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문(金文)을 통해본 고대 동아시아 사회, 역사의 재조명
1) 갑골문보다 오래된 금문
“갑골문이 금문 보다 오래되었다.”는 학계(學界)의 통념(通念)는 거북 껍질에 갑골문을 새기는 도구가 강도 높은 강철(鋼鐵)을 요구한다는 면에서 부인할수 있다. 즉 갑골문은 고대 중국의 점사(占辭)를 적어넣은 그 기록을 뜻한다. 이처럼 거북 등판을 여섯짝 합친 속에 쑥과 같은 연료(燃料)를 집어넣고, 불을 짚이어 그 파열자국을 보고 점치는 것을 바로 복(卜)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거북 등판이 잘 균열되게 하기 위하여 복(卜)짜 모양으로 깊게 파는 행위가 우선 전제 되어야 한다는데 있다. 점사를 새긴 문자는 강도(剛度)높은 돌(석(石)을 사용할수 있다고 그럭 저럭 변명(辨明)할수 있으나, 마치 시골에서 감자를 숫가락으로 긁어내듯이 복(卜)자 모양의 깊은 도랑을 파기 위해서는 경도(硬度)높은 강철(鋼鐵)을 전제하지 않으면 도저히 납득할수 없기 때문이다. (복(卜)을 “복”이라 읽는 이유는 갑골문이 터지는 파열음 “뽁~”에 대한 의성어(擬聲語)를 빌어쓴 것임)
(좌)갑골문은 이처럼 거북껍질에 새기어진 글자이다. (우) 금문(金文)의 사례(事例): 「형계유」에 새겨진 명문(銘文): 내용은 ●子王인 제곡 고신이 구축에게 돈을 내려 祭器를 만들었다는 기록
2) 낙빈기(駱賓基)의 금문신고
“금문신고”는 중국인 문자학자인 낙빈기(駱賓基 : 1917-1994)에 의해 씌어져 지난 88년 중국에서 출간된 책으로 현재 중국의 강단학계가 신화, 전설의 시대라고 단정해 놓은 4500년 전 삼황오제시대인 서기전 2517년부터 서기전 2298년 까지 220년 간을 고대 청동기의 금문(金文)을 철저한 “문자인류학적 해석학”을 통해 확실한 역사시대라고 논증해 놓은 방대한 연구논문이다.
이 금문신고란 책은 크게 4개의 부분으로 나어어져 있는데 다음과 같다.
가) 전적집(典籍集) : 중국의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 까지의 방대한 역사서를 통해 삼황오제 시대가 역사 실제 시대라고 논증한 저술
나) 화폐집(貨幣集) : 이 시대가 청동으로 만들어진 화폐로써 실제 시장에서 유통되었음을 논증한 저술
다) 병명집(兵銘集) : 무기,농기구,제기(祭器) 등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를 가려내 실제 그시대에 사용된 기물(器物)을 통해 사회상을 조명한 저술
라) 인물집(人物集) : 신화나 상서(尙書)등의 간접(間接) 자료(資料)를 토대로 하지 않고, 직접 청동기에 새겨진 직접(直接) 자료(資料)를 통해 신농(神農), 황제, 전욱 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순임금,우임금의 실제 사적(事績)을 규명한 저술
3) 한국에의 전래 경위와 한국 재야(在野) 학계(學界)에서 주목(注目)
이런 획기적인 인류학적 가치를 지니는 낙빈기의 저술은 중국 당국에 의해 800권의 출간 허락을 받고, 중국인 학자들의 냉담한 반응과 일체의 평가가 함구된 상태에서 그중 4 - 5 권이 서울의 중국서점에 들어와 소남자 김재섭, 청암 김대성 등의 재야학계에서 크게 주목하게 된다.
이처럼 한국 재야학계가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 낙빈기의 저술을 숨긴채, 작년 11월 11일 주요 일간지에서는 북경 특파원발로 “하(夏)왕조 개국은 서기전 2070년”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서 특필되고 5년간 200여명의 학자를 동원해 지금까지 서기전 1600년에 개국한 은상(殷商)이 중국 건국의 시초라고 단정한 중국의 학계가 “가상의 나라 이름”일 뿐이라고 부정을 해온 하(夏) 나라의 건국을 서기전 2070년 때 부터라고 공식 선언을 하면서 그 원천(源泉) 지식(知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학술(學術)을 정치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관점, 또 자칫 중국(中國)이 낙빈기가 밝힌 자료를 근거로, 주변 국가 (주로 당시 고조선(古朝鮮)이라 칭해진 우리나라)등 에 패권주의적 사관(史觀)을 기정 사실화 하려는 경향에 대해 우려를 하는 학자적 양심이 그 근간이었다.
