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 둑(纛). 마조단(馬祖壇). 모극(矛戟). 모절(旄節). 백택기(白澤旗). 백학기(白鶴旗). 백호기(白虎旗). 백호당(白虎幢).
작성자러브인작성시간20.01.23조회수244 목록 댓글 0조선왕조
둑(纛)
정의
어가의 행렬이나 군대의 출정 시에 앞세우던 것으로 군왕 및 지휘관의 군령권을 상징하던 의장물.
개설
둑은 옛날 중국 전설상의 군왕인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의 탁록대전에서 승리한 이후 그 머리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한다. 치우는 중국 고대인들에게 엄청난 괴력을 소유한 전쟁의 신으로 받아들여졌는데, 특히 장기간에 걸쳐 전란이 계속되었던 춘추전국시대에는 이러한 치우의 이미지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그리하여 치우는 황제에 반하는 악의 화신으로서의 성격과 동시에,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숭배되기도 하였다.
둑은 이러한 이미지를 차용하여 만들어진 군의 의장물이었다. 그 모양은 창에 꿰어진 치우의 머리를 표현하고 있었다. 중국의 고대 문헌에 따르면 아주 이른 시기부터 둑은 군 지휘자의 군권을 상징하는 의장물로 채택되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충렬왕대 기록에 이미 둑의 존재가 보이고, 조선 건국 직후에도 강무당(講武堂)에 둑기를 설치하였던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정기적으로 둑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는데, 이를 둑제라고 하였다. 둑제에는 2개의 큰 둑기와 2개의 작은 둑기가 사용되었다. 한편으로 둑은 왕의 행차 시 노부(鹵簿) 행렬 맨 앞에 늘 고정적으로 배치되기도 하였다. 『세종실록』「오례」의 노부조에는 대가노부(大駕鹵簿), 법가노부(法駕鹵簿), 소가노부(小駕鹵簿)의 행차 맨 앞에 시위군 병력이 배치되었는데, 시위군의 행렬 가운데에는 둑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노부 조항에는 둑이 빠져 있어, 두 기록이 작성된 시기 사이에 이를 노부 행렬에서 제외한 조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둑은 노부 행렬에는 포함되었으나, 궁궐에서 진행되는 의식에 배치되는 의장물에는 제외되어 있어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왕의 의장물의 성격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조대에 편찬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서는 노부를 배치할 때 둑이 있었고, 조선후기 왕 행차를 기록한 기록화 등에는 대열 앞에 둑이 보이고 있어, 『국조오례의』 편찬 이후 다시 왕 행차에 둑을 설치하도록 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왕 호위에 동원되는 병력에 대한 군령권을 상징하기 위해 둑을 설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으로 둑은 실제 군사행동 직전에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몇 차례의 여진 정벌과 대마도 정벌 등 실제 군사작전이 몇 차례 있었다. 이러한 경우 출병 전 서울에서 둑제를 지내거나, 혹은 군사작전 지역으로 이동하여 전투 전에 둑제를 지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여타의 의장물들이 왕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실질적인 기능은 없었던 반면에, 둑은 실질적 기능과 의장으로의 기능을 동시에 겸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연원 및 변천
둑은 중국 고대 문헌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그 기원이 어느 시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사(高麗史)』에서 둑이 등장하는데, 충렬왕 시기 일본 출정 과정에서 둑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판단하건대, 둑은 고려시대부터 군권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건국 직후부터 그 존재가 드러나며, 특히 『태조실록』 등에서는 둑기가 스스로 움직였다던지, 둑이 소리를 냈다던지 하는 기록이 보이고 있어, 군사적인 정변이나 국가의 비상사태를 암시하는 존재로 여겨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형태
둑의 형태를 자세히 전하고 있는 『세종실록』「오례」와 『국조오례의』의 군기 도설, 그리고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참조해 보면 둑기는 치우의 머리를 창으로 꿴 형태로 만들어졌고, 치우의 머리털을 형상화한 것에는 소의 꼬리털을 사용하였다. 행진할 때에는 말을 탄 장교가 잡고 2~4인의 군사들이 받쳐주었는데,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순조순원후가례도감의궤(純祖純元后嘉禮都監儀軌)』의 반차도에는 말 탄 장교 1명이 둑을 잡고 네 명의 군사들이 좌우에서 이를 받치고 있는 그림이 남아 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치우에 대한 신앙은 우리나라보다 중국의 민간에서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치우를 형상화한 둑도 군의 의장물로만 사용되었기에 일반 민간의 생활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순조순원후가례도감의궤(純祖純元后嘉禮都監儀軌)』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이성구, 『중국고대의 주술적 사유와 제왕통치』, 일조각, 1997.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마조단(馬祖壇)
정의
마조(馬祖) 제사를 거행하던 제단.
