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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용어

조선왕조 : 소의(昭儀). 소의방(昭儀房). 숙빈추숭(淑嬪追崇). 숙용(淑容). 숙원(淑媛). 숙의(淑儀). 채상단(採桑壇). 종친·의친/공주(公主)

작성자러브인|작성시간20.01.09|조회수549 목록 댓글 0


조선왕조

 

소의(昭儀)

 

정의

왕의 후궁으로, 내명부(內命婦)에 규정된 정2품 위호(位號).

 

개설

조선시대 왕의 후궁에게 내리던 정2품 내명부의 위호이다. 1428(세종 10) 숙의(淑儀)와 함께 정2품에 속하였으나,경국대전(經國大典)이후에 소의(昭儀)는 정2, 숙의는 종2품으로 나누어서 구별하였다. 이 조항은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등 몇 차례의 법이 개정되었으나, 조선왕조 말기까지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담당 직무

소의를 포함한 내명부 소속 여성들은 일정한 직무가 있었다. 1428년에 후궁의 고유한 직무를 구체적으로 규정해놓았다. 소의의 주요 임무는 숙의와 함께 비례(妃禮)의 찬도(贊導)를 담당하는 것이었다[세종실록1038]. 이처럼 후궁에게 부여된 직무는 육체 노동을 시기키 위한 것이 아니라 왕후 보좌는 물론 광계사(廣繼嗣), 즉 왕의 자녀 생산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었다[선조실록13428]. 소의가 낳은 아들은 군()이며, 딸은 옹주(翁主)이다. 조선후기로 올수록 후궁 소생 왕위 계승자가 많아진 만큼, 왕실 안에서 이들의 역할은 의미가 커져갔다.

 

이외에 왕실 자녀를 양육하는 일과 왕실 어른 봉양[세종실록21127]), 왕비의 유사시에 내명부의 모든 내사(內事)를 총괄하는 일 등의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세종실록444].

 

후궁은 내명부에서의 임무만 주어졌을 뿐, 공식적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최고의 권력자인 왕의 측근에 있었던 그들이 정치와 무관하기 쉽지 않았다.

 

변천

소의는 내명부 내관(內官)에게 주던 정2품직이다. 14283월에 개정된 내관 제도에서는 숙의와 함께 정2품직이었다. 소의 위로는 정1품 빈()과 귀인(貴人)이 있으며, 아래로는 정3품 소용(昭容)과 숙용(淑容), 4품 소원(昭媛)과 숙원(淑媛) 등이 있었다. 이들의 정원은 빈과 귀인을 제외하고 소의를 포함한 그 이하의 직급은 각 1명씩 모두 6명을 두도록 했다[세종실록1038]. 품계마다 정원을 규정했지만 이것은 형식에 불과했다. 이후 소의는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이전(吏典)내명부조에서 종2품에 제정된 숙의와 구분되어 숙의보다 한 단계 높은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때 내명부 직급의 정원은 규정되어 있지 않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소의방(昭儀房)

 

정의

내명부의 정2품인 소의(昭儀)의 궁가(宮家) 혹은 궁방(宮房).

 

개설

소의는 후궁의 지위 중 하나이다. 소의는 한()나라 원제(元帝) 때 처음으로 설치되었는데 당시 비빈(妃嬪) 중 최고의 지위였다. 당대(唐代)에는 비()의 아래에 있는 9() 중 최고의 지위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에 후궁의 품계에는 빈, 귀인(貴人) 다음에 소의가 있고, 그 아래에 종2품 숙의(淑儀), 3품 소용(昭容), 3품 숙용(淑容), 4품 소원(昭媛), 4품 숙원(淑媛)이 있었다. 소의방(昭儀房)은 소의의 재산을 관리하는 궁가이다. 후궁에게 지급되는 궁방전(宮房田)은 신궁(新宮)인 경우 800결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빈, 귀인, 소의, 숙의 등 등급에 따른 차등은 보이지 않는다. 구궁(舊宮)으로 되면 제전(祭田)으로 4대까지 200결이 지급되었다.

