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 욕수(蓐收).용마기(龍馬旗).우정(牛鼎).운검(雲劍).웅골타자(熊骨朶子).웅후(熊候).육정기(六丁旗).은교의(銀交倚).의장(儀仗)
작성자러브인작성시간20.01.27조회수304 목록 댓글 0조선왕조
욕수(蓐收)
정의
오행(五行) 중 금(金)을 다스리고, 가을과 서쪽을 주관하는 신령.
개설
욕수는 오행 중 금을 관리하는 신령이기 때문에 ‘금정(金正)’이라고도 하는데, 금정의 ‘정(正)’은 관장(官長)을 의미하였다. 조선시대에 국가 제례로 편입되어 중사(中祀)로서 강우를 기원하면서 올리는 제례인 우사(雩祀)의 여섯 신령, 즉 구망(句芒)·축융(祝融)·욕수(蓐收)·현명(玄冥)·후토(后土)·후직(后稷)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내용
욕수의 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그중 하나는 본래 백제(白帝) 소호씨(少皥氏)의 네 아들, 중(重)·해(該)·수(脩)·희(熙) 가운데 해로서, 왼쪽 귀에 뱀이 매달려 있고 두 마리의 용을 타고 다니는 신묘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금과 가을을 다스리는 상제 겸 부친인 소호씨를 보좌하여 공덕을 쌓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가을과 금의 신령으로 승격되고 제향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소호씨는 오제(五帝)의 첫 번째 군주인 황제(黃帝)의 아들로서 동이족(東夷族)의 시조라고도 전해진다.
다른 설에 의하면 오제의 세 번째 군주인 제곡(帝嚳)을 보좌하는 오행관(五行官)의 하나로서 금과 가을·서쪽을 다스렸고, 그로 인해 금정으로 칭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제곡을 보좌한 오행관은 욕수 외에도, 목(木)과 봄·동쪽을 다스리는 관리인 목정(木正) 구망, 화(火)와 여름·남쪽을 다스리는 관리인 화정(火正) 축융, 수(水)와 겨울·북쪽을 다스리는 관리인 수정(水正) 현명, 토(土)와 중앙을 다스리는 관리인 토정(土正) 후토 등이었다.
조선초기에 국가 제례 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이들 오정(五正)은 오곡(五穀)의 신인 후직과 함께 강우를 기원하며 올리는 우사 제례의 봉행 대상이 되었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예기(禮記)』
용마기(龍馬旗)
정의
조선시대 왕의 행차나 궁궐 행사에 왕권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된 의장기.
개설
용마는 현명한 군자가 통치할 때 등장하는 신령한 동물인데, 용마기는 이를 상징하는 의장기이다. 왕의 행차에 사용되는 노부(鹵簿)의 대가(大駕), 법가(法駕), 소가(小駕)에 모두 사용되며, 왕비와 왕세자 의장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연원 및 변천
용마는 복희씨(伏羲氏)가 다스릴 때, 황하(黃河)에서 팔궤도를 지고 나왔다는 신령한 짐승으로 백택(白澤)과 쌍을 이루는 상징물이다. 신마(神馬)로 이해되는데, 현명한 통치자가 있을 때, 등장하는 존재이다.
『세종실록』「오례」에 그려진 용마는 몸은 말 모양이면서 다리는 용의 형상으로 네 개의 발톱을 가지고 있다. 머리는 말의 형태이면서 뿔이 있고,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전설상의 신수(神獸)와는 모습이 다르다. 그렇더라도 현명한 군주가 있을 때 용마가 나타난다는 전설에 근거하여 신수를 상징한 것은 틀림없다.
용마기는 왕에게만 적용되는 의장기이고, 대가와 법가, 소가 편성에 모두 사용되지만, 대가와 법가에서는 좌우에 하나씩 2기가 배치되고, 소가에서는 1기만 배치되는 차이가 있다.
형태
『세종실록』「오례」의 용마기는 기의 형태만을 설명하고 있다. 백색의 바탕에 용마와 운기를 그리고, 청색·적색·황색·백색 등 네 가지의 빛깔로 채색을 한다. 그리고 화염각(火炎脚)이 있다[『세종실록』 오례 가례 서례 노부 노부의 예2]. 이러한 설명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도 그대로 수정 없이 수록되었다.
