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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논문

논어에 나타난 ‘권도(權道)’의 논리 구조와 의미

작성자위대한|작성시간16.08.09|조회수491 목록 댓글 0

 

 

논어에 나타난 권도(權道)’의 논리 구조와 의미

주희와 왕부지의 관점을 중심으로

 

요약문

 

󰡔논어󰡕에서 말하는 권도[]는 마치 저울이 어떤 물건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잘 측정하여 평형을 유지하듯이, 변화하는 현실에서 서로 다른 관점이 대립할 때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고르게 균형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의 유학자들은 󰡔논어󰡕에 나타난 이 권도관을 각자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특히 주희는 경()과 권도가 깊게 관계하지만 궁극적으로 경과권도는 구별되는 개념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보편 법칙인 경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경직된 상태로 적용되지 않고 융통성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때 현실의 적용만을 중시하여 경의 내용이 변질되면 안 된다. 경의 내용이 변질되면 그 변질된 내용은 더 이상 경이 아니다.

 

경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경의 현실적 운용이 바로 권도이다. 따라서 이러한 권도의 실행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고, 오직 성인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희의 논리는 초시공적인 불변의 경 자체와 변화를 전제하는 권도 사이의 논리적 충돌 문제가 발생한다. 곧 현실의 변화가 경의질서 체계 안에서 진행될 경우에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현실의 변화가 경 자체의 변화를 전제할 때에 가능하다면 기존의 경은 더 이상 경의 위상을 고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권도란 성인만 실행할 수 있다면 성인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수 없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의 지속은 결국 현실의 중요성에 근거한 권도의 논리가 오히려 비현실적인 관념의 상태에서 관조자의 역할로 제한될 수 있다.

 

왕부지는 주희의 이러한 관점을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논어󰡕에서 보이는 권도의 의미는 학문과 심덕이다. 이 권도는 경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 세계의 근거는 늘 변화하는 기이기 때문에 권도가 경보다 먼저이고, 경이란 권도의 실행 속에 내재한 규율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현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란 경을 내재적으로 함유한 권도의 실행을 통해 합리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곧 인간은 늘 변화하는 구체적인 현실에 주목하여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그 현실 속에 내재한 공통의 규율을 찾아 제한적인 보편의 질서의식을 확립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권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성인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원리를 깨닫고 노력한다면 누구든지 권도를 실행할 수 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성인이란 예측하지 않은 뜻밖의 상황에서 발생한 일에서만 권도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성인이란 변화의 상황이나 일정한 질서의식이 유지되는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권도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성인은 세상의 근거를 고요함의 상태가 아니라 운동하는 기의 상태로 여길 뿐만 아니라, 고요함을 운동하고 변화하는 가운데 유지되는 일정한 규율의 상태로 여기기 때문이다. 권도에 대한 왕부지의 이러한 관점은 특수성을 중시하지 않는 초시공적인 원리주의나 제한적인 보편성조차도 거부하며 변화만을 강조하는 현상주의적 태도와 구별된다. 따라서 왕부지의 권도관은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찾아 직면한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될 수 있다.

 

주 제 : 권도, 논어, 주희철학, 왕부지철학, 유가철학, 중국철학

검색어 : 보편법칙, 특수성, 융통성, 제한적 보편성, , 권도,

 

1. 들어가는 말

 