 

숙빈추숭(淑嬪追崇)

 

정의

1753(영조 29) 영조가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사당과 무덤을 궁원(宮園)으로 격상시키면서 의례적으로 진행하던 절차.

 

개설

조선 시대 사친에 관련된 핵심 개념 및 의례는 주자가례상례(喪禮)남의 후사(後嗣)가 된 남자나 시집 간 여자는 그 사친을 위해 모두 상복(喪服)을 한 등급 내리고, 사친도 역시 그렇게 한다.”는 규정이었다. 이 규정에 의하면 사친은 양자가 되어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의 친부모 또는 시집 간 여자의 친정 부모를 지칭한다. 양자가 된 남자는 양부모를 위해서는 정복(正服)의 상복을 입지만, 정작 친부모를 위해서는 상복을 한 등급 내려 입는데, 이는 자신의 친부모보다는 자신을 양자로 들인 부모를 우선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시집 간 여자 역시 시부모를 위해서는 정복의 상복을 입지만, 친정 부모를 위해서는 상복을 한 등급 내려 입는데, 이 역시 자신의 친부모보다는 시부모를 우선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조선 건국 후 부계친족 사상이 확산되고 유교이념이 보급되면서 왕실에서도 양자로써 즉위하거나 후궁 소생으로 즉위한 왕에게 사친 문제는 왕권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의 왕들은 의례 추숭을 통해 사친을 왕이나 왕비 또는 그에 버금가는 존재로 만들곤 했다.

 

왕의 사친 추숭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다. 예컨대 성종의 사친인 의경세자, 선조의 사친인 덕흥군 등에 대한 추숭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의경세자의 추숭이나 덕흥군 추숭은 왕권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 조선 후기에는 부계 위주의 친족조직 확립과 주자학의 보급에 따라 왕의 사친 추숭이 곧 왕권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사안으로 간주되었다.

 

내용 및 특징

영조는 즉위 초에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가 왕비가 아니라서 종묘에 모실 수 없었다. 영조는 1724(즉위년) 숙빈의 사당 부지를 선정하게 해서 이듬해인 1725년에 경복궁 서북쪽 북악산 아래에 숙빈묘(淑嬪廟)를 완성하였다. 또 영조는 1753(영조 29) 625일에 숙빈묘(淑嬪廟)를 육상궁(毓祥宮)이라 하였으며 숙빈 무덤이던 소령묘(昭寧墓)는 소령원(昭寧園)으로 하였다. 본래 조선 시대에 세자, 세자빈 또는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은 묘(), 무덤은 묘()로 불렸는데 이 같은 묘묘(廟墓) 제도를 영조가 궁원(宮園) 제도로 바꾼 것이다.

 

유교 예법에서는 천자의 무덤을 능이라고도 하고 원()이라고도 하며, 제후왕의 무덤 역시 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무덤의 명칭이 묘()에서 원()으로 바뀐 것은 의례상 크나큰 격상이었다. 영조는 자신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를 위해 이 같은 궁원 제도를 도입하였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숙빈최씨(淑嬪崔氏)를 추숭(追崇)한 것이었다.

 