중국에서 용마를 형상화할 때 몸통에 팔궤를 그리거나, 비늘을 표현하는데, 조선의 용마는 이와는 모습이 일치하지 않는다. 애초에 물로부터 나왔다는 전설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용의 모습을 많이 반영한 형태로 형상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대명집례(大明集禮)』
『제사직장(諸司職掌)』
『삼재도회(三才圖會)』
袁珂, 『중국신화대사전』, 華夏出版社, 1998.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김지영, 「조선시대 典禮書를 통해 본 御駕行列의 변화」, 『한국학보』31-3, 2005.
우정(牛鼎)
정의
국가 제사에서 희생(犧牲)으로 쓸 소를 삶는 데 사용된 솥.
개설
우정은 조선시대의 국가 제례에서 중요하게 상용된 솥인 정(鼎)의 한 종류로서, 몸체는 원통형이고, 정의 세 발이 모두 소의 다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세 발 윗부분에도 소머리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다. 정의 외관을 희생인 소로 장식한 것은 그 안에 소를 담는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형태
우정의 몸체는 위, 아래의 지름이 동일한 원통형으로, 몸체 윗부분에 우레 문양이 빙 둘러서 새겨져 있으며, 기구(器口) 둘레에는 네모난 손잡이가 두 개 달려 있다. 중국 송나라 때에 편찬된 『송반악도(宋頒樂圖)』에 의하면 우정의 기구와 바닥의 지름은 모두 1자 3치(약 39㎝), 우정 내부의 깊이는 1자 2치 2푼(약 37㎝), 내부 용량은 1곡(斛), 즉 10말(약 180ℓ)이라고 한다. 옛날의 제도에 따르면 천자는 우정을 황금으로 장식하였고, 제후는 백금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 수록된 우정의 그림에서는 본체와 함께 우정의 덮개인 우정멱(牛鼎冪), 우정을 들어 올리는 데 사용하는 막대인 우정경(牛鼎扃), 희생인 소를 건져 올리는 데 사용하는 막대인 우정필(牛鼎畢)의 형태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우정멱은 기(氣)가 새지 않도록 띠풀[茅]을 촘촘하게 엮어 만든다. 우정경의 길이는 3자(약 90㎝)이며 양쪽 끝을 각각 3치(약 9㎝) 정도의 옥으로 장식한다. 우정필은 소를 잡는 부분인 갈고리 모양의 잎[葉]과 자루[柄]로 구성되는데, 잎의 넓이는 3치이고 가운데 1치(약 3㎝)가량을 깎아내며, 자루의 길이는 2자 4치(약 73㎝)이다. 우정필은 가시나무로 만들며 자루의 끝부분과 잎을 붉은색으로 칠한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춘관통고(春官通考)』
운검(雲劍)
정의
왕을 호위하는 신하가 패용하는 검으로 원래는 왕의 보검 혹은 그 보검을 패용한 신하.
개설
조선시대에 사용한 긴 외날을 가진 단병기로 환도(環刀)의 일종이다. 운검은 왕을 호위하는 신하가 패용(佩用)하는 검으로 일반 환도보다 장식이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나라에 큰 잔치나 회합이 있어 왕이 참석할 때 유능한 무장(武將) 중에서 믿는 사람을 골라서 임명하여 호위하게 하였는데, 그때 좌우에 호위를 맡은 신하가 패용했다. 이에 운검을 패용한 신하를 운검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운검에서 운(雲)은 ‘용이 타고 승천하는 구름’을 상징한다. 따라서 원래 운검은 왕을 용으로 보고 왕을 보좌하는 무사들이 소지했던 보검을 의미한다.
조선전기의 경우 종3품의 대호군(大護軍)이 운검을 받들고 다녔다. 조선후기에는 형식상 정2품의 도총관(都摠管)이 보검(寶劍)이라는 이름으로 운검을 받들고 다녔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왕을 호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고, 단순히 운검을 운반하는 역할은 운검차비(雲劒差備) 혹은 봉운검수문장(捧雲劒守門將)이라는 하급 무관에게 넘겼다.
이와는 별도로 조선초기부터 2품 이상의 무관 중에서 2명 혹은 4명을 선발하여 운검을 패용하고 왕의 바로 곁에서 호위하도록 했는데, 이들을 별운검(別雲劍) 혹은 운검이라고 하였다. 별운검의 직책은 반드시 무반이 맡은 것은 아니었으며, 한명회(韓明澮) 등 문반 출신도 자주 운검을 맡았다. 조선후기에는 2품 이상이라는 조건도 그리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이들이 소지한 운검 혹은 보검은 일반 환도에 비해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조선전기와 조선후기에 그 형태가 각각 달랐다.