개설
마조는 왕마(王馬)이자 말의 수호신·조상신인 동시에, 하늘의 별인 마조성(馬祖星)으로서, 조선시대의 국가 제례 체계에 소사(小祀)로 편입·분류되어 숭배되었다. 성종대 이전까지는 마조단(馬祖壇)에서 말을 다스리는 네 신령인 마조와 말 기르는 일을 관장하는 신[養馬]인 선목(先牧), 말을 처음 탄 사람이자 말의 수호신인 마사(馬社), 말에게 재앙과 질병을 내리는 신령인 마보(馬步) 등을 함께 제사지냈다. 이들은 하늘의 별인 천사성(天駟星)으로도 숭배되었다. 그러다가 성종대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면서 마조 제사는 따로 의주(儀注)를 두지 않고, 소사로서 곡식을 주관하는 신이자 28수 중 각수로서 곡식을 관장하는 신인 천전성(天田星)을 의미하는 영성(靈星)의 제사에 덧붙여서 동일한 절차에 따라 설행하도록 했다. 그로 인해 마조단의 규격과 조성은 영성단(靈星壇)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마조단은 동교(東郊)에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동교는 현재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살곶이다리 근처로 추정된다.
변천 및 현황
마조단은 1908년(융희 3) 7월에 칙령에 의하여 산천(山川), 선잠(先蠶), 선농(先農) 등의 제례를 폐지하면서 관련된 여러 제단들을 없앴을 때 함께 없어져서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형태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마조단은 영성단과 동일하게 넓이가 2장 1자(약 6.6m), 높이가 2자 5치(약 0.7m)이며, 사방으로 계단이 조성되어 있다. 마조의 신좌(神座)는 제단의 북쪽에 설치하되 남향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모극(矛戟)
정의
조선시대 의장용 병기인 모(矛)와 극(戟)을 아울러 이르는 말.
개설
원래 ‘모’는 긴 장대 끝에 고리 모양으로 휘어진 날이 달린 무기로, 적을 끌어당겨 베는 데 사용하였다. ‘극’은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긴 창으로, 적을 찔러서 살상하는 병기였다. 조선시대에는 통치자의 권력과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구일식의(救日食儀) 등의 군례에 이러한 모와 극을 의장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모는 구겸창(鉤鎌槍)이라고도 하는데, 보병이나 수병이 즐겨 사용하였다. 육전의 경우에는 적의 기병을 말에서 끌어내리거나 말의 다리를 베는 데 사용하였으며, 방패로 몸을 가린 적 보병을 걸어 당겨 베는 용도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농성전에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베는 데 사용하였다. 수전의 경우에는 근접한 적을 찍어 배에서 끌어내리거나 물에 빠진 적을 베는 데, 또 적선의 돛 줄을 끊는 데도 사용하였다.
극은 삼지창(三枝槍)의 일종으로, 끝부분에 달린 여러 개의 예리한 창날로 적을 찔러 범위가 큰 여러 개의 상처를 동시에 입히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또 창날이 넓게 퍼져 있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도 용이하였다. 그러나 갑주(甲冑)의 방호력이 증가하면서 실전에서는 찌르는 능력을 극대화한 창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그에 따라 조선후기에는 왕이 행차할 때 동원되는 의물(儀物)인 용기(龍旗)나 둑기(纛旗)의 깃대로 활용되는 경우가 잦았다.
모와 극은 조선시대 군례 가운데 하나인 구일식의를 거행할 때 의장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전악서(典樂署)의 전악(典樂)이 근정전(勤政殿) 계단 위에 북[鼓] 3개를 설치하면, 그 뒤 병조(兵曹) 정랑(正郎)이 청색·적색·백색의 휘(麾) 3개를 북 안쪽에, 병기(兵器) 3개를 북의 바깥쪽에 진열하였다. 동쪽에는 청색고(靑色鼓)와 모, 남쪽에는 적색고(赤色鼓)와 극, 서쪽에는 백색고(白色鼓)와 월(鉞)을 두었다.