영조가 숙원 최씨의 사당과 무덤을 궁원(宮園)으로 추숭한 시점은 즉위 후 29년 만이었다. 영조는 즉위 직후부터 숙원 최씨를 추숭하고 싶었지만 노론과 소론 사이의 분쟁 등 현실적인 난관에 막혀 실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영조는 1741(영조 17) 신유대훈(辛酉大訓)을 반포하여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의 제반 정책에 대한 개혁과 정비를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예컨대 1744(영조 20)국조속오례의가 편찬되었고 그 뒤를 이어 1746(영조 22)속대전, 1749(영조 25)탁지정례가 편찬되었으며, 1750(영조 26)에는 균역법이 시행되었다. 이런 추세 속에서 1753(영조 29)에 숙빈최씨(淑嬪崔氏)를 추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궁원 제도 도입과 더불어 영조는 1753(영조 29) 7월에 궁원식례(宮園式禮)-육상궁소령원식례를 편찬함으로써 육상궁과 소령원의 식례(式禮)를 국가 의례화하였다. 아울러 영조는 숙빈최씨(淑嬪崔氏)에게 화경(和敬)’이라는 두 글자의 추시(追諡)를 올렸는데, 이는 영조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1753(영조 29) 625, 영조는 시임 대신, 원임 대신, 관각(館閣)의 당상, 육조의 참판 이상의 관원을 불러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시호를 의논하게 하였다. 영부사김재로, 판부사김약로, 좌의정이천보, 우의정김상로 등이 입시하여 화경(和敬)’이라는 시호를 제시하자 영조는 화경이라는 글자가 진실로 자신의 뜻에 맞는다며 마땅히 육상궁에 나아가 고유제를 지내고 친히 신주를 쓰겠다고 하였다. 영조는 626일 육상궁에 행행하여 고유제를 거행하였으며, 85일에는 육상궁의 상책인의(上冊印儀)를 위한 소지(小識)를 작성하게 한 뒤, 86일에 죽책(竹冊)과 은인(銀印)을 올렸다. 당시 숙빈최씨(淑嬪崔氏)에게 시호를 올리는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상호도감(上號都監)이 설치되었고, 소령원을 수리하기 위해 봉원도감(封園都監)이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에 죽책과 은인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을 책봉할 때 이용되던 상징물이었다. 보통 죽책에는 왕세자나 왕세자빈을 책봉한다는 왕의 명령이 실렸는데, 이 죽책은 대나무 판을 책처럼 엮어서 만들었기에 죽책이라고 불렸다. 은인에는 왕세자인(王世子印)’ 또는 왕세자빈인(王世子嬪印)’이라는 인문(印文)이 새겨졌다.

 

조선 시대의 경우 후궁은 책봉되지 않았고 단지 교지(敎旨)로 임명될 뿐이었다. 영조는 숙빈최씨(淑嬪崔氏)에게 화경이라는 시호를 올리면서 죽책과 은인을 함께 올림으로써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위상을 최소한 왕세자빈의 수준으로 격상시킬 수 있었다. 영조는 숙빈최씨(淑嬪崔氏)를 왕비로 추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고의 추숭을 한 것이었다.

 

변천

영조 이후 후궁의 아들로 즉위한 순조도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친을 추숭하였다. 이 결과 영조의 사친을 모신 육상궁(毓祥宮)을 위시하여 추존왕 원종의 사친을 모신 저경궁(儲慶宮),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를 모신 대빈궁(大嬪宮), 추존왕 덕종의 사친을 모신 연우궁(延祐宮), 사도세자의 사친을 모신 선희궁(宣禧宮), 순조의 사친을 모신 경우궁(景祐宮), 영친왕의 사친을 모신 덕안궁(德安宮) 7궁이 출현하였다.

 

참고문헌

朱子家禮

이영춘, 潛冶 朴知誡禮學元宗追崇論, 청계사학7, 1990.

이왕무, 영조의 私親宮조성과 行幸, 장서각15, 2006.

 

숙용(淑容)

 

정의

왕의 후궁으로, 내명부(內命婦)에 규정된 종3품 위호(位號).

