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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밀의 잃어버린 왕궤(王軌)를 찾아서

작성자러브인|작성시간21.02.14|조회수378 목록 댓글 0

타밀의 잃어버린 왕궤(王軌)를 찾아서

 

1.시리즈를 시작하며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으며 우리말은 어떻게 형성됐는가? 지금까지 학계에선 우리 민족은 북방 유목민출신이며 언어도 거기서 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하지만 지난 2004년 단국대 생물학과 김욱 교수연구팀은 미토콘드리아 DNA형을 분석한 결과 55%에서 60%가량이 북방의 몽골족 등 북방 유목인의 유전자 형을 보였고 40%가량은 동남아시아 등 남방 사람들의 것과 같은 유전자형을 지니고 있다고 밝혀냈다. 그렇다면 남방에선 언제, 어떻게 들어왔을까? 이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가야의 초대왕비 허왕후가 인도에서 건너왔다는 기록에서 볼 때 2천 년 전에 이미 인도와의 해상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 후 고려사와 조선사에선 인도보다 더 멀리 떨어진 아랍 상인들이 도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필자는 허왕후가 기원전 수 천 년 전에 인더스문명을 일으킨 드라비다족의 최대 일파인 타밀족 출신으로 보고 있다. 백인인 아리안족의 침략으로 인도 남부로 쫓겨 내려 온 드라비다족은 타밀어, 텔루구어, 칸나다어, 말라얄람어 등 드라비다어를 구사한다. 남인도 동해안에 살고 있는 타밀인들이 동남아시아와 중국남부를 휘젓고 다니면서 마침내 한국 및 일본과도 교류했다는 증거는 한국어와 일본어 형성에 스며든 타밀어의 영향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 고종의 외교고문이자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는 1905년 ‘한국어와 인도 드라비다어의 비교 문법’이라는 저서에서 “두 언어가 유사한 것은 한반도에 정착한 선주민이 최소한 일부 지역이라도 남방에서부터 이주해왔음을 입증해주는 누적된 증거의 고리” 라고 주장했다.

 

강길운(姜吉云) 수원대교수도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1990년)에서 드라비다어와 우리말이 무려 1천여 개 어휘가 같다면서 드라비다족이 한반도에 이주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원로 언어학자 오노 수수무(大野晉, 86세) 학습원대학 교수는 ‘일본어와 타밀어’(2000년) ‘야요이 문명과 남인도’(2004년)등 일련의 역작을 통해 타밀인들이 기원전 수세기에 이미 일본열도에 집단 거주했다고 강조했다. 필자는 이를 확인, 추적하기 위해 30여 만 명으로 추산되는 토론토 거주 타밀인들 가운데 교수, 교사, 힌두교 성직자, 타밀인 협회 간부 등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면서 언어와 습관 등에서 우리와 유사한 것이 적지 않음을 발견했다.

 

한국과 일본 고대사에 대한 신선한 충격을 던질 새로운 발굴기사를 7차에 걸친 시리즈로 소개한다.

 

언론인 김정남 (한국타밀연구회 회장)

 

글 싣는 순서

 

1. 시리즈를 시작하며

2. 한국. 타밀 언어 및 전통민속놀이의 유사성

3. 허왕후는 인도 타밀출신.

4. 신라 4대왕 석탈해도 타밀출신이다

5. 박혁거세는 타밀인들이 양육했다.

6. 일본 최초의 여왕은 가야인

7. '아리랑'은 타밀인의 자장가에서 유래했다.

 

2. 언어 및 전통민속놀이의 유사성

 

우리와 타밀간의 유사성은 언어및 전통민속놀이 등에서 상당수가 발견됐다.

 

첫째, 현대 타밀어에서 우리말과 똑같은 말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아빠(아빠), 암마(엄마), 안니(언니)","난(나), 니(니)"""니, 인거바!(니, 이거 봐!)""니, 인거 와!(니, 이리 와!)", "난, 우람(난, 우람하다)""난, 닝갈비다 우람(난, 니보다 우람하다)""난, 비루뿜(난, 빌다)""바나깜(반갑다)" , 난, 서울꾸완담(난, 서울로 왔다)" "모땅(몽땅)", "빨(이빨), 무크(코), 깐(눈깔), 코풀(배꼽), 궁디궁덩이)"등 거의 똑같은 단어와 어귀들이 적지 않다.