공자가 함께 배울 수는 있지만 함께 도에 나아갈 수 없고,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있지만 함께 설 수 없으며, 함께 설 수는 있지만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없다고 지적한 이래, 유학에서는 권도의 의미를 중요하게 취급한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직접 주고받지 않는 것은 예의이고, 형수가 물에 빠지거든 손으로 구해주는 것은 권도이다고 지적한 맹자의 말은 구체적인 현실 상황에서 권도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본보기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공자와 맹자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유학자들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이러한 권도를 적용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보편 법칙에 해당하는 경()과 구체적인 상황을 합당하게 조율하는 권도[]를 통해 지혜로운 삶을 추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그들이 역동적이면서도 다양하게 펼쳐지는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하나의 불변적 원리만을 고집하는 완고한 태도나, 변화만을 중시한 나머지 그 변화 과정 속에 내재한 공통의 규율을 간과하는 현상주의적 태도 등을 합리적인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곧 그들은 보편 법칙[]과 융통성[]의 유기적인 어울림을 통해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여 건강한 사회를 조성하고자 한다. 이후의 유학자들은 이러한 공자와 맹자의 권도관을 계승하며 각자의 관점을 정립한다. 송대의 주희와 명말청초의 왕부지 역시 이러한 권도관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세계의 기원에 관한 문제에서 고정불변한 이치[]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주희와 운동하는 기()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왕부지 사이의 관점 차이는 권도의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곧 그들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다양한 현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권도의 운용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보일지라도, 권도의 내용과 적용 방법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이것은 송대 성리학을 종합한 것으로 평가받는 주희 철학과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새로운 기철학의 체계를 정립한 것으로 평가받는 왕부지 철학 사이에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원리의 실질적인 활용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논어󰡕의 권도관을 주희와 왕부지의 관점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본 후, 이러한 권도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동안 필자와 같은 문제의식으로 󰡔논어󰡕의 권도관에 대해 주희와 왕부지의 관점을 치밀하게 비교하면서 분석한 연구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4) 따라서 본 연구는 이 분야의 연구에 생산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칙과 융통성의 유기적인 통일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사상적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 권도의 개념과 경과의 관계

 

전통 유가철학에서 권()의 기본적 의미는 저울[]이다. 저울은 물건의 무게를 측정하는 도구이다. 곧 저울은 어떤 물건의 가벼움이나 무거움을 판별하여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 전통의 동아시아 사회에서 사람들은 저울을 활용하여 물건을 측정할 때에 정지의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의 상태에서 진행한다. 이것은 저울이란 움직임 가운데 평형의 상태를 유지하여 균형을 맞추는 도구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권이란 움직임 가운데 어떤 물건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균형을 잡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 유학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권의 의미를 수용하여 자신의 입론을 펼친다. 곧 전통 유학자들은 이 권을 변화하는 현실 사회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인 균형을 찾는 역할로 생각한다. 그런데 전통 유학자들은 이 권을 경()과 관련시켜 논한다. 경의 의미는 날줄이다. 이것은 󰡔설문해자주󰡕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옛날에 옷을 짤 때에 날줄을 먼저 걸고 씨줄을 후에 넣기 때문에 경은 어떤 것을 규정하는 근거이며 준칙이고 원리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경은 가치 판단의 근거이며 기준을 의미하는 일정한 도리이다. 점 및 그것의 현실적 의미를 논구하고자 하는 필자의 기획 의도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권과 경의 의미로 인해 학자들 사이에는 권과 경의 관계에 대해 의견 차이를 드러낸다. 한대의 학자들과 송대 이후의 학자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고, 송대 이후에도 학자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다. 한대의 학자들은 경과 권을 주로 일정함[]과 변화[]의 관계로 파악한다. 그런데 한대 학자들의 견해는 이전 시대에 출간된 것으로 여겨지는 󰡔춘추공양전󰡕에 의거한다. “권이란 무엇인가? 권은 경에 반한 이후에 선한 것이 있다.” 이 말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나라 장공(莊公)은 등()나라 여자인 등만(鄧曼)과의 사이에 소공(昭公)인 홀()을 낳았고, ()나라 대부 옹()씨의 딸인 옹길(雍姞)과의 사이에 려공(厲公)인 돌()을 낳았다. 장공이 죽자 태자인 홀이 왕이 되었다. 이때 옹씨의 가문에서 불만을 가졌다. 그들은 정나라 세력가인 제중(祭仲)을 납치하고 협박하여 돌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제중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한 후 돌을 왕으로 삼았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춘추공양전󰡕에서는 제중을 권도를 아는 현명한 신하로 평한다. 특히 󰡔춘추공양전󰡕은 제중이 송나라 옹씨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면 왕도 죽고 나라도 망하지만, 제중이 옹씨 가문의 말을 수용했기 때문에 왕도 살고 나라도 유지한 것으로 평가한다.