 

개설

조선시대 왕의 후궁에게 내리던 종3품 내명부의 위호이다. 1428(세종 10) 소용(昭容)과 함께 정3품에 속하였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이후 소용은 정3, 숙용(淑容)은 종3품으로 나누어서 구별되었다. 이후 이 조항은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등 몇 차례의 법이 개정되었음에도 조선왕조 말기까지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담당 직무

숙용을 포함한 내명부 소속 여성들은 일정한 직무가 있었다. 1428년에 후궁의 고유한 직무를 구체적으로 규정해놓았다. 숙용의 주요 임무는 소용과 함께 제사와 빈객(賓客)에 관한 일을 맡았다[세종실록1038]. 국가적인 제사나 손님을 맞이하는 직무는 매우 실무적인 일이나 직접 육체 노동을 한 것은 아니다.

 

후궁의 궁극적인 역할은 왕후 보좌는 물론 광계사(廣繼嗣), 즉 왕의 자녀를 생산하는 데에 있었다[선조실록13428]. 숙용이 낳은 아들은 군()이고, 딸은 옹주(翁主)이다. 조선후기로 올수록 후궁 소생들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던 사실을 감안해본다면, 왕실 안에서 이들의 역할은 점차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외에 왕실 자녀를 양육하는 일과 왕실 어른 봉양[세종실록21127], 왕비의 유사시에 내명부의 모든 내사(內事)를 총괄하는 일 등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세종실록444].

 

변천

숙용은 내명부 내관(內官)에게 주던 종3품직이다. 14283월에 개정된 내관 제도에서는 숙의와 함께 정3품직이었다. 숙용 위로는 정1품 빈()과 귀인(貴人), 2품 소의(昭儀)와 숙의(淑儀)가 있으며, 아래로는 정4품 소원(昭媛)과 숙원(淑媛) 등이 있었다. 이때 정원은 빈과 귀인을 제외하고 소의를 포함한 그 이하의 직급은 각 1명씩 모두 6명을 두도록 했다[세종실록1038]. 그러나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이전(吏典)내명부조에서 숙용은 정3품에 제정된 소용과 구분되어 한 단계 낮은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때 내명부의 직급의 정원은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숙원(淑媛)

 

정의

왕의 후궁으로, 내명부(內命婦)에 규정된 종4품 위호(位號).

 

개설

조선시대 왕의 후궁에게 내리던 종4품 내명부의 위호이다. 1428(세종 10) 소원(昭媛)과 함께 정4품에 속하였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이후 소원은 정4, 숙원(淑媛)은 종4품으로 나누어서 구별되었다. 이후 이 조항은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등 몇 차례의 법이 개정되었음에도 조선왕조 말기까지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담당 직무

숙원을 포함한 내명부 소속 여성들은 일정한 직무가 있었다. 1428년에 후궁의 고유한 직무를 구체적으로 규정해놓았다. 소원의 주요 임무는 숙원과 함께 연침(燕寢)을 마련하고, 사시(絲枲)를 다스려서 해마다 헌공(獻功)하는 일을 맡았다[세종실록1038]. 연침을 마련하고 실을 준비하는 업무는 매우 실무적인 일이나 직접 육체노동을 한 것은 아니다.

 

후궁의 궁극적인 역할은 왕후 보좌는 물론 광계사(廣繼嗣), 즉 왕의 자녀를 생산하는 데에 있었다[선조실록13428]). 숙원이 낳은 아들은 군()이고, 딸은 옹주(翁主)이다. 조선후기로 올수록 후궁 소생들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던 사실을 감안해본다면, 왕실 안에서 이들의 역할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외에 왕실 자녀를 양육하는 일과 왕실 어른 봉양과[세종실록21127] 왕비의 유사시에 내명부의 모든 내사(內事)를 총괄하는 일 등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세종실록444].

 

변천

숙원은 내명부 내관(內官)에게 주던 종4품직이다. 14283월에 개정된 내관 제도에서 소원과 함께 정4품직이었다. 숙원 위로는 정1품 빈()과 귀인(貴人), 2품 소의(昭儀)와 숙의(淑儀), 3품 소용(昭容)과 숙용(淑容) 등이 있었다. 이때 정원은 빈과 귀인을 제외하고 소의를 포함한 그 이하의 직급은 각 1명씩 모두 6명을 두도록 했다[세종실록1038]. 그러나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이전(吏典)내명부조에서 숙원은 정4품에 제정된 소원과 구분되어 한 단계 낮은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때 내명부 직급의 정원은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숙의(淑儀)

 

정의

왕의 후궁으로, 내명부(內命婦)에 규정된 종2품 위호(位號).

