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위구르 문자와 그 기원
현대 위구르 문자의 간략한 체계이다. 문자를 보면, 단번에 아랍 문자에서 따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몽골, 만주 문자의 기원이 되었다고 알려진 중세의 위구르 문자와는 완벽하게 달라진 것이다. 중세의 위구르 문자가 생긴 것은 고대 중동에서 나온 아람 문자가 동방으로 전해졌고, 이것이 중앙아시아에서 동서무역에 종사했던 소그드 인들에 의해서 소그드 문자로 변형되어 위구르로 전해졌는데, 이것이 중세 위구르 문자가 되었다.
이 중세 위구르 문자는 다시 칭기스 칸 시기 몽골에 들어와서 몽골문을 표기하는 방식으로 채택되었고, 여기에서 나온 몽골 문자는 훗날 만주 문자로 연결되기에 이른다. 이런 식으로 기원을 따져보면, 유목민의 문자는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셈이 된다. 만주 문자의 기원을 고대 아람 문자까지 가지고 올라가는 식이 되니까, 그 역사가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몽골문자와 만주문자를 만들었던 위구르인들은 정작 지금은 그 문자를 쓰고 있지 않다.
현대 위구르 문자는 이렇게 아랍 문자와 비슷한(몇몇 글자는 아예 똑같다) 문자를 쓰고 있다. 아랍문자는 28자 체계이고, 여기에 4자를 더한 32자 체계를 가진 것이 페르시아 문자인데, 현대 위구르는 여기에서 보이는 바로는 34자 체계다.
몽골이 들어온 이후, 사실 위구르는 몽골보다는 중앙아시아와 더욱 관련이 많아졌던 것 같다. 위구르 제국이 840년에 키르기스 족에 의해 멸망한 이후, 위구르인들은 더욱 서쪽으로 이동하여 많은 연맹체를 세우게 된다. 그러다가 몽골 칭기스 칸이 몽골 고원에 등장하면서 위구르는 가장 먼저 칭기스 칸에게 자진 복속한다. 이로 인해서 위구르는 칭기스 칸에게 최고급 대우를 받기에 이르렀고, 이후에도 위구르는 몽골제국에 계속 복속하게 된다. 그러나, 쿠빌라이 시기 이후 몽골제국에 계속 내분이 생기고 거기에 중앙아시아 일대를 차지했던 카이두 세력이 워낙 거대했던 탓에 위구르는 카이두의 공격을 받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면서 위구르의 지배세력이 중국 내지로 들어오게 되었고, 아마 나머지가 중앙아시아 각지에 흩어지게 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중앙아시아는 칭기스 칸의 차남 차가타이의 분봉지역이었다. 칭기스 칸은 천산 이남에서 아무다리야 강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일대를 차가타이에게 분봉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소위 '차가타이 칸국'이라는 분봉령, 더 나아가 국가가 생기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카이두가 세력을 결집하여 몽골초원 및 중앙아시아에 웅거하면서 차가타이 칸국은 카이두에 배속되어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가 카이두가 전쟁 중에 화살을 맞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기회를 잡게 된다.
카이두의 신하로 들어가 그와 여러 해를 싸웠던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 칸은 카이두의 죽음을 계기로 그 세력을 자신이 휘하에 두게 되고, 결국 중국의 원 제국과 화평을 맺기에 이른다. 대칸의 권위를 인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차가타이 칸국은 이후로도 원 제국과는 동떨어진 독자적인 정치체로의 길을 걸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유목을 중시하는 동차가타이 칸국과 정주 문명을 중시하는 서차가타이 칸국으로 분열되어 세력이 소멸되었고, 서차가타이 칸국이 결국 티무르 제국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며, 동차가타이 칸국은 모굴 칸국이라는 세력으로 발전하면서 차가타이 칸국이라는 국가는 멸망한다.
어쨌든, 이런 역사적인 과정을 거친 차가타이 칸국은 중국과는 확실히 동떨어진 지역이었고, 오히려 중앙아시아나 중동과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었던 모양이다. 1270년에 있었던 헤라트 전투는 차가타이 칸국과 일 칸국의 접전이었으며, 여기에서 차가타이 칸국의 바락 칸이 패배하는 바람에 그 세력이 소멸되었었다. 또한 14세기에는 차가타이 칸국의 칸 중에서 이슬람교로 개종을 했던 칸이 있을 정도로 중국 문화보다는 오히려 그 서쪽의 문화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당시 인도의 이슬람화도 국경을 맞대고 있던 차가타이의 이슬람화에 영향을 조금이라도 끼치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여기에 더욱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차가타이 투르크어'가 되지 않을까 한다. 즉, 차가타이어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양이 아랍, 페르시아문을 보는 것처럼 생겼다. 아래 그림이 차가타이 문으로 기록된 문헌인데, 언뜻 보아도 위에 보이는 현대 위구르문 혹은 아랍, 페르시아문과 비슷해 보이는 것이 확인된다.
사실, 차가타이 문으로 된 문헌 중에서 중요한 것이 많이 있다고 한다. 특히 인문, 의학 등 서적에서 중요한 것이 많이 있다고들 한다. 우리나라 학계에는 김호동 교수가 본인의 논문을 통해 소개했던<라시드사>라는 것이 그나마 잘 알려져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15~16세기, 결국은 티무르 시기의 중앙아시아 역사를 서술해 놓은 책이다. 이 책의 차가타이 투르크어 원본을 본 적은 당연히 없지만, 이 책의 영역본과 중역본은 본 적이 있다. 역본이 이렇게 나왔을 정도라면, 가치가 있는 사료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어쨌든,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 활발한 문화교류가 이렇게 문자의 측면에서도 드러난다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 더욱 범위를 넓히면, 몽골제국 시기부터 시작하여 위구르 문자에 기원을 둔 몽골문, 만주문과 아랍 문자에 기원을 둔 아랍문, 페르시아문, 차가타이 문, 그리고 티베트 지역의 문자인 티베트문과 거기에 기원을 둔 파스파 문도 있다. 아마 이보다 더욱 다양한 문자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차가타이 투르크문은 차가타이 칸국의 성격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음과 동시에 몽골제국(차가타이 칸국) 시기 이후의 중앙아시아 및 현재의 신강 위구르 지역은 확실히 중국보다는 그 서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청대 강희제와 건륭제의 티베트, 준가르 정벌로 인해서 혼란이 생겼고, 그 혼란이 사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차가타이 문과 거기서 기원하고 있던 현대 위구르 문자를 썼고 또 쓰고 있는 사람들은 중국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문자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