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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금석문 : 도조(度祖)의 사적이 있는 경흥(慶興)에 세운 기적비(紀蹟碑). 비문 해제

작성자신으로|작성시간20.01.06|조회수423 목록 댓글 0


왕실금석문

 

도조(度祖)의 사적이 있는 경흥(慶興)에 세운 기적비(紀蹟碑). 비문 해제

    


 

경흥부적지기적비(慶興府赤池紀蹟碑)

 

慶興府赤池紀蹟碑銘
御製慶興府赤池紀蹟碑銘 幷序
龍之爲物至靈也 故能先人以爲瑞 不能慶人以爲德 若我先祖度王赤池事亦然 始王嘗居于慶興之望德山下 夢一神翁告曰我南池之龍也 有客龍據我池 將奪我潛窟 聞公善射 請以一矢 殪我敵 事苟成 我且知德 俾慶公之後 王許諾 旣覺帶櫜鞬 登府之南麓 忽大雨暴作 群動震慴 而望見雲烟迷茫中 黑龍自東北起 引白龍交戰 蜿蜒千尺 互相挐攫 鱗甲閃閃 與電光爭燭 王欲射之 莫辨主客 竟不發而歸 是夜神翁復覿于夢曰 公旣諾我而終惜一矢 何也 王曰 非惜一矢 我不知誰爲客 翁曰白爲我 黑爲客 明日愼勿誤 王又諾 翌朝又登于南麓 兩龍又交戰如昨日 王乃指黑龍 發一矢 正中其腰 於是驚血淋漓 渾池皆赤 故曰赤池 亦曰射龍淵 盖如交趾丹池之得名 而其事尤奇 然說者或以慶後之報 傅合於龍之德我 則豈其然哉 惟我家克世懿問 厚積仁澤 含光而弗耀 率履而弗伐 卒能享天受命 爲百神之所嚮福 萬姓之所歸往 赤池之事 特先人以爲瑞而已 龍豈能慶人哉 雖然 古者 瑞必有紀 雲鳥之無心也
而尙且紀官 則况於龍之至靈乎 乃命竪碑于赤池之濱 紀其事 系之以銘曰 予聞龍之爲德 有聖則見 無聖則處 遊乎靑氣之中 躆乎天外之野 龍可謂見得其時 曾竊竊然潢池之懷居邪 抑天使之效靈於聖人 而將假池以彰厥庥邪 式至今妥玆營窟 我先后之仁也 尙能興雲興雨 永賴我宅幽之民邪 小子嗣服之十一年丁未十一月日立
嘉善大夫吏曹叅判兼奎章閣直提學春秋館修撰官知製敎 臣李秉模 奉敎書
崇政大夫判敦寧府事 臣尹東暹 奉敎篆  

 

[내용 및 특징]

1787(정조 11) 정조(正祖)가 태조(太祖)의 조부(祖父)인 도조(度祖)의 사적이 있는 경흥부(慶興府)에 기적비를 세우고, 이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과 음기를 하나의 족자로 장황하였다. 찬자(撰者)는 정조이고, 서자는 이병모(李秉模), 전서자는 윤동섬(尹東暹)이다. 소재지는 경흥(慶興) 망덕산(望德山) 적지(赤地)이다. 두전(頭篆)은 소전체(小篆體)이며, 음기는 해서체이다. 두전에는 경흥부적지기적비명(慶興府赤地紀蹟碑銘)’이다.


경흥부는 본래 목조가 살던 지역이었다. 애초에 목조가 전주에서 출발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닐 무렵 동쪽으로 덕원(德源) 땅에 이사하고, 또 경흥으로 이사하였다가, 적전(赤田)의 북편으로 옮겨 비로소 터를 잡았다. 익조가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정조가 지은 비문에서는 이곳이 조선왕실의 기틀이 서렸던 곳임을 피력하였다.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도조가 경흥땅 망덕산 아래서 살 때 하루는 꿈을 꾸었다. 꿈에 백룡이 나타나 흑룡을 해쳐주기를 바랬다. 도조는 백룡의 소원대로 흑룡을 화살로 명중시킨다. 이때 흘린 피로 붉게 물든 연못이라 하여 적지(赤地)’라 하였다. 그래서 백룡의 보답으로 자손에게 경사를 준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어찌 이런 이야기를 그대로 시인할 수 있겠는가. 오직 우리 왕실은 선대에서 어짐을 베풀어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도 나타나지 않으시고, 훌륭한 일을 실천하시고도 자랑하지 않으셨음에 마침내 천명을 받아 누리고 모든 신령의 복된 도움과 만백성이 그리워 따르는 바가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신화 같은 이야기를 전적으로 신뢰 할 수 없고, 오히려 선대 왕실에서 덕을 베풀어 조선왕실이 번성할 수 있었다는 견해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 비석을 세우는 이유에 대해서 정조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옛날에는 상서로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기록이 있었고, 찬란한 구름이나 새 같은 무심한 것도 오히려 벼슬의 명칭으로 적어놓았거늘 하물며 영물인 용에 대해서랴. 이제 적지 물가에 비를 세도록 명령하여 그 사실을 기록하고 명을 새긴다.”


한편 용의 현현에 대한 상서로움과 선대 왕실을 본받으려 하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내가 듣던 용은 덕을 지니고 있어서 성인이 나시면 나타나고, 그렇지 않으면 숨어있다. 푸른 기운 가운데 노닐기도 하고 하늘 밖 뜰에 꿈틀거리고도 한다. 즉 용은 나타날 때 나타난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므로 용을 볼 수 있을 때라면 가만히 조그만 연못에라도 웅크리고 있을 때라고나 할까.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이 용으로 하여금 성인에게서 거룩함을 본받게 하는 셈으로 장차 연못을 빌려서 그 의지하는 곳을 빛나게 하려는 것일까. 어떻든 이제야 이르러 이 신령스런 굴을 아늑하게 하는 것도 우리 선조의 어진 마음씨를 본받음이어라. 지금도 오히려 구름과 비를 일으키고 있음이여. 길이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복된 터전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려 함인가.”


글씨를 쓴 이병모(李秉模, 17421806)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이칙(彛則), 호는 정수재(靜修齋)이다. 단하(端夏)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악진(岳鎭)이고 아버지는 연()이며 어머니는 남유상(南有尙)의 딸이다. 1773(영조 49) 진사시를 거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당시 영의정 한익모(韓翼謨)의 주청으로 6품에 올랐다. 경기지방·관동지방을 암행하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김상로(金尙魯)의 죄를 탄핵하였다. 이조좌랑·대사간·예조참의를 거쳐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1779(정조 3)운산에 유배되고, 1781년에는 사판(仕版)에서 제명되기도 하였다.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 평안도 관찰사에 있을 때에 휴정(休靜)의 비문을 찬술하였다.


두전을 쓴 윤동섬(尹東暹, 17101795)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승(德升), 호는 팔무당(八無堂)이다. 할아버지는 부()이고, 아버지는 언교(彦敎)이며, 뒤에 현교(顯敎)에게 입양되었다. 서예에 능하여 80세가 넘어서도 궁중의 서사(書寫)를 맡아 정조로부터 필력(筆力)이 유건(愈健)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이 비석을 비롯하여 달천사비(達川祠碑)·적전사기적비(赤田社紀蹟碑)·임경업충렬사비(林慶業忠烈祠碑)등 당시의 그의 손으로 씌여진 것이 많았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 후기 왕실 현양사업의 일단을 엿볼 수 있고, 당대의 명필 이병모와 윤동섬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다.

정조실록(英祖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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