 

개설

숙의(淑儀)는 내명부 내관(內官)에게 주던 종2품 위호이다. 1428(세종 10) 소의(昭儀)와 함께 정2품에 속하였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이후 소의는 정2, 숙의는 종2품으로 나뉘어 구별되었다. 이후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등 몇 차례의 법이 개정되었으나, 이 조항은 조선왕조 말기까지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담당 직무

숙의를 포함한 내명부 소속 여성들은 일정한 직무가 있었다. 1428년에 후궁의 고유한 직무를 구체적으로 규정해놓았다. 이때 숙의의 주요 역할은 소의와 함께 비례(妃禮)의 찬도(贊導)를 담당하는 것이었다[세종실록1038]. 이처럼 후궁에게 부여된 직무는 육체 노동을 시기키 위한 것이 아니라 왕후 보좌는 물론 광계사(廣繼嗣), 즉 왕의 자녀 생산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었다[선조실록13428]. 숙의가 낳은 아들은 군()이 되고, 딸은 옹주(翁主)가 된다. 조선후기로 올수록 후궁 소생들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던 사실을 감안해본다면, 왕실 안에서 이들의 역할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외에 왕실 자녀를 양육하는 일과 왕실 어른 봉양과[세종실록21127] 왕비의 유사시에 내명부의 모든 내사(內事)를 총괄하는 일 등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세종실록444].

 

변천

숙의는 조선시대 왕의 후궁에게 내리던 종2품 내명부의 위호 가운데에 하나이다. 1397(태조 6) 내관의 칭호, 품계 및 정원 등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 숙의는 정2, 2품 각각 1명씩 정원이 모두 2명이었다. 이때 숙의 위로는 1품의 현의(賢儀), 아래로는 3품의 찬덕(贊德), 4품의 순성(順成), 5품의 상궁(尙宮), 6품의 상관(尙官), 7품의 가령(家令), 8품의 사급(司給), 9품의 사식(司飾)을 두었다[태조실록6315]. 이어 1405(태종 5) 정월에 개정된 여관(女官)에서 숙의는 현의보다 여전히 한 단계 낮은 품계로 정()과 종()의 구분 없이 정원 1명으로 감원되었다[태종실록5115].

 

이후 14283, 숙의는 소의와 함께 정2품으로 개정되었다. 숙의 위로는 정1품 빈()과 귀인(貴人)이 있고, 아래로는 정3품 소용(昭容)과 숙용(淑容), 4품 소원(昭媛)과 숙원(淑媛) 등이 있다. 이들의 정원은 빈과 귀인을 제외하고 소의 이하의 직급은 각 1명씩 모두 6명을 두도록 했다[세종실록1038].

 

그러나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이전(吏典)내명부조에서 숙의는 정2품으로 개정된 소의와 구분되었다. 따라서 그 지위는 소의보다 한 단계 낮고, 소용보다 한 단계 높았다. 이때 내명부 직급의 정원은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채상단(採桑壇)

 

정의

조선 시대 친잠례(親蠶禮) 때 왕비가 자리해 뽕을 따던 네모 형태의 흙으로 쌓은 단().