 

여기에서는 비록 옹씨 가문의 논리와 제중의 선택이 타당한지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춘추공양전󰡕의 저자는 기존 질서의 무조건적 유지보다 기존 질서의 변화를 통한 왕의 생명과 나라의 보전을 중시한다. 곧 그는 옛 질서의식의 유지가 발생시킬 살육과 혼란의 정국보다 새로운 방법의 수용을 통한 평화와 안정을 우선적 가치로 여긴다. 그가 초기에 송나라 사람의 요구를 수용하여 돌을 왕위에 앉혀 국정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얼마 뒤에 돌을 추방하고 위()나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홀을 왕으로 복위시킨 것은 그의 이러한 관점을 현실에 투영한 예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국정 혼란 방지와 생명 유지라는 명분이 있을 경우 동기의 순수성보다 결과주의에 경도되어 남용과 오용의 문화를 초래할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춘추공양전󰡕의 저자는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봉추보(逢丑父)의 일화를 통해 드러난다. 서기 전 5896월에 노()나라가 진()()() 등과 동맹을 맺어 안()의 전투에서 제()나라 군사를 대패시켰다. 7월에 제나라 군주인 경공(頃公)이 국좌(國佐)로 하여금 원루(袁婁)에서 동맹을 맺게 했다. 그런데 당시에 동맹을 맺을 때에는 대부가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직접 참여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럼에도 경공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경공의 군사가 진나라 극극(郤克)의 군사에 포위되었을 때, 경공의 신하이면서 경공과 외모가 닮은 봉추보(逢丑父)의 꾀에 의해 경공이 달아났기 때문이다. 곧 봉추보가 경공의 복장을 하고 경공으로 하여금 마실 것을 가져오게 한 후, 새로 맑은 것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는 척하며 경공을 도망시켜 돌아오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춘추공양전󰡕의 저자는 이러한 봉추보의 행위에 대해 권도를 행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봉추보는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 군주를 보호한 면에서 제중과 공통점이 있지만, 군주로 하여금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게 한 제중과 달리 군주를 치욕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곧 이 책의 저자에 의하면 동생에게 왕위를 선양하게 한 제중의 방법은 권도에 해당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위기 극복의 선구자가 되어야 할 지도자가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외면하고 혼자 살기 위해 도망치도록 안내한 봉추보의 방법은 보편 법칙도 아니고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권도도 아니다.

 