형태
조선전기의 경우 운검의 “칼집은 물고기 가죽으로 싸고, 칠은 주홍색을 사용하고, 장식은 백은(白銀)을 사용하며, 붉은 술인 홍조수아(紅絛穗兒)를 드리우고, 띠는 말위라는 가죽을 사용한다.”고 하였으며[『세종실록』 오례 군례 서례 병기 창·장검·검], 나머지 제도는 환도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당시 운검은 일반 환도와 마찬가지로 길이가 짧고 구름 문양이 없었으며 칼 띠를 이용하여 허리에 패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조선후기의 경우 『진연의궤(進宴儀軌)』와 『진찬의궤(進饌儀軌)』에 그려진 운검을 보면, 칼머리 부분에 구름 모양의 운두(雲頭) 장식이 달려 있으며, 2개의 칼집 고리 사이가 환도에 비해 상당히 넓어서 주로 등에 메거나 어깨에 지고 다니기 편하도록 만들어졌다. 또한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정조세자책봉의례도(正租世子冊封儀禮圖)’와 기타 반차도들을 보면, 조선후기 운검의 길이는 일반 환도에 비해 훨씬 길었다. 그러나 육군박물관 패월도(佩月刀)의 예로 보면, 이는 칼집의 길이만 길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칼날은 일반 환도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현재 운검이라고 전해지는 조선후기의 칼들은 운두도 없고 칼집 고리 사이의 폭도 좁으며 칼집의 길이도 일반 환도와 비슷한 수준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조선시대의 여러 의궤에 그려진 운검과는 다른 칼이며, 단순히 장식이 화려한 도검이거나 원래 소유자가 별운검의 임무를 맡았을 때 사용했던 환도들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진연의궤(進宴儀軌)』
『진찬의궤(進饌儀軌)』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가람기획, 2004.
김성혜 외, 「刀劍의 기능성 연구 : 육군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육군사관학교육군박물관 학예지』6, 1999.
웅골타자(熊骨朶子)
정의
조선시대 특수한 신분층의 지위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하던 병장기류 의장.
개설
웅골타자는 골타(骨朶)라는 타격기의 한 종류이다. 봉(捧)의 끝부분에 철 종류의 타격부를 부착하여 공격하는 병기류이지만, 골타는 숙위의 의장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에서도 몇 가지 종류의 골타를 의장물로 채택하였는데, 웅골타자는 왕과 왕세자의 의장에 사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봉에 타격부를 부착한 골타는 배가 나온 것을 의미하는 중국어 발음에서 전용되어 지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격용 병장기이기는 하지만, 타격부의 다양한 모양과 장식이 가능해서 의장용으로도 광범위하게 채택되었다. 고려의 노부(鹵簿) 편성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당·송 이래의 중국 왕조의 의장으로 사용되었고, 특히 원에서는 다양한 골타가 의장에 동원되었다.
의장용 병장기는 실제 살상 기능은 퇴화되고 장식이나 상징 기능이 강조되는데, 조선에서 채택한 골타의 경우도 타격부의 타격 기능은 사실상 제거된 의장물이다. 웅골타자는 표범가죽으로 장대 끝을 덮어씌운 표골타자(豹骨朶子)와 함께 초기부터 사용된 의장물이다. 강한 색상의 봉과 화려한 타격부 장식을 갖추어 시선을 끌기 좋은 의장물이었다. 골타 자체가 갖는 특별한 상징성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조선에서는 대장(大仗)·반장(半仗)·소장(小仗) 등 모든 등급의 왕 의장에 반드시 포함되는 의장물이었고, 왕세자 의장에도 사용되었다.
형태
웅골타자는 붉은 칠을 한 봉에 머리 부위를 둥글게 하여 곰 가죽 주머니를 덮어씌우며 주칠봉(朱漆棒) 끝에는 쇠 장식을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대명집례(大明集禮)』
『제사직장(諸司職掌)』
『삼재도회(三才圖會)』
袁珂, 『중국신화대사전』, 華夏出版社, 1998.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김지영, 「조선시대 典禮書를 통해 본 御駕行列의 변화」, 『한국학보』31-3, 2005.
웅후(熊候)
정의
조선시대에 왕이 활을 쏠 때 쓰던, 곰의 머리가 그려진 과녁.
개설
어사(御射) 즉 왕이 직접 활을 쏠 때 사용하던 전용 과녁으로, 중앙에 곰의 머리를 그려 넣었다. 사우사단의(射于射壇儀), 대사례(大射禮) 등의 군례(軍禮)를 거행할 때 설치되었다.