 

둘째, 농업용어에 대한 두 언어가 너무나 똑같다.

우리말의 비단, 삼, 길쌈, 벼, 풀 등은 고대 타밀어와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경악할 정도로 너무나 똑같은 농경사회의 주요 명칭들을 다음의 비교표로 정리했다.

 

세째, 농경사회에서 발생한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의 형태와 명칭이 타밀의 그것과 일치한다.

새해 첫 날 우리들이 즐기는 윷놀이, 제기놀이(또는 제기차기), 쥐불놀이, 팽이놀이 등 민속놀이도 당시 타밀어로 각각 '윷노리(Yuddh, Yuth Nori)' '제기노리(Jegi Nori)', '추불 노리(Chupul Nori)' ' 팡이 노리(Pamgi Nori)'로 불리며 그 형태도 완전히 똑같다. '놀이'는 고대 타밀어로 '노리(Noori), 또는 노루(Nooru)'로 불렸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빌햐야들(Vilaiyattu)'로 불리고 있다. 다음의 비교표를 보면 타밀인들이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바로 이웃 사람으로 느껴진다.

 

네째, 타밀인들이 수천년동안 믿어온 힌두교와 관련된 것들이 우리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崔致遠)의 <석리정전(釋利貞傳)>에서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 한 바 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이진아시왕의 별칭 )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김수로왕의 별칭) 두 사람을 낳았다.“라고 되어 있는 데 이들 모두 힌두교와 관련 있다.

 

힌두교의 주요신 시바(Shiva),부인 파르바티(Parvati) , 두 아들 가네쉬(Ganesh)와 무루간(Murugan)을 각각 고대 타밀어로 '이비가지(Ibigaji)', '정견(Chongyon)','뇌질주일(Noejil Juil)', '뇌질청예(Nojil Chongye)'라고 불렀다.

 

이 귀절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펴낸 《동국여지승람》의 증보 개정판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최치원의 <석리정전>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타밀인들이 한반도까지 도달했던 또 다른 증거는 벼농사, 난생신화,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巨石文化)등이 말해주고 있다. 한국 고고학계의 원로이신 한양대의 김병모(金秉模) 교수에따르면 벼농사, 난생신화,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巨石文化)등의 지리적 분포가 인도-동남아시아-한반도 남동부 해안지역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인도 문화의 영향을 시사했다.

 

가야의 초대왕 김수로왕를 비롯하여 박혁거세와 석탈해등 신라 초기의 왕들의 난생설(卵生說)과 남해안과 동해안 바닷가 부근에서 발견되는 고인돌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 남부및 스리랑카북부 해안지대에 거주하는 타밀인들은 기원전 수세기부터 서쪽으론 로마제국까지, 동으로는 동남아시아와 중국남부까지 활발한 해양진출을 하다가 대만 북쪽으로 흐르는 흑조(黑潮) 난류를 타고 북상, 급기야 한반도까지 도달한 것이다.

 

3. 가야 초대 왕비 허왕후는 타밀출신

 

허황후 초상과 파사석탑

 

지난 2002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그 밑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 등을 비롯한 600여만 명이나 되는 한국 최대의 성씨인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들로 구성된 가락중앙종친회는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Ayodhya)에 가야 초대 왕비 허왕후의 탄생기념비를 세웠다. 이는 배를 타고 서기 48년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허황옥(許黃玉, 32~189)이 “나는 인도 아유타국(阿喩陀國) 출신의 공주”(삼국유사)라고 주장함에 따라 그녀의 고향을 아유타와 발음이 비슷한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인도에 ‘아요디야’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여러 개 더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또 다른 아요디야는 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수백 개가 되는 타밀어를 쓰는 인도 남동부 타밀 나두주(州)의 주도 첸나이(영어 이름 마드라스) 동쪽 바닷가 마을 아요디야 쿠빰이다. 또 타밀인들이 대거 거주하는 스리랑카 북부에는 기원전 아요디야 왕국이 있었다.