이 화상석(畵像石)은 중국 동안한리(東安漢里)에 있는 한 墓室의 벽면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칠지도(七枝刀)를 쥔 신인(神人)이 있는데, 이는 한국문화(백제)가 중국내부에도 깊히 투영되어 있음을 알수있게 한다. 오제금문(五帝金文)시대에는 이처덤 문화가 다른 영역(領域)을 넘어 나타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4) 낙빈기가 해명한 실제 역사
낙빈기씨는 “금문신고”에서 이미 ① 최초의 군주 신농이 서기전 2517년부터 43년간 제위에 있다가 ② 서기전 2474년 소호김천(少?金天)씨에게 물려 주고, 또 소호김천은 7년간의 짧은 재위를 마치고 ③ 전욱고양(?頊高陽)에게 재위를 넘긴다. 전욱고양은 47년간의 재위를 마치고
④서기전 2420년에 사위인 제곡고신(帝?高辛)에게 넘기고 55년간 톰치하던 고신씨는
⑤자기 아들인 지(摯)에게 서기전 2365년에 재위를 넘긴다. 지 이후
⑥ 요임금(요(堯) : 서기전 2357-2321)
⑦ 순임금 (순(舜):서기전 2320-2312)
⑧ 우임금(우(禹) 서기전 2357-2321)
⑨ 그리고 삼황오제 시대 마지막 임금인 백익(伯益)이 통치하던 6년 만에 우임금의 아들인 계(啓)에게 도륙을 당하고 계가 아버지인 우임금을 시조로 세운 나라가 하나라이며, 하의 건국은 서기전 2297년이라고 이미 못박아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확한 연대 또한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에서 하나하나 찾아내 중국의 고대사를 완벽하게 재구성해 놓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삼황오제시대의 주역들이 바로 동이(東夷)족이라는 점이 특히 우리들의 주목을 끄는 점이 아닐수 없다.(금문의 비밀 258p).....사진18
순(舜)임금의 첫 번째 이름 호(護), 이는 한(韓)이란 글자의 시원(始原)이 된다. 그리고,, 공자를 비롯한 유생(儒生)들에 의해 이상적인 정치를 펼친 것으로 되어있는 요순(堯舜)시대는 칼로써 정권을 뺏고 뺏기는 전제군주 정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금문(金文)으로써 밝혀지고 있다. 이같은 역사 왜곡은 서구인들에게 정확한 동양고대사의 입문서로 유명한 사마천(司馬遷: 서기전 145-86?)이 쓴 “사기(史記)”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순(舜)임금의 첫 번째 이름 호(護), 이는 한(韓)이란 글자의 시원(始原)이 된다.
5) 신화적 종교적 권위에서 벗어나, 인류학(人類學)적 분석이 가능해지게 된 “고대 아시아사”
낙빈기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오제(五帝)-금문(金文)” - 삼황오제 시대를 금문(金文)을 통해 재규명하는 학술분야를 칭함 - 은 지금까지 유학(儒學)이라는 종교적 권위 혹은 정형화(定型化)된 신화(神話)라는 권위 아래 당연시 여겨온 고대 아시아의 역사 및 사회상에 내재된 패러다임(paradyme)을 전혀 다른 인류학적 시각으로 재조명하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학술적 가치가 중요해 진다.
그 일례(一例)를 몆가지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문자(文字)의 시작은 지금 중국 산동성 곡부에서 나라를 열고, 그 문자를 만든 신농(神農 : 재위 서기전 2517-2475)이라는 이름 글자인 [?} [○] [ㅣ] 로부터 시작되고 있고, 한자가 단순한 상형(象形)문자로써부터 발달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제자(制字)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 지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고, 또 이 시대 주역들의 이름과 관직의 명칭, 통치하는 봉읍(封邑)등이 이런 제자(制字) 원리에 의하는 만치 실제, 그러한 이름과 관직 등이 어떤 사회적 기능과 의미가 있었는지를 인류학적 관점에서 다양하게 음미할수 있는 시각을 던져 주고 있다.
이런 사실은 사실 한자(漢字)의 품위를 높이는 쾌거였다. 왜냐하면, 이집트의 신성(神聖)문자, 또 마야의 문자 까지도 단순한 상형(象形)이 아니라, 고도로 체계화된 제자(制字)원리를 포함하고 있음이 밝혀져, 지금까지 유독 한자(漢字) 만이 상형(象形) 문자로 낙후(落後)된 문자라는 오명(汚名)을 씻게한 큰 공로가 있는 것이다.
「오제 금문」에 보이는 손 수(手)의 방향 : 이는 한자(漢字)가 독특한 제자(制字)원리가 있고, 낙빈기는 이를 해명하였다.
② 이 시대는 푸나루아(punalua)라는 특이한 모계제(母系制)시대였음이 밝혀 졌다. 두 사람의 남편과 두 사람의 부인이 한 가정을 이루는 양급제(兩級制) 시대로 재위는 사위에게 넘겨주던 때였다. 즉 아들이라고 알려진 자(子)는 “사위”라는 뜻이며, 우리가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 남(男)으로 불리워졌다는 것이다. 또, 서양의 “트로이 전쟁”에 비견할수 있는 “탁록대전”의 발단인 신농(神農)과 황제(黃帝)의 전쟁도 기실, 서로 누비 결혼을 이루는 당시 중국의 양대 세력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었음이 들어난다. 즉 결혼은 양대세력인 신농과 황제계열이 서로 누비사돈이 되었고, 재위(在位)는 신농계와 황제계가 서로 바톤을 주고 받던 때였음이 들어난다.