󰡔춘추공양전󰡕의 저자는 권도가 비록 구체적인 상황을 중시할지라도, 자유방임형의 상황윤리를 상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권도에도 제한적이나마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공통의 시대의식이 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춘추공양전󰡕에 의하면 고정된 원리로서의 절대 보편적인 경의 논리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분출되는 새로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권도의 논리를 따를 때에야 비로소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한대의 유학자들은 권과 경에 대해 대부분 이러한 󰡔춘추공양전󰡕 의 논리를 수용한다. 예를 들면 동중서는 󰡔춘추번로󰡕에서 춘추에는 경의 예의[經禮]가 있고, 변화의 예의[變禮]가 있다. 행할 때에 성품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것과 같은 경우는 경의 예의이다. 성품이 비록 편안하지 않고 마음이 비록 평화롭지 않더라도, 그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없다면 이것은 변화의 예의이다. 경과 변화의 사정에 밝은 후에 가벼움과 무거움의 구분을 알게 될 것이니, 함께 권도에 나아갈 수 있다. 권도가 비록 경에 반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한계가 없다면 그 때문에 비록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끝내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춘추의 도는 넓으면서도 핵심이 있고, 상세하면서도 하나로 돌아온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이 변화의 관점에서 권도를 해석하는 견해는 위진남북조시대의 학자들에게서도 공통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하안은 비록 서는 것이 있을 수 있을지라도, 반드시 권도로 그 가벼움과 무거움을 헤아리는 지극함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지적하고, 황간 또한 권도란 일정함에 반하여 도에 합치하는 것이다. 스스로 변화에 통하고 이치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권도를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바른 일에 함께 설 수는 있을지라도, 함께 권도를 행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왕필은 권도란 도의 변화이다. 매우 어려운 것이다고 했다. 권도로 가벼움과 무거움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권도를 밝히는 것이다고 지적하여, 수시로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권도를 밝히기도 어렵고 실행하기도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런데 경에 반한 것이 권도이다고 하는 권도와 보편 법칙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송나라 학자들에게 비판적으로 계승된다. 정이는 한대의 유학자들이 경에 반하여 도에 합하는 것을 권도라고 했기 때문에 권변과 권술의 말이 있으니, 모두 잘못되었다. 권도는 다만 경이다. 한대 이래로 사람들이 권이라는 글자를 알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권도와 경의 경계를 제거하여 권도가 바로 경이라고 한다. 곧 정이는 권도에 대해 한대 학자들이 경과 거리가 있는 것으로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권모술수까지 권도로 여기는 풍토가 조성될 수 있음을 염려하여 권도를 경과 동격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주희는 이러한 정이의 견해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권도와 경의 차이를 드러낸다. 주희는 선배 유학자들은 이 문장을 오해하여 아래 글의 그 반()에 치우친 것으로 한 문장을 삼았기 때문에 경에 반하여 도에 합치한다는 말이 있다. 정자가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것은 옳다. 그러나 맹자는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사용하여 구한다는 뜻이 있으니, 그것을 미룬다면 권도와 경은 또한마땅히 구별이 있어야 한다”15)고 말하여, 권도와 경이 깊게 관계되었을지라도 둘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경과 권도의 분리는 여러 사람들의 말이 합치하지 않는다. 만약 권도가 저절로 권도이고 경이 저절로 경이라고 한다면 서로 관여하지 않으니 진실로 불가할 것이다.

 

만약 일에는 반드시 권도를 사용해야 하고, 경은 반드시 권도로 행해야 하며, 권도는 다만 경이라고 한다면 권도와 경은 또한 온전히 분별될 수 없을 것이다. 공자가 함께 설 수는 있지만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없다고 한 말과 맹자가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으로 구한다고 한 말을 보면 권도와 경은 반드시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비록 다른 점이 있지만 권도는 사실 경을 떠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차이는 아주 작다. 이천이 권도는 다만 경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미진한 듯하다고 지적하여, 권도와 경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왕부지는 이에 대해 주희의 관점과 차이를 드러낸다. 왕부지는 이 문제에서 오직 정자의 말이 가장 깊고 정밀하다고 지적하며, 주희의 관점보다 정이의 관점을 지지한다. 그는 주자는 자를 성기고 넓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실제로 구할 경우에 가벼움과 무거움을 살피지 않는다면 어떻게 경을 행할 수 있겠는가? 경은 성긴 것이 아니고 권도도 조밀한 것이 아니니, 권도는 경과 대칭이 되지 않는다. 이미 경과 대칭이 되지 않는다면 경과 권도가 구별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지적하여, 경과 권도가 동격으로서 긴밀하게 관계하고 있음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권도의 역동성을 중시하고 있다.