 

힌두교 국가 인도와 인접한 회교도 나라인 방글라데시에서도 힌두교 마을 아요디야(현지의 뱅골어 발음은 아조다)라는 지명이 있는 등 인도 및 주변 국가에는 아요디야라는 이름이 여러 개 존재한다. 따라서 필자는 허왕후의 고향이 인도 북부가 아니라 인도 남부및 스리랑카 북부의 아요디야일 것으로 보는 데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는 히말라야산맥 아래 갠지스강 중류에 위치한다.

허황옥이 배를 타고 동아시아로 향하기 위해선 무려 1000㎞나 되는 강줄기를 따라 갠지스강 하류의 인도 북동부 캘거타까지 와서 벵골만의 바닷길로 나서야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출발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집채만한 파도가 금방이라도 배를 집어 삼킬 기세로 달려들기 시작해”허황옥은 출발지로 되돌아가 부친을 만난다.

 

만약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야에서 출발했다면 갠지스강의 물줄기를 역류시켜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약 2000년 전의 항해 기술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집채 만한 파도’도 바다에서나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허왕후가 서기 48년 인도 남동부 바닷가 마을 아요디야 쿠빰이나 스리랑카 북북 아요디야 왕국의 해변가에서 배를 타고 동아시아를 향해 출발했다가 풍랑을 만나 되돌아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

 

둘째, 허왕후가 풍랑을 막고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부친으로부터 받은 파사석탑(婆娑石塔) 문제도 있다.

약간 붉은빛의 반문이 있는 높이가 120㎝ 정도밖에 안되는 축소형 돌탑인데, 이 파사석이 인도의 내륙지방이 아니라 동부 바닷가 지역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이다. 허왕후 후손으로 김해 금강병원 원장이자 배달문화연구회장인 허명철 박사는 필자와 전화 인터뷰에서 “파사석은 우리나라에서 결코 발견되지 않고 인도 동부 해안 벵골만 동쪽의 안다만군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돌”이라면서 “이 돌이 바닷가가 아닌 인도 내륙 아요디야의 허황옥 손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부친이 왕의 지위에서 특별히 입수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세째로, 타밀인들은 부계중심의 북부 아리안 인도인과는 달리 어머니의 성을 부여하는 등 모계사회였다.

허왕후가 10명의 아들 가운데 2명에게 자신의 성인 허씨를 부여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모계 성을 탄생시킨 것도 타밀 전통의 모계사회와 일맥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신라 4대왕 석탈해도 타밀출신이다

 

신라 제4대왕 석탈해(昔脫解, 재임 서기 57~80년)가 자신의 출신지라고 밝힌

다파나국(多婆那國) 또는 용성국(龍城國)은 어디인가? 필자는 가야의 허왕후와 마찬가지로 석탈해도 타밀출신이며 그의 다파나국은 기원전 타밀인들이 세운 촐라왕국 (Chola Kingdom)이라고 보는 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석탈해는 자신이 “숯과 숯돌을 사용하는 대장장이 집안”이라고 밝혔는데 석탈해의 성(姓)인 ‘석(Sok)’은 당시 타밀어로 ‘대장장이’를 뜻하는 ‘석갈린감(Sokalingam)’의 줄인 말로 성과 집안 직업이 그대로 일치한다.

 

‘석갈린감’ ‘석’ ‘석가(Soka)’등은 영어의 Blacksmith, Goldsmith나 Smith처럼 대장장이 집안의 이름으로 통용됐으며 지금도 타밀인의 남자이름에 남아 있다. 또 ‘탈해(Talhe)’는 타밀어로 ‘머리, 우두머리, 꼭대기’를 의미하는 ‘탈에(Tale)’나 ‘탈아이(Talai)’와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석탈해’라는 이름은 타밀어로 ‘대장장이 우두머리’를 가리켜 그가 바다 건너 한반도에 함께 들어온 대장장이의 지도자임을 이름에서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석탈해가 ‘대장간 도구’를 ‘단야구’(鍛冶具)라고 불렀는데 당시 타밀어의 단야구(Dhanyaku)와 그 발음 및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약 2000년 전 당시 타밀인이 세운 촐라왕국(Chola Kingdom) 등 인도 남부지역은 당대 세계 최고 품질인 우츠(Wootz)강철의 원산지인 철의 선진국으로 동서양에 철을 수출하던 ‘철의 실크로드’ 중심지였다. 석탈해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초기철기시대에 머물러 있던 한반도에 칼이나 철제 농기구 등 인도 남부의 강력한 선진 철기문화를 갖고 이주해 기존 토착세력에 맞서 신라의 왕권에 참여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잡게 된 것이다.