이런 사실이 중요한 것은 역사의 시작을 철저하게 이(夷)와 하(夏)로 분리한 시각 자체가 후대 사가들에 의해서 조작임이 들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夷)와 하(夏)의 개념 규정 자체도, 하(夏)가 중국 정통이고, 이(夷)가 주변 세력이라는 동양고대사의 고정관념도 잘못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③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한자(漢字)의 근원은 신농계의 언어인 “우리의 말(한국어)로써만이 그때의 글자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된다.”는 중국고대 언어연구의 방법론이 도출된다는 점이다. 즉 문법(文法)은 중국어와 한국어가 다르지만, 그 발음(發蔭)과 개념(槪念)은 한국어에서 많이 투영되어 있고, 이는 그 시대에 한국인이 오제(五帝) 시대의 중국에 실제 핵심세력으로써 동거(同居) 했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됨을 여실히 들어내고 있다.
④ 이미 한자(漢字)가 단순한 상형(象形)에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제자(制字) 원리에 의해서 구성되어진 문자의 세계임이 밝혀졌기 때문에, 우리가 막연히쓰는 조선(朝鮮)이란 용어가 전욱고양(?頊高陽)이란 임금의 이름에서, 어떤 개념이 투영되었지, 또 한(韓)이란 이름이 바로 순(舜) 임금의 이름, 위(韋)에서 나왔음이 밝혀져, 이런 제자(制字) 원리에 함축되어 있는 개념으로부터, 고대의 조선(朝鮮) 및 한(韓)의 사회상(社會相)을 음미할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다시말하면, 지금까지 고조선 및 한(韓)의 문제에서 최대의 인류학적 문제는 오늘날의 국가의 개념을 원시시대로 퇴화(退化)시켜 한반도 내에 국한시키는 논리적(論理的) 오류(誤謬)를 범한 것이다. 주권,영역,국민이 국가의 삼요소인데, 과연 상고시대에도 국가의 영역이 상호 배타적이었는가? 중국 안에 조선이 있을수 있고, 또 조선 안에 중국이 있을수 없는가? 하는 국가의 기본개념을 검토하지 않은채, 영토분쟁(領土紛爭)을 고대사에 투영해 하는듯한 인상을 주어온 것이 사실인데, 이런 명칭이 주어지는 과정(process)를 통해, 재음미할 계기가 주어졌던 것이다.
좌(左)의 첫글자는 해돋을 간, 솟대 사이 해(일(日) 3개로 삼신을 표시하고 있고, 진시황 이후 문자통일이후 등장한 우(右) 두글자는 유난히 배(선(船))를 강조하고 있다. 중국이란 영토 속의 조선의 개념을 음미케 하는 중요한 문화-코드이다.
⑤ 또 신주(神主)라는 글자, 제사의 제(祭)와 사(祀)가 어떻게 만들어진 글자미며, 입만 벙긋하면 들먹이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예(禮)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축하(祝賀)의 축(祝)이 내포한 의미, 차인(茶人)들이 죽고 못사는 차(茶)란 글자의 내력등 수많은 글자의 생성과정을 밝혀주고 있다.
⑥ 특히, 중국인들이 멸시해 부르는 오랑캐 이(夷)가 한족(漢族)의 시조인 우(禹)임금의 이름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글자가 바로 신농계에서 발음하고 있는 사람 인(人),임금이라는 임(任)이 변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⑦ 이처럼, 오제금문은 문자(文字)-인류학(人類學)의 보고이기 때문에, 인류학이 당연히 여기는 차원 - 기존의 인식체계를 윤리적 차원에서 선입관점을 가지고 조사하는 “에틱(etic)” 적 차원을 철저하게 배제하게 할수 있게한 중요한 학적 콘텐츠(contents)의 보고(寶庫)인 것이다. 즉 지금까지는 “고대중국이 이렇다.”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버리고, 오히려 한국인이 중국 문자의 개념과 발음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는 객관적 사실로부터 , 이미 퇴행(退行)되어 그 원형을 잘 알수 없는 “솟대”며,세발달린 “삼족오(三足烏)”, 여자들이 시집갈 때 이마와 뺨에 찍는 “연지 곤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 “난생(卵生) 설화”의 비밀등을 저, 고대로부터 냉동(冷凍)되어 있는 “오제(五帝) 금문(金文)” 으로부터 신선하게 재음미할수 있는 것이다. 오제금문(五帝金文)이 중요한 것은 기존의 인식체계의 대전환을 할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를 제공해주기 때문인 것이다.
