 교: 부의父義·모자母慈·형우兄友·제공弟恭·자효子孝)에서 멀리는 천하의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무릇 사람과 사람이 그 본분을 다하는 것을 인이라 한다고 하여, 이 본심本心에 내재된 덕성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쟁점은 공자가 안연顔淵의 질문에 답하면서 자기를 이기고 예법을 회복하는 것[克己復禮]’라고 대답하여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설명한 사실이 을 두 사람의 관계라는 해석과 충돌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점이다. 이에 대해 다산은 공자의 이 대답을 보면 새롭고 기이한 것으로서 범상한 것을 벗어난 것이다. 마치 동쪽을 물었는데 서쪽으로 대답하는 것과 같아서. 일깨워 격발시킨 것이요 평탄하고 순조롭게 말씀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음 단락에 그 까닭을 부연 설명하여, 내가 만약 스스로 닦으면[克己復禮] 사람들이 모두 순응해온다[天下歸仁焉]고 말하였다라고 해명하고 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을 말한 것은 인에 대한 대답의 완성이 아니고, 천하의 사람이 순응해오는 천하귀인天下歸仁과 상응하여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서 인의 본래 모습을 전체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해명은 두 사람의 관계 속에 성립하는 것으로 보는 자신의 개념을 일관하게 적용시키기 위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다소 궁색한 해명으로 보이는 점도 있다. 오히려 사람을 향한 사랑[嚮人之愛]’으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라 규정하는 것은 인의 구현과정에서 전체적 양상을 파악한 것이라면 자기를 이기고 예법을 회복하는 것[克己復禮]’으로 규정하는 것은 인의 실천방법에서 주체적 조건을 파악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다산은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 직접적 연관관계로 를 설명한 공자의 언급들(“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옹야雍也>”, “施諸己而不願, 勿施於人.<중용中庸>”)이 모두 극기克己와 일치하는 것이라 하여, ‘극기克己가 바로 가 될 수 있음을 밝히기도 하며, 또한 을 추구하는 자는 반드시 서에 힘쓰며, 에 힘쓰는 자는 반드시 자기를 극복한다. 그러나 극기克己는 인을 추구하는 방법이지 인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극기克己를 통한 강서强恕’(에 힘씀)의 실행과 강서强恕의 실행을 통한 구인求仁’(을 추구함)의 실천적 조건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안연顔淵극기복례인克己復禮仁의 실천조목을 물었을 때. 공자는 예법이 아닌 것은 보지 말고, 예법이 아닌 것은 듣지 말고, 예법이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법이 아닌 것은 행동하지 마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안연顔淵>]”의 이른바 사물四勿로 대답했다. 이에 대해 다산은 인간에게 예법이 아닌 것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려고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도록 제시한 것임을 지적하고, “욕구()라는 것은 인심人心이 하고자 하는 것이요, 하지 말라()는 것은 도심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저것은 하고자 하고 이것은 하지 말라고 하여 둘이 서로 싸우는데, 하지 말라는 것이 이기는 것을 극기克己라고 한다고 하여, 마음속에서 인심人心·도심道心의 갈등구조에 근거하여 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다산은 설암선사雪菴禪師가 말한 것으로, “귀가 듣고, 눈이 보고, 입이 말하고, 몸이 행동하는 것은 노복奴僕이요, 마음이 그 속에 주장하여 지키니 주인主人이다. 주인이 총명함을 진작시켜서 노복奴僕에게 명령하면 모두 복종하여 명령을 받드니, 하지 말라는 것은 주인으로 노복의 말을 따르지 않게 하고 노복으로서 주인을 이끌지 않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선학禪學이라 하여 배척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고, 그 비유의 적절함에 적극 찬동하는 뜻을 밝히고 있다.