 

3. 권도의 논리 구조와 의미

 

󰡔논어󰡕(자한편)에서 공자는 권도에 도달하기 전에 여러 단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함께 배움[共學]과 도에 나아감[適道]과 세움[]의 단계를 통과해야 비로소 권도를 실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성리학자들은 이에 대해 성인의 뜻을 구한 후에 함께 배울 수 있고, 생각을 선하게 한 후에 함께 도에 나아갈 수 있다. 생각하여 얻는 것이 있으면 함께 세울 수 있고, 세운 것이 확고하면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주희에 의하면 함께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뜻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고, 함께 도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맥락을 보고 있다는 것이며, 함께 설 수 있다는 것은 세운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일의 변화를 만나더라도 그 마땅함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만 대강을 이와 같이 말했을 뿐이다.”20) 주희의 이러한 견해는 정이의 함께 배울 수 있으면 구하는 것을 알고, 함께 도에 나아갈 수 있으면 가는 방향을 알며, 함께 설 수 있으면 뜻을 돈독히 하고 굳게 잡아서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와 양시의 앎이 자기를 위하는 것이라면 함께 배울 수 있고, 배움이 충족되어 선을 밝힌 후에 함께 도에 나아갈 수 있으며, 진실로 도가 돈독해진 후에 함께 설 수 있고, 때의 마땅함을 안후에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있다고 하는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 그런데 주희는 함께 설 수 있지만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을 어쩔 수 없는 경우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말이라고 지적하고,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성인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안연조차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는 보통사람이 권도를 행한다는 것은 마치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달리는 것을 먼저 배우려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지적한다. 곧 그에 의하면 천하의 일에는 일정함과 변화가 있고,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경도 있고 권도도 있다. 일을 일정하게 처리하는 경우에 경을 지키는 것은 성현도 할 수 있고 보통 사람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측되지 않은 뜻밖의 상황에서 일을 처리할 때 권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오직 성인뿐이다. 그는 권도란 최고의 경지에서 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보편 법칙인 경()을 체득한 사람이 융통성을 발휘하여 시대 상황에 맞게 경을 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가 경이란 도의 일정함이고, 권도란 도의 변화이며, 도란 경과 권을 관통하는 총체라고 생각한데에 연원한다.

 

따라서 그는 경은 다만 대경대법을 보존하는 것으로 정당한 도리일 뿐이다. 예컨대 정미하고 세세한 곳은 경이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권도란 정미하고 세세한 곳에 그 마땅함을 다하여 경이 미치지 않는 것을 구제하는 것이다. 중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권도라고 말한다. 권도는 바로 경의 긴요하고 오묘한 곳이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이 그는 권도를 보편 법칙인 경을 다양하게 변화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획일적으로 적용시키지 않고 융통성을 발휘하여 운용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결국 그에게 권도의 실행이란 경이 전제되는 상태에서 가능함을 말해준다. 그는 공자가 함께 설 수는 있지만,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없다고 한 말에서 세우는 것은 바로 경이고, 함께 설 수 있다는 것은 경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세움을 잡는 것이 있지만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으로 보면 권도는 경의 긴요하고 오묘하며 세밀한 곳이다. 도리의 정밀하고 투철하며 완숙한 것을 보지 않는다면 충분히 권도를 행할 수 없을 것이다고 지적하여, 권도를 경의 원활한 적용으로 여긴다.

 

 

이와 같이 그는 권도의 실행이란 경과 무관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경과 긴밀하게 관계하는 가운데 진행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때 그에게 경이란 권도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권도 이전에 주어진 보편 법칙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에게 권도란 예측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선입관도 없이 문제를 균형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보편 법칙을 그 상황에서 조절하여 조화를 추구하는 방법이다. 이 때문에 그에게 권도란 선험적인 보편 법칙의 현실적 적용이므로 선험적 보편 법칙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근원적인 대안이 되는 측면에 한계가 있다.