 

둘째로,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하는 또 다른 단어는 석탈해의 제안에 의해 제3대 유리(儒理)왕부터 쓴 ‘니사금’(Nisagum)이라는, 왕을 뜻하는 용어이다.

 

셋째로, 석탈해가 자신의 부친을 다파나국의 함달파(含達婆)왕, 줄여서 함달(含達)왕이라고 밝히고 있는 데 함달파(함달)는 타밀인이 가장 숭배하는 신 ‘한다파(Handappa)’, 줄여서 ‘한단(Handan)’과 거의 일치한다.

 

‘한다파’는 힌두교 3대신의 하나인 시바(Shiva)의 둘째 아들이며 인도 북부 아리안이 별로 중요시하지 않고 남부 타밀인만 으뜸으로 섬기는 신으로 남성 이름에도 자주 등장한다. 아울러 ‘한다파’는 당시 타밀어로 ‘아버지’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석탈해가 자신의 아버지를 타밀인이 가장 존경하는 신 ‘한다파’의 한자 표기로 함달파왕, 또는 함달왕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한다파’는 최근 무루간(Murugan)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넷째, 서기 8년 신라 2대 남해(南解)왕의 사위가 된 석탈해는 2년 뒤 국무총리 격인 대보(大輔)라는 중책을 맡았는데 당시 타밀 나라에선 왕의 신하 가운데 측근을 뜻하는 ‘데보(Devo)’와 일치한다.

 

‘데보’는 남자신(God)을 뜻하는 ‘데반(Devan)’과 여자 신(Goddess)및 왕비(queen)을 뜻하는 ‘데비(Devi)’와 같은 뿌리로 ‘신의 다음 자리’(next to God)’와 ‘막강한 사람(a powerful man)이라는 2가지 뜻을 갖고 있다. 당시 왕은 신처럼 받들어졌기에 ‘신의 다음자리’와 ‘막강한 시람’이라는 2가지 뜻을 갖는 ‘데보(Devo)’가 바로 왕 다음의 권력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대보(大輔)자리에 석탈해가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오른 것은 그가 타밀 나라 출신임을 시사한다.

 

다섯째로 주목되는 것은 석탈해가 한반도에 사상 처음으로 도입한 동물 뿔로 만든 술잔인 각배(角杯)가 고구려나 백제에선 발견되지 않고 오직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만 발굴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고고역사학계에선 시베리아나 몽골 등의 북방 기마 유목민이 사용했던 뿔잔이 이 두 나라에만 전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북방의 각배가 어떻게 지리적으로 근접한 고구려나 백제를 건너뛰어 한반도 동남쪽 신라와 기야에만 전해질 수 있겠는가. 이 의문은 신라와 가야의 각배가 북방이 아니라 남방의 바닷길을 통 전해진 것으로 보면 쉽게 풀린다.

 

각배는 그리스,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 지중해 및 중근동 고대국가에서 발생했는데 이들 나라와 기원전부터 이미 해상무역을 활발히 했던 타밀인의 인도 남부에서도 흔히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타밀인이 신라와 가야, 일본에 각배를 소개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훨씬 더 타당하다.

 

각배를 타밀어로 쿠디꿈 콤부(Kudikkum Combu)라고 부르는데 타밀 출신인 석탈해와 허왕후가 각각 신라와 가야에 이를 소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석탈해의 출신국 다파나국(多婆那國) 또는 용성국(龍城國)은 과연 어디인가를 추적해 보자.