 

다음으로 다산은 일일극기복례一日克己復禮일일一日을 마융馬融·형병邢昺·주자朱子가 모두 하루 동안이라는 기간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거부하고, “하루아침에 선으로 옮겨가 예법의 마당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다라고 하여, ‘하루아침에이라는 실천의 결의를 하는 계기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은 두 사람의 일이니, 두 사람의 일이지만 오로지 책임은 한 사람에게 있다. 그러므로 공자가 그 공효功效를 설명하여, 하루아침에 자기를 이기고 예법을 회복하면 천하의 사람이 귀화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실천이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인 만큼 자신이 결심하고 실천하는 공효功效가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퍼져 모든 사람을 감화시켜 인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인을 실현한다는 것이 오직 자신의 주체적 결심에서만 가능한 것이요, 그 실천의 성과와 더불어 실천주체로서 자신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공자가 내가 인을 하고자 하면 인에 이르른다[我欲仁, 斯仁至矣.<술이述而>]”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로 확인되며, ‘을 하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는다[爲仁由己]’는 구절도 인의 실천주체와 실천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2) 의 실천원리로서 서

일관지도一貫之道와 서

 

공자는 일이관지一以貫之(하나로 꿰뚫었다)’라는 말을 두 번 썼는데, 증자曾子[]에게는 도로서 말하고, 자공子貢[]에게는 학과 연관시켜 말하였다. 주자는 이에 대해 증자에게는 행으로 말하고 자공에게는 지로 말한 것이라 하여 그 차이를 대조시키고 있다.(󰡔논어집주󰡕, 8) 그러나 다산은 이란 서이다. 를 행하여 인을 이루는 것도 진실로 일관一貫이요, 를 알아서 인을 힘쓰는 것도 역시 일관一貫이니, 와 행으로 구별하여 차이가 있다고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밝혔다. 곧 공자의 일관一貫하는 도로 확인하고, ‘가 인을 행하는 방법임을 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가 제자 증자曾子에게 일관一貫하는 도를 제시하였을 때, 증자曾子는 그것을 충서忠恕라 설명하였고,<이인里仁> 자공子貢한마디로 평생 동안 지켜야할 것을 물었을 때 공자는 라고 대답하였다.<위령공衛靈公> 여기에 충서忠恕의 차이가 문제될 수 있다. 정자程子충서忠恕에 대해 충과 서를 천도天道·인도人道로 구별하거나, 무망無妄과 충을 행하는 방법으로 나누기도 하고, ·의 관계로 파악하기도 하여, 과 서를 대비시키면서 충을 기준으로 보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다산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충서忠恕가 곧 서이다. 본래 나누어 둘로 삼아야 할 것이 아니다. 하나로 꿰뚫었다는 것은 서, 를 행하는 것이 이다라고 하여, 를 일관一貫의 중심개념으로 삼고 충은 서를 하는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그는 속마음에서 사람을 섬기는 것[中心事人]’이라 하고, ‘남의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미루어 헤아리는 것[忖他心如我心]’이라 하여, 이 서를 행하기 위한 방법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그는 공자가 말한 나의 도[吾道]’란 인도人道, 인륜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전제로, “무릇 인륜에 처한 것은 오교五敎·구경九經에서 경례經禮 삼백三百과 곡례曲禮 삼천三千에 이르기 까지 모두 하나의 로 행한다고 하여, ‘한 글자가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일관一貫의 실천원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하나의 를 붙들고 󰡔논어󰡕·󰡔중용󰡕·󰡔대학󰡕·󰡔맹자󰡕에 가보면, 천언만어千言萬語가 하나의 를 풀이하지 않은 것이 없다. 공자의 도는 참으로 이 하나의 일 뿐이다라 하고, “사서四書는 우리 도의 나침반인데, 󰡔대학󰡕󰡔중용󰡕은 모두 이 를 부연한 의리요,

 

