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의 사서학 체계에서 확충의 의미
1. 문제제기
2. 복성설과 사서학 체계
3. ≪중용≫의 致中과 致和
4. ≪맹자≫의 擴充
5. ≪대학≫의 致知
6. ≪논어≫에서 확충의 논리
7. 맺는말
요약문
주희는 ≪대학≫·≪논어≫·≪맹자≫·≪중용≫에 일관되는 논리를 복성과 확충으로 파악하고 이를 유학의 근본적 사유로 확립하였다. 이는 주희의 중화신설의 종지인 미발함양공부론과 상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본성은 순수지선한 사실로 이해되며 복초설과 복성설의 근간을 이루지만, 그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공부론이 필요하다. 공부에는 존양과 확충이 병행되어야 하지만 주희는 유가의 주요 논리가 사태마다 올바르게 행위한다는 확충에 초점을 둔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주희의 사서집주에 체계적으로 반영되어 있으며 주자학의 학문적 중심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주제어 : 사서학, 성선, 복성, 양성, 존양, 확충.
1. 문제제기
주희(朱熹, 1130~1200)는 북송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성리학적 사유를 토대로 선진 유학을 충실하게 독해하여 자기주장의 근거를 찾아내면서 하나의 학문 체계를 완성하였다. 이는 1169년 중화신설(中和新說)의 정립으로 확정된 것이다. 중화신설은 미발함양공부론(未發涵養工夫論)을 학문적 중심으로 세운 것으로, 이후 주희는 이에 근거하여 심성론(心性論), 태극론(태극론),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 등을 전개하였다. 주희의 사서학(四書學)은 바로 이러한 학문적 기반위에서 형성되었다. 주희는 자신의 학문적 핵심이 정립된 이후 본격적으로 선진 유학 경전에 대한 주석 작업에 매진하여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거쳐 이른바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완성한다. 즉 주희는 ≪예기≫의 편명이었던 <대학>과 <중용>을 별도로 분리하여 ≪논어≫ㆍ≪맹자≫와 함께 사서로 확정하고, 사서집주를 통해 일관된 체계와 논리를 가진 사서학 체계를 완성하였다.
주희의 사서집주는 사서에 대한 주석서 중의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리학의 결정체일 뿐만 아니라 경학의 결정체이기도 하며 공맹(孔孟)의 철학을 이어 유학의 의리를 밝히려 했다. 특히 원대에 주자학이 관학화가 되고 시험의 채점 기준으로 자리잡으며 사대부의 필독서이며 표준적 경전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현실적 제 상황에 따라 사서집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였지만 사서는 성리학 연구의 가장 근본적인 저서로서 경전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사서의 이러한 학문적 위상은 중국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확고하였고 오경(五經)보다 더 중요한 경전으로 연구되어왔다. 그런데 현대의 학자 모종삼은 유학의 이해에 있어서 주희의 사서학 체계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사서에서 ≪대학≫의 성격은 다른 문헌과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논어≫ㆍ≪맹자≫ㆍ≪중용≫ㆍ≪역전(易傳)≫을 유가의 핵심 문헌으로 보며 ≪대학≫은 이것들과 같은 계열도, 같은 층차의 책도 아니라고 하였다. 즉, 전자는 심과 리가 하나라는 차원에서 도체가 존재하기도 하며 활동한다는 논리를 근본으로 하는 반면, 주희가 강조하는 ≪대학≫에는 이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어≫ㆍ≪맹자≫등에서 도덕 본체의 자각과 본성으로서의 긍정[逆覺體證]에 의한 비약적 깨달음[頓敎]이 본질인 반면 ≪대학≫의 핵심은 격물치지로, 이는 지식을 중시하며 사물에 따라 리를 인식하는[順取] 사고 형태이며 점진적 깨달음[漸敎]이라고 한다. 이는 주희의 사서학 체계가 내적인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사서학을 일관된 체계로 이해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속경남은 주희의 <논맹정의서(論孟精義序)>에 근거하여 ≪논맹정의≫는 주희가 이정(二程)의 도통을 이었고, 그 핵심은 체용일원(體用一源)과 현미무간(顯微無間)을 천명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체용일원과 현미무간은 구도(求道)의 요체로 주희의 사서학 저작뿐만이 아니라 오경학에서도 근본사상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사서학에서 체용일원으로 논리적 일관성을 강조하는 견해는 황준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주희가 체용,이기 등의 개념으로 사서에 새로운 해석을 하였는데, 여기서 체용 등은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되고, 둘이 합해 하나가 되는 [一分爲二, 合二爲一] 사고’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즉 체용, 이기는 ‘구분되나 분리될 수 없는 관계’로 논의된다고 한다.4) 이는 체용의 일원과 이기의 불리부잡(不離不雜)의 논리가 주희의 사서학에 일관된다고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춘봉은 또 다른 시각에서 주희의 사서학이 일관된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제시하였다. 그는 ≪논어≫·≪맹자≫·≪중용≫은 물론이고, ≪대학≫의 격물치지도 결국은 도덕 본심을 밝히는 것이지 외부적으로 사물의 리를 탐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김춘봉은 이에 근거해 주희의 견해를 정이의 이본론(理本論)과 구별되는 심본론(心本論)이라 주장하였다. 또한 채방록은 주희의 사서학이 경전 해석의 역사에서 중요하다고 하며 그 특징을 도통사상을 밝힌 것과 훈고 위주에서 탈피하여 신유학의 의리를 드러낸 것으로 규정한다. 특히 그는 <중용장구서>를 중심으로 나타난 도통사상의 의미를 중시하며 ≪논어≫ㆍ≪맹자≫ 등에서 도통사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주희의 사서학이 일관된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는 모종삼이 ≪대학≫을 선진유가의 다른 경전과 구분하는 시각과 현저한 대비를 이루면서, 주자학 체계에서 사서학이 갖는 학문적 의의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리학을 공부론의 관점에서 면밀히 분석하려는 의도나 시도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속경남이 주희의 사서학이 성선(性善)으로 복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대학≫은 총체적으로 복성(復性)의 사상체계와 방법론을 개괄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의미가 있다.