 

다파나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타밀어로 태양을 뜻하는 다파나(Tapana) 또는 다파난(Tapanan)과 일치해 ‘다파나국’, 즉 ‘태양국(太陽國)’으로 당시 타밀인 나라 촐라 왕국의 별명이다. 아울러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용성국(龍城國)의 용성(龍城)은 당시 촐라 왕국의 도시 가운데 대장간과 철기제작으로 잘 알려진 항구도시 나가파티남(Nagappattinam)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타밀어로 나가(Naga)는 본래 ‘코브라’를 뜻하지만 힌두교도에겐 코브라가 용으로 전화되어 숭배대상이 됐기 때문에 ‘용’으로도 불리며 파티남(pattinam)은 ‘도시’를 뜻해 ‘나가파티남’은 ‘용성’(City of Dragon)을 의미한다. 따라서 석탈해가 철기생산 및 해상무역으로 번성했던 국제도시 나가파티남, 즉 용성이 소재했던 촐라 왕국을 용성국으로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5. 타밀인들이 박혁거세(朴赫居世) 양육했다

 

지난해 10월말 경부고속철도가 지나가는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구간에서 신라 초대왕 박혁거세(朴赫居世, BC 69~AD 4)를 키웠던 진한(辰韓) 6촌장들의 사로육촌(斯盧 六村)중 고허촌(高墟村)의 유적이 대량 발굴되면서 이들의 정체규명에 대한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알에서 태어나 왕궁에서 키워지다가 자력으로 만주지역에 고구려를 세우고, 가야의 시조 김수로(金首露)왕은 알에 태어난 지 반 나절 만에 성인이 돼 보름 지나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모든 박(朴)씨의 시조인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 사로육촌의 6촌장들에 의해 13년간 키워지고 나서 신라의 초대 왕으로 추대된다. 필자는 가야 초대 왕비 허왕후(許王后)및 신라 제4대 석탈해(昔脫解)왕의 설화 속에 언어적 유사성 및 해양교류 등을 추적한 결과, 이들이 인도 남부의 타밀 출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박혁거세의 설화에 나오는 주요 명칭들이 당시 타밀어와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박혁거세의 대부(代父)격인 6촌장들이 타밀 출신이라 자신들의 언어와 풍습을 우리에게 그대로 소개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당시 타밀어에서 '자력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으로 왕에 오른 운 좋은 왕' 또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왕'을 지칭하여 '박히야거세(Pakkiyakose)' 또는 '박히야거사이(Pakkiyakosai)'라고 불렀는데 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 바로 '박혁거세(朴赫居世) '이다.

 

6촌장들이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박처럼 둥근 알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은 '박(朴)', "세상을 밝게 한다" 하여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라고 한자어 작명을 한 것이다.

 

인도가 원산지인 '박'은 당시 타밀어와 우리말이 아주 똑 같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수라이카이(Suraikai)라고 불리고 있다. 또 박혁거세에게 붙인 '왕'의 명칭 거사간(居西干)도 당시 타밀어 '거사간(kosagan)'과 그 발음 및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아울러 6촌장들의 이름 또한 당시 타밀인들의 이름과 유사하다.

 

박혁거세알을 처음으로 발견한 돌산 고허촌(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는 타밀어로 '훌륭한 지도자'(Good Leader)를 뜻하는 Sobolthurai( 소벌두라이)와 거의 같다. 알천 양산촌(楊山村) 의 알평(謁平)는 Aryappan(아리야판)과, 자산 진지촌(珍支村) 의 지백호(智伯虎) 는 Chippaiko(치빠이코)와, 무산 대수촌(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는 Kurema (구레마)와, 금산 가리촌(加利村)의 지타(祗陀)는 Cheetha(치타)와, 명활산 고야촌(高耶村) 의 호진(虎珍) 은 Hochin(호친)과 각각 일치한다.

 

두번째로, 박혁거세의 탄생지 근처에 있는 우물 ' 나정(蘿井)'은 타밀어로 "파헤친 도랑이나 이랑"을 뜻하는 '나중'(nazung)과 거의 일치한다.

 

타밀어의 나주쿠(nazukku)는 "땅을 파헤쳐 이랑이나 도랑을 만들다"(=make a shallow furrow)라는 뜻의 능동형 동사인데 그 수동형동사 '나중구(nazungku)'는 '이랑이나 도랑이 만들어지다'(= be ploughed with shallow furrows) 라는 뜻이다. 여기서 "파헤친 도랑이나 이랑"이라는 뜻의 명사 '나중'(nazung)이 바로 박혁거세의 우물 '나정'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5년 8월 문화재청은 깊은 도랑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 박혁거세의 탄강전설(誕降傳說)이 깃든 경주 시내 우물 나정을 발굴한 성과를 공개한 현장 설명회를 가졌다.

