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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역사

사마천의 후손들이 전하는 사마천의 최후

작성자짜르르|작성시간20.04.01|조회수2,840 목록 댓글 0


사마천의 후손들이 전하는 사마천의 최후

    


 

지난 20여 년 동안사기를 연구해 온 김영수 전 영산원불교대학 교수는 지난해완역 사기본기 1(알마 펴냄)을 내놓고사기완역이라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최근 김원중 건양대교수가 펴낸 완역본에 이어 또 하나의사기완역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한나라 때 역사학자 사마천이 쓴사기는 왜 이토록 국내에서 꾸준한 관심을 받을까? 또 김영수 전 교수의 완역본은 어떤 다른 특징이 있을까?(중략)

 

김 전 교수는 1999서촌 (중국 산시성 한청시 서촌. 사마천의 고향이다-옮긴이)을 방문했을 때 사마천의 후손을 만나서 사마천의 죽음과 관련된 얘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사마천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었는데, 후손들은 한 무제(이름은 유철-옮긴이)에게 처형당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후손들이 사마성을 쓰지 않고 ()’이란 성을 쓰고 있는 것도 그 화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현장을 다니지 않으면 역사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책에는 자신이 직접 찍은 유적 사진과 그에 대한 설명 등 현장에서 얻은 정보들이 가득 들어 있다. 텍스트(기록/-옮긴이) 번역을 위주로 한 기존 완역본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중국 문화공습맞서려면 사기제대로 알아야.”

(문법과 어법에 맞지 않는 부분, 있어야 할 낱말이 빠진 부분은 고쳤으나, 내용 자체를 손대지는 않음)

 

황당하다고? 역사책엔 그런 말이 없다고? 그럼 이제부터 내 말을 들어보기 바란다.

 

김영수 교수가 사마천 선생의 고향에서 들은 야사(野史)에 따르면, 사마천 선생의 후손들이 성을 동()씨와 풍()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사마천 선생의 성씨는 사마(司馬)인데, ()자 옆에 작대기를 붙여 ()’으로 바꾸고, ()자 옆에 두 이() 변을 붙여 ()’으로 바꾼 것이다. 이는 자신을 사마천 선생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한성시(韓城市) 서촌(徐村)의 동씨와 풍씨들이 김 교수에게 전해준 이야기다.

 

나는 개성 왕()씨들이 이성계의 탄압과 학살을 피해 성을 전()씨나 옥()씨나 전()씨로 바꾼 야사(에 작대기 두 개를 붙이면 이 되고, 에 점 하나만 더 찍으면 이 되며, 에 들 입자를 덧붙이면 이 되기 때문이다)를 알기 때문에 이 야사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금관가야의 왕족도 같은 어버이에게서 나왔으나 한 쪽은 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김()(김해김씨)가 되고, 다른 한 쪽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허()(김해 허씨)가 되었다.

 

다이 비엣(한자로는 대월大越. 베트남의 옛 이름)의 황족(皇族)이다가 쩐(한자로는 정. 프랑스어로는 트란Tran')씨에게 나라를 빼앗긴 리(Li. 한자로는 이) 씨 집안도 쩐 씨의 학살과 탄압 때문에 자신의 성씨를 버리고 다른 성씨를 써야 했다 (, 화산 이씨는 고려로 달아났기 때문에 자기 성씨를 지킬 수 있었다).

 

또한 유비(劉備. 촉나라의 황제. 시호 선주先主/소열황제)의 후손은 서진(西晉)이 망한 뒤 시골에 내려가 숨어 살았는데, 600여년 뒤 씨족 가운데 죄를 지은 사람이 있어 멸족당할 위기에 처하자 성씨에서 도(?)변과 묘()변을 빼고 남들 앞에서는 김()씨라고 주장했다(‘자에서 를 빼면 금자만 남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사회에서는 성씨는 함부로 바꾸면 안 된다.”는 관념이 강했으므로, 성씨를 바꿔야 했다는 건 그 집안이 탄압받거나, 미움을 사거나, 선조가 권력자에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살아남으려고 일부러 다른 집안인 척 했다는 이야기임).

 

또한 임금이나 귀족이 사마천의 후손에게 새 성씨를 주었다는 기록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새 성씨를 줄 때에는-또는 이민족이 들어와서 국적을 바꾸고 유교문화를 받아들일 때에는-예외적으로 성씨를 바꾸는 게 허락된다)도 없으므로, 이 사실도 사마천의 후손이 탄압받았다는 가설에 무게를 실어준다.