그는 사서의 핵심은 인성(人性)으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하며 이를 하나의 학문적 방법론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사서학 전체를 복성을 근본 귀착점으로 하는 성리학체계의 내재적 구조라고 결론짓는다. 이는 ≪대학≫을 포함한 사서학 체계가 복성이라는 학문적 방법론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밝혀주는 분석이다. 또한 이는 성리학을 이기의 관계나 심성의 구조 등 형이상학적인 이론 분석에서 벗어나, 실제 이 학문이 핵심적으로 추구한 것은 무엇이며 그 방법은 어떤 것인지를 중점적으로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공부론의 각도에서 사서학에 접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공부론을 중심으로 사서학 체계를 분석하면서 ‘복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기존의 연구에서는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주희의 사서학을 고찰하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복성 또는 복초(復初)라는 기본 논리는 성선설에 입각해 제시되지만 순선한 본성이 즉자적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므로 순선한 본성대로 행위하려는 노력, 즉 공부(工夫)가 필요하다.
이 공부의 방법을 정립한 것이 주희 중화신설의 미발함양공부론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주희의 사서학이 미발함양공부론의 체계적 적용에 의한 해석인 점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주자학이 복성의 논리 구조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왜 복성이 제기되는 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거기에서 도출된 논리와 구체적인 공부 방법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즉 순선(純善)한 성(性)을 함양하는 양성(養性) 의 과정을 통해 복성하는 것이 공부라는 논리를 밝혀볼 것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주희가 중화신설에 정립한 미발함양공부론을 살펴보고, 그것이 주희의 사서학 체계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분석하여, 사서학의 근본 논리가 확충에 있음을 밝혀볼 것이다.
2. 복성설과 사서학 체계
먼저 주희가 주장하는 복성설의 논리 구조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주희의 사서학 저작에서 복성[復其性]과 복초[復其初]라는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 <대학장구서>에서 주희는 "인의예지의 본성이 인간에게 주어지지만 그것을 온전히 하지 못하므로 군사(君師)가 백성들을 다스리고 가리켜 하늘이 준 인의 예지의 성을 회복하게 한다[復其性]."고 하였다. 즉 복성의 맥락은 인간에게 인의예지의 본성이 부여되지만 그것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므로, 학습과 교육을 통해 본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제 설정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복성이 대학의 근본 논리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맹자에서 더 분명하다. 주희는 ‘요순은 본성대로 한 사람이고 탕무(湯武)는 돌이켰다.’고 평가하였고, 공자가 소무(韶武)를 평가하는 구절에서 순의 덕을 성지(性之)로 무왕의 덕을 반지(反之)로 풀이하였다. 성지는 '본성이 온전히 실현되었다'는 의미이고 반지는 '본성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요컨대 복성론의 중요 논지는 본성은 누구에게나 주어졌지만 그것을 온전히 실현하느냐 못하느냐의 현실적 차이가 발생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은 실천적 노력을 통해 본성으로 돌아가야[復性] 한다는 것이다.
또한 복초설을 살펴보면 ≪대학장구≫에서 주희는 “배우는 사람이 명덕이 드러난 것을 인하여 밝혀 그 처음을 회복한다[復其初].”고 하여 대학장구서의 복성의 논리와 일치된 사고를 보여준다. 이러한 논리가 ≪논어집주≫의 “뒤에 깨달은 사람이 반드시 선각자가 하는 바를 본받아야 선을 밝혀 그 처음을 회복할 수 있다[復其初].” 라는 것과 ≪맹자집주≫의 “맹자가 호연지기를 잘 길러 그 처음을 회복했다[復其初].”에서 나타난다. 특히 ≪중용혹문≫에서는 “기질이 달라도 공을 이룬다면 그 처음을 회복한 것이다[復其初].”라고 하여 복초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룬 결과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복성설이나 복초설이 강조되는 이유는 주희가 성선설에 근거하여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즉 본성의 순수지선은 주희에게 자명한 사실이며 학문의 출발점이다. 특히 그 학문이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 배워서 성인이 되는 학문이므로 모든 인간의 성선이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근거이다. 문제는 그런 복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즉 순수 지선한 본성이 온전히 실현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용문에서 보듯이 인간의 순선한 본성은 자동기계처럼 일체의 착오 없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본성의 선함은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때, 바로 복성을 실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주희는 30대 중반에 장식(張栻)을 통해 호상학(湖湘學)의 이론을 접하고 이른바 중화구설(中和舊說)을 세웠지만 스스로 문제점을 느끼다가, 40세 봄인 1169년에 중화신설(中和新說)을 확립하고 자신의 학문적 종지인 미발함양공부론(未發涵養工夫論)을 건립하였다. 중화신설의 핵심은 미발을 함양하는 공부에 있으며, 이는 북송에서부터 사대부들에 의해 제창된, '배워서 성인되기'의 궁극적 방법론이라 평가할 수 있다. 주희는 맹자의 존심양성(存心養性)에 근거하고 장재(張載)의 심통성정(心統性情)의 논리에 따라 미발과 이발을 심을 위주로 이해하면서 이 공부론은 확립하였다. 다시 말해 마음을 보존하여 성을 기른다는 존심양성은 심이 미발과 이발을 관통하며 성과 정을 통괄한다는 성리학적 논리에 의해 미발을 함양하는 공부로 정립된 것이다. 이로부터 선성(善性)이 양성(養性)으로 복성(復性)된다는 논리가 형성되었다. 이후 주희는 자신의 신설에 근거하여 사서학에 대한 체계적인 주석 작업에 매진하였다. 사서집주는 바로 이러한 주희 자신의 학문적 여정 속에서 탄생된 산물이다. 주희의 사서학 체계는 46세(1175년) 이전의 전(前) 사서집주 경학 체계와 그 이후의 사서집주 경학 체계로 구분되며, 주희가 48세인 1177년에 이른바 사서집주의 경학체제가 완성된다. 그 후 60세가 된 1189년에 자신의 학문에 대한 두 번째 총결을 하게 된다. 이로써 사서학체계는 거경(居敬)과 치지(致知),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의 통일적 정신을 체현하게 된다.