 

개설

조선 시대 왕비는 국모로서 여성이 갖추어야 할 덕을 상징하였는데, 왕비가 행하는 친잠례는 특히 여성의 노동을 상징하였다. 남성들이 밭에 나가 땅을 갈고 먹을 것을 생산하는 동안, 여성들은 집에서 길쌈을 하여 입을 것을 생산하였던 것이다. 여성들이 길쌈을 통해 생산하는 옷감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비단이었다. 비단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먼저 누에를 쳐야 했다. 조선 시대 왕비가 내외명부 여성들을 거느리고 잠실에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의식이 바로 친잠례였다. 이때 왕비가 흙을 쌓아 뽕을 따기 위한 단()을 만들었는데 그 단이 채상단이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 시대 친잠은 백성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이를 널리 장려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식을 갖춘 친잠례(親蠶禮)와 수견례(收繭禮)로 나뉘었다. 친잠에 관한 기록은 조선 태종 11(1411)에 비롯되나, 실제로 친잠례를 갖춘 것은 1476(성종 7) 왕궁 후원에 시설한 채상단에서 실시한 것이 최초가 되며, 1477년에는 이를 제도화한 친잠응행절목(親蠶應行節目)이 제정되었다. 친잠례의 시기는 1476년에는 3, 1529(중종 24)에는 2월에 한 것으로 보아 일정하지 않고, 기후에 따라 뽕잎이 피어나는 것을 보아 실시했다.

 

왕비는 세자빈, 봉작을 받은 내외명부들을 거느리고 실시하였는데, 1767(영조 43) 3월에 작성된 친잠의궤(親蠶儀軌)에 의하면 왕비는 다섯 개, 내외명부는 일곱 개, 2·3품의 부인들은 아홉 개 가지의 뽕잎을 땄다. 이는 마치 친경의식(親耕儀式) 때 왕은 5추례(五推禮)의 밭갈이, 세손은 7추례, 종신(宗臣) 이하는 9추례를 행하는 것과 비슷하였다. 이와 같은 친잠의식이 끝나면 만조백관은 왕비의 친잠에 하례를 드렸다.

 

누에가 고치를 지어 성견(成繭)이 되면 고치를 거두고 씨고치를 갈무리하는 의식인 수견의(受繭儀)가 있었다. 1767(영조 43) 5월에 작성된 장종수견의궤(藏種受繭儀軌)에 의하면 영조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견의식은 526일에 덕유당(德遊堂)에서 행하여졌고, 백관의 진하(陳賀)529일 숭정전(崇政殿)에서 거행되었다. 수견의식은 상공(尙功)이 죽상(竹箱)에 고치를 가득 담아 왕과 왕비에게 올리면 고치를 친견한 다음, 왕비는 상의(尙儀), 상의는 상복(尙服)에게 주어 보관시키고 친잠과정에서 수고한 관계관을 위로하는 물품을 하사하는 과정으로 끝났다.

 

1924년 순정효황후 윤씨(尹氏)의 친잠의식은 수원의 잠업시험장에서 양력 513일에 소잠(掃蠶)을 하고, 수견(受繭)은 창덕궁 주합루(宙合樓) 서편의 친잠실(親蠶室)에서 양력 617일에 있었다. 이와 같이 왕비의 친잠은 채상(採桑)에서 뽕잎을 딴 후 고치를 거두고 씨고치를 갈무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틀어서 일컬으나, 초기의 친잠은 그 일부를 생략하고 채상단에서 뽕잎을 따는 것으로 그쳤다.

 

형태

채상단은 선잠단(先蠶壇)의 서쪽에 흙을 이용해 쌓았다. 친잠의궤에 의하면 채상단은 사방의 길이가 각각 12자이고, 높이는 1자이며 서쪽, 남쪽, 북쪽에 각각 계단이 있었다. 채상단을 쌓은 후에는 그 위에 잔디를 심었다. 친잠례 때 왕비는 남쪽 계단을 이용해 채상단으로 올라가 동쪽에 있는 뽕나무에서 잎을 땄다. 이에 따라 채상단의 동쪽에는 계단을 설치하지 않았다.