 

게다가 서촌 사람들의 야사(野史)에 따르면, 원래 서촌에 묻힌 사마천을 기리는 제사는 아주 조촐했다고 한다. 관아의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제사를 몰래 지냈으며, 동씨와 풍씨들은 청명절(淸明節. 동지冬至로부터 온 나흘[104] 뒤를 일컫는 말. 음력으로는 3월이고 양력으로는 4월임. 조상의 무덤을 돌보는 날이기도 하다-옮긴이)사당과 무덤을 청소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북과 꽹과리를 치고 놀다가’, 얼른 사마천 선생의 위패를 모신 다른 곳으로 가서 잽싸게 제사를 지낸 뒤 나와서 꽹과리를 치고 놀았다고 한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중국 정부는 사마천 선생의 제사를 국가의 큰 행사로 선언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만약 사마천이 늙고 병들어서 세상을 떠났다면-그리고 그가 한() 나라와 유철(劉徹. 서한西漢 무제의 이름. 무제武帝는 죽은 뒤에 받는 존칭인 묘호다)의 미움을 사지 않았다면-죽은 뒤 후손들이 눈치를 안 보고 기일(忌日 : 세상을 떠난 날. 그러니까 제삿날. 제일祭日이라고도 한다)에 정중하게 제사를 지내지 굳이 핑계를 대거나, 청명절에만 제사지내거나, 노는 척 하다가 재빨리 제사를 지내고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다. 또 그는 한나라의 환관이자 벼슬아치였으므로, 관아에서 제사지낼 비용을 대 주거나 못해도 후손들이 그를 제사지내는 걸 막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야사는 이 모든 상식과 어긋나는 이야기를 전한다.

 

쉽게 말해 사마천 선생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며, 그는 한나라와 유철의 미움을 샀으며, 후손들은 정부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주 보수적으로 따져도 삼국시대가 열릴 때까지, 그러니까 서기 220년 동한東漢이 공식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286년 동안 감시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좀 더 비관적으로 따진다면 위나라는 동한을 무너뜨린 뒤에도 그 문화와 관행을 대부분 이어받았고 서진西晉도 이는 마찬가지였으므로 감시를 받은 기간은 402년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 3세기[또는 4세기]동안 감시당했다면 야사에서 말하는 풍습이 생겨난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살아남기 위해 진심을 감추고 제사를 놀이로 위장해야 했을 테니까. 이들이 오늘날까지 동과 풍이라는 성씨를 쓰는 걸 보면 - 516국 시대의 나라들과 북조 정권은 빼고-서진 이후의 중국 왕조들도 사마천의 후손들을 탄압하고 감시한 듯하다)

 



그렇다면 사마천이 사형에 처해졌다고 볼 이유는 있는가?

내가 볼 때에는 있다. 원래 사마천은사기효무본기(孝武本紀)라는 이름으로 유철의 이야기도 따로 써서 집어넣었지만, 후세 사람이자 동한(후한)의 학자인 반고(班固)“(사기에서) 벌써 10여 편이 없어졌다.”고 말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부분만 사라졌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봉선서(封禪書)를 참고해효무본기를 다시 써서사기에 집어넣었다.

 

정부의 공식 역사서가 된 책이 모조리 불에 타서 사라진 것도 아니고, 일부분만 사라졌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나라 조정이나 한나라의 황제가 껄끄럽게 여기는 내용이 실렸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의도적인 삭제와 검열을 의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마천이 쓴 원래의효무본기는 지금 우리가 읽는 글과 많이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사마천의효무본기가 유철을 추켜세우는 내용이었다면 굳이 없앨 필요가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유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를 헐뜯거나, 깎아내리거나, 욕하는 글을 쓴 사람을 도저히 살려둘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유철은 그를 사형에 처하거나, 감옥에 가두거나, (:노비)으로 만들거나, 벌금을 물리거나 벼슬자리에서 내쫓거나 귀양을 보냈을 것이다. 유철과 로 얽힌 사람 가운데 사마천이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이미 이릉을 감쌌기 때문에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되었다. ‘전과가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그랬던 그가 또 다시 유철의 분노를 샀다면? 그리고 사마천이사기를 다 써서 이제 할 일은 다 했으니 설령 죽는다 해도 아쉬울 건 없어.’라고 판단하고 순순히 형벌을 받았다면? (심리학적으로 생각해도 예전에 자기를 화가 나게 했던 사람이 또다시 화를 부추긴다면, 예전에 내렸던 처벌보다 더 잔인한 벌을 내리는 건 당연하다. 유철이 사마천에게 또다시 화를 냈다면, 궁형보다 더 무거운 벌인 사형을 선고한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없어진 원래의효무본기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마천이 책을 다 쓴 건 서기전 91년이고, 그가 죽은 건 서기전 86년인데? 유철이 책 때문에 화를 냈다면 책이 다 사라지던가, 아니면 사마천이 서기전 91년에 죽었어야지!”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유철이 처음에는 화가 나도-사마천에게 모질게 대한 과거가 있는지라 그리고 사마천 선생이 이미 벌을 받은지라-참았지만, 나이가 들어 자제력이 약해지고 후계자들의 자리다툼이 일어나 신경이 날카로워지자, 6년 전의 나쁜 감정이 되살아나 화를 참지 못하고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는 것이다(한비자는 젊고 아름다울 때에는 임금에게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를 받았지만, 나이가 들자 임금의 사랑을 잃어 젊을 때 저지른 잘못으로 벌을 받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유철도 그 임금처럼 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물론 사마천은 생김새가 아니라 말과 글 때문에 미움을 샀지만 말이다).