(좌) 이룰 성(成)이란 글짜에 솟대와 깃발이 있다. 이는 고대 동북아인에게 “이룬다”는 개념에 솟대와 깃발이 함축되어 있음을 뜻한다.(우) 축(祝)자는 제상(祭床) 앞에서 축을 읽는 제주(祭主)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6) 문명(文明)의 원형(原型)은 미래(未來)-기억(記憶)
오제금문(五帝金文)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시대를, 근본적으로 다시보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고대사(古代史)는 하나의 문명의 원형(原型)을 품고있고, 이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사(過去事)가 아니라, 미래를 꿈꾸는 패러다임으로 작용한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단순한 기억(記憶)이 아니라, 미래(未來)-기억(記憶)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제금문(五帝金文)의 의의(意義)는 “미래(未來)의 기억(記憶)”에 대한 혁명(革命)이라고 할수 있다. 역사(歷史)에 발전법칙이 있는지는 알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미래의 비젼(vision) 의 토대는 분명 과거를 성찰(省察)하는 시각에서 연원(淵源)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청암 김대성 선생은 생(生)의 역정(歷程)가운데 한부분을 차지하는 기자(記者)생활을 특이하게도학술세계에서도 펼쳐 나가는 문화학자입니다. “기자정신(記者精神)이 살아 숨쉬는 문화학(文化學)”을 선생은 꾸준히 개척해 온 것입니다.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전달매체)가 메씨지(콘텐츠)이다.”라는 혁명적 명제(命題)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문화-현상에는 미디어 자체가 이미 하나의 콘텐츠이기에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한 예(例)로 가옥구조에서 천정(天井)은 단순히 네 벽(壁)을 가로막는 덮게에 불과하지만, 이미 “하늘 우물(天井)”이라는 콘텐츠를 이미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정이라는 미디어를 보고 “하늘우물”을 연상케 하는 지적이 진정한 “기자정신이 살아있는 문화학”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런면에서 선생의 저술(著述)과 논문(論文)은 매우 특이한 형식을 취합니다. 차(茶)-문화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맞닿아있는 허황옥의 이야기를 하고 한편으로 남해(南海) 고각(古刻)을 이야기합니다.
인도학자 「데세판데」가 규명한 남해 고각(古刻), 환단고기에는 환웅(桓雄)이 사냥하러 왔다가 삼신에게 제사(祭祀)를 드린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 내용이 흡사하다.
차(茶)의 시원(始原)이 되는 「여(余)」는 좌변(左邊)의 배모양의 잔(盞) 모습 외에는 삼신(三神)을 뜻하는 삼각형을 높히 올린 모양으로 나타난다. 삼신(해,달,북두)중의 하나가 해이고 옆그림의 환웅 모습이 태양을 뜻하는 모자(帽子)를 쓰고 있음이 들어나면, 결국 시종이 바치는 것이 차(茶)일 개연성이 크다. 청암 선생은 이처럼 조용히 문화-코드를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또 궁궐-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맞닿아있는 천문(天文)과의 상관성을 밝힙니다. 또 “한국문화는 한(恨)의 문화이다.”라는 통설에 “한국의 미소”를 기왓장에서부터 토우(土偶)에 이르기 까지 세세(細細)히 끄집어 내었읍니다. 이처럼 우리 이웃에 있으나, 그 내용이 낯선 수많은 문화소(文化素)를 그 내면(內面)에 있는 질적(質的) 의미를 규명해 친근히 느낄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꾸준히 온축(蘊蓄)해 온 것입니다. 이런 청암 선생이 학술적으로 크게 혐오하고 금기(禁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저널리즘을 타는 유명인사(有名人士)나, 전문가(專門家)입네하는 학자(學者)들이 흔히 취하는 “당의정(糖衣釘) 같은 짜집기”입니다. 깊이 그문제를 고민하고 연찬(硏鑽)하지도 않은 입장에서 통념(通念)에 달콤하게 들리는 식으로 논리(論理)를 짜집기하는 행위입니다. “붉은 악마”의 응원열기를 보고 “외래문화와 자생문화의 통합”이니 하는 따위의 소론(所論)이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짜집기”가 인식의 대전환을 하게하는 아무런 학적 진실성과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의정(糖衣釘)적 짜집기”를 혐오하는 청암 선생에게 한국-문화의 시원(始原)을 밝혀주는 방대한 문헌(文獻)들이 쏟아졌습니다.
그 하나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로써 별(성(星)로 쓰여진 방대한 “하늘의 문장”이고, 또 하나는 신화시대로 치부하던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가 엄격한 문자학적 고증을 거친 금문(金門)의 형태로 갑자기 쏟아져 나타난 것입니다. 중화적 유학적 해석체계와 서구-문화이론에 질곡(桎梏)해 있던 한국-문화의 원류(源流)를 재해석할 거대한 보고(寶庫)인 것입니다.
청암선생은 외면(外面) 당하는 이 보고(寶庫)를 매장(埋葬)시키지 않고, 학계에 접목(接木)시키기위해, 해석학(解釋學)을 가(加)한 시원(始源)-학자들의 진실을 명확히 밝히면서도, 이를 더 넓은 차원에서 다양한 각도(角度)에서 조명할수 있도록 개방시키는 작업을 묵묵히 진행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정보가 극히 적은 상고시대가 고스란히 냉동(冷凍)된 채로 이 두 보고(寶庫)에 나타나있음을 청암선생은 그 누구보다도 깊히 인식하였고, 이를 한국-문화와 역사의 가교(架橋)로 잇는 작업을 십여년간 꾸준히 해 오셨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청암-선생 고유의 해석학적 관점을 오히려 자제(自制)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으나, 본 강좌에서 부터는 이제 선생의 입론(立論) 역시 많이 소개될 계획이어서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런 입론(立論) 자체도 선생의 학문하는 근본 궤도(軌道)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 자명합니다. 선생의 지론(持論)은 “오제금문(五帝金文)”에 대한 해석학은 그것이 “문자(文字)인류학”이니만치 이젠, 학제적(學際的) 인터페이스(interface)를 최대한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방되어 재정리(再整理) 되어야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식-정보 자체가 부족 한가운데의 정통성(正統性)의 강요” - 바로 이것이 한국 문화를 질곡케한 문화-사대주의(事大主義)의 본질이라는 경구(驚句)를 선생은 한국 학계(學界)에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금문신고-3] '금문신고' 해설.