형태
『세종실록』「오례」에서는 주로 중국 문헌을 인용하면서 모와 극을 설명하였다.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의 「병기도설(兵器圖說)」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모와 극은 자루의 경우 나무로 만들었는데, 주사(朱沙)를 이용해 붉게 칠하거나 생옻과 숯으로 검게 칠하였다. 자루의 하단 끝부분은 모철(冒鐵)이라는 쇠로 덮어씌워 둥글고 뾰족하게 만들었다. 모철은 창을 지면에 세우기 위해 부착한 것이지만, 창날이 부러지면 이를 살상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설문(說文)』에 따르면, 모는 옛날 병기인 추모(酋矛)를 가리킨다. 길이는 2장(丈)이며 코끼리 모양을 닮았는데, 병거(兵車)에 세웠다고 한다. 서씨(徐氏)라는 사람은 모는 구병(勾兵), 즉 굽은 병기라고 하였다. 『예서(禮書)』에서는, 모의 형상[爲器]이 위는 날카롭고 옆은 굽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위의 날카로움은 식물이 처음 날 때의 가시랭이[苗]를 본뜬 것이고, 옆이 굽음은 식물이 성장할 때의 구부러짐[勾]을 본뜬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세종 연간에 간행된 『운부군옥(韻府群玉)』에 따르면, 극은 삼지창 모양으로 전체 길이는 1장 6척, 너비는 1촌 반이다. 『주례(周禮)』의 「병기총도(兵器總圖)」에는, 가운데 있는 긴 창날인 원(援)의 길이는 7촌 5푼, 좌우로 뻗은 보조 창날인 호(胡)의 길이는 6촌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창날 아래 자루를 끼우는 부분인 내(內)의 길이는 4촌 5푼, 극의 자루인 비(柲)의 길이는 14척 8촌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모절(旄節)
정의
조선시대 노부(鹵簿) 행렬에 편성된, 7개의 털 뭉치가 연결된 의장용 깃발.
개설
‘노부’는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동원되던 의장(儀仗) 행렬을 말한다. 궁궐 안에서 시행될 때는 ‘의장’이라 불렀다. 왕의 노부는 그 규모에 따라 대가(大駕)·법가(法駕)·소가(小駕)로 구분되었으며, 왕 이외에 왕비, 왕세자, 왕세손 등의 의장도 있었다. 노부 행렬에는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각종 깃발·부채·덮개·병기·악기 등 다양하고 화려한 의물(儀物)이 사용되었다. 모절은 그러한 의물 가운데 하나로, 붉은색의 털 뭉치 7개를 연결해 만든 깃발을 가리킨다.
연원 및 변천
절(節)과 월(鉞)은 중국 송나라 때, 황제가 임지로 떠나는 절도사(節度使)에게 절과 긴 자루가 달린 도끼 모양의 부월(斧鉞)을 하사한 데서 비롯되었다. 절은 지휘의 권한을, 부월은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한을 상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신임 관찰사(觀察使)나 유수(留守), 병사(兵使) 등의 지방관이 부임할 때 왕이 손에 쥐는 작은 수기(手旗) 모양의 절을 부월과 함께 내려 주었다. 그뿐 아니라 절과 부월은 국가 행사의 의장에도 포함되어 왕의 통치권과 위엄을 상징하였다.
모절은 조선시대 대가노부에는 4개, 법가노부에는 2개, 소가노부에는 1개가 사용되었다. 다른 의장과 더불어 왕의 가마인 어연(御輦) 앞에 진열되었는데, 대가노부의 경우 4개의 모절이 좌우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모절을 드는 군사는 홍의(紅衣)에 피모자(皮帽子)를 착용하였다. 그에 비해 중궁(中宮) 즉 왕비의 노부에는 4개가 편성되었으며, 이때 모절을 드는 군사는 청의(靑衣)에 피모자를 착용하였다.
세종대에 경창부윤(慶昌府尹)정척(鄭陟)이 새로 제정한 왕세자의 대가의장에는 모절이 2개 포함되어 있다[『세종실록』 30년 3월 24일]. 또 성종 연간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왕세자 의장에도 모절 2개가 편성되었다. 한편 1783년(정조 7)에 정조의 생모 혜경궁(惠慶宮)의 의장을 정할 때는 모절 4개를 편성하였다[『정조실록』 7년 3월 27일].