연원 및 변천
대사례는 왕과 신하가 회동하여 활쏘기를 하면서 예(禮)와 악(樂)을 익히고 이를 통해 군신 간의 질서와 도리를 확인하고 화목함을 도모하는 행사이다. 조선시대의 활쏘기는 사후(射侯), 관람하는 것은 관사(觀射)라고 하였다. 활쏘기는 무예(武藝)의 수련과 경합, 유흥과 친목 도모를 위해 시행되었다. 그러나 본래 활쏘기는 육예(六藝)의 하나로 마음의 수련을 의미하였고, 활쏘기의 관람은 수련으로 인해 체득한 덕(德)의 드러남을 살피는 것이었다.
조선은 건국 후 사례(射禮) 의식을 정비하여, 왕이 신하들과 함께 직접 활을 쏘는 사우사단의, 신하들이 활을 쏘는 것을 참관하는 관사우사단의(觀射于射壇儀), 지방 수령(守令)이 주재하는 향사의(鄕射儀) 등의 의주(儀註)를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정리해 놓았다. 대사례는 사우사단의를 바탕으로 제정된 의례로, 1477년(성종 8) 8월에 처음으로 시행되었다[『성종실록』 8년 8월 3일]. 주로 문묘(文廟) 참배 및 문과(文科)와 무과(武科) 등이 부대 행사로 수반되었다. 영조대에는 대사의(大射儀)라고도 하였다[『영조실록』 19년 3월 29일]. 정조 연간에는 연사례(燕射禮)가 자주 시행되었는데, 활쏘기 외의 부대 행사는 거행되지 않았다[『정조실록』 3년 9월 25일].
각종 사례를 거행할 때는 활을 쏘는 주체에 따라 과녁과 연주되는 음악 등에 차등을 두어 군신 간의 위계와 질서를 확인하려 하였다. 웅후는 왕이 직접 활을 쏠 때만 설치한 과녁으로, 신하들이 활을 쏠 때는 미후(麋候)를 설치하여 차등을 두었다. 시후(豕候)는 무과 및 군사들의 교습에 사용되었다. 웅후·미후·시후는 과녁의 색깔과 모양을 달리하여 구별하였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고대 중국의 천자는 호후(虎候), 제후(諸侯)는 웅후, 경대부(卿大夫) 이하는 미후를 사용했다고 한다. 웅후는 사단(射壇)에서 90보(步) 거리에, 화살막이 판인 핍(乏)은 웅후의 동쪽과 서쪽 10보 거리에 각각 설치되었다. 마주 보는 두 핍 안에는 획자(獲者)가 들어가, 발사된 화살을 줍고 화살의 명중 여부를 확인하였다. 웅후를 비롯해 활쏘기에 쓰이는 각종 사기(射器)의 설치는 훈련원(訓鍊院)에서 맡아보았다.
형태
『세종실록』「오례」에는 웅후·미후·시후의 형태와 제작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웅후는 붉은색 베로 사각형 바탕을 만드는데, 높이와 너비는 각각 1장(丈) 8척(尺)으로 한다. 과녁의 정중앙 부분인 정곡(正鵠)은 가죽으로, 가로와 세로가 각각 6척인 사각형 모양이 되도록 만든다. 표면에 흰색 칠을 하고 그 위에 곰의 머리를 그려 넣은 뒤 바탕이 되는 붉은색 베의 한가운데에 붙인다. 붉은색 베의 네 모서리에 끈을 단 뒤, 이 끈을 지면에 고정하는 두 개의 막대 상단과 하단에 각각 묶으면 완성된다. 미후의 제작법은 웅후와 동일하다. 다만 바탕이 되는 베의 빛깔이 푸른색이며, 정곡에 큰 사슴[糜]의 머리를 그려 넣는 점이 다르다. 시후는 정곡에 돼지의 머리를 그려 넣는다.
1743년(영조 19) 윤4월에 영조가 거행한 대사례의 의식 및 준비 과정을 기록한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에도 웅후의 제작법과 형태, 재료 등이 실려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제작된 웅후는 홍염포(紅染布)로 만들었으며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각각 18척이었다. 과녁의 정중앙 부분은 정곡 대신에 관(貫)이라 하였는데, 백피(白皮) 위에 곰의 머리를 그려 넣었다. 조선전기에 제작된 웅후와 달리 관 바깥에 세 개의 정방형 과녁인 삼정(三正)을 추가로 부착하였는데, 이는 고례(古禮)를 따른 것이다[『영조실록』 19년 4월 30일]. 그 결과 조선전기의 웅후가 두 개의 정방형이 겹쳐져 있는 모양인 데 비해, 『대사례의궤』의 웅후는 다섯 개의 정방형이 포개져 있는 모양이 되었다. 삼정은 주색(朱色)·백색(白色)·창색(蒼色)의 차례로 칠하고, 네 모서리를 붉은색 줄로 연결하여 붉은색 대나무에 묶는다. 미후는 이정(二正)만 추가하는데, 주색·녹색(綠色)의 차례로 칠한다. 네 모서리는 푸른색 줄로 연결하여 푸른색 대나무에 묶는다[『영조실록』 19년 윤4월 7일].