 

이것은 세계관의 문제와 관계된다. 곧 그는 인간의 의지에 관계없이 시공을 초월하는 고정불변한 이치가 선험적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이 이치를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덕성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내재된 이 이치를 현실 사회에서 발현해야 한다. 그에게 이 이치는 경이고, 이 이치를 구체적인 현실에서 제대로 발현하는 것이 권도이다. 이 때문에 그의 논리 체계에서는 경이 최고류의 개념이고 권도는 경의 종개념일 뿐이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불변을 상정하는 경과 변화를 전제하는 권도 사이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논리적 충돌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함유하고 있다. 왕부지는 주희의 이러한 관점에 비판적이다. 그는 경에 반하여 도에 합치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일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본문에서 함께 배우는 것도에 나아가는 것으로부터 세움권도를 행하는 것으로 말하면 심덕과 학문에 대해 말한 것이다. 학문과 심덕이 어떻게 경에 반할 수 있겠는가?”라고 지적하여, 󰡔논어󰡕의 권도에 대한 한나라 학자들의 견해를 오류라고 평가한다.

 

그는 공자는 함께 설 수 있지만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없다고 했지, 애초에 함께 경을 행할 수 있지만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없다고 하여 자와 권도를 대칭으로 여긴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사물을 처리하는 것으로 말하면 경에 대해서는 마땅함이라고 하고 변에 대해서는 권도라고 하니, 권도 또한 마땅함이다. 학문과 심덕에 대해 경을 말하면 자는 저절로 일체를 다 포함하니, 예컨대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경륜한다는 것과 같은데, 단서를 정리하여 나누는 것이 세세한 것이라도 차이 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니, 경은 본래 권도를 갖고 있는 것이지, 경이 성기고 권이 조밀한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곧 그는 󰡔논어󰡕(자한편)에서 말하는 권도에 대해 주희와 같이 경을 전제한 상태에서 권도를 설정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이곳에서 말하는 권도는 학문과 심덕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 학문과 심덕의 문제에서 권도란 경과 분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이 권도의 전제도 아니다. 권도가 실행되는 가운데 경은 그 속에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이치[]란 운동하고 변화하는 기()의 조리일 뿐이라는 그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그 역시 이 이치가 인의예지의 도덕성일 뿐만 아니라 선()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주희의 관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는 이 본성이란 초시공적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생겨나고 날마다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주희가 선험적인 이치를 우주 운행의 근거로 설정하여 본연지성(本然之性)’을 선()으로 여기고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불선(不善)으로 여긴 것과 달리, 왕부지는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기()를 우주운행의 원리이며 선()으로 여김과 아울러 이치를 기의 조리로 여기고, 기의 소통을 방해하는 질()을 불선(不善)의 근거로 여긴다. 이와 같은 주희와 왕부지 사이에 발생하는 세계관의 차이가 그들의 권도관에 반영되고 있다. 왕부지는 이미 이루어진 경으로 말한다면 경이란 천하의 본체이고 권도란 내 마음의 작용이다. 예를 들어 경륜한다의 경으로 말한다면 권도가 아니면 경을 행하기에 부족하고, 경 밖에 또한 권도도 없을 것이다. 경 밖에 권도가 없는데, 하물며 경에 반할 수 있겠는가? 실을 정리하는 것이 이고 물건을 다는 것이 권도인데, 세밀하게 나누고 교묘하게 유지하는 것은 한결같다. 다만 경은 두터움과 엷음을 나누고 길고 짧음을 정하는 것이며, 권도는 가벼움과 무거움을 살피는 것으로 조금 다를 뿐이다. 물건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이미 살핀 이후에 나의 두터움과 엷음길고 짧음을 정할수가 있다. 이 또한 권도가 먼저이고 경이 뒤이다”34)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주희와 같이 경이 전제되고 권도가 그 경을 현실에 맞게 조율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권도를 통해 보편 법칙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왕부지는 󰡔맹자󰡕에서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으로 구한다고 하는 논리에 대해서도 예측하지 않는 가운데 일어나는 뜻밖의 상황이라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이라면 비록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형수를 구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그의 관점은 성인만 권도를 행할 수 있다는 주희의 관점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권도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원리를 체득한 일부의 사람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준다. 곧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짐승이 아닌 인간이라면 모두 구해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미 주자의 정미하고 세세한 곳에 마땅함을 다한다는 뜻이 아닌데, 어찌 또한 성현의 마음속에 이러한 본령이 있어 형수가 물에 빠지기를 기다려 경에 반하여 도에 합치하는 일이 있겠는가?”라고 지적한다.