 

사기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사연도 석연치 않다. 기록에 따르면사기는 사마천의 외손자인 양운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서기전 74년 이후에 역사책이 드러난 것이다. 이미 사마천이 다 써서 유철에게 바친 책이 왜 열여덟 해가 흐른 뒤-그것도 유철이 죽은 뒤에-다시 나타나야 했을까?

 

사마천이 자연사했다면-그리고 그의 집안이 안전했다면 - 굳이 외손자가 책을 바쳤을까?

 

게다가 양운은 유철의 증손자이자, 유철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황족의 후손인 유순이 서한을 다스리던 시절에 이 책을 내놓았다. 유철에게 원한을 품거나 유철을 원망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게 책을 바친 것이다. 쉽게 말해 이제는 유철의 눈치를 안 봐도 되겠구나.’라고 판단하고 책을 공개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사기는 유철의 미움을 산 역사책일 가능성이 높다.

책이 임금의 미움을 샀다면 책을 쓴 사람의 운명은 뻔하다. 잘해 봐야 쫓겨나거나 감옥에 가고, 최악의 경우에는 사형에 처해지거나 그 집안이 망한다.

허균과 박지원도 그들의 글 때문에 임금의 미움을 샀고, 그래서 처형당하거나(허균) 쫓겨났다(박지원). 사마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남아있는사기열전가운데흉노열전을 보면, 원래 한족(漢族)이었다가 훈나(한자로는 흉노匈奴) 제국으로 달아나 훈나선우(單干)의 신하가 된 중행열이 한나라 사신 앞에서 훈나의 풍습을 추켜세우고 한나라의 풍습을 깎아내리는 이야기가 나오고, 조선열전에는 섭하는 공로를 꾸미다가 적군의 발동으로 머리를 잃었다.

 

누선은 적은 장졸(將卒. 장군과 병사)로 싸울 때 어려운 일을 당하자 제 허물만 면하려고 집착하다가 번우를 잃었으며, 이를 뉘우치다가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손수와 더불어 전쟁의 공로를 다투다가 (그와) 함께 죽음을 맞았다.

두 군사가 모두 욕됨을 당하였고 후() 작위를 받은 장수도 없다.”는 사마천의 평가가 나온다. 두 나라는 모두 유철과 싸웠는데, 이런 나라들의 편을 드는 것 같은 글을 집어넣은 것이다. 게다가 그는 유철이 위만조선을 무너뜨린 전쟁을 추켜세우지 않고 깎아내렸다. 유철이 그 글들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현대사, 그것도 정치인의 현대사를 다루는 글을 쓰면 공격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사마천에게는 같은 시대를 살며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던 유철의 역사가 현대사였다. 남아있는 글이 그 정도라면 원래의 글은 더 신랄하게 비난하는 내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이 때문에 서촌의 야사가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세의 역사가들이 이 야사를 채택하지 않은 까닭은-서진시대 말기까지는-왕들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어서였고, 그 뒤에는 한()을 이어받았다고 선전한 왕들이 야사에 별 관심을 안 기울였거나, 아니면 한나라의 위신에 금이 갈 수 있는 야사(예컨대 그들이 위대한 황제로 추켜세우는 유철이 화를 참지 못하고 훌륭한 정사를 쓴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일부러 빼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야사를 무작정 버리거나 부정하면 안 되고, 정사와 함께 견준 뒤 그것이 합리적이고 정사를 제대로 보충하며 논리적이라면 거기서 후대에 덧붙여진 요소나 신화적인 요소, 비합리적인 요소는 빼고 나서 받아들여야 한다. 아울러 정사는 100% 옳다.”는 말도 의심해야 한다. 당대의 기록이라고 해서 다 정확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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