그 당시에 웅후 1개를 제작하는 데는 재봉실용 마사(麻絲) 1냥(兩), 관피(貫皮) 제작용 회우피(灰牛皮), 삼정을 만드는 데 쓰이는 안료인 당주홍(唐朱紅)·진분(眞紛)·하엽(荷葉) 각 4냥, 곰 머리를 그리는 데 사용되는 안료인 당주홍 1전(戔)·진분 5전·도황(桃黃) 5분(分), 그림을 그릴 때 틀로 사용하는 소연목(小椽木) 4개, 숙마(熟麻)로 꼰 줄 30파(把), 관피 재봉용 생모시 2전, 관의 사면(四面)을 세 번 두르는 데 쓰이는 오승포(五升布) 175척 등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
강신엽, 「조선시대 大射禮의 시행과 그 운영-『大射禮儀軌』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16, 2001.
신병주, 「영조대 大射禮의 실시와 『大射禮儀軌』」, 『한국학보』106, 2002.
심승구, 「조선시대 大射禮의 설행과 정치사회적 의미-1743년(영조 19) 大射禮를 중심으로-」, 『한국학논총』32, 2009.
육정기(六丁旗)
정의
조선시대 왕의 행차 및 공식 행사에서 왕권의 상징으로 쓰이던 여섯 기의 의장기.
개설
육정기는 60간지(干支)에서 10개의 천간(天干) 중 정(丁)이 들어가는 간지를 신격화하여 형상화한 의장기이다. 도교에서는 육갑(六甲)과 육정(六丁)을 신격화하는데, 육정신은 미래를 예지하고 물건을 움직이는 신통력이 있다고 한다. 고려에서 조선초기까지 육정신은 하늘의 별에게 제사하는 초제(醮祭)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의장기로 육정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가장 규모가 큰 대가노부(大駕鹵簿)와 전정대장(殿庭大仗) 등 왕의 의장에만 사용된다.
연원 및 변천
중국에서는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地支)를 결합해서 60개의 간지를 형성하여 날짜의 표기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천간의 으뜸인 갑(甲)에 지지가 결합한 간지를 육갑이라 하여 양(陽)에 속하는 신으로 인식하였다. 이에 상대하여 육정은 음(陰)에 해당하는 신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육갑이 남신을, 육정이 여신을 상징한다.
조선의 육정기가 도교 신의 개념에서 유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기의 상부에 신의 형상을 그리고 하단에 12지에 해당하는 신수(神獸)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신을 표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육정기에 상대되는 육갑기는 채택되지 않았는데,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육정기의 배치가 정확한 방위 개념에 의해 설정된 것은 틀림없다. 노부를 설명하고 있는 기록에서 육정기는 좌우에 배치된다고만 기술하기 때문에 정확한 배치 순서를 알 수 없는데, 『조선왕조실록』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배반도(排班圖)에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12지지는 자(子)를 정북으로 하여 순서대로 방향을 표시한다. 조선에서는 이들 중 갑과 결합되는 지지를 제외하고 정과 결합하는 지지는 방위의 순서대로 배치하였다.
상징 의장의 선두가 되는 홍문대기(紅門大旗)를 기준으로 문관인 동반(東班)에 해당하는 좌측에 정사(丁巳)·정묘(丁卯)·정축(丁丑) 순서로, 무관인 서반(西班)에 해당하는 우측에 정미(丁未)·정유(丁酉)·정해(丁亥)의 순서로 배치된다. 정과 결합된 12지(支)는 좌측에 남쪽에 해당하는 사(巳), 동쪽에 해당하는 묘(卯), 북쪽에 해당하는 축(丑)을 순서대로 배정하였다. 이와 상대하여 우측에는 남쪽에 해당하는 미(未), 서쪽에 해당하는 유(酉), 북쪽에 해당하는 해(亥)를 순서대로 배치하였다.