 

왕부지는 주자는 함께 설 수 있지만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또한 어쩔 수 없는 경우에 이르러서야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유독 이윤과 주공은 당연히 권도를 갖고 있었고, 요와 우는 권도가 없었다는 것인가? 맹자는 중을 잡고도 권도가 없는 것을 비웃었으니, 애초에 어쩔 수 있고 없음을 논하지 않았다. 󰡔주역󰡕에서는 정밀한 의리로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고, 쓰는 것을 이롭게 하고 몸을 편안하게 한다고 말했으니, 비록 평화로운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이미 세운 나머지에다가 이 일단의 심덕을 더한 것이다. 하물며 이것은 다만 배우는 사람이 덕을 진전시키는 차례를 말했을 뿐, 애초에 어쩔 수 없는 시세가 급박하게 한 적이 없음에 있어서랴?”라고 지적하여, 어쩔 수 없는 경지에서 성인만 권도를 실행할 수 있다는 주희의 주장을 비판한다.

 

왕부지는 정자는 성인은 저울로 가벼움과 무거움을 아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곧 저울이다고 말했다. 분명 이것은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고 하는 오묘함이다. 저울로 가벼움과 무거움을 측정하는 것은 자로 길고 짧음을 정하는 것과 같고, 저울을 따라 균형을 얻는 것은 제한이 없으며, 자는 더욱 정밀하니, 반드시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은 다음에야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는 것이 바로 권도를 행하여 함께 권도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이상적 인간인 성인이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권도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이나 예외적인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권도를 발휘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곧 왕부지에 의하면 성인이란 보편적인 질서의식이 유지되는 예측 가능한 상황이나, 혹은 예측할 수 없는 뜻밖의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권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자유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은 오히려 현상적인 변화에 임기응변하는 방식이 아니라, 변화 속에 내재하는 일정한 규율을 적용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때 왕부지가 말하는 일정한 규율이란 주희처럼 본래부터 고요하여 시공을 초월하는 절대불변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움직임과 변화를 세상의 근거로 여긴다.40) 따라서 그가 말하는 일정한 규율 역시 이러한 변화 가운데 형성된 제한적인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성인은 이러한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권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권도를 사용한다. 이러한 권도는 보편 법칙인 경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정중동(靜中動)’의 논리가 아니라, ‘동중정(動中靜)’의 논리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에 보편 법칙인 경에 의해 권도가 제약되는 원리주의나, 다양하게 변화하는 구체적인 상황에만 집착하여 공통의 공속의식을 방기하는 현상주의 등의 문제를 극복하는 면에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논어󰡕에 나타난 권도에 대한 왕부지의 이러한 관점은 다원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통일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현대사회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방면에 하나의 사상적 자료가 될 수 있다.

 

4. 맺는말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현실 사회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문제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할 경우에 근원적인 원인을 찾아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해결책을 찾는 일은 매우 필요하면서도 중요하다. 이 때문에 많은 철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의 원인 규명과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공자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유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고뇌를 한다. 특히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에 도취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체적인 현실에 깊게 개입하여 실제적인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현실 중시의 초기 유가 사상은 󰡔논어󰡕의 권도[]관에 폭넓게 반영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권도는 마치 저울이 어떤 물건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잘 측정하여 평형을 유지하듯이, 변화하는 현실에서 서로 다른 관점이 대립할 때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고르게 균형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의 유학자들은 󰡔논어󰡕에 나타난 이 권도관을 각자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특히 도교와 불교의 논리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며 현실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성리학을 종합한 송대의 주희와 이민족에 의해 조국이 멸망당하는 것을 목도하며 사상적인 측면에서 원인을 찾아 기철학적 관점으로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던 왕부지에게서도 이 권도관은 비중 있게 취급된다.