󰡔논어󰡕󰡔맹자󰡕는 서에 힘써서 인을 추구하는 것이 거듭 보이고 겹쳐 드러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공자의 도는 하나의 일 뿐이다. 이 한 글자를 붙들고 사람을 상대하면 인을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인간관계의 모든 규범이나 사서四書의 모든 언급이 로 일관되고 있으며, 공자의 도가 바로 한 글자로 꿰뚫고 있음을 강조하여, ‘가 도의 중심개념이 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는 충서忠恕를 해석하면서, ‘자기를 다하는 것[盡己]’이라 하고, ‘나를 미루어가는 것[推己]이라 하고, 추기一理의 체[一理渾然]와 범응泛應의 용[泛應曲當]으로 설명하여, 과 서를 체용體用구조로 해석하고, 이에 따라 충을 전제로 서를 시행한다는 선후先後의 순서가 있는 것으로 이해할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 이러한 주자의 견해에 대해 다산은 정면으로 비판한다.

 

과 서는 대대對待하는 것이 아니다. 가 근본이 되고 행하는 방법이 충이다. 사람이 사람을 섬긴 다음에 충이라는 명칭이 있으니, 나 혼자 있으면 충이 없으며, 비록 먼저 스스로 자기를 다하고자 하여도 착수할 곳이 없다. 지금 사람들이 모두 충이 앞서고 서가 뒤에 오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심히 잘못되었다. 한 바로 그 때에는 이미 서한 지 오래되었다. ······ 지금 사람들이 알기로는 마치 먼저 한 가지 물건이 마음속에 있어서 충이 되고, 그런 다음에 스스로 이를 미루고 굴려서 발현하여 서가 되는 것이니, 어찌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이와 같다면 공자는 둘로 꿰뚫은 것이지, 어찌 하나로 꿰뚫은 것이겠는가.”

 

이처럼 성리학에서 충·를 상대시켜보는 관점을 철저히 비판함으로써 를 일관一貫의 원리로 확고히 정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내면의 본체로서 덕이 를 통해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실행원리로 를 정립하고 이를 실행함으로써 덕을 성취하고자 하는 실천적 동력을 확보하는 데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증자曾子가 공자의 일관지도一貫之道를 충서忠恕로 해석한 것이 공자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 “유가儒家에는 전도傳道의 법도가 없다고 하여, 증자曾子가 대답한 것이 전도傳道의 요결要訣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일관一貫을 증자曾子충서忠恕로 말한 것이 도통道統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없고, 자공子貢이 대답하지 않은 것은 막혀서 그런 것이라 할 수 없다하여, 증자曾子와 자공子貢 사이에 일관지도一貫之道의 이해에 차등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공자가 말한 일관지도一貫之道를 증자曾子충서忠恕로 설명한 것이 공자의 도를 새롭게 밝혀낸 것이 아니라, 공자의 근본적 가르침으로서 제자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로 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의 실천

 