양을 목축하던 동이족 신농이 호북성, 섬서성에서 탄생 성장해 황하하류의 웅족이 사는 산동성 곡부로 장가들어 도읍을 정하게 된 문화인류학적 이유는 무엇인가. 염소와 양을 치던 동이족 신농은 4500여 년 전 지금의 호북성 수현(隨縣) 역산(歷山)에서 태어났다.
신농의 아버지는 고시(高矢)씨 방계후손인 웅족(熊族) 출신인 소전(少典)이었고, 어머니는 치우(蚩尤)씨 집안의 여자 강(姜)씨였으므로 대우혼적 모권제에 의해 성을 강(姜)씨라 했다. 호북에서 태어난 신농은 지금의 섬서성 천주산(天主山:岐山) 아래 강수(姜水)에서 살다가 성년이 되자 유웅(有熊)씨 집안의 딸 즉, 황제의 아버지와 자일급 부인 사이에서 낳은 임사(妊巳)씨에게 장가들어 서방님(西方任)이 된다.
이리하여 신농이 산동성 곡부로 와 나라를 세운 것이 기원전 2517년인 상원갑자였다. 낙빈기가 말하는 이 연대가 궁금하여 환단고기와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단기 2333을 빼면 -184년이다. 이 연대를 배달 환웅국 치세 말년시대에 대입하니 제 16대 축다리 환웅이 56년, 17대 혁다세 환웅이 72년, 18대 거불단 환웅이 48년이므로 3대 치세기간 도합 176년이므로 -8년이 되어, 제 15대 치액특 환웅 치세 89년 중 마지막 말기 8년 전임을 알 수 있어 8대 안부연 환웅 때와 다소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서방님(書房任)은 원래 서쪽지방에서 동쪽 지방으로 장가온 남편을 여성쪽에서 부르는 장부(丈夫)에 대한 호칭이었다. 낙빈기에 따르면 당시의 동상례(東床禮)는 장인의 사위 즉, 오늘부터 처갓집의 머슴애가 되어 처갓집을 잇겠다는 의례였다고 하며, 중국에서는 지금 서방님이란 말은 없어졌으나 동상(東床)이란 말은 남아 사위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장가올 때 데리고 온 작은 서방(데련님)은 새서방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상고사의 혈통문제를 단순하게 지금의 가부장제적 부권제의 관념으로 바라보아 피아를 가려오곤 했는데, 낙빈기의 논조를 보면 필자가 「통곡하는 민족혼」에서 언급한 바 있는 족외우혼적 모권제인 "대우혼제도"를 뒷받침하는 당시의 "누비혼인"이라는 문화전통 아래, 후일 동방족과 서방족, 동이족과 서이족, 등 피아를 가늠하는 분기가 되었던 신농과 황제가 그 실은 같은 동이족 역사의 바운더리 안에 놓여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낙빈기가 그려내는 신농시절의 이야기는 환단고기와 연대고증만 상호 다를 뿐 결혼풍속을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귀기울여 볼 만 하다. 신농이 양족과 곰족을 대표하는 임금이 된 지 43년 되던 해(기원전 2473)에 무슨 이유에선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위 황제와 전쟁을 치르게 된다.(이 부분은 신농의 후손 유망과의 전쟁을 잘못 고증한 부분이니 알고 읽었으면 한다)
결국 신농은 황제에게 패해 임금자리를 내놓게 되는데 이에 신농의 어머니계 군주인 치우가 지금의 탁록( 鹿)에서 황제와 수년간 전쟁을 벌인다. 그래서인지 황제는 임금자리에 앉지 못하고 아들인 소호금천(기원전2474-2468)이 제위를 잇는다. 필자는 낙빈기가 말하는 이 대목이 아주 쓸모있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기존의 학자들은 치우가 황제에게 패했다 왜곡하고 있지만 낙빈기는 환단고기의 기록대로 치우에게 패해 역사에서는 동이족으로 더 많이 어필된 아들 소호에게 제위를 넘기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낙빈기가 해석하는 혈통 계보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황제는 신농의 모일급 정비가 낳은 딸 누조( 祖)와 결혼한 신농의 큰 사위고, 소호금천은 신농의 자일급차비가 낳은 딸 소진(小辰)에게 장가든 작은 사위다. 낙빈기가 바라보는 세계는 부권제가 아닌 모권제이므로 외가의 권력이 황제를 좌우한 것으로 본다.
황제가 도망가고 아들 소호가 제위를 잇자 신농계열에서는 소위 "구려(九黎)의 난"이 일어나 7년 만에 소호는 제위를 신농의 손자이자 황제의 외손자인 전욱고양에게 넘긴다. 곤(│:소리음=袞곤룡포 곤, 해석은 셈대나 산가지, 물러설 退,위아래로 통할 곤)은 신농을 의미하는 이름글자다.
"곤(│)"자는 기원전 2517년 신농이 곡부태산에 나라를 열었을 당시 유통된 청동화폐인 호미모양의 조패( 貝)에 새겨져 있다. 허신은 "아래위로 통한다"하였고, 위로 그어서 읽을 때는 '가마(가리마) 신( :정수리)'으로 읽는다 했다. 다시 말해 "│"의 소리음은 본래 "곤"이라기보다는 "신"이며 신( )은 정수리로 곧 우두머리로 일본어 가미(神), 우리의 신(神)과 통한다.
