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한자,‘나[아(我)]’의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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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대로 공(工) 임(壬) 술(戌) 익(弋) 아(我)의 갑골문이다. 공(工) 임(壬) 술(戌)의 ‘Ⅰ’기호는 서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공(工)의 변형이다. 임(壬)은 공(工)의 이(二)가 둘로 나눠진 크기이고, 술(戌)의 부분은 임(壬)의 이(二)가 둘로 나눠진 크기의 차이뿐이다. 그리고 술(戌)의 ‘I’부분은 익(弋)과 같은 얼개이다.
공(工)은 ‘둘(하늘과 땅)[이(二)]을 서로 고르게 엮어/이끌어 주는[공] 얼[십(ㅣ)]’이고, 임(壬)은 ‘둘(나눠진 둘)[이(二)]을 서로 이어 묶은(맺은)[임] 얼[십(ㅣ)]’이며, 술(戌)의 부분은 ‘두 주제를[이(二)] 서로 이어 묶은/감은[익] 얼[십(ㅣ)]’을 나타내기 위한 변형이다. 즉, 각각은 둘의 서로를 이어주는 공통의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말 ‘님’은 ‘바느질에 쓰려고 일정하게 자른 실오리를 세는 말’의 뜻도 있고, ‘임’은 ‘머리에 인 물건 또는 머리에 일 정도의 짐’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임(壬)은 ‘짊어지다, 아첨하다’ 등의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임(짐)을 머리에 이어 서로 이어주는 것이 짊어지는 뜻이고, 머리에 이듯 떠받들며 ‘이받아(<옛>대접하다) 말해 주는[임]’것이 아첨하는 뜻이다. 그러나 임(壬)은 아홉째 천간으로 쓰이듯, 본래는 ‘둘(날실과 씨실)을 서로 이끌어 묶어/맺어 주는 님(실오리)[임]의 얼[십(ㅣ)]’로, ‘북(베틀에 딸린 부속품의 한 가지. 씨올의 실꾸리를 넣는 제구로 날 틈으로 오가며 씨를 푸는 구실을 함. 방추)’을 뜻하는 글자로 볼 수 있다. ‘임(님금의 씨앗, 사랑하는 임)을[임] 여미어[녀(女)] 이어 맺다[임(壬)]’ 곧 ‘잉태하다(아이 배다)’는 임(妊)이 그 증거이다.
주살/익(弋)은 술(戌) 부분의 변형체이다. 주살은 ‘오늬에 줄을 매어 쏘는 화살’이다. 곧 ‘줄 화살’의 준말이다. ‘활과 화살의 두 주제를[이(二)] 이어 감아 [익] 뚫는[곤(丨)]’ 것이다. 다만 이(二)의 윗부분이 별(丿)의 좌우 반대로 바뀌어 변형되었을 뿐이다. ‘비어져 바르는[별]’좌우 반대는 ‘비어지게 들추는(들이는)’의미로 변형시킨 것이다. 그리고 갑골문의 십(ㅣ)은 또한 뚫을/곤(丨)이기도 하다. 곧 ‘세운 얼(살)을[ㅣ] 고자(곶다<옛>꽂다) 넣는[곤]’뜻이다.
한자에서 무기와 관련된 글자는 익(弋)을 근본으로 만들어졌다. 무슨 이유인가? 무기가 따로 없었다는 반증이다. 즉, 칼 낫 도끼 등 집에서 생활도구로 쓰던 것을 작대기에 매어 대용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두 주제를 끈으로 묶어서[임(壬)] 비어지게 들이어[별(丿)의 변형] 뚫는 날(얼)[곤(丨)]’이 무기의 근본임을 나타낸다. 역설적으로 무기란 두 얼이 이어 맺힌 하나의 얼 그 인간 존재이유의 천명을 없애는 것이다.
창/과(戈)는 일(一)과 익(弋)의 회의이고, 갑(十)과 같은 얼개이다. 즉, ‘과녁을[과] 하나 일어(생기게 하여, 삼아)[일(一)] 뚫는 날[익(弋)]’의 뜻이다. 우리말 ‘창’은 ‘해져서 생긴 구멍’의 뜻이고, ‘차서 열다’의 준말로 ‘구멍을 내다’는 뜻이다. 창을 내는 곧 창이 나게 하는 것이 창[과(戈)]이다. 그래서 후에 창(槍) - 곳간(창고)에[창(倉)] 창을 내는[창] 나무[목(木)] - 으로 입말과 같이 형성의 방법에 따라 보다 구체화시켜 나타냈다. 곳간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쌓아 놓는 곳이다. 삶을 해지게 하는 것이 무기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나타내는 뜻이다.