다산은 를 인의 실천원리로 확인하여, 과 서의 관계를 해명하면서, “은 인륜人倫의 이루어진 덕이요, 는 인을 이루는 방법方法이다. 이미 성숙한 것이 인이 되고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이 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죽순이 대나무가 되고, 연꽃봉오리가 연꽃이 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곧 서를 실천하는 것이 인을 이루는 것이요, 그것은 길을 가는 것이 목적지에 가는 방법인 것처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을 설명하면서,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서게 하고, 자기가 이르고자 하면 남을 이르게 한다[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옹야雍也>]”라 하고,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위령공衛靈公>]”고 말한 것이 바로 를 실천하는 것이요, 의 실천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서는 자기와 남 사이의 인간관계에서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 바로 공자가 말한 인의 방법으로서 가까운 데서 취하여 견주어가는 것[能近取譬.<옹야雍也>]’이다. 다산은 이 말을 부연 설명하여, “가까운 데서 취하여 견주어가는 것은 법도로 헤아리는 것이요, 아래에서 취하여 견주어 위를 섬기고, 왼쪽에서 취하여 견주어 오른쪽과 사귀니, 맹자가 에 힘써서 행하면 인을 구하는데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고 언급한다. 󰡔논어󰡕에서 인의 방법으로 제시한 능근취비能近取譬󰡔대학󰡕에서 말하는 혈구絜矩’(법도로 헤아림), 맹자가 말한 강서구인强恕求仁’(에 힘써서 인을 구함<진심상盡心上>)으로 통하는 것이라 확인하고 있다. 그만큼 서는 사서四書를 관통하여 인의 실천방법으로서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다산은 공자의 일관지도一貫之道로서 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서 실천되는 것임을 강조하여,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사람사이에서 살고 있는 만큼, 가까운 관계나 먼 관계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모두가 나 한 사람과 저 한 사람의 두 사람 사이에 교제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우리 도는 무엇하는 것인가? 그 교제를 잘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에 예법禮法을 만들어 선을 유도하고 악을 막으며, 일동일정一動一靜과 일언일묵一言一黙과 일사일념一思一念에 모두 법식과 금률이 있어서 백성으로 하여금 나아가고 물러나게 한다. 그 문장으로 시···춘추春秋가 이미 천언만어千言萬語가 되고, 경례經禮 삼백三百과 곡례曲禮 삼천三千은 가지치고 잎이 벌어지며, 나누어지고 조각나며, 광대하고 질펀하니 끝까지 배울 수가 없지만 그 귀추를 요약하면 교제를 잘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그는 공자의 도가 아무리 넓어도 그 최종적 귀결점을 한마디로 집약시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교제를 잘하는 것[善於際]’이라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유교의 전체를 하나로 꿰뚫고 있는 중심축으로서의 선어제善於際’(교제를 잘하는 것)라는 인간관계로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산은 공자의 도를 이기설理氣說의 형이상학이나 자연철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구체적 인간관계의 바람직한 질서를 추구하는 인도人道로 인식하는 토대 위에서 유교의 전체를 내다보는 시야를 재정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산은 교제를 잘하는 것[善於際]’이란 상하上下·전후前後·좌우左右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강요하거나 억압함이 없이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이를 한 글자로 요약하면 바로 라고 확인한다. 여기서 그는 인간관계의 교제를 잘하는 실천방법으로서 는 인간관계의 질서에 폐쇄되어 있는 인도人道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실현하고 하늘에 근원하는 방법으로서 하늘로 연결되어 있는 인도人道임을 밝히고 있다.

 

하늘이 사람의 선·악을 살피는 것도 역시 두 사람이 서로 교제함에서 그 착한지 악한지를 감시하는 것이며, 또한 식욕·색욕과 안일安逸의 욕심을 부여하여 두 사람의 교제에서 그 다투고 사양함을 시험하며 그 근면하고 나태함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면 옛 성인聖人이 하늘을 섬기는 학문이란 인륜人倫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요, 곧 이 하나의 가 사람을 섬길 수 있고 하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다산은 서가 천도天道와 인도人道, 사천事天과 사인事人을 결합시켜주는 연결고리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만큼 는 인의 실천방법이요, 인륜人倫을 실천하는 원리이며, 일관一貫하는 도의 발현양상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4. 의 실천방법과 효제충신의 규범

 

1) 의 실천방법

 

을 실천하는 구체적 과제로서 공자는 번지樊遲의 질문에 대해 인자仁者는 어려운 일에 앞서고 이로움을 얻는 것은 뒤로 한다[仁者, 先難而後獲.<옹야雍也>]”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다산은 어려운 일에는 남보다 앞서고 이익을 얻는 일에는 남보다 뒤에 가는 것이 서이다라고 하여, 남을 향한 사랑으로 서를 행하는 데에서 인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 해석한다. 따라서 그는 공안국孔安國이 인을 하는 방법으로 노고勞苦를 먼저 하고난 다음에 공을 얻는 것[先勞苦而後得功]’이라 해석하는 것은 남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자기의 일이므로 서가 될 수 없고 인이 될 수 없음을 비판하다.