"│"을 곤이라 읽는 것에 대해, "│"의 위쪽을 하늘이라 했을 때 천신이 되고, 밑둥치 쪽을 땅이라 했을 때 곤(坤)은 토지신이 된다. 곤의 소릿값이 '꽂는다'의 '꼰'에서 온 것이라면, 양을 상징하는 양물이 꽂혀야 새 생명을 탄생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지구의 중심축, 동북 간방향의 끝 쪽, 북극성에서 내리꽂히는 지구의 중력축을 의미하는 글자다.
노중평은 물러갈 "퇴(退)"자로 보는 것에 대해, '쉬엄쉬엄 갈 착( · )'자와 팔괘의 동북쪽을 뜻하는 '간(艮)'의 합성글자로, '간(艮)'이 팔괘에서 천제를 모시는 원단(圓壇)있는 제(祭)를 지내는 영산(靈山)이라는 뜻에서 '물러갈 퇴'는 동북 간방향에 있는 천제단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라 했다.
필자는 오히려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즉 감진간(坎>震>艮)의 민족이동원리를 반영한 것이 '퇴(退)'로, 간방위(艮方位)로 흘러들어가 후천개벽을 준비하는 소도 제천 신교의 우주 원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김대성이 엮은 「금문의 비밀」은 어디서 어디까지가 낙빈기 저서의 오리지날 내용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그의 스승인 소남자의 주장이며 어디서 어디까지가 본인의 서술인지 뒤범벅으로 구성해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음의 우주원리에 대한 내용은 누가 설명했든지 본질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좋은 내용이다. 필자가 동양 상수철학적 개념으로 살짝 덧칠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금문에서 말하는 열 십이라는 글자는 본래부터 창조의 뜻을 가지고 있다. 숫자를 헤아리는 개념의 십이 아니라 "열린다는 열"의 뜻이었다. 그래서 "열리는 열 십"이다. "십"을 어원으로 하고 있는 우리말의 '씹'은 '씨(種·卵)의 입(口)'이라는 뜻으로 씨의 입이 열려 삼라만상이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특히 민물의 영장인 사람은 아버지의 씨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자라 자궁이 저절로 열리는 달, 열 달 만에 그 자궁의 문이 열리면서 태어나는 것이다. 자궁은 그래서 열 십자의 가운데 자리인 자미원국(紫微垣局)이다. 남자는 얼굴에 7개 아래에 2 개 구멍인 9규(竅:구멍 규)를 가지고 있으며 여자는 얼굴에 7개 아래에 3개 구멍인 10규(竅)를 가지고 있다. 9수는 극대분열의 완성수라면 10은 시공이 합쳐지는 10무극 완전수로 생명이 열리는 창조의 수이다.
낙빈기는 "문자는 본래 말이다. 고금문에서는 인(人)자를 두 가지로 읽는다. 문자를 창조한 신농 양(羊) 족이 말하는 본음은 지금의 임(任·ren)으로 읽고, 변음은 이(夷·yi)라고 읽으며, 하나라 우임금의 씨성(氏姓)이 되고, 우임금이 임금자리에 오른 뒤, 인(人)은 또 시(尸)와 통하며 주(主)라고 해석했다"고 한다.
낙빈기가 '인(人)'을 옛날 '임(任)'이라고 읽었다는 말은 우리 국어사전의 해석과 같이 자기가 가장 존경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면 "│"은 아래 위로 통하는 하나의 님, 하나의 신을 의미했으며, 상통천문, 하달지리한 신농의 신(神)자였다.
이제 다음 서술이 바로 낙빈기가 말하는 좆(祖:남근신앙)과 황실을 잇는 혈통의 중심으로 최고의 존칭으로 칭한 자지(自持), 다음 임금자리를 이을 태보(太保:왕자)를 잉태하는 존귀한 여자라는 뜻의 보지(保地)에 대한 결론내용이다. 좀 길지만 상고사의 핵을 이루는 부분이므로 핵심만 간추려 소개한다.
"│"자에서 자지 또는 좆의 'ㅈ'을 뿌리로 하는 음이 나온다. "│"자는 바로 자지이며 성인 남자의 좆이다. 조상이라는 조(祖)의 어원도 바로 좆이고 조선이라는 조(朝)의 음운도 첫획 "│"에서 나온다. "│"자는 신(申)자에서 신(神)으로 변해간다.
"│"자가 '자지 신'으로 발전하는 것은 다음단계인 '신(申)'에서 확인된다. 「설문해자」에서 "신(申)은 신(神)이다...'확 구(臼)를 좇아서 스스로 가진 것(자지)이다(從臼 自持也)"라고 하였으며, 또 "환할 신, 아홉째 지지신"이라고 하였다.
즉, 여성의 음물을 표시하는 '절구 구(臼)'가 남자의 양물을 상징하는 절구공이, 즉, '기둥 주(│)를 둘러싸면서 "│"자가 다음 단계인 '신(申)'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확 구를 따르고 스스로 가진 것'이란 말에서 자지(自持)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여자를 쫓아(따라,從臼) 남자(自持)'라는 뜻으로 신(申)은 여자의 음물을 쫓는 남자의 양물이라는 뜻이다.