여기서 전 사서집주체계는 ≪사서집해(四書集解)≫체계를 의미하며, 대표적이고 중요한 문헌은 바로 ≪논맹정의(論孟精義)≫이다.20) 주희는 <논맹정의서>21)에서 ≪논어≫와 ≪맹자≫의 해석의 역사가 이정에 의해 총결 및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주희는 이정의 논맹 해석으로 공자와 맹자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핵심은 ‘체용일원(體用一源), 현미무간(顯微無間)’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논맹정의서>에서는 ≪논어≫와 ≪맹자≫가 일관된 논리로 이해된다는 주장 이외에, 양자가 서로 다르다는 언급이 보인다. ≪논어≫의 말은 포함하지 못하는 바가 없지만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조존 과 함양의 요체가 아닌 것이 없다. ≪맹자≫ 칠편의 취지는 궁구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은 체험과 확충의 단서가 대부분이다. 주자는 이렇게 ≪논어≫와 ≪맹자≫의 차이를 조존(操存)함양(涵養)과 체험(體驗)확충(擴充)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조존 함양과 체험 확충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특히 ≪논어≫와 ≪맹자≫가 모두 체용일원이라는 입장과 달리 이렇게 차이를 두어 구분하는 것의 철학적 의미를 알기가 쉽지 않다. ≪주자어류≫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글을 찾아볼 수 있다.
≪논어≫는 조존 함양의 요체가 아닌 것이 없으며 ≪맹자≫ 일곱 편은 체험 확충의 단서 아닌 것이 없다. 대개 공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넉넉히 노닐고 실컷 먹게 하고 함영하며 맛보도록 하였다. ≪맹자≫는 대개 사람들로 하여금 탐구하고 힘껏 토구하여 자신을 반성해 스스로 구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천은 ‘공자는 구절마다 자연스럽고 맹자는 구절마다 사실이다’고 했으니 또 이 뜻이다. 예를 들어 ≪논어≫의 ‘거처는 공손하고 일을 맡아선 경건하며 남과 함께는 충실하다’ ‘문을 나서면 큰 손님을 본 듯하며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드는 듯 했다’ ‘예가 아니면 시청언동(視聽言動)하지 말라’는 부류는 모두 존양의 뜻이다. 맹자가 말한 성선, 존심, 양성, 유자입정의 마음, 사단의 발동이 불이 처음 타듯 샘이 처음 흐르듯 한다는 부류는 모두 이 심성을 제대로 체인하여 확충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말을 완미하면 곧 스스로 알 수 있다.
주희의 설명에 따르면 ≪논어≫는 조존ㆍ함양하는 요체이고 ≪맹자≫는 체험하고 확충하는 단서이다. 이는 <논맹정의서>의 논리와 다름이 없지만 여기에는 보다 상세한 주희의 설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논어≫의 ‘거처공, 집사경’이나 ‘비례물시(非禮勿視)’ 등은 존양의 의미이고, ≪맹자≫의 존심, 양성, 사단 등의 논의는 심성을 분명하게 체인하여 확충한다는 의미로 보는 점이다. 여기서 ≪논어≫의 조존ㆍ함양이 존양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논어≫의 조존ㆍ함양은 여기서 존양이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논의되며, 그것이 ≪맹자≫의 확충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양과 확충의 구별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주희는 ≪논어≫의 ‘근본’과 ≪맹자≫의 ‘확충’을 대비시켜 설명한다. 비경이 ‘≪논어≫는 조존 함양의 요체가 아닌 것이 없으며 ≪맹자≫ 일곱 편은 체험 확충의 단서 아닌 것이 없다.’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규모가 커서 그렇게 말할 필요 없이 도리가 안에 자재(自在)한다. 맹자는 대부분 발현처에 나아가 사람에게 다 말해주었는데 끝내 공자가 근본을 확실히 세움과 같지 못했다. 그래서 정자는 ‘그 재주가 높아 배우려 해도 의거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요컨대 공자가 말한 것은 맹자를 포함하며, 맹자가 말한 것은 도리어 성인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 공자가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 가면 인(仁)이 곧 그 속에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거처에 공손하고 일을 맡아 경건하며 사람들과 충실하다’고 했으니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이 마음은 곧 있게 된다. ≪맹자≫에서는 오히려 그렇지 못하여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다.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모두 깜짝 놀라 측은해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모두 일에 나아가 미루어 궁구하도록 하였다. 주희는 ≪논어≫는 근본을 확고히 세우는 것으로 심성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이해하면서, ≪맹자≫는 심성에서 그것을 확충해 나가는 데 초점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논어를 ‘근본을 세우는 것’이라고 이해한 부분이다. 이는 ≪논어≫가 조존ㆍ함양의 존양이라는 점에서 보면 존양이 ‘근본을 세운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논어≫가 존양공부이고 근본 세우기라는 해석은 ≪맹자≫가 발현처에서 체험하고 확충한다는 논리와 분명하게 구별된다. 이제 ≪논어≫의 ‘존양’과 ≪맹자≫의 ‘확충’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구별되는 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특히 이러한 점들은 주희의 사서학을 일관된 논리 체계로 이해하는 맥락에서 반드시 정합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무엇보다 주희의 중화신설에서 정립된 미발함양공부론에 의해 제시되었으며 그 경전적 근거는 ≪중용≫에 있다.