술(戌)은 십(ㅣ)과 입(入)이 옆으로 누운 변형체와 익(弋)의 회의이다. ‘마름질(옷감이나 재목 따위를 마르는 일. 재단)하다’는 뜻이 있듯, 본래는 대패나 가위 등을 나타낸 글자로 볼 수 있다. 우리말 ‘술’은 ‘책 · 종이 · 피륙 따위의 포갠 부피나 한 숟가락의 분량’ 등을 나타내는 뜻도 있다. 그래서 ‘날(가윗날, 대팻날 등)을[십(ㅣ)] 뉘어 들이어[입(入)의 변형] 술을 내며[술] 해지게 하는 도구[익(弋)]’의 얼개이다. 익(弋)의 우리말 ‘익’은 ‘익다(익숙하다)’의 준말이기도 하다. 곧 익(弋)은 실생활에 익어 익숙한 여러 도구들의 상징을 담아 나타낸 글이기도 하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대패질하며 깎여 나오는 얇은 나뭇조각을 대팻밥이라고 하듯, 대팻밥은 동그랗게 말리며 생기는 모습이 영락없는 밥 한 숟갈의 ‘술’과 같다. 덧붙여 대패는 마름질하는 도구이다. 가윗밥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아(我)의 갑골문은 삼(三)과 술(戌)의 회의이다. 무기 또는 농기구를 그린 것이었으나 뒤에 ‘나’라는 뜻으로 가차되었다고 흔히 설명하는 글자이다. 무기라면 삼지창 같은 것이었을 것이고, 농기구라면 쇠스랑(쇠로 서너 개의 발을 만들어 자루를 박은, 갈퀴 모양의 농기구)이나 쟁기였을 것이다. 쟁기는 술(쟁깃술/쟁기의 몸채 아래로 비스듬히 벋어 나간 나무. 그 끝에 보습을 맞추는 넓적하고 삐죽한 바닥이 있음)·성에(쟁깃술의 윗머리에서 앞으로 뻗치어 나간 가장 긴 나무)·한마루(쟁기의 성에와 술을 꿰뚫어 곧게 선 긴 나무)를 삼각형 모양으로 맞춘, 마소에 끌려 논밭을 갈아 뒤집는 농기구이다. 즉, ‘셋을[삼(三)] 아우르러[아] 날(보습/쟁깃날)을[십(ㅣ)] 뉘어 들여[입(入)의 변형] 헤치는(갈아엎는) 도구[익(弋)]’의 얼개이다.
갑골문의 삼(三)은 기(氣)이기도 하다. 곧 천지인의 삼위를[삼(三)] 일체이게 하는/기르는 기운[기]이다. 천지인의 삼위일체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대로 땅 위에서 사람으로 이루어진 상징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의 비유이다. 사람의 저마다 곧 나는 하늘의 마음(소명/천명) 그 시간대로 땅의 몸 그 공간에 담겨 단 하나의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이다. 그러면 아(我)는 ‘천지인 삼위일체의 기운[삼/기(三)] 그 아람치(자기의 차지)의[아] 천명(소명)을[십(ㅣ)] 들여[입(∧)의 변형( > )] 세상 밭(마음 밭)을 갈아엎는/마름질하는 도구[익(弋)] 곧 술(戌)’의 얼개이다. 즉, 독생자 또는 유아독존인 아람치의 천명으로 마음 밭을 갈아 마름질하는 연장이 ‘나’이고 ‘아(我)’의 뜻이다. 그래서 또한 아(我)는 ‘외고집’의 뜻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아(我)는 나의 연장이 나의 일(소명)이고, 나의 일을 통해 나의 자아실현을 이루는 것이 나의 존재이유임을 나타낸 글이다. 우리말 ‘ㄴ’은 태양의 상징이고, 태양을 아우른 것이 태음이다. 아(我)와 견주면 우리말 ‘나’는 ‘태양을(ㄴ) 아우른 태음의(아) 아람치[아]’를 줄인 말이다. 그래서 ‘너’는 ‘나와 어울리는’준말인 이인칭의 존재이고, ‘니(이)’는 ‘나와 이어지는’준말인 모든 삼인칭의 존재를 뜻한다. 모두가 하늘과 땅의 여줄가리(주된 몸뚱이나 원줄기에 딸린 사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