채상단의 동쪽에는 선잠단을 쌓았다. 선잠단은 사방의 길이가 각각 14(4.2m), 높이는 2(60)였다. 사면에 계단이 있고 단 아래의 동쪽, 서쪽, 남쪽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10(3m)였으며 북쪽은 길이가 5(1.5m)였다. 중앙의 계단은 높이가 9(30)였고, 3개의 계단은 1계단[]이며, 중앙 계단에서 남쪽 유문(壝門)까지의 길이가 36(11m), 너비가 35(10.5m)였다. 선잠단은 채상단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쌓아 잔디를 심었다. 사면에 흙 담장을 치는데 길이가 67(20m), 너비가 37(11.2m)), 높이가 3(90), 두께가 1(30)이며, 잔디로 덮었다. 4개소의 유문은 길이가 10(3m), 너비가 69(1.2m)였다. 요석(爎石)은 단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는데, 길이가 14(44), 너비가 16(50), 높이가 7(23)였다. 선잠단에는 누에의 신인 선잠을 모셨는데, 신좌(神座)는 북쪽에 남향으로 자리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왕비의 친잠례는 조선 시대 여성들의 길쌈 노동 및 양잠 노동을 상징하였다.

 

참고문헌

親蠶儀軌

藏種受繭儀軌

박소동, 친경친잠의궤 해제, 국역친경친잠의궤, 민족문화추진회, 1999.

김문식 외,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종친·의친/공주(公主)

 

정의

왕의 딸로, 왕비의 소생임.

 

개설

공주(公主)는 보통 왕비가 낳은 딸의 작위이다. 그러나 조선초기에 궁주(宮主옹주(翁主왕녀(王女)로 혼용되다가 1440(세종 22) 이후 왕의 적처(嫡妻)에게서 태어난 딸만을 칭하도록 규정되었다. 이 규정은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외명부(外命婦)’조에 그대로 법제화되었고, 이후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등에도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내용 및 특징

왕비 소생 공주와 후궁 소생 옹주는 보통 아기씨[阿只氏]에서 10세 이전에 고신(告身)을 받았다. 공주에 임명되면 존귀한 신분으로서 품계를 초월한 외명부의 최상위에 올랐다. 이로 인해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았다. 예컨대 속대전에 의하면, 공주는 출가(出嫁)하기 전에 녹봉을 받았고, 출가한 이후에도 남편인 부마(駙馬)에게 지급되는 녹봉을 간접적으로 받았다. 또한 생전에 850결 규모의 면세결을 지급받다가 죽으면 제사를 위해 필요한 제위조(祭位條)250결을 받았다.

 

공주의 남편은 중국과 같이 부마도위(駙馬都尉)라 하였는데, 처음에 종1품의 위()를 받았다가 나중에 정1품의 위로 올려 받았다. 최초로 부마가 된 자는 태조의 차녀 경선공주(慶善公主)와 혼인한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 심덕부(沈德符)의 아들 심종(沈淙)이다[태조실록21010].

 

변천

고려사(高麗史)』「백관(百官)내직(內職)’에 따르면, 고려 문종 때 대장공주(大長公主)와 함께 정1품이 주어졌고 공양왕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건의에 따라 왕의 딸로 불리게 됐다. 그러나 조선초기 일정한 법 체제가 여전히 미비한 탓에 왕비 소생의 딸은 궁주·옹주·왕녀 등 여러 가지 칭호로 혼용되었다[태종실록1836], [세종실록4216].

 

이후 1434(세종 16)에 세종은 공주를 왕녀로 호칭하도록 하였으나[세종실록1648], 1440년 중국의 고사를 상고하여 왕비에게서 태어난 딸만을 공주라 규정하였다[세종실록22415]. 1428(세종 10) 이후 내관 제도가 마련되고 외명부의 작위가 정비되면서 호칭이 구별되었다. 이 규정은 경국대전』 「이전(吏典)외명부조에 그대로 실려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을 공주, 후궁이 낳은 딸을 옹주라 뚜렷하게 구분한 것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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