3. ≪중용≫의 致中과 致和
주희는 중화신설을 정립하면서 ≪중용≫을 전면적이고 입체적으로 해석한다. 그 핵심은 바로 치중화(致中和)를 치중(致中)과 치화(致和)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 또한 일이 없는 때에는 본원을 함양하니 곧 본체를 온전히 함이고, 일에 따라 응접하여 각각 자리를 얻음은 곧 시중이다. 길러서 지극한 중에 이르러 잃지 않음이 치중이고, 미루어 때때로 중절하여 어긋나지 않는 것이 곧 치화다. 치중은 중을 지극하게 하는 것 또는 조금도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본체를 온전히 하는 것이고, 치화는 화를 지극하게 하는 것 또는 시중(時中)하여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으로 각득기소(各得其所)하는 공부이다. 주희는 이렇게 치중과 치화를 구분하고, 공부 방법 또한 각각 다른 것으로 본다.
“이른바 치중이란 단지 재중(在中)일 뿐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치우치고 기욺이 있으면 안 된다. 반드시 항상 중심의 십자상에 서야 치중이다. 활쏘기를 예로 들자. 비록 홍심(紅心)을 쏘아 맞추었더라도 홍심의 곁이면 합당하지 않다. 반드시 홍심의 가운데에 맞아야 중이 된다.” 광이 “이는 항상 계신공구 공부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 단지 계신공구가 곧 공부다.” “비록 천리를 보존하였지만 임발할 때 모름지기 점검해야 하니 이것이 곧 저 긴밀한 곳이다. 만약 단지 천리를 보존하기만 하면 더 이상 신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도리어 단지 치중만 쓴 것이고 치화는 쓰지 못한 것이다.” 즉 계신공구가 치중 공부이고 신독이 치화 공부이다. 이렇게 중용의 치중화는 치중과 치화로 구분되며 그 공부 방법은 각각 계신공구와 신독으로 규정된다. 주희가 치중과 치화를 구분하는 것은 본성[天理]이 올바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공부 양태가 다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치중하여 천리를 보존하지 않으면 일에 임하여 치화할 수 없고, 천리만 보존한다고 해서 실제 사물과의 대응에서 천리를 올바로 실현할 수는 없다고 이해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치중공부가 바로 ‘근본을 확고히 세우는 것’이며, 존양만 한다고 해서 공부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주희는 더 나아가 계신공구를 미발공부로 신독을 이발공부로 규정한다. 또한 미발공부는 존양으로 이발공부는 성찰로 규정된다.
대개 심은 한 몸에 주가 되어 동정(動靜)과 어묵(語黙)에 간극이 없다. 그래서 군자는 경(敬)에서 또한 동정과 어묵에 그 힘을 쓰지 않는 것이 없으니, 미발의 전의 경은 정말로 이미 존양의 실질을 주재하고 이발의 때에 이 경은 또 항상 성찰 사이에 실행된다. 즉 심(心)은 동정(動靜)을 관통하므로 심의 미발에는 존양공부가, 심의 이발에는 성찰공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희는 존양과 성찰을 각각 정시공부(靜時工夫)와 동시공부(動時工夫)로 규정하는데, 이는 미발과 이발을 심의 동정으로 이해하는 자신의 논리에 근거한 것이다. 요컨대 ≪중용≫의 치중은 계신공구이고 존양으로 정시공부 또는 미발공부라고 하며, 치화는 신독이고 성찰로 동시공부 또는 이발공부라고 한다. 여기서 주희가 미발ㆍ이발과 중화개념을 통해 정립한 미발함양공부론에 왜 두 양태의 공부가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주장의 근거가 다름 아닌 ≪중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주희는 이러한 사고의 정립을 통해 치중과 치화를 다음과 같이 적용하였다. ≪맹자≫의 이른바 존심양성(存心養性)과 구방심(求放心), 조존(操存) 이런 것 등은 치중이다. 인의의 마음을 확충하는 것이라야 치화이다. 즉 조존 등은 치중으로 확충은 치화로 규정된다. 앞에서 논의하였듯이 주희는 논어를 존양으로 맹자를 확충으로 구분하였는데, 여기서는 확충이 치화와 같은 맥락으로 설명되었다. 이는 논맹의 특징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서로 배척하는 두 요소의 차이가 아니라 공부의 두 양태를 지시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즉 확충이 치화라는 것은 존양이 치중이라는 점과 함께 공부의 한 측면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논어≫와 ≪맹자≫를 존양과 확충으로 구분하는 주희의 사서학적 해석은 자신이 중화신설에서 확립한 미발함양공부론의 두 양태 즉 치중과 치화라는 공부 방법론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그 방법론은 선진유가 경전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정립된 것이라는 점도 파악할 수 있다. 주희는 이렇게 중용의 해석을 통해 치중과 치화의 공부방법론을 정립하였고 이에 따라 사서를 체계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논의의 초점이 되는 확충 개념을 본격적으로 다루어 보자.
