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한글어원

한국어와 투르크어의 뿌리는 동일한가

작성자러브인|작성시간21.08.18|조회수484 목록 댓글 0

한국어와 투르크어의 뿌리는 동일한가

 

오르혼 비문을 통해 그 형태를 구체적으로 밝혀낸 고대 투르크어와는 달리, 현대 한국어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신라어는 향가와 목간에서 추출한 소수의 인명·지명을 제외하곤 그 실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이는 신라만의 고유문자도 없었던 데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다수의 고대사료들이 소실됐기 때문이다. 아쉽게나마 현대 한국어와 현대 투르크어 사이의 고유어를 비교해 두 집단의 유사성을 가늠할 수밖에 없다. 만일 두 민족의 근원이 동일하다면 분명 단 하나의 실마리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어는 중앙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페르시아어와 대조해도 그 발음과 형태상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 '인도유럽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도유럽인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선사시대부터 세계 각지로 분화됐음에도 특정 어휘에선 일관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다양한 유럽어들과 중앙아의 페르시아어 그리고 파미르 토착어는 모두 종족의 최소단위인 '친족'의 호칭에서 깊은 유사성을 드러낸다. 친족명은 그 자체로는 외래어의 영향을 받는 내용어에 해당되지만 혈족 사이에 대를 이어 전승되는 일상어인 만큼, 실제로는 형태소처럼 수백수천 년이 흘러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갖는다.

 

고대 동아시아어 연구의 권위자인 알렉산더 보빈 교수의 논문 ‘고중세 한어 속 고대 투르크어 친족명칭들’도 같은 맥락을 전하고 있다. 탁발선비가 당나라를 세우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고중세 한어에서 기존의 고대 한어에는 없었던 새로운 친족명이 등장했고, 이는 투르크어의 친족명과 유사하다는 주장이다. 즉 탁발선비가 당나라를 세우며 언어문화가 한화(漢化)되는 과정에서도 그들의 친족명 만큼은 지키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다만 보빈은 투르크와 적대했던 탁발선비가 어째서 투르크어 친족명을 차용했는지에 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사실 선비어는 그 실체가 분명히 드러난 고대어는 아니지만 학계에서는 이를 투르크어의 일파로 보기도 한다.

 

'가족'이란 울타리는 천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대 한국어와 현대 투르크어의 친족명은 비슷한 점이라곤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 국어학자 이기문의 연구에 의해서도 밝혀진 바 있다. 지난날 한국어와 투르크어의 뿌리를 동일하게 보는 알타이어족설이 크게 유행하기는 했으나 오늘날 언어학자들은 한국어를 알타이어와는 분리된 '고립어'로 간주한다. 7차 교육과정부터는 한국어를 더는 알타이어족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다만 비교언어학자 강길운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지명연구를 토대로 후기 신라 지배층은 투르크어 사용자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는 춘하추동의 체계와 방위어, 기본수사 등이 투르크어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이슬람화된 중세 투르크 지배층도 그들의 계절체계와 기본수사, 방위명을 아랍-페르시아어에서 차용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랍인이고 페르시아인이었을까?

 

아미르 티무르나 바부르처럼 페르시아 문화를 숭상하던 투르크 귀족들은 궁정에서는 페르시아어를, 사석에서는 투르크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삼국사기>처럼 국가에서 공식 편찬한 사료에 기술된 지명과 수사(數詞)적 표현들만으론 실제 신라인의 진짜 '민족어'를 찾아낼 단서를 제공하지 못한다.

 

현재 필자가 거주하는 사마르칸드 역시 거주민 대다수가 페르시아계 타직인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관공서에서 모든 공문서를 우즈벡어로 작성하며 학교에서도 타직어가 아닌 우즈벡어를 사용한다. 그러면서도 같은 타직인끼리는 타직어로 대화하고 귀가해서는 가족들끼리 타직어만 쓴다. 1000년 후에 사마르칸드를 발굴한 후대 학자들이 우즈벡어로 쓰인 공문서를 보면서 사마르칸드 타직인들을 '우즈벡인'으로 규정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투르크어와 한국어 사이의 기초문법 유사성에 관해선 이미 상당한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하지만 한민족과 투르크계 민족들 사이의 뿌리가 동일하다는 주장은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도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외교적 수사(修辭)는 아프라시얍의 고구려 사신도에서 더 발전할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신라 김씨 흉노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정녕 흉노의 후예라 해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토착민에 흡수돼 흉노적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했다면 우리에게 어떤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 한민족을 흉노의 자손이자 투르크의 형제라 부르는 게 가능한 것일까.

 

글쓴이 송호림은 동서(東西) 투르키스탄의 근현대사와 고전 차가타이어를 연구하는 독립적인 아마추어 사학자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중앙아시아 문제를 단편적으로 바라보며 실제와 다르게 소개하는 경향이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에 거주하며 페이스북에 중앙아시아 연구회(Central Asia Research Group of Korea) 모임을 운영 중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