결국 '신'에서 나온 자지라는 말은 "│"의 순수 조선말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곧 자지가 곧 하나님이며 스스로 사람의 씨를 가진 사람으로 신농이 그 중에서도 으뜸 하나님이다.
「설문해자」에서는 "신(神), 하나님으로 만물을 끄집어낸 사람(天神引出萬物者也)이라 하는데, 신농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세상의 새로운 세상을 연(열 10) 하나님 신(神)으로"│"자는 열 십으로도 읽는다.
조정 또는 나라 '조(朝)'는 '사당 묘(廟), 할아버지 조(祖)'와 음이 같고, 그 뜻 또한 '하나 아비 조, 한 아비 조, 하나님 조(祖)'와 같은데 이는 고조선 문자인 남자의 생식기처럼 생긴 '조(且·남근모양)'자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자지 조(自持且)'의 조(祖)가 그 소릿값이기 때문이다.
현재 섬서성 서안 근교에 있는 황제릉 앞 자료관에는 흙으로 구워만든 남자성기가 진열되어있으며 그 아래 설명문에는 복제품 "도조(陶祖)"라 되어있다.
신농시대의 호미모양의 청동 화폐인 조패( 貝)는 끈으로 꿸 수 있게 윗부분에 동그라미 모양으로 구멍을 파 놓았다. 그리고 그 구멍이 뚫린 동그라미와 연결해서 그 아래로 "│"자가 새겨져 있다. 이 동그라미 구멍이 문자의 시작인 '·'를 도형화시킨 '○'이다.
불꽃 주, 불씨 주, 불핵 주, 불의 알이라고 읽는 글자다. 우리민족은 태양족이며 문자는 바로 태양에서 시작된다. 염제의 후손들이면 '불의 씨'들이고 '불의 알'들이다. 우리가 무심코 말하는 '부랄·불알'도 사실은 '불의 알, 불의 씨', 즉 '염제 신농의 씨알, 신농의 후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이다.
고구려,백제,신라,가락 등 2000년전 시조들이 모두 새알에서 태어난 것도 바로 염제 신농의 씨알이라는 뜻이 숨어있다. 우리를 동이족이라 하고 동이족 중에서도 새족(鳥族)이라 한 이유가 여기있다.
낙빈기는 주(主·柱)의 'ㅈ'자 발음에서 조선이나 조상 등 '조'라는 음이 나온다고 했다. 하나 "일(一)"이나 날 "일(日)" 또는 달 "월(月)"자에서는 '조'라는 음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상고사회신론」의 <28수론>에서 조수(鳥宿)를 풀이하면서 "조(鳥)는 원래 하(夏)나라족 계통의 족칭글자였고 본래가 훌륭한 칭호, 존귀한 칭호였다.
처음에는 악의가 없었고 남자아이의 배설기관을 조(鳥·자지)라고 장난기 섞인 부름으로 하였다. 헌원족 계통의 남자는 순임금의 유신(維新) 이전에 또한 모계제 유풍을 따르고 있었으며 신농족에 데릴사위로 가서 여자쪽과 혼인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고문화가 있는 지역에서 데릴사위 남성은 자연스럽게 족칭을 '조'로 하였고 남자아이를 낳으면 '조'는 곧 뇨(尿:배뇨관, 즉 자지)와 연계되었다. 하나라에 이어 등장한 은과 상나라는 하나라 시조 우임금을 싫어했으므로 이에 본래부터 존귀한 족칭이었던 조를 뇨로 통용해 이에 따라 음 은 '뇨'로 읽혀져 그 소리는 폄하와 배척으로 고정되었다.
중국의 발음은 조와 뇨를 'Niao'로 발음한다. 연대가 오래되자 도리어 그것의 원래의 의미인 임금과 같은 존귀한 족칭의 옛 소리(본래의 음은 수리매 응(鷹)이고 변음은 알릴 고(告)의 소리로 읽으며 비둘기 구(鳩)의 소리가 원류가 되었다)의 뜻을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중국인들은 자지를 '자지(自持)'로 쓰고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풀어 천자나 다음 제위에 오를 왕자의 생식기에 최고의 존칭을 붙여 '자지'라고 했다. 여기에 상반되는 여자의 생식기를 '보지(保持)'라고 했다. 다음 임금자리를 이를 태보(太保:왕자)를 잉태하는 존귀한 여자라는 뜻이다.
낙빈기는 둘째 부인 여영을 순의 형인 오회와의 공동부인인 요임금의 딸로 본다. 그리하여 여영을 낳은 어머니는 요의 모일급부인으로, 전욱고양의 둘째 아들 구축의 딸이라 한다. 낙빈기가 추적하는 문화인류학 속에는 항상 태양신이 들어있다. 여영의 글자인 금문 언(방 속에日아래女))은 도랑 언이지만 금문에서는 기러기( ), 큰 새 안(雁)으로 하나라로 가면 제비 연(燕)으로 격하되고 주나라로 가면 동이족의 봉황마저 제비 을( )로 격하되었다고 말한다. 언( )은 태양의 여자라는 공주를 뜻함과 동시에 새(鳥) 가문의 딸을 의미해 어머니가 동이족 신농 집안의 여자라는 것이다.