 

또한 공자는 제자 사마우司馬牛가 인에 대해 묻자, “행하기 어려운데 말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爲之難, 言之得無訒乎.<안연顔淵>]”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대해 공안국孔安國을 행하기 어렵고, 을 말하기 어렵다[行仁難·言仁難]’고 해석하였는데, 주자는 마음을 간직하기 어렵고 일을 행하기 어렵다[存心難·行事難]’고 해석하여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다산은 우리 인간의 일생 동안 행하는 일은 이라는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이란 인륜人倫의 사랑인데, 천하의 일은 인륜人倫을 벗어나는 것이 있는가? 부자父子·형제兄弟·군신君臣·붕우朋友에서 천하의 만민萬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륜의 이치이다. 이것을 잘하는 자는 인이 되고, 이것을 잘못하는 자는 부인不仁이 된다. 공자孔子가 인바깥에 일이 없음을 깊이 알았으므로 하기가 어렵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인간존재는 근본적으로 인간관계의 질서로서 인륜人倫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그만큼 인간의 삶에서 가장 포괄적인 행동원리가 바로 인임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행위일반을 어렵다고 보았던 주자의 해석이 도리어 애매하고 인을 행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던 공안국孔安國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지적한다.

 

공자는 을 담당함에는 스승에게 사양하지 않는다[當仁, 不讓於師.<위령공衛靈公>]”고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는 이란 사람이 스스로 가진 것이요, 스스로 하는 것이니, 다툼이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사양이 있겠는가라 하여, 을 심성心性에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주자의 견해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을 할 수 있는 이치는 본심本心에 있고, …… 을 행하는 근거도 본심本心에 있다. …… 그러나 인의 명칭은 반드시 행사行事한 다음에 이루어진다. …… 무릇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 본분을 다한 다음에 이라 이름하니, 다만 마음속의 아득하여 아무 조짐도 없는 이치를 가리켜 인이라 하는 것은 옛 경전의 사례가 아니다. 을 리라고 하면 사서四書󰡔󰡕·󰡔󰡕·󰡔󰡕·󰡔󰡕란 모두 읽기 어려워지며, 단지 인을 담당하여 사양하지 않는 것만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인을 마음에 내재한 이치로 보는 주자의 해석에 대한 다산의 비판은 단호하고 엄중한 것이었다. 그는 주자학을 하는 당시 사람들이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여도 될 수 없는 이유로 세 가지를 들면서, 그 하나로 을 만물을 낳는 이치라 인식하는사실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는 인을 할 수 있는 이치나 인을 하는 근거도 본심本心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인이라는 명칭이 행위를 통해 성립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의 근거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의 실천을 묻는 것이 인의 근본적 과제임을 확인한다. 