 

발굴팀은 현장 조사에서 확인된 나정의 정중앙 8각형 건물지(한 변 8m. 지름 약 20m) 주변에서 이 8각형 건물지 보다 앞서 축조되었음이 분명한 도랑, 즉 구거(溝渠) 같은 대형 구상(溝狀) 유적을 확인했다. 이로써 박혁거세가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역사상 존재했던 인물로 자리매김된 것이라고 문화재청측은 설명했다.

 

세째, 박혁거세의 또 다른 이름인 '불구내(弗矩內)'는 현재 인도의 타밀 나두주(州) 땅에 있었던 당시 타밀인들의 촐라 왕국(Chola Kingdom) 바닷가 마을 '부르구나이(Purugunai)'와 거의 일치한다.

 

필자는 신라 4대왕 석탈해의 고향이 동서양 무역으로 크게 흥했던 고대 국제도시 나가파티남(Nagapattinam ) 이라고 주장했는 데 이 도시 남쪽으로 약 8 km 떨어진 곳에 부르구나이가 있다.

 

혁거세의 후견인 6촌장들이 이 곳을 출발, 동아시아를 향해 떠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데 자신들의 고향이름을 박혁거세의 별명으로 붙여 막강한 영향력의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부르구나이는 현재 벨란간니(Velankanni ) 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카톨릭 교회 '안네 벨란간니(Annai Velankanni )'가 들어서 있는 유명명소가 됐다.

 

넷째, 고구려의 주몽이나 가야의 김수로왕과 마찬가지로 박혁거세도 알에서 태어나지만 혁거세의 알이 박에 견주어 졌다는 점이 다르다. 박은 우리말과 당시 타밀어가 그 발음과 뜻에서 완전히 똑같다.

 

박은 현대 타밀어로는 수라이키이(Suraikai)라고 불리고 있다. 박은 인도나 아프리카등 열대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 인도에서 건너온 6촌장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 필수품중의 하나인 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타밀인들은 일년내내 무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해서는 박을 파낸 표주박등으로 만든 물통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목을 추기곤 했었다. 이러한 물통은 타밀어로 단니 쿠담(Thaneer Kudam)이라고 불리며 호리병박으로 만든 작은 물통은 수라이 쿠담(Surai Kudam), 호박으로 만든 큰 물통은 푸사니 쿠담(Pusani Kudam)이라고 각각 칭한다.

 

경주 괘릉 앞에 있는 무인석상(타밀인?)

 

다섯째, 신라이전의 나라이름인 '서나벌(徐那伐)'은 당시 산스크리트어및 고대 타밀어로 황금(gold)을 뜻하는 '서나(Sona)'와 벌판(=field)을 의미하는 '벌' 또는 '펄'(Pol)'이 합쳐져 '황금밭'(Gold Field)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말에서 '벌'의 옛말이나 거센말은 '펄'인데 고대 타밀어와 마찬가지로 "매우 넓고 평평한 땅"을 의미한다. 아울러 '서라벌(徐羅伐)'도 '아름다운(=nice)'을 뜻하는 '서라(Sora)'가 '벌(Pol)'과 합쳐져 '아름다운 들판'을 뜻해 새 나라의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박혁거세의 비(妃) 알영(閼英, BC 53 ~ ?)부인은 아리영(娥利英)이라고도 불리는 데 타밀 여성이름 아리얌( Ariyam )과 거의 일치한다.

 

아리얌은 아리야말라(Ariyamala)의 줄인 이름으로기원전 타밀 왕국역사에 나오는 캇타바라얀( Kaththabarayan)왕의부인이름인데 이를 신라 초대왕비 이름으로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알영부인이 계룡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났을 때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이 생겼다는