이렇게 정돈된 배치는 세종 때 완성되었다. 정종과 태종의 발인반차(發引班次)에 나타나는 육정기의 배치는 방위의 배열이 혼재되어 있지만, 『세종실록』「오례」에서 12지를 남쪽에서 북쪽을 상징하는 순서대로 배치하고 있다[『세종실록』 오례 가례 서례 노부 대가의 노부]. 이러한 배치 원칙은 성종 때 편찬된 『국조오례의』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육정기는 고려 때 가장 규모가 큰 법가노부(法駕鹵簿)에서도 의장기로 채택되지 않았다. 조선에서 도교적 유래를 가지고 있는 육정신을 왕 의장에 포함시키게 된 경위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후기에도 육정기는 배제되지 않고 그대로 사용되었다.
행차 시에 육정기는 방향을 나타내는 주작기(朱雀旗)와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다. 가운데 붉은색의 주작기가 위치하고 좌측에는 정사기와 정묘기가 배치되는데 동쪽을 상징하는 청색기이다. 우측에는 정미기와 정유기가 있는데, 서쪽을 나타내는 흰색기이다. 이들 뒤에 정축기와 정해기가 위치하는데, 북쪽을 상징하는 흑색기이다.
육정기는 왕의 행차 때 사용되는 노부의 대가와 궁궐 행사에 배치되는 전정의 대장 등급에서만 편성된다. 육정기는 등급이 낮은 법가와 소가(小駕), 혹은 반장(半仗)과 소장(小仗) 등급에서는 사용하지 않으며, 왕비와 왕세자 의장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형태
육정기는 상단에 여신의 형상을 머리 부분만 그리고, 중간에 글자를 형상화하여 부적 문양을 나타내고, 하단에는 해당 12지의 신수를 그렸다. 바탕색으로 흑색과 청색, 흰색을 사용하는 각각의 방위에 부합되는 색을 채용하였다. 바탕색에 의해 구분하면 정축기와 정해기가 흑색 바탕이고, 청색 바탕은 토끼 형상이 있는 정묘기와 뱀 형상을 넣은 정사기에 적용되고, 흰색 바탕은 양 형상의 정미기와 닭 형상이 있는 정유기에 적용되었다.
정축기는 흑색 바탕에 위에는 여신의 형상을 그리고, 아래에 소의 머리 모양을 그리고 있다. 그림 주변은 청색·적색·황색·백색의 네 가지 채색을 하였고, 기의 주위에는 화염각(火炎脚) 장식을 달았다. 정묘기는 청색 바탕에 정축기와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데, 몸통이 되는 부적 문양이 다르고 토기 문양을 둔 점이 다르다. 정사기는 청색 바탕이고 문양과 뱀 형상을 그리고 있다. 정미기는 백색 바탕에 독특한 문양과 양의 머리 형태를 두었고, 정유기는 백색 바탕에 닭의 머리를 형상화했다. 정해기는 흑색 바탕이고, 독특한 문양과 함께 돼지 머리 모양을 그리고 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육정신은 도교적 유래를 갖는 신으로 민간에서도 숭배의 대상이었고, 조선초기에는 국가에서 제사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육정신은 여신으로 남쪽 방향과 불을 상징하면서 신력을 발휘하는 존재이지만, 육갑과 함께 군사적 역량을 가진 신장(神將)으로 개념화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대명집례(大明集禮)』
『제사직장(諸司職掌)』
『삼재도회(三才圖會)』
袁珂, 『중국신화대사전』, 華夏出版社, 1998.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김지영, 「조선시대 典禮書를 통해 본 御駕行列의 변화」, 『한국학보』31-3, 2005.
은교의(銀交倚)
정의
조선시대 노부(鹵簿) 행렬에 편성된, 은색의 의장용 접이식 의자.
개설
노부는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동원되던 의장(儀仗) 행렬을 말한다. 궁궐 안에서 시행될 때는 ‘의장’이라 하였다. 왕의 노부는 그 규모에 따라 대가(大駕)·법가(法駕)·소가(小駕)로 구분되었으며, 왕 이외에 왕비·왕세자·왕세손 등의 의장도 있었다. 노부 행렬에는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각종 깃발·부채·덮개·병기·악기 등 다양하고 화려한 의장 용품이 사용되었다. 은교의는 이러한 의장 용품 중 하나로, 은색의 접이식 의자를 가리킨다.