형태
붉은색으로 물들인 상모(象毛) 뭉치 7개를 용머리 모양의 장대에 매달아 만든다. 상모는 각종 병기나 군복, 깃발에 다는 털 장식을 말한다. 각 상모 뭉치의 상단에는 금으로 도금한 구리 덮개를 씌우고 연꽃을 새긴다. 각 상모 뭉치를 가죽으로 꿴 다음, 붉은색으로 칠한 장대의 용구(龍口) 고리에 매달아 연결한다.
1759년(영조 35)에 편찬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의 「품목질(稟目秩)」에는 당시에 모절 4개를 만드는 데 사용된 재료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백마(白馬)의 갈기 10근, 천초(茜草) 10근, 조개껍질 재 1말 2되, 백반 4냥, 초(醋) 4복자(卜子), 소가죽 1령, 자루용 가시나무 4개, 백구피(白狗皮) 2령, 추목(楸木) 반 조, 주철 10근, 반주홍(磻朱紅) 2냥, 아교 2냥, 가는 철사 40자, 당주홍(唐朱紅) 2돈, 하엽 2돈, 삼록 4돈, 황단 2돈, 청화 4돈, 석자황 1돈, 정철 4근, 두석 10냥, 삼보(三甫) 5속(束), 홍면사 1냥, 정분(丁粉) 4돈, 부레 2냥, 쇠심줄 2냥, 명유(明油) 3홉, 생모시 1근, 청마사(靑麻絲) 2돈, 주토(朱土) 1말, 땔나무 4단, 과표자 2개, 꿩 깃털로 만든 비[雉尾箒] 1자루, 홑집용 청색 무명 1필 10자, 비를 막는 두꺼운 기름종이 8장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 행차에 대한 연구-의궤반차도와 거동기록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백택기(白澤旗)
정의
조선의 의장기 중 하나로, 인간의 말을 하고 덕 있는 왕이 통치하는 시대에만 나타난다는 백택(白澤)을 그린 기.
개설
백택은 중국의 전설상에 등장하는 동물이다. 『수서경적지(隋書經籍志)』에 수록된 「백택도(白澤圖)」에 의하면 백택은 사자를 닮은 동물로 말을 잘하며, 황제(黃帝)가 동해의 해변에서 만나 천하의 귀신에 관한 것을 질문하자 이에 대답했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한편 『산해경(山海經)』에서는 겉모습이 사자와 같고 여덟 개의 눈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삼재도회(三才圖會)』에서는 온몸에 눈과 뿔이 달린 네 발 짐승으로 표현하였다.
각 기록마다 백택의 모습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인 내용으로는 백택은 사람의 말을 이해하며, 세상의 이치에 통달해 있고 영적인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백택은 성왕(聖王)이 통치하는 시기에만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러한 백택의 이미지 때문에 백택을 그린 문양이나 깃발은 당나라시대부터 의장물로 사용되었는데, 군주의 치세를 과시하거나 혹은 그러한 치세를 이루는 군왕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백택을 그린 백택기는 왕의 의장물 및 왕비의 의장물로 사용되었다. 즉 조선 왕의 가장 큰 규모의 의장인 대장의장(大仗儀仗) 및 대가노부(大駕鹵簿), 다음 규모인 반장의장(半仗儀仗) 및 법가노부(法駕鹵簿)에서 각각 백택기가 2개씩 사용되었다. 가장 작은 규모의 소장의장(小仗儀仗) 및 소가노부(小駕鹵簿)에서는 백택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한편 왕비 의장 및 왕세자 의장에서도 각각 백택기가 2개씩 사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백택기가 의장기로 처음 등장한 것은 당나라시대로 보이는데, 『신당서(新唐書)』권23,「의위지(儀衛志)」에는 당 황제의 의장물로 백택기 2개가 등장한다. 이후 『송사(宋史)』, 『원사(元史)』, 『명사(明史)』 등의 기록에서도 백택기가 황제 의장으로 사용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 황제 의장을 기록한 『고려사(高麗史)』 「여복지(輿服志)」의 의위조 및 노부조에도 백택기가 보이고 있어, 이미 백택기가 고려 황제의 의장으로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태
조선시대 의장물의 형태를 기록한 『세종실록』「오례」 및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통해 백택기의 모습을 살펴보면, 사각의 깃발에 삼각(三脚)의 화염각을 달고 있다. 깃발은 흰 바탕에 백택과 운기(雲氣)를 그려 넣었고 청색, 적색, 백색, 황색의 네 가지 색깔로 채색하였다. 백택의 모습은 머리와 꼬리에 털이 달려 있고 여타 형태는 호랑이나 표범과 비슷하다. 이러한 백택의 모습은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 묘사한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인데, 중국 문헌에 나온 백택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있으며, 혹은 뿔을 달고 있기도 하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백택은 왕실의 의장물뿐만 아니라 대군(大君)이 아닌 왕자들 복식의 흉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흉배에 나온 백택은 백택기에 나온 백택과 비슷하게 뿔이 달려 있지 않고 머리와 꼬리에 털이 나 있다. 전체적인 모습도 호랑이와 비슷하게 표현되었다. 백택 문양은 왕실의 의장물로 자주 사용된 것인 만큼, 왕실이 아닌 사대부가나 일반 민가에서는 백택문의 사용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택의 이미지는 중국과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받아들여졌는데, 일본에서 백택은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신당서(新唐書)』
『송사(宋史)』
『원사(元史)』
『명사(明史)』
『산해경(山海經)』
『삼재도회(三才圖會)』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백학기(白鶴旗)
정의
조선의 의장기 중 하나로, 흰색의 학을 그려 넣은 기.