낙빈기에 의하면 부계제를 실시하려는 순을 뒤엎은 건 기존 모계제를 고수하려 한 신농계의 여자들 힘이다. 낙빈기에 의하면 우는 큰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8 년 만에 신농계 백익에게 제위를 넘긴다. 그러나 이러한 우가 근검, 검박했으므로 공자 다음 맹자 전에 태어난 묵자로 하여금, 공자의 번요(煩擾)함과 예악의 낭비성을 배격하고 우의 정신을 좇겠다는 기치아래, 묵가(墨家)의 계보를 따로 세우니, 한비자도 세상에 학문을 드러낸 자는 오직 유묵(儒墨)뿐이라 하고, 여씨춘추도 세상에 영광을 드러낸 자를 들면 반드시 이 둘을 든다 한 바 있다. 낙빈기는 이(夷)에 대해 새로운 금문학적 견해를 쏟아낸다.
족칭인 곰 웅(熊)자가 변한 글자인 우(禹)는 부인과 어머니의 씨칭을 따서 성씨 부(阜)로 쓰고 씨칭을 이(夷)라 하여 부이(阜夷)라고도 불렀는데, 집권과 동시에 그때까지 사직신으로 모시던 신농의 아들 희화를 밀쳐내고 아버지 고신을 (神)보다 격상시킨 귀(鬼)라는 글자로 신농에 버금가는 천자로 모신다. 이때 우는 자신의 이름을 사람 '인(人)'으로 쓰고 있는데, 신농계에서는 인·임·님으로 읽는 인(人) 자를 황제계에서는 큰 사람, 사람중의 사람이라는 뜻의 이(夷), 시(尸)자로 새김을 했다.
지금 산동성 우성(禹城) 지구를 '이방(夷方)'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곳이 우의 봉읍지 때문이다. 우는 장인의 또 다른 이름 화(華)를 성칭(姓稱)으로 썼다. 여기에 장인과 어머니 집안의 족칭인 강(姜)을 따와 강(羌)이라 했다. 강(羌)은 우의 성씨의 하나인 (華)와 통하므로 우는 모계의 족칭인 강(姜)을 성씨로 해서 비슷한 글자를 따 강(羌)이라고 했는데, 현재 중국은 티벳트를 강족(羌族)이라 부르고 있다.
낙빈기는 우는 죽어서 시호에 해당하는 용왕으로 봉해졌다고 단정한다. 물을 다스리는 용왕은 원래 물을 다스리던 우임금이며 복희(宓羲·阜夷)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용은 우의 형 후직과 함께 썼던 이름으로 자신의 부인들이 쓰던 신농계 족휘인 누에( )를 계승하여 칭호를 대신한 것이다. 신농계의 누에 잠이 황제계에서는 용, 융으로 읽혔으나 이를 이름(씨칭)으로 사용한 것은 후직 기와 우가 처음이다.
낙빈기는 춘추전국시대의 묘로 판정난 항주 영은사 용왕묘의 용왕 그림를 예를 들면서 두 다리가 용을 씨(氏)로 한 후직과 우 등 두 비씨(匕氏)라고 단정한다. 두 비씨 중에서 후직은 1000년이나 지나서야 주나라의 시조로 책봉되었으니 당시에는 용왕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는 점을 들어 우리고 결론지었다.
또 용왕이 받들고 있는 규의 모양이 역사인물을 가리키는 특유한 표시인데 「주례(周禮)」<동궁(冬宮)>에 "규의 머리쪽 뾰족한 곳을 종규(終葵)라 부른다" 한 것을 예로 들어 우의 큰 어머니거 종규로 용왕이 두 손으로 종규를 받들고 있는 모습이 두 어머니와 두 부인 등 모계세력에 의해 제위에 오른 우가 큰 어머니 종규의 명을 받들어 천자의 일을 집행한 것으로 보았다. 더불어 용왕이 구슬을 늘어뜨려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가린 면류관은 수렴첨정이나 섭정으로 꼭두각시인 우임금의 표정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우는 8년만에 백익에게 제위를 넘기고 말지만 백익 또한 6년 만에 우임금의 아들 계(啓)에게 도륙당하고 만다. 최근에 은허(殷墟) 안양에서 목인 잘린 채 묻힌 수많은 인골들이 발굴되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을 '노예제사갱(奴隸祭祀坑)' 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런데 낙빈기는 우임금이 제위를 백익에게 넘기고 임금으로 책봉했음을 알려주는 '책대부기(冊大父己)'라고 새겨진 명문이 출토된 것과 목이 잘린 것을 눈여겨보고 이 무덤이 기존의 고고학자들이 제후가 죽으면서 순장된 것이 아니라 아들 계가 백익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일대 참살극이었다고 결론내린다.
계는 백익에게 곡부에서 서쪽으로 200여 리 떨어진 안양(安陽)에 있는 아버지 우임금의 사당에서 벌어지는 두 번째 제사에 참석케 한 후 군사를 매복시켜 제사에 참석한 측근과 호위군사 300여명을 몰살시켜 그대로 매장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제위를 차지한 계는 순이 실패한 부계중심의 세습제를 실현시킨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