연원 및 변천
대가노부에 2개, 법가노부에 1개가 편성되었다. 왕이 타는 가마인 어연(御輦) 앞에 금장도(金粧刀)·은장도(銀粧刀)·금횡과(金橫瓜)·은횡과(銀橫瓜)와 같이 좌우로 나뉘어 진열된 의장 사이에 진열되었다. 은교의 뒤에는 교의(交椅) 아래에 두고 쓰는 발판인 각답(脚踏)이 배치되었다. 1명의 군사가 1개의 은교의를 받들고 나아갔는데, 이때 군사는 자의(紫衣)에 자건(紫巾)을 착용하였다. 중궁(中宮)의 노부에는 1개가 편성되었으며, 은교의를 받든 군사는 청의(靑衣)에 자건을 착용하였다. 국장(國葬) 의례를 거행할 때에 발인반차(發引班次) 행렬에는 2개가 편성되었다.
형태
교의는 의자의 일종으로, 유랍(鍮鑞)으로 도금하여 은색 빛깔을 낸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 행차에 대한 연구-의궤반차도와 거동기록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의장(儀仗)
정의
왕, 왕비 등 특수한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는 상징물.
개설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왕을 비롯한 특수한 신분자의 지위를 상징하기 위해 다양한 물품이 사용되었는데, 이를 통칭하여 의장(儀仗)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이 단일한 문장을 상징으로 사용한 것과는 달리 유교문화권의 상징 의장은 신분이 높을수록 의장의 개수와 구성이 복잡하게 규정되었다. 의장은 궁궐 밖으로 이동하는 경우와 궁궐 내의 공식적인 행사에 사용되었다. 조선의 경우 왕과 왕비, 왕세자와 관련된 의장 내용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의 예전(禮典)에 규정하여 따르도록 하였다. 법전의 규정은 없지만, 지방을 순행하는 체찰사(體察使), 관찰사(觀察使)와 같은 재상급 관인과 지방에 부임하는 수령(守令) 등의 관원도 일정한 규모의 신분 상징 의장을 갖추고 있었다.
연원 및 변천
유교문화권에서 의장은 특수한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노부(鹵簿)라는 용어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노부는 군주가 밖으로 이동할 때 갖추게 되는 방패의 일종인 노(鹵)의 개수를 기록하는 장부를 의미하였는데, 점차 특수 신분층이 이동 시에 갖추게 되는 의장의 개념으로 전환되었다.
조선에서 의장을 정비할 때 주로 참조한 중국의 『통전(通典)』과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왕과 왕비, 왕세자 등의 이동 시에 사용되는 의물과 그 구성을 노부로 칭하고, 궁궐의 행사에 배치되는 의물과 그 구성을 의장으로 구분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서도 왕의 이동 시에 갖추게 되는 노부와 궁궐 마당에서 사용되는 의장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노부와 의장에 사용되는 의물(儀物)의 종류와 구성을 통일하여 사용하였다.
조선에서는 왕과 왕비, 왕세자의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 의장을 사용하고, 국가의 공식 행사에서는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황의장(黃儀仗), 황태자를 상징하는 홍의장(紅儀仗)을 갖추었다.
왕을 상징하는 체계로 고려 의종 때 편성된 노부 법가(法駕)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인데, 500여 개가 넘는 의장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의 경우는 가장 큰 규모의 대가(大駕)에 사용되는 의장물이 160여 개 정도로 구성되어 고려보다 축소된 편성을 보이고 있다. 조선에서는 궁궐 마당에 배치되는 의장을 규모에 따라 대장(大仗)·반장(半仗)·소장(小仗)으로 규정하였고, 이에 상응하여 노부의 편성을 대가(大駕)와 법가(法駕), 소가(小駕)로 구분하였다.
노부는 외부로 행차할 때 사용되는 편성이고, 협의의 의장은 궁궐 내에서 공식적인 행사가 진행될 때 배치되는 것이지만, 조선에서는 이를 노부로 통합하여 정리하였다. 문과 전시(殿試)는 궁궐 마당에서 시행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이때 배치되는 의장을 노부 반장(半仗)이라 규정하였다. 반면에 무과 전시는 궁궐 바깥에서 시행되는데 이때는 법가 노부가 동원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문·무과는 동일한 등급의 의장이 동원되었는데, 행차 때에 동원되는 법가와 마당에 배치되는 반장에 해당하는 의장물의 구성이 동일하기 때문에 노부라는 용어로 통합한 것이다.