내용도 인도 힌두교 신화에서 지혜와 총명의 여신(Goddess of Learning and Wisdom) 사라스와티 (Saraswati)가 백조(swan)의 부리를 갖고 태어났다는 설화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결국 알영부인은 용모와 인품이 뛰어나 백성들에게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릴 정도로 추앙받았다는 것은 힌두교를 믿는 인도 타밀인들이 사라스와티를 숭배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일곱째, 박혁거세왕은 재임 17년(기원전 40년) 알영부인을 대동, 6부를 순시하며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농토를 충분히 이용하도록 하였다(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즉, 삼과 누에로부터 얻은 실로 길쌈해서 삼베옷과 비단옷등을 해입었고 벼농사를 비롯한 곡식생산에 주력했다는 이야기다. 또 제3대 유리왕은 추석때 길쌈놀이를 실시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우리말의 비단, 삼, 길쌈, 벼, 풀등은 고대 타밀어와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현대 타밀어에서도 우리말과 똑같은 말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아빠(아빠), 암마(엄마), 안니(언니)","난(나), 니(니)"""니, 인거바!(니, 이거 봐!)""니, 인거 와!(니, 이리 와!)", "모땅 다(몽땅 다오)" "난, 우람(난, 우람하다)""난, 닝갈비다 우람(난, 니보다 우람하다)""난, 비루뿜(난, 빌다)", "바나깜(반갑다)" "난,서울꾸 완담(난, 서울로 왔다)" " 모땅(몽땅)" "빨(이빨), 무크(코), 깐(눈깔), 코풀(배꼽), 궁디(궁덩이)"등 거의 똑같은 단어와 어귀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이는 박혁거세부부의 대부격인 6촌장들이 인도 타밀의 것을 한반도에 소개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타밀인들이 한반도까지 도달했던 또 다른 증거는 박혁거세와 석탈해등 신라 초기의 왕들의 난생설(卵生說)과 경주(慶州)와 포항(浦項)등 신라지역에서 대거 발견되는 고인돌등에서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경주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가? 인도 남부 해안지대의 타밀인들은 기원전 수세기부터 서쪽으론 로마제국까지, 동으로는 동남아시아와 중국까지 활발한 해양진출을 하다가 대만 북쪽으로 흐르는 흑조(黑潮) 난류를 타고 북상, 급기야 한반도까지 도달한 것이다. 타밀인들은 사로 6촌들가운데 동해안과 접하고 있는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에 도착한 뒤 내륙으로 들어가 경주의 사로 6촌을 개척,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타(祗陀)가 통치한 영일만(迎日灣)부근 금산가리촌은 현재 동해안과 접하고 있는 경주시 감포읍과 양남면, 양북면 등 3개지역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 또,필자가 인도 타밀출신으로 간주하는 신라 제4대왕 석탈해(昔脫解)의 알이 담긴 꿰짝도 동해바다에 표류하다가 동해안의 아진포(阿珍浦)에 당도하는 데 이 곳이 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아진포라고 석씨(昔氏)전국대종회가 밝히고 있어 이래저래 금산가리촌은 당시 인도 타밀인들의 도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라 제3대 유리왕은 서기 32년 육촌을 육부(六部)로 개편하고 각 부에 성(姓)씨를 하사함으로써 6촌의 각 촌장들은 자동적으로 각 성의 시조로 모셔지게 된다.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최(崔)씨의, 알평(謁平)은 경주 이(李)씨의, 구례마(俱禮馬:仇禮馬)는 손(孫)씨의, 지백호(智伯虎)는 정(鄭)씨의, 지타(祗陀)는 배(裵)씨의, 호진(虎珍)은 설(薛)씨의 조상이 된다.

 

6. 일본 최초의 여왕은 가야인

 

경북 고령읍 지산리에 있는 가야 고분군.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 설화와 스리랑카 비자야왕 설화 ‘이렇게 닮았다’ 사마태(邪馬台, 일본어발음은 ‘야마타이’) 비미호, 또는 비미크 (卑彌呼, 일본어 발음은 ‘히미코’) 일여(壹與, 일본어 발음은 ‘이요’) 임나(任那)(일본어 말음은 ‘미마나(彌摩那)’ ) 등 한국의 가야(伽倻)나 일본의 사마태국(邪馬台國)등 한일(韓日) 고대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명과 지명이 일본어 발음은 물론 우리말 발음과 똑같이 나타나는 나라가 있다. 바로 기원전 6세기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비자야(Vijaya, 재임 기원전 543~504 )에 의해 싱할리 왕국을 수립한 스리랑카다.