그만큼 인의 실재는 그 가능근거에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정에서 성립할 수 있는 것임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며, 지자知者는 활동하고 인자仁者는 고요하며, 지자知者는 즐거워하고 인자仁者는 오래 산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옹야雍也>]”고 하여, 지자와 인자仁者의 모습을 대조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다산은 지자知者와 인자仁者를 분리시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지자知者는 인을 이롭게 여기고, 인자仁者는 인을 편안히 여긴다[知者利仁, 仁者安仁.<이인里仁>]”는 공자의 말을 근거로 둘을 통합하여 파악하고 있다. 곧 그는 그 마음을 수립함은 비록 다르지만 그 효과를 이룸은 모두 같으니, 을 행함에서 벗어나 별도로 이른바 지가 있어서 그 문호를 스스로 세우는 것은 아니다. 지자知者가 구하는 것도 자기를 이루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만큼 다산은 인을 다른 덕목과 상대화시켜 여러 덕목 가운데 하나로 보려는 입장을 철저히 거부하고 인을 통해 모든 덕목이 포괄되고 수렴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자仁者는 고요하다는 말에 대해 공안국孔安國욕심이 없기 때문에 고요하다[無欲故靜]”라고 해석했는데, 다산은 무욕설無欲說에 반대하면서, “이란 서에 힘써 행하는 것이다[仁者强恕而行]”라는 자신의 인개념에 근거하여 구체적 인간관계에서 추구하는 의지와 욕구가 있음을 전제로 확인한다. 따라서 그는 사물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로부터 베푸는 것으로, 그 형상이 후덕하여 사물에 혜택을 입히기 때문에 고요하다고 한다고 하여, 고요함의 의미가 인자仁者의 후덕厚德함이 그 자신으로부터 넘쳐 나와 만물에 미치는 기상氣象을 의미하는 것이라 해석하였다. 이와 더불어 인자仁者는 오래 산다는 말에 대해, 포함包含성품이 고요한 사람은 장수한다[性靜者多壽考]”라 해석하였지만, 이런 설명은 의가醫家의 양생養生법에 불과한 것으로 도를 논하는 것이 못된다고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인자仁者도 단명短命한 경우가 있다는 현실을 들고, 을 행하는 것이 연단술鍊丹術처럼 장수를 도모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의 도란 오래고 길게 갈 수 있으며, 그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천하를 교화하니, 그 기상氣象이 오래가고 멀리가기 때문에 그래서 인자仁者는 오래 산다고 말한다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다산의 해석은 인자仁者의 모습을 그 덕에서 발현되는 기상氣象이 멀리 퍼지고 오래도록 지속된다고 해명함으로써, 견강부회하여 신비화하거나 술법으로 해석하는 견해를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사람 사는 마을은 인함이 아름답다. 사는 곳을 선택하여 인함에 머물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리인里仁>]”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정현鄭玄인자仁者의 마을에 사는 것[居於仁者之里]’이라 하여, 인자仁者가 사는 마을을 선택하여 사는 것이 지혜롭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정현의 견해에 반대하여, “군자君子의 도는 그 닦음이 나에게 있으며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만약 반드시 인자仁者의 마을을 선택하여 살아야 한다면 자신에게 요구하지 않고 먼저 남에게 요구하는 것이니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이인里仁이란 인자仁者가 사는 마을이 아니라, 그 마을에 살면서 내가 인을 행한다는 뜻으로 본다. 여기서도 다산은 인이 자신에게서 말미암아 실행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적용시켜 인의 실천주체로서 자신의 책임을 각성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2) 의 실천규범과 허물[]의 성찰