개설
백학기는 조선의 왕, 왕비, 왕세자의 의장물 중 하나로, 흰색 바탕에 흰 학을 그려 넣은 모양의 기였다. 학은 신분의 고귀함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장수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백학기가 왕이나 왕비, 왕세자 의장에서 활용된 것은 의장물의 주체가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왕의 의장 등급은 모두 3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백학기는 모든 등급의 의장에서 1기씩 사용되었고, 의장의 배치에서는 항상 현학기(玄鶴旗)와 짝하여 사용되었다. 왕비 및 왕세자의 의장에서도 마찬가지로 1기씩 사용되었고, 현학기와 짝을 이루도록 배치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의 의장물은 중국의 역대 제도와 고려의 의장을 참조하여 만들어졌다. 학은 일찍부터 중국의 황제 의장물로 활용되었는데, 『송사(宋史)』의 황제 노부에는 학기(鶴旗)가 보인다. 또 『속통전(續通典)』 등에는 서학기(瑞鶴旗) 등이 보인다. 이로 보아 학이 의장물의 도안으로 활용된 것은 송나라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의 의장을 전하고 있는 『고려사(高麗史)』 「여복지(輿服志)」에 의하면, 황제의 법가노부(法駕鹵簿)에 백학기가 2개와, 이에 짝하여 현학기 2개를 사용하였다. 이로보아 조선의 백학기는 고려시대의 의장물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형태
조선의 의장물의 형태와 모양을 설명하고 있는 『세종실록』「오례」 및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가례서례(嘉禮序例)」 노부조에 의하면, 백학기는 사각형의 형태에 청색, 적색, 백색, 황색 등으로 채색을 하고, 화염각을 달고 있다. 기 안의 도안은 흰 바탕에 흰 학과 운기를 그리고 있다. 백학은 아래를 향해 머리를 내민 형태로 되어 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학은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민간에서도 미술의 소재나 문양, 장식 등에 활발히 사용되었다. 또 학은 관원 복식의 흉배로도 사용되었는데, 당상관(堂上官)의 경우는 쌍학, 당하관(堂下官)은 단학의 문양을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송사(宋史)』
『통전(通典)』
『속통전(續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대명집례(大明集禮)』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백호기(白虎旗)
정의
조선의 의장물 중 하나로, 사각형의 깃발 안에 사신(四神) 중 하나인 백호(白虎)를 그려 넣은 기.