왕비와 왕세자의 의장도 규정되었다. 왕비의 경우는 양산(陽繖)과 부채[扇]로 편성된 단순한 의장만 있었는데, 세종 때 이에 대한 확충이 논의되어 다양한 의장물이 추가되었다. 왕세자의 경우는 세종 때에 왕의 소가에 버금가는 규모로 의장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세조 때 의장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여 이후 성종 때 편찬된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었다. 왕비와 왕세자는 등급의 구분 없이 단일한 편성의 의장을 사용하였다. 왕비와 왕세자의 의장은 별도의 의장물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왕 의장 구성물의 일부를 채용하여 편성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조선후기에는 『국조오례의』에 규정된 최하위 등급의 의장인 소가 규모의 의장을 갖추기도 힘든 상황을 겪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에 규정된 의장 제도는 원칙적으로 변화 없이 유지되었고, 의장물의 구성에도 변화가 없었다. 다만, 왕이 군사를 지휘할 때 사용하는 기물(旗物)의 편성을 형명(形名)이라 하는데, 형명의 구성 요소인 둑기(纛旗)와 교룡기(交龍旗)가 의장 편성 체제에 추가된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세조 때 형명을 궁궐 마당에 배치하여 의장물을 대신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국조오례의』에는 해당 사항이 누락되었다. 조선후기의 의장 편성에는 형명과 궁궐 노부의 의장물이 통합되어 하나의 의장 체계로 인식되었다.
절차 및 내용
의장은 상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의 기능은 없다. 의장의 구성은 의장기와 병장기, 기타 의물로 이루어진다. 의장기는 상징 대상의 신분에 부합하는 다양한 상징물이 표시되는데, 신분이 높을수록 상징의 범위와 대상이 확대된다.
조선의 왕은 중국과는 차등을 두어 해와 달과 같이 하늘과 관련된 상징 깃발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통치자임을 상징하기 위해서 주작·청룡·백호·현무 등 사방을 나타내는 깃발과 용과 기린 등의 신령한 동물을 그린 깃발, 징[金]과 북[鼓] 등 군대의 지휘권을 상징하는 깃발 등을 사용하였다.
병장기는 왕의 군사적 위용을 드러낼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금·은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화려한 색상의 장식을 갖추었다. 병장기 관련 의장은 생사권을 상징하는 부월(斧鉞)과 군대의 지휘와 위엄을 강조하는 도검류, 철퇴, 각종의 봉(棒)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병장기 의장은 목재로 제작되어 적절한 채색을 한 것으로 실제의 살상 기능보다는 상징 기능에 치중한 것이었다.
기타의 의장물은 양산과 부채를 비롯한 각종의 의물로 구성되는데, 이것들은 양의 기운으로부터 대상자를 가리고 보호하는 상징성을 나타낸다. 양산은 신분에 따라 황색, 홍색, 청색을 채택하는데, 조선의 경우 왕과 왕비는 붉은빛의 홍양산(紅陽繖)을, 왕세자는 푸른빛의 청양산(靑陽繖)을 사용하였다. 부채의 경우는 용(龍)과 봉황[鳳] 등의 신령한 동물 문양을 적용하였고 청색 등의 색을 사용하였다.
의장은 왕을 수행하는 방식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의장의 일부는 왕이 편전(便殿)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항상 왕의 측근에서 수행하게 된다. 반면에 대부분의 의장은 왕을 상징하는 기능을 하면서 수행 의장과는 별도로 일정한 원칙에 따라 배치된다.
수행 의장의 대표적인 것이 양산과 부채인데, 상징의 대상자는 양산의 뒤, 부채의 앞에 위치하게 된다. 양산은 상징 대상자를 직접 지칭하므로, 그 자체로 상징 대상자가 현장에 있음을 나타내는 기능을 한다.
중국의 황제와 황태자를 상징하는 황의장과 홍의장은 중국과 관련된 외교적 사안이 생겼을 때 사용하는 의장이었다. 궁궐 정전(正殿), 혹은 중국 관련 건물을 중국의 궁궐로 설정하여 이를 상징하는 패(牌)를 건물 한가운데 설치하는데, 황의장의 경우에는 궐정(闕庭)을, 홍의장에는 궁정(宮庭)을 사용한다. 이런 상태에서, 각 행사의 성격에 따라, 건물 주위에 황의장과 홍의장을 배치하였다. 조선에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황제와 황태자를 상징하는 최소한의 약식으로 편성되었고, 중국의 조서와 칙서가 왔을 때 도성에서 이를 맞이하는 의례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대명집례(大明集禮)』
『제사직장(諸司職掌)』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김지영, 「조선시대 典禮書를 통해 본 御駕行列의 변화」, 『한국학보』31-3,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