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의 고유어는 무엇일까?
현대 국어에는 동서남북 사방을 이르는, 이른바 방위어의 고유어 계열 단어가 없습니다. 옛날에도 사정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합니다. 12세기 무렵 송(宋)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 갔던 손목(孫穆)이 쓴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350개가 넘는 고려어 단어가 실렸습니다. 손목은 고려인들이 쓰는 말을 자신의 모국어 발음으로 옮겨 적었는데, 이를테면 '하늘'은 '漢捺'이라고 했습니다(참고 글). 그런데 '동서남북'은 그냥 '東西南北'으로 적은 것으로 보아 고려인들도 우리처럼 방위어를 고유어가 아닌 한자어로 말했나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말에는 처음부터 동서남북을 뜻하는 고유어가 없었던 것일까요? 하지만 우리말에도 방위어의 고유어가 있었음을 짐작할 만한 단서가 있습니다.
뱃사람들은 동풍을 '샛바람', 남풍을 '마파람'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이 단어들은 '새+ㅅ+바람', '마ㅎ+바람'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새'는 동쪽, '마ㅎ'은 남쪽의 뜻을 지녔습니다. '새'는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반짝이는 금성을 가리키는 말인 '샛별' 속에도 들어갔는데, 여기에서도 '새'는 동쪽을 의미합니다. 이제 '새'와 '마ㅎ'은 합성어에서만 나타날 뿐 단일어로 쓰이지 않지만, 서풍을 가리키는 '하늬바람'의 '하늬'가 아직 단일어로 쓰이는 것으로 미루어 한때는 '새'와 '마ㅎ'도 단일어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새, 하늬, 마ㅎ' 등이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기에 이 단어들의 형태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새'는 17세기부터 문헌에 등장했고, '하늬'와 '마ㅎ'은 그보다 더 늦은 19세기가 되어서야 문헌에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어에 방위어의 고유어가 있었다는 주장이 눈길을 끕니다. 중국 사서인 『후한서(後漢書)』에는 고구려의 지배 집단인 5족(五族)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당(唐)의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은 거기에 주석을 달았는데, 그 주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고려 오부(五部)를 살펴보니 첫째는 내부(內部)인데 황부(黃部)라고도 부르며 곧 계루부다. 둘째는 북부(北部)인데 후부(後部)라고도 부르며 곧 절노부다. 셋째는 동부(東部)인데 좌부(左部)라고도 부르며 곧 순노부다. 넷째는 남부(南部)인데 전부(前部)라고도 부르며 곧 관노부다. 다섯째는 서부(西部)인데 우부(右部)라고도 부르며 곧 소노부다.“
강서대묘의 <사신도> 중 북방을 지키는 현무의 모습
일찍이 일본인 학자인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와 무라야마 시치로[村山七郞] 등은 이 글에 주목했습니다. 그들은 5부에서 계루부(桂婁部)를 제외한 나머지 순노부(順奴部), 소노부(消奴部), 관노부(灌奴部), 절노부(絶奴部)의 고유한 명칭이 어떤 단어의 소리를 적은 것이며, 이를 뜻으로 새기면 동서남북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순(順)'은 동쪽, '소(消)'는 서쪽, '관(灌)'은 남쪽, '절(絶)'은 북쪽을 뜻하는 고구려어 단어라는 것이지요. 일본인 학자들은 고유명 부에서 캐낸 단어들을 비슷한 뜻의 퉁구스 어족의 말들과 맞대어 자신들의 주장이 옳음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예컨대 '순'은 왼쪽을 뜻하는 만주어 단어 'žun', 동쪽을 뜻하는 에벤키 어 단어 'žūn' 등과 어원이 같은 말로 봤고, 이렇게 비교한 결과 '관'과 '절'이 기록이 잘못되는 바람에 뜻이 뒤바뀌었다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고구려인들은 동서남북을 '순소절관'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는 5부가 나라에서 인위적으로 편제한 행정 단위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학자인 노태돈 교수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 설에서 과연 『삼국지』에서 전하는 고구려 5부의 명칭이 퉁구스어로 방위를 나타내는 말인가가 문제인데, 이는 아니라고 본다. 무엇보다 '노(奴)'는 '나(那)'로서 어떤 내(川) 유역의 집단이라는 뜻이며, 원래 다수의 那가 압록강 중류 유역에 존재하였고, 5부의 명칭도 그들 중 하나였다. 따라서 '모노부(某奴部)'의 '모노(某奴)'는 '모나(某那)'로서, 그 명칭은 자연적으로 붙여진 것이지 인위적으로 편제한 집단에 붙여진 것은 아니었다."
- 「삼국시대의 부와 부체제: 부체제론 비판에 대한 재검토」에서
한마디로 고구려 초기의 고유명 부와 중기 이후의 방위명 부는 그 성격이 다르므로 '순'의 뜻은 동쪽이라는 식으로 일대일 대응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언어학자 김방한 선생조차 "결론적으로 '東'은 확실하게, '南'은 약간 확실하게, '北'과 '西'는 불확실하게 퉁구스語와 연결된다고 한다"라고 말했는데, 논거의 반이 불확실하다면, '순소절관'은 동서남북의 고구려어 단어라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새, 하늬, 마ㅎ' 이전에도 방위어의 고유어 계열 단어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는 셈입니다.
첨언 하나. 참고 문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방한(1983), 『한국어의 계통』, 민음사
김종훈, 박영섭, 박종규, 김태곤, 김종학(1998), 『한국어의 역사』, 대한교과서
노태돈(2009), 『한국고대사의 이론과 쟁점』, 집문당
첨언 둘. 소노부는 연노부(涓奴部)를 잘못 적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냥 소노부로 통일해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