 

현실 세계에서 고요한 이치[]와 운동하는 기()가 늘 함께 있지만, 기원의 측면에서 어쩔 수 없이 이치가 기보다 먼저라고 생각하는 주희는 예측하지 않은 뜻밖의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이치의 결집체인 경()을 현실 사회에 잘 조응되도록 노력하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곧 그는 경과 권도가 깊게 관계하지만 궁극적으로 경과 권도는 구별되는 개념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보편 법칙인 경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경직된 상태로 적용되지 않고 융통성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때 현실의 적용만을 중시하여 경의 내용이 변질되면 안 된다. 경의 내용이 변질되면 그 변질된 내용은 더 이상 경이 아니다.

 

경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경의 현실적 운용이 바로 권도이다. 따라서 이러한 권도의 실행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고, 오직 성인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희의 논리는 초시공적인 불변의 경 자체와 변화를 전제하는 권도 사이의 논리적 충돌 문제가 발생한다. 곧 현실의 변화가 경의 질서 체계 안에서 진행될 경우에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현실의 변화가 경 자체의 변화를 전제할 때에 가능하다면 기존의 경은 더 이상 경의 위상을 고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권도란 성인만 실행할 수 있다면 성인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의 지속은 결국 현실의 중요성에 근거한 권도의 논리가 오히려 비현실적인 관념의 상태에서 관조자의 역할로 제한될 수 있다.

 

왕부지는 주희의 이러한 관점을 비판한다. 그는 우선 경과 권도를 서로 다른 별개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이 세계를 운동하는 기로 인해 구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에게 이치란 기를 규정하는 근거가 아니라 기의 조리일 뿐이다. 곧 그에 의하면 󰡔논어󰡕에서 보이는 권도의 의미는 학문과 심덕이다. 이 권도는 경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 세계의 근거는 늘 변화하는 기이기 때문에 권도가 경보다 먼저이고, 경이란 권도의 실행 속에 내재한 규율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현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란 경을 내재적으로 함유한 권도의 실행을 통해 합리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도에 의해 실행된 균형은 초시공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변화에 비례하여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의 본성이 날마다 생하고 날마다 이루는지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은 늘 변화하는 구체적인 현실에 주목하여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그 현실 속에 내재한 공통의 규율을 찾아 제한적인 보편의 질서의식을 확립해야 한다. 또한 왕부지에 의하면 이러한 권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성인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원리를 깨닫고 노력한다면 누구든지 권도를 실행할 수 있다. 왕부지에 의하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성인이란 예측하지 않은 뜻밖의 상황에서 발생한 일에서만 권도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성인이란 변화의 상황이나 일정한 질서의식이 유지되는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권도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성인은 세상의 근거를 고요함의 상태가 아니라 운동하는 기의 상태로 여길 뿐만 아니라, 고요함을 운동하고 변화하는 가운데 유지되는 일정한 규율의 상태로 여기기 때문이다. 권도에 대한 왕부지의 이러한 관점은 특수성을 중시하지 않는 초시공적인 원리주의나 제한적인 보편성조차도 거부하며 변화만을 강조하는 현상주의적 태도와 구별된다. 따라서 왕부지의 권도관은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찾아 직면한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될 수 있다.

 

참고문헌

 

류칠로, 유가의 권도에 관한 연구, 󰡔동서철학연구󰡕 8, 1991.

박재주, 유가윤리에서의 도덕적 딜레마 해결방식으로서의 경()()=(), 󰡔윤리연구󰡕 64, 2007.

오종일, 유학사상의 , 󰡔동양철학연구󰡕 24, 2001.

이철승, 유가철학에 나타난 氣質之性의 문제왕부지와 주희의 관점을 중심으로-」, 󰡔유교사상연구󰡕 3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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