 

공자의 제자 유자有子[有若]·라는 것은 인을 하는 근본이다[孝弟也者.其爲仁之本與.<학이學而>]”라고 하여, 을 실천하는 구체적 행동규범으로 효(효도(공경)를 들고 있다. 여기서 다산은 효·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란 두 사람이 서로 더불어 하는 것이다. 부모를 섬김에 효성스러우면 인이 되니, 부모와 자식은 두 사람이다. 을 섬김에 공경하면 인이 되니, 과 아우는 두 사람이다. 임금을 섬김에 충성스러우면 인이 되니, 임금과 신하는 두 사람이다. 수령이 백성을 다스림에 자애로우면 인이 되니, 수령과 백성은 두 사람이다. 부부夫婦와 붕우朋友에 이르기까지 무릇 두 사람의 사이에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은 모두 인이다. 그러나 효와 제는 뿌리가 된다.”

 

이 두 사람 곧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인식 위에서 효···등 인간관계의 도리를 실현하는 규범은 모두 인을 하는 방법이라고 본다. 이러한 여러 규범들 가운데 효와 제가 근본적 규범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다산은 이 사람 사이에서 실행한 다음에 이루어지는 명칭인 것처럼 자식이 부모를 섬긴 다음에 효라는 명칭이 있게 되고. 젊은이가 어른을 섬긴 다음에 제라는 명칭이 있게 되고, 신하가 임금을 섬긴 다음에 충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고. 수령이 백성을 양육한 다음에 자라는 명칭이 있게 된다고 하여, 구체적 인간관계의 도덕규범도 모두 실행한 다음에 명칭이 성립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그만큼 도덕적 행동규범과 도덕성의 조목은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드러나고 성립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산은 맹자가 ···는 마음에 근본한다[仁義禮智根於心.<진심상盡心上>]”고 말한 의미를 분석하여, “···는 비유하면 꽃이나 열매이니 그 근본根本은 마음에 있다. 측은惻隱·차악差惡의 마음이 안에서 발동하면 인·는 밖에서 이루어지고, 사양辭讓·시비是非의 마음이 안에서 발동하면 례·는 밖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여, ···의 덕목은 마치 꽃이나 열매처럼 바깥에서 드러난 것이지 땅 속의 뿌리처럼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당시의 성리학자들이 인···를 마음속에 내재한 덕이라 보는 견해를 거부하여, “오늘의 유학자들은 인···를 네 개의 낟알처럼 사람의 뱃속에 오장五臟처럼 있어서 사단四端이 이를 따라 나오는 것이라 인식하니, 이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효·도 덕을 닦는 명칭이니 바깥에서 성립하는 것이요, 어찌 효·라는 두 낟알이 사람의 뱃속에 간이나 폐처럼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비판한다. 곧 그는 마음속의 사단四端에서 바깥으로 터져 나와 실행된 것이 사덕四德(···)라 밝힘으로써, 성리학에서 마음속의 사덕四德에서 바깥으로 사덕四端이 터져 나오는 것이라는 견해를 뒤집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의 인내재설仁內在說을 거부하는 것은 인이나 그 실천규범으로서 효·가 현실 속에서 실행을 통해 성립하는 것임을 확고하게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그는 효·와 인의 관계를 좀더 직접적으로 연관시켜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는 ·가 인이요, 이 효제孝弟이다. 다만 인은 총명總名이니,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고 고아나 과부를 보살피는 것을 포함하지 않음이 없다. ·는 전칭專稱이니, 오직 부모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것이 그 실지가 된다고 하여, 이 효···의 구체적 실천규범을 포괄하는 전체적 명칭으로서 총명總名이라 하고, ·는 그 실천의 구체적 상황에 따르는 실지를 특정하게 가리키는 전칭專稱으로, 하나의 도덕적 실천행위에 대해 명칭의 범위가 다른 것일 뿐이라 한다. 그렇다면 부분이 없이 전체가 있을 수 없으므로 부분으로서 효·가 전체로서 인의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다산은 인의 실천과정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로서 허물[]’의 문제에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허물[]과 악()의 차이를 분명히 구별하여, “에 뜻을 둔 사람은 아직 인을 이루는 데 못 미쳤다면 허물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허물을 보고 인을 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뜻이 이미 수립되었으면 반드시 악행은 없을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허물은 그 행함이 치우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을 행하는 데서도 치우쳐서 허물이 생길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허물을 보고 인함을 안다[觀過斯知仁矣.<이인里仁>]”는 공자의 말에서처럼, 의 실행에서 치우침으로 일어나는 허물을 보면 그가 인을 지키려다가 저지른 과오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을 지향하여 실행하는 것은 악과는 반대방향에 있는 것이므로, 의 실천으로 향하는 방향에는 악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그는 고쳐가야 하는 허물[]’과 단절해야하는 죄악[]’의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의 실천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허물에 대해 관용적 이해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허물이 있는데 고치지 않으면 이것이 허물이다[過而不改, 是謂過矣.<위령공衛靈公>]”고 언급한 공자의 말에 대해, 앞에 말한 허물은 과중過中’(중용을 지나친 것)이요, 뒤에 말한 허물은 죄과罪科라 해석하여, “허물이란 중용을 얻지 못한 것의 명칭이다. …… 만약 허물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으면 이것은 죄과罪過이다라 한다. 죄악은 허물과 다르지만, 허물을 성찰하여 고치지 않는 데서 죄악에 빠지게 되는 것임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5. 다산의 행인론行仁論이 지닌 특성

 