개설
백호는 서방을 수호한다고 여겨지는 신령한 짐승이다. 백호기는 여타의 사신기와 더불어 중국 당대부터 황제의장으로 사용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후 줄곧 왕 의장물로 사용하였다. 조선의 왕 의장은 모두 3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백호기는 의장의 등급과 상관없이 각각 1기씩 사용되었고, 전정에 배치될 경우에는 항상 서쪽에 배치되었다. 백호기를 비롯한 사신기는 행차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기능과 동시에 중앙의 왕을 동서남북에서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백호기는 왕 의장에서만 사용되었고, 왕비 및 왕세자 의장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연원 및 변천
백호를 비롯한 청룡, 주작, 현무의 사신 개념이 형성된 것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부터 전한(前漢) 시기에 이르는 때였다고 한다. 이후 전한 말~후한대에 만들어진 서적이나 고분 등에서 사신과 관련된 내용이나 그림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려 고분에서 사신의 그림이 발굴된 바 있다. 이러한 사신이 의장기로 등장하게 된 것은 당나라 시기부터인 것으로 보이는데, 『신당서(新唐書)』의 황제 의장에 대한 내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송사(宋史)』, 『원사(元史)』, 『금사(金史)』, 『명집례(明集禮)』 등의 기록들을 참조해 보면, 당대 이후 중국 역대 왕조에서는 사신기를 지속적으로 황제의장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사신기가 왕의 의장물로 사용되었다. 황제의 의장을 기록한 『고려사(高麗史)』「여복지(輿服志)」의 의위조 및 노부조에는 백호기를 비롯한 사신기가 등장하고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에서 사신기의 사용은 고려시대 의장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형태
조선 의장물의 형태와 모양을 설명하고 있는 『세종실록』「오례」 및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가례서례(嘉禮序例)」 노부조를 확인해 보면, 백호기는 사각형의 깃발에 삼각의 화염각이 달린 모습이었다. 깃발 내부는 흰색 바탕에 백호와 운기를 그려 넣고 청색·적색·황색·백색의 네 가지 빛깔로 채색을 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백호를 비롯한 사신은 한국에서도 고대시기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사신의 이미지는 왕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 의장에서도 사신의 기나 당은 왕비나 왕세자 의장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민간에서는 일반적인 흰색 호랑이의 이미지는 활발히 사용되었지만, 사신 중 하나인 백호는 많이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대명집례(大明集禮)』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백호당(白虎幢)
정의
조선의 의장물 중 하나로, 4겹의 비단을 처마처럼 만들고 그 위에 백호를 그려 당간에 매단 것.
개설
당(幢)이란 깃발의 종류 중 하나인데, 깃발 대신 비단이나 소 털[牛毛] 등으로 모양을 만들어 깃대 끝에 매단 것을 이른다. 백호당은 이러한 당의 종류 중 하나로, 사신(四神) 중 하나인 백호를 그려 만든 것이었다. 백호는 흰색 털을 가진 호랑이를 말하며, 사방 중 서쪽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의장물의 배치 시에도 전정의 서쪽에 배치되었다.
조선의 왕 의장은 총 3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백호당은 가장 큰 규모인 대가노부(大駕鹵簿)-전정대장(殿庭大仗), 다음 규모인 법가노부(法駕鹵簿)-전정반장(殿庭半仗)에서만 각각 1기씩 사용되었다. 가장 작은 규모인 소가노부(小駕鹵簿)-소장의장(小駕儀仗) 및 왕비, 왕세자 의장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연원 및 변천
『주례(周禮)』「천관(天官)」 하채조의 주석에 의하면 당은 ‘소의 꼬리털로 만든 모(旄)를 드리워 당간 끝에 매단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은 고대 중국에서 기의 종류로 다양하게 사용되었고, 황제의 의장물에서도 많은 종류의 당이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을 당으로 만들어 황제의 의장물로 사용한 것은 북위(北魏) 때부터인 것으로 보이며, 당나라에서 이를 계승하여 사신의 당을 각각 동서남북에 배치하였다. 이후 중국에서는 사신을 그린 당을 대대로 황제 의장으로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시대의 의장을 기록한 『고려사(高麗史)』 「여복지(輿服志)」에 따르면 황제의 법가의장에 백호당 2개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백호당은 고려시대의 의장물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며, 고려의 백호당은 중국의 의장물을 참조하여 황제 의장물을 구성할 때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형태
조선의 의장물의 형태와 모양을 설명하고 있는 『세종실록』「오례」 및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확인해 보면, 백호당은 청룡당의 형태와 같았다. 청색, 백색, 홍색의 세 빛깔의 저사(紵絲)로 4겹의 처마를 만드는데 모양은 일산[蓋]과 같았다[『세종실록』 오례 가례 서례 노부 노부의 예3]. 4겹으로 한 것은 중국 황제 의장이 5겹의 당을 만드는 것에 비하여 격식을 한 등급 감한 것으로 생각된다. 일산 모양의 덮개 위에는 백호를 그려 넣었고, 사방 옆으로는 술을 드리웠다. 일산의 복판에는 도금한 정자를 설치하여 당간에 매단다. 당간은 붉은 빛깔로 칠하도록 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백호를 비롯한 사신은 한국에서도 고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사신의 이미지는 왕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조선 의장에서도 사신의 기나 당은 왕비나 왕세자 의장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민간에서는 일반적인 흰색 호랑이의 이미지는 활발히 사용되었지만, 사신 중 하나인 백호는 많이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대명집례(大明集禮)』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