4. ≪맹자≫의 擴充
주지하다시피 확충이란 개념은 사실 ≪맹자≫에 처음 보인다. 맹자는 발현처에 나아가 확충하라는 사단의 확충설을 제시한다. 사람은 단지 인의예지 네 가지가 있다. 이는 이 몸의 벼리로 다른 것은 더 타당한 것이 없다. 그 발처에서 체험하여 확충해 간다. 측은ㆍ수오ㆍ시비ㆍ사손은 일상에서 때때로 발동하니 다만 사람이 스스로 확충하지 못할 뿐이다. 인의예지는 사단으로 발현하므로 그것을 확충해가라는 것이 확충설의 기본 논점이다. 여기에는 인의예지의 발현이 수시로 가능하다는 논리와 그것을 본연의 양까지 넓혀서 채워야 한다는 논리가 내재해 있다. 그렇다면 확충의 확과 충은 각각 어떤 의미인가? 확은 벌리고 여는 것이며 충은 놓아 채우는 것이다. 즉 확충이란 넓히고 열어서 채운다는 뜻이다. 이는 무엇인가가 있어 그것을 더 넓히고 어느 정도 있기에 더 채운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일종의 싹을 키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맹자에서 그 싹은 바로 사단이며 이 싹을 잘 키워야 하는 것이다. 싹을 키우는 방법이 바로 사단의 확충인 것이다.
측은지심은 단지 어린이를 볼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마다 모두 이와 같다. 오늘 하나의 일에서 미루어 가고 내일 또 두 번째 일에서 미루어가 점점 개방하여 집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천하로 미쳐 사해를 보전할 수 있는 곳에 이르면 다 채운 것이다. 확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어떤 일 어떤 상황이든, 항상 측은ㆍ수오ㆍ사양ㆍ시비의 선한 마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일마다 그렇게 한다는 점과 지속적이고 점진적으로 해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함축한다. 그래서 주희는 사단의 확충으로 중용의 치곡(致曲)을 풀이하고 있다. 인성은 비록 같지만 기품은 혹 달라, 그 성으로부터 말하면 사람은 어린 아이 때부터 성인의 자질은 모두 이미 완구되었다. 그 기로 말하면 오직 성인만이 그 전체를 거행하여 다하지 못한 바가 없다. 위 장에서 말한 지성과 진성이 이것이다. 그 다음은 선단(善端)이 발한 바에서 그 품수의 후박에 따라 혹 인하고 혹 의하며 혹 효하고 혹 공손하여 같을 수 없다. 각각 그 발현한 편향을 인해 하나씩 미루어서 그 지극함에 이르러 박한 것을 후하게 하고 다른 것을 같게 하지 않으면, 전체를 관통하여 그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 장의 소위 치곡은 ≪맹자≫의 사단을 확충한다는 그것이다.
치곡의 의미는 다양하게 전개되지만, 주희는 ‘한 가지에 치중한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을 경계한다. 주희는 하나의 굽이에서 드러난 마음을 통해 그것을 지극하게 해 나간다는 의미로 치곡을 이해한다. 주희는 치자의 의미를 “미루어 지극함에 이른다.”고 해석하며 그것은 곧 확충의 의미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드러난 단서를 지극하게 한다는 것인데 이는 곧 확충 그 자체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치곡이란 선단의 발현처에서 미루어 지극하게 하다라는 의미이며 이것이 곧 ≪맹자≫의 사단 확충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까지 넓혀가는가? 즉 다 채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충은 자신의 본연의 양을 미루어 가득 채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연의 양은 어떻게 논의되는가? 추(推)는 여기서부터 미루어 가는 것이다. 나의 노인을 노인으로 대하여 다른 사람의 노인에 미치고 나의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하여 다른 사람의 어린이에 미친다. 여기에 이르면 가득 메워 채우게 된다. 물을 주입하는 것과 같아서 미룸은 아래로 물을 대는 것이며 충(充)은 이 그릇을 다 대서 채우는 것이다.
인의의 성은 본래 천지에 가득 찬다. 만약 자신이 확충하지 못하면 이 몸을 가득 채울 수 없으니 빈 몸일 뿐이다. 주희는 본연의 양이란 바로 천지에 가득 차는 것이라 한다. 본래 자신의 양인 천지에 가득 차는 양을 다 채우라는 의미가 확충설에 담겨있다. 즉 본연의 양을 채우는 확충에서 그 본연의 양을 천지로 보고 있다는 것에서 만물일체의 경지를 떠올릴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확충이 결핍된 본성을 채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즉 본성의 질적 결함을 후천적으로 보충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실제 내가 만물과 단절되지 않고 본래 연결되어 있다는 논리가 유학에서 매우 중요한 사고라는 점이다. 우리는 본래 만물과 하나이다. 그것이 우리의 본연의 양이다. 그러나 기질과 사욕에 의해 본래의 일체성을 상실하면 개체적 속성이 표출되고 심성은 더욱 협소해진다. 그러나 인륜의 장에서 끊임없이 공부해가면 본래적인 일체성은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이런 회복의 과정을 주희는 확충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확충은 양적인 확장 또는 확대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에서 맹자의 호연지기에 대한 주희의 주석을 살펴보자. 주희는 호연지기의 해석에서 기를 본래 호연하다고 풀이한다. 즉 주희는 “그 기는 지대하고 지강하여 곧음으로 길러 해가 없으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찬다.[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閒]”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지대(至大)란 애초에 한정된 양이 없음이고 지강(至剛)이란 굽히고 꺾이지 않음이다. 천지의 정기를 인간이 얻어 생겼는데 그 모습이 본래 이와 같다. 오직 스스로 반성하여 곧으면 기르는 바를 얻을 수 있고, 또 작위하여 해치지 않으면 본체는 어그러지지 않아 빈 틈 없이 가득 찰 것이다. 호연지기가 천지지간에 가득 찬다는 것은 바로 이 확충의 궁극을 말한다. 즉 확충이란 본래의 양을 채우는 것이고 이는 결국 호연지기를 키우는 것과 같은 맥락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양이란 바로 천지를 가득 채우는 양이고, 이는 ‘호연지기가 천지에 가득찬다.’