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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역사

몽골 제국과 고려와의 관계

작성자신으로|작성시간19.03.28|조회수1,044 목록 댓글 0


몽골 제국과 고려와의 관계

    


몽골 제국의 고려 침입도


몽골과 고려가 최초로 접촉한 것은 1218년 카친과 잘라가 이끄는 몽골군이 거란(Khitai)의 잔당을 쫓아 한반도 북부로 들어왔을 때였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 파견한 김취려와 조충 두 장군은 몽골군과 연합하여 1219년 강동성(현재 평양시 강동군)을 함락시켰다. 양측이 형제 맹약을 맺었으나, 몽골 측의 과도한 공납 요구와 1225년 사신 제구예(저고여) 피살 사건으로 인해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몽골 측은 칭기즈 칸의 사망으로 한동안 보복을 하지 못하다가 오고타이(Ogedei) 칸이 즉위한 뒤 고려 원정을 결의하고, 1231년 사르탁(살리타)을 파견하여 침공을 개시했다.


몽골군은 어려움 없이 고려 북부를 손에 넣고 정복된 지역에서 재물을 걷기 위해 72인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었다. 위기에 빠진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하여 대몽 항전을 시작했다. 일부 산성이나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게릴라식 항전이 이루어져 사르탁이 처인성(處仁城, 현재 경기도 용인시)에서 김윤후(金允侯)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그 후 몽골의 침공은 거의 30년에 걸쳐 단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235~1239년 탕구트, 1247년 아무칸, 1251~1253년 예쿠, 1254~1259년 차라대 등의 침공이 계속되었다.



대몽항쟁기의 강화도


  

여몽 관계는 1258년 최의가 피살되고 대몽 강경 노선을 고집하던 무신정권이 붕괴되면서 전기를 맞게 된다. 고려에서는 복속과 화평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1259년 태자 왕전을 몽골로 파견했다. 왕전은 당시 쓰촨에 있던 몽케(Mongke) 칸을 만나러 가다가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귀환하던 도중, 남송 원정을 중단하고 북상하던 쿠빌라이(Kublai)와 조우했다. 당시 아리크 부카(Ariq Buka)와 경쟁하던 쿠빌라이는 고려 태자 일행과의 만남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고려가 자발적으로 복속해온 것은 천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나타낸다고 선전했다. 이렇게 해서 고려는 몽골의 잔혹한 응징과 보복을 피해 우호적 평화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고려와 몽골의 혼인 관계도()와 몽골의 6()


  

1269년 임연이 원종을 폐위하자 몽골은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왕을 복위시켰다. 이를 계기로 태자 왕심과 쿠빌라이의 친딸 쿠틀룩 켈미시(제국대장공주)의 혼인이 성사되었다. 충렬왕으로 즉위한 왕심은 고려의 국왕이면서 동시에 몽골 황실의 부마(駙馬, Guregen)가 되었고, 1280년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이 설치될 때는 승상(丞相)에 임명됨으로써 3가지 지위를 동시에 지니게 되었다. 1260년에 시작하여 1280년경에 완성된 여몽 관계의 틀은 기본적으로 고려와 몽골 두 나라가 종말을 맞게 되는 14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처인성 전투와 김윤후()


양측의 외교 교섭은 주로 한자 문서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외형과 표현은 과거 전통적인 '책봉-조공' 관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한족 왕조들과는 달리 유목민이 세운 몽골 제국이기 때문에 도입된 특징들도 현저하게 나타난다. 고려에 요구한 소위 6(六事, 인질 파견, 군사 지원, 세량 납부, 역참 설치, 호구 조사, 다루가치 설치), 고려 국왕이 속국의 군주로서가 아니라 부마, 즉 제왕의 자격을 갖고 정치적 활동을 했던 사실이 그러하다.



 

여몽 관계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몽골인들이 지닌 정치 관념의 특수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외교 관계를 '국가''왕조'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칭기스 일족과 다른 나라 군주들과의 인신적, 개별적 관계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고려 국왕과 몽골 칸의 관계로 표상되었다. 당시 고려 국왕은 제국의 외부에 별도로 존재하는 영토와 백성을 갖고 있는 군주임과 동시에 칭기스 일족의 부마로서 제국 내부에 존재하는 제왕이었다. 정동행성의 승상이라는 직책도 제국의 고위 관리라는 점에서 제국 내적 존재였다. 몽골 제국 시기 고려의 정치적 위상은 이러한 국왕의 지위와 연동했기 때문에 이중적인 특징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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