 

비자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승리(victory) 또는 정복(conquest)의 뜻에서 정복자(Conquerer)로 발전한 비자야 왕의 이야기는 아시아권 정복개국설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힌다. 한반도에서 수만리 멀리 떨어진 스리랑카의 역사와 지리에서도 거의 똑같은 내용이 있다. 기원전 6세기 스리랑카 최초 왕 비자야 설화와 수백년 뒤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金首露, 42~199)왕 설화를 비교하면 그 수수께끼가 풀린다. 비자야 왕의 설화는 다음과 같다.

 

“인도 대륙 북동부가 고향인 한 공주가 사자와 사랑에 빠져 아들 비자야를 낳았다. 이 왕자는 행실이 불량하다고 추방당한다. 비자야는 인도땅을 떠나 추종자 700명과 함께 거북 모양의 선박에 올라타고 바다 건너 스리랑카 서부해안에 도착한다.

 

기원전 543년 비자야는 추종자에 의해 스리랑카 최초의 왕으로 추대되고 인도 최남부에 있는 타밀인의 판디야 왕국(Pandya Kingdom)에 왕비감을 청원, 타밀 공주 야쇼다라(Yasho dhara)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추종자도 타밀인 하녀와 결혼한다.”

 

김수로왕의 설화는 주지하다시피 “기원 42년 가야지역 9부족의 추장인 9간(干)이하 수백명이 김해 구지봉(龜旨峰)에 모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하자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金盒)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나왔다.

 

반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은 모두 사람으로 변했는데 김수로는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이 돼 ‘수로(首露)’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그 달 보름에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48년 인도에서 바다 건너 온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삼았다.

 

두 설화를 비교하면 비자야 왕과 김수로왕 모두 거북과 관련있고 새 땅에 도래, 첫 왕국을 열었으며 추종자 수백명의 추대에 의해 초대 왕위에 올랐고 바다 건너 인도 땅에서 (타밀인) 왕비를 맞이한다는 점에 있어서 두 설화는 아주 비슷하다. 정복개국설화의 원형인 비자야 왕 이야기는 구전으로 동남아시아에 널리 펴졌으며 종국에는 한반도까지 영향을 끼쳐 수로왕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가야인이 이를 모방해 ‘대위법’에 의해 수로왕 설화 형성에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수로왕(42~199) 장남인 금관가야 제2대 거등왕(199∼253) 사이, 즉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중반에 걸쳐 재임했던 일본 최초의 여왕 ‘비미호(卑彌呼)’는 비자야 왕 시절 국무총리를 의미하는 ‘비미호(Pimiho)’ 또는 ‘비미크’(Pimiku, 대부분의 언어에선 ‘ㅎ(h)’ 와 ‘ㅋ(k)’는 음성학적으로 호환 가능)와 일치한다. 또 그녀가 통치했던 ‘사마태 (邪馬台)’는 비자야 왕의 수도 탐바판니(Tambapanni)에 국무총리가 주도해 건설한 왕궁의 이름 ‘사마테(Samate), 또는 ‘사마타이(Samatai)’와 각각 일치한다.

 

아울러 비미호 여왕이 죽고 잠시 남자 왕이 재위한 뒤 등극하는 여왕 ‘일여’(壹與, 일본어 발음은 ‘이요’)도 비자야왕의 조카로 스리랑카 제2대왕이 된 판두바사(Panduwasa, 재위 504~474 B.C.)의 부인 이름 ‘일여(Ilyo)’왕비와 일치한다.

 

비자야 왕 이야기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나타나는 ‘비미호(비미크)’ ‘사마태’ ‘일여’ 등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중국의 ‘삼국지’ 기록에 나오는 명칭이 일본어발음이 아니라 우리말 발음과 똑같다는 것은 일본이 가야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있음을 시사한다.

 

‘사마태(邪馬台)’ 국의 한자 ‘邪’는 일본어 음독으로 ‘자’로, 훈독으론 ‘요코시마’로 읽으며 예외적으로 감기를 뜻하는 ‘風邪’만 ‘가제’로 읽는데 ‘야마’로 읽는 경우는 邪馬台뿐이다. 당시 당시 최고 하이테크였던 철 제련 능력과 토기 생산기술를 갖춘 가야는 중국과 일본 등에 철을 수출하면서 동시에 기동력있는 항해술로 한반도 남부 및 일본 열도를 아우르는 막강한 해상세력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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