는 의미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즉 주희는 인간이 얻은 천지의 정기를 잘 기르면 천지간에 틈이 없이 가득 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확충의 궁극은 천지와 동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호연지기를 얻는 방법은 바로 ‘일마다 올바르게 행위한다.’는 집의이다. 기는 비록 도의에 짝하지만 그 기름의 시작은 일이 모두 의에 합치함에 말미암는다. 스스로 반성하여 항상 곧아서 부끄러운 바가 없으면 이기는 자연스럽게 안에서 발생한다. 단지 하나의 일이 우연히 의에 합치해 밖에서 엄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희는 ≪맹자≫의 집의를 적선(積善)으로 보면서, 하나의 사태가 의에 합하는 것이 아니라 일마다 모두 의에 합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중용≫의 치화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 즉 치화란 모든 일에 다 중절하는 것이고 언제나 잘못이 없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마다 의에 합치하고 일마다 절도에 맞는 것[事皆合義, 事皆中節]이 바로 확충의 의미인 것이다. 이는 ≪맹자≫의 집의나 확충이 모두 ≪중용≫의 치화 공부의 맥락에서 논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주희의 사서학이 중화신설의 공부론에 입각해 설명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확충이 양적인 확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집의(集義) 양기(養氣)의 논의에서는 그것이 질적 변화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인간이 직면하는 다양한 사태 속에서 각각 의롭게 행위해 갈 때 그것은 곧 도덕적 실천 역량이 강화되는 것이고 의지가 강해지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확충은 양적인 확장과 질적인 강화라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희는 ≪맹자≫의 ‘친친ㆍ인민ㆍ애물’의 차등적 사랑의 논리에 대해서도 “인은 뿌리이고 측은은 새싹이다. 친친 인민 애물은 미루어 넓혀 가지와 잎에 이른 것”이라고 하여 확충이란 바로 측은의 싹을 미루어 넓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측은지심의 확충이란 이러한 싹을 키워서 가지 잎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맹자≫의 ‘사단의 확충’, ‘집의양기’, ‘친친ㆍ인민ㆍ애물’의 논리에서 확충이라는 논리가 핵심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대학≫의 致知
이렇게 발현처에서부터 지극하게 미루어 간다는 확충의 논리가 바로 ≪대학≫「격물보전」의 가장 근본적인 논리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격물치지는 또한 이미 아는 바를 인하여 미루어 알지 못하는 것에 미치는 것이다. 다만 하나의 근본이니 원래 두 양태의 공부가 없다. 치지공부는 또한 단지 이미 아는 것에 근거하여 완미하고 탐색하여 확충해 가는 것이다. 마음에 구비된 것은 본래 부족함이 없다. 주희는 여기서 ‘이미 아는 것’에서 미루어간다고 하고 그것을 또한 확충해 간다고 말하고 있다. 치지란 바로 ‘이미 아는 것’에 근거하여 미루어 넓혀가는 것이다. 이는 사단의 확충이 발현한 단서에서부터 넓히고 채워간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아는 것’의 의미는 더 살펴보자. 사물에는 리가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사람은 앎이 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 예컨대 어린 아이는 그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고 성장해서는 그 형을 공경할 줄 아는 것과 주리면 먹을 것을 구할 줄 알고 목마르면 마실 것을 구할 줄 아는 경우에도 앎이 있지 않은 경우가 없다. 다만 아는 바가 대략적인 것에 그쳐 앎을 미루어 지극함에 이르게 하지 못할 뿐이다. 치자의 뜻은 손으로 밀어 보내는 뜻과 같다. 모든 경전 속에 치(致)라고 한 것은 그 뜻이 모두 이와 같다. ≪대학≫「격물보전」의 이미 아는 리의 확충이란, 인간이 애친경형(愛親敬兄)할 수 있는 것에서 보듯이 이미 도리에 대한 앎이 있다는 점에 근거한다. 여기에는 어떤 함축이 있는가? 확충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일마다 중절(中節), 합의(合義)하는 것이다. 즉 항상 도덕적으로 상황에 적합하게 올바르게 행위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도덕적 실천 행위는 완전한 무지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주희의 견해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선하고 그것이 사단의 형태로 드러나므로 거기에서부터 더욱 넓혀가라는 것이 주희의 기본적이 사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인간의 양지(良知)와 효제가 중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희는 이런 양지와 사단의 확충을 격물치지의 맥락으로 이해한다. 치와 격은 다만 미루어서 지극하도록 궁구해 이르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각각 견식이 있으니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없다. 예컨대 어린아이도 그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없고 성장해서는 그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자가 없으며 선악시비의 경우에도 또한 매우 분명히 안다. 다만 미루어 확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견식이 끝내 다만 이와 같다. 반드시 이 단서에 인하여 따라서 궁구해 이르러야 한다. 단서가 발현함을 보지 못했을 때는 공경하여 함양해야 하고 단서를 발견하면 곧 궁구해 이르러간다. 또한 근거 없이 사물을 찾아가 격(格)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격물이란 단서를 확충해 미루어 끝까지 채우는 것이다. 격물은 단서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아는 것[已知]을 미루어 지극하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주희가 생각하기에 보통 사람들이 인간의 도리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앎이 있으니 그것에서 확충해 지극하게 하라는 것이 격물치지의 의미이고 이것이 바로 확충설의 가장 근본적인 논리이다.