다산의 󰡔논어󰡕 해석에서 자신의 관점을 가장 특징적으로 분명하게 제시한 부분이 바로 인개념의 인식과 인의 실천방법에 대한 견해라 할 수 있다. 그는 주자가 만물을 낳는 이치[生物之理]’로 보고, 마음의 본체로서 성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는 성리학의 본체론적 인개념을 전면으로 거부하고 구체적 인간관계 속에서 실행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 보는 실천성과적 인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다산의 인개념은 그의 실학적 인간이해와 인격실현의 방법론을 뒷받침하는 핵심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산은 자신의 인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그 근거로서 심성내면의 인식을 철저히 재점검하고 있다. 곧 그는 인의 가능근거가 되는 성개념의 인식에서부터 성을 본체의 리로 규정하는 성리학적 입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내면의 실체를 가리키는 바른 명칭으로서 맹자가 말한 대체大體를 끌어들이고, 을 대체大體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好善惡惡: 好德恥惡]’ 기호嗜好의 성질로 본다. 따라서 그는 성의 선악善惡문제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검토하여 기호嗜好[好惡]로서의 성개념에 따라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기준으로 확립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인성人性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여 확립함으로써 그 기초 위에 자신의 인개념과 행인론行仁論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여기서 그는 성리학에서 성의 선악善惡문제가 얽혀있는 복합적 현상을 해결하는 해석의 논리로 제기되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개념이 지닌 문제점을 예리하게 비판해갔다. 그러나 그는 인간존재의 구조가 신(정신)과 형(육신)의 결합이요, 마음이 대체大體와 소체小體의 결합이라는 이중구조에 따라 인간의 마음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갈등구조로 확인하고 있으며, 바로 인간의 마음을 인심人心·도심道心의 갈등구조로 제시한 점에서 그는 주자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있다. 이처럼 다산은 자신의 인간 심성과 도덕성의 이해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한학漢學이나 송학宋學의 어느 쪽에 대해서나 자유롭게 비판하고 섭취하는 입장을 지키고 있는 일관성을 보여준다.

 

다산의 인개념은 이라는 글자의 형태가 의 결합이요, 옛 전자篆字에서 를 두 개 겹쳐서 인인人人으로 썼던 사실에 근거하여, 두 사람 사이 곧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라 확인한다. 여기서 그는 공자의 도곧 유교의 도가 한마디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교제를 잘하는 것[善於際]’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그만큼 다산은 공자의 도를 본체론적 관념으로 추상화시키는 이론을 깨뜨리고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는 인간을 향한 사랑이라 규정하고, 의 실현방법으로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일치시켜가나 를 행인行仁의 기본원리로 강조한다. 그는 공자의 도로 일관함을 강조하면서, 유교의 모든 경전과 의례는 물론이고, 인간사회의 모든 법도와 질서가 라는 한 글자로 관철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만큼 인간관계의 현실 속에서 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을 벗어나면 인의 실현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를 벗어나게 되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을 실행하는 구체적 방법은 서의 실천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만, 이를 더욱 구체적 실천조목으로 제시하여, 인간관계의 구체적 경우에 따라 실천되고 드러나는 효···을 비롯한 다양한 도덕규범이 바로 인의 실천방법임을 확인한다. 여기서 다산은 효·를 비롯한 구체적 실천규범과 인의 관계를 부분(전칭專稱)과 전체(총명總名)의 관계로 제시함으로써 사실상 인은 구체적 인간관계 속에서 실행되는 도덕규범의 구현 그 자체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다산의 행인론行仁論은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구체적 인간관계의 현실에서 실현되는 것이요, 또한 그 구체적 인간관계의 실현은 인성人性의 선함에 근거하여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는 인륜적 도덕규범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로 제시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행인론行仁論의 인식을 통해 유교경전의 본래적 의미와 공자의 도가 지닌 바른 의미를 해석하고자 시도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를 통해 인간존재의 근본구조와 인간사회의 질서가 지닌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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