6. ≪논어≫에서 확충의 논리
앞에서 보았듯이 주희는 ≪논어≫는 존양이고 ≪맹자≫는 확충이라고 구분하였다. 그러면서도 주희는 ≪논어≫는 ≪맹자≫를 포괄하지만 ≪맹자≫는 그렇지 못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는 ≪논어≫와 ≪맹자≫라는 텍스트의 성격 규정과 함께 ≪논어≫가 갖는 고유한 의미와 논리를 짐작하게 해주며 또한 ≪논어≫에서 제시한 공부 방법과 ≪맹자≫에서 강조한 공부방법이 연관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러한 점을 실마리로 ≪논어≫와 확충설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펴보자. 이는 단지 ≪논어≫와 ≪맹자≫라는 텍스트간의 비교가 아니라, 주희 전체 공부론의 맥락에서 존양과 확충이 어떻게 서로 관계되는지 살펴보는 의미를 갖는다. 공자는 사람을 가르침에 매우 직절하였고 맹자는 비교적 힘을 많이 썼다. 맹자는 반드시 확충하려 했다. 공자는 사람을 가르침에 원래 시작하는 점이 있었다. “공자는 어째서 사람에게 확충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거처에 공손하고 일을 맡아 경건한 것이 확충이 아니면 무엇인가?” 사단 중 수오ㆍ사양ㆍ시비도 일에 따라 발할 뿐이다. 이 마음이 아직 수오를 일으키지 않았을 때 억지로 저 사람을 증오해도 안 된다. 측은의 경우 또한 자극에 있어야 비로소 보인다. 억지로 안배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 학자는 단지 이 마음을 알아서 보존하고 주재하여 경을 유지하면 사단은 점점 확충될 것이다. 주희는 ‘거처공, 집사경’을 확충이라거나 존주(存主)하여 경에 있으면 사단이 확충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결국 경공부가 존양의 핵심이며 그것이 논어의 근간이라는 점과 경공부가 확충과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주희에게 경은 아래위를 관통하는 공부법으로 정위되며, 인간의 언행 즉 용모사기에 경건하고 엄숙히 하는 것을 중시한다. 경(敬)하면 마음을 잡을 수 있고, 마음은 잡으면 보존된다. 보존된 마음은 바로 양성의 장소이다. 이것이 주희가 이해한 ≪논어≫의 공부론이다. 그런데 주희에게 경은 단순히 조용하게 앉아있기[靜坐]나 눈을 감고 우뚝 앉아있기[閉目兀坐]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집사경’은 이른바 이발의 경이다. 주희가 경을 단순한 정좌가 아니라고 하거나, 경을 미발과 이발로 구분하는 것은 경공부를 오해하는 경우 생길 수 있는 폐해 때문이다. 즉 경을 정좌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불교의 좌선입정과 같은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고 주희는 경계한다. 사실 여기에는 중요한 철학적 주제가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미발기상(未發氣象)의 체인(體認)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점이다. 주희는 신설을 통해 이를 미발함양공부의 정시공부인 존양의 의미로 이해하였다. 그러면서도 주희는 이통이 말한 이 미발기상의 체인 공부가 자칫 좌선입정(坐禪入定)이라는 불교의 논리로 빠지게 될 수 있음을 매우 경계하였다.
이렇게 주희가 존심양성의 논리에서 경공부가 미발과 이발에 관통한다고 보는 것은 자칫 존심양성이 사물과 올바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주정(主靜)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희는 양성이라는 것이 결코 정적인 공부가 아님을 강조한다. 주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맹자가 마음을 보존하고 성을 기르라고 했는데, 다만 사람이 항상 이 마음을 잡아 보존하여 방일하게 안하면 스스로 강학하여 의리를 밝혀 동정의 사이에 모두 성의 당연을 따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심양성에 대한 유자의 설을 들을 수 있습니까?” “존심은 기가 외물을 쫒지 않아 항상 지극히 바름을 지키는 것이다. 양성(養性)은 일이 반드시 리를 따라서 그 본연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이로서 미루어보면 유자와 이단의 구별은 분명할 것이다.” 즉 존심양성이란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기르는 것인데 그 양성의 의미는 다름 아니라 성의 당연을 따르는 것이고 성즉리라는 점에서 보면 곧 리를 따름 즉 순리(循理)인 것이다. 주희는 이점을 유학과 이단의 구분으로까지 보고 있다. 그러므로 경이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에 따라 올바르게 행위할 수 있는 공부이고, 확충이 인의지심을 일마다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상호간의 필연적 연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논어≫가 존양을 기본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확충의 의미는 배제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주희는 ≪논어≫의 하학상달이 바로 격물치지의 확충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맹자의 뜻은 다만 궁리가 지극하면 심이 자연히 전체를 지극하게 하여 남음이 없다는 것이지 그 마음을 크게 한 후에 성을 알고 천을 아는 것이 아니다. 도부가 “[이에 대해] 단지 횡거가 말한 것과 같다면 또한 본래 착수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자 “횡거가 때로 본래 그렇게 말하려 했는데, (이는) 공허하게 상상하면 심이 자연스럽게 커진다는 것과 같다. 이런 곳은 원래 단지 격물을 많이 하면 자연히 탁 트여 관통처가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학상달이다. 맹자의 뜻은 단지 이와 같다.” 주희는 격물관통의 의미를 하학상달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심을 공허하게 상상해서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희는 이렇게 집의해서 호연지기가 생긴다는 점에서 강조한 점진적 누적의 의미가, 대학의 격물치지에서 아는 것을 확충해 누적 관통한다는 논리로 정립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논어≫의 하학상달의 의미라고 이해한다. 이렇듯이 주희는 순서에 따른 점진적 자기 공부[하학]로 자연스럽게 상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전자는 확충의 논리로서 점진적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후자는 하학을 통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란 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바로 위 인용문에서 격물을 많이 한 후에 자연적으로 관통한다는 ≪대학≫의 격물치지의 입장과 일치하는 논리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런 확충설은 단서로부터 확충한다는 점에서 씨앗 싹이라는 비유로 많이 논의된다. 모두 사람이 학문에 진보하기를 권면하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이다. 이 도리는 감당하기 어려우니 단지 이렇게 힘써 가는 것이다. ‘싹텄으나 꽃 피지 못하고 꽃 피었으나 열매 맺지 못한다’는 것은, 대개 사물은 생명이 있어도 성장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성장해도 성취하는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희는 생겨나서 길러져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생명의 싹이 트고 그것이 자라고 길러져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주희는 이를 통해 꽃이 피어 열매를 맺어야만 완성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단이라는 싹에 근거하여 그것을 키워간다는 확충의 논리와 닮아있다. 이 점을 주희는 이천의 곡종설(穀種說)을 통해 설명한다. 이천의 곡종설로 미루어보면 그 심(心)은 씨앗과 같으니 생명의 성이 곧 인이고 양기가 발동한 것이 곧 정이라 한다. 대개 이른바 생의 성은 곧 인의 체(體)고 발처는 곧 인의 용(用)이다. 저 박시제중(博施濟衆)은 또한 씨앗이 열매를 맺어 남에게 이익이 미친 것을 말한다. 이로 보면 인과 성을 알 수 있다 …또 말했다. ‘어찌 인을 일삼겠는가’는 어찌 인에 그치겠느가 반드시 인의 덕의완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마치 ‘어찌 나무에 그치겠는가? 반드시 나무가 성취된다. 어찌 씨앗에 그치겠는가? 반드시 씨앗이 벼를 이룬다.’는 뜻과 같다.
주희는 심을 곡종 즉 씨앗으로 비유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런 씨앗의 싹과 열매로서 인(仁)과 성(聖)을 비교, 설명하고 있다. 즉 이익이 남에게 미치게 된 것을 주희는 열매로 보고 있다. 이는 인과 성의 구분에서 실제 행위를 통하여 남에게 까지 미처 어떤 결과를 이루어 내는 것에 초점이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여기에는 사랑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타인에게 미쳐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만약 사욕과 기질에 의해 이 순선한 본성이 은폐되면, 결국 마음은 자기 자신의 협소한 이익 추구에 경도될 것이고 타인에게 열려가는 확충의 의미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주희는 성인 문하의 공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인 문하의 일상의 공부는 매우 천근한 것 같다. 그러나 리(理)를 미루어보면 포함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관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넓혀 채우게 되면 천지와 그 광대함을 같이 한다. 그래서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며 천지를 정위 시키고 만물을 양육하니 다만 이 하나의 리일 뿐이다. 일용공부가 천근해 보이지만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에 미루어 넓히면 천지와 그 광대함을 같이 한다. 궁극적으로 하나의 리일 뿐이므로 어떻게 확충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확충한다면 천지와 그 광대함을 같이할 수 있으므로 천지가 정위되고 만물이 양육되는 것이 여기서 가능한 것이다. 이는 만물일체의 논리로 이해할 수 있으며 본래 일체였던 인간이 비로소 다시 실제적으로 일체성을 회복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나로부터 남에게 실제로 올바른 일을 적합하게 해 내면서 점점 확충시켜 본래의 양을 다시 채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주희는 ≪논어≫의 하학상달(下學上達)과 박시제중(博施濟衆) ≪맹자≫의 사단확충(四端擴充)과 집의양기(集義養氣)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중용≫의 치화(致和)와 치곡(致曲) 등을 유가의 핵심적 종지임을 규명하여, 확충(擴充)의 논리가 사서에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주희는 미발함양공부론에 근거하여 존양과 확충은 상보적인 관계지만, 유가의 공부는 실제 일상에서 하나씩 올바르게 행위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7. 맺는말
기존의 연구에서 사서학의 확충의 논리를 중점적으로 밝혀낸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주희의 중화신설에 나타난 미발함양공부론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사서학을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공부론을 중심으로 주자학을 고찰하려는 접근이 약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종삼은 점진적인 공부법인 ≪대학≫이 ≪논어≫ㆍ≪맹자≫ㆍ≪중용≫ㆍ≪역전≫처럼 비약적 깨달음을 근본으로 하는 논리와 다르다고 하여, 주희의 사서학 체계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서학은 확충을 핵심적인 논리로 체계화되어있다. 이는 ≪대학≫ㆍ≪논어≫ㆍ≪맹자≫ㆍ≪중용≫이 일관된 논리를 갖는 정합적 체계임을 의미한다. 주희는 성선설에 근거하여 자신의 학문체계를 세운다. 여기서 성선이 현실적으로는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양성하여 본성으로 돌아간다는 복성론 또는 복초론이 언급된다. 그러나 어떻게 복성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공부론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희는 중화신설을 통해 미발함양공부론을 확립하였다.
여기서 주희는 ≪중용≫의 치중화(致中和)를 치중(致中)과 치화(致和)로 구분하여, 각각을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이라는 정시(靜時)공부(또는 미발공부)와동시(動時)공부(또는 이발공부)로 규정한다. 이에 근거하여 주희는 사서에 대한 주석을 전개한다. 주희는 확충을 동시공부인 치화(致和)로 보아 자신의 공부론 안에 위치시킨다. 또한 ≪논어≫는 존양이 중심이지만 그것은 확충과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충이 가능한 필수 조건으로 자리잡힌다. 이로부터 존양과 확충이 모두 필요하지만 사서학은 확충을 근본 논리로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여기에는 일상의 인륜 실천을 강조하여 사태에 올바르게 대응하는 것이 유가의 중요한 본령이라고 이해하는 주희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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