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성과 페미니즘, 그 새로운 문화 정치학을 위하여
최성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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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파우스트가 근대적인 욕망의 형식들, 이를테면 발전과 진보에 대한 믿음 하에 끊임없이 옥망의 출구를 열어 놓고 생산성을 가동시키는 근대적 주체를 낳는다면 그레트헨은 여성성의 대표적 인인물로 희생과 정화의, 혹은 모성성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런데 지난 해 나는 파우스트를 다시 읽으면서 파우스트가 남성성을 혹은 권력을 상징하기에는 지나치게 우유부단하고 연약하며 메피스토펠레스가 악마적인 즉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을 상징하기에는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사를 구사하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 더욱 재미있는 부분으로 다가왔다. 즉 이 두 인물은 비중은 다르다 할지라도 근대적 생산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양가적인 특성을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레트헨이란 인물 또한 강인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랑 때문에 오빠에게 고통을 호소하고 감옥에 갇힌 채로 죽기를 바라는 양가적인 심리상태를 모두 갖고 있는 인물었던 것이다.
따라서 괴테가 [파우스트]의 마지막 장면에 그레트헨을 찬양하면서 "미칠 수 없는 것, 여기서 이루어지고 형언할 수 없는 것, 여기서 성취되었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라고 한 것은 단순히 그레트헨이 가진 전통적인 의미의 여성성을 찬양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레트핸란 인물이 함축하고 있는 일종의 성찰적 근대화 의식. 이를테면 근대적인 기획의 이면을 다시 반성적 이성으로 되짚고 이성과 비이성,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호한 혼성적인 측면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의 출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근대/반근대, 이성/비합리성의 대립적인 구도가 아니라 그 사선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반사적인 현상들과 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유의 변화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신화와 계몽 사이에 얽혀 있는 문화 정치학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그레트핸의 목소리는 단순한 구원의 의미가 아니라 혹은 억압되고 미분화된 자연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그레트헨 개별의 목소리로 즉 가부장제적이고 남성적인 파우스트에 의해서 억눌린 목소리가 아니라 복잡한 계몽의 비전 속에서 터져나온 또 하나의 역사적 사이렌이 된다는 것이다. 근대성 논의에 모호한 지점들, 혹은 복잡한 지점들을 강조하는 전략으로서 여성성의 의미를 다시 물을 수 있는 지점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레트헨이란 인물 자체가 여성성과 근대성과의 대타적인 개념이 아니라 근대성과 나란히, 아니 동시에 존재하는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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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산업, 소비주의, 근대 도시적인 것, 대중매체, 테크놀로지, 현상 같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남성적인 것이며 여기에 대해서 여성적인 것은 기술지배의 합리성밖에 존재하는 숨어들 장소로 여겨왔던 것이 사실이다. 소위 말하는 모태공간이라는 것 자체가, 혹은 자궁회귀적이라는 것 자체가 철저하게 이러한 기술지배의 합리성 밖에 혹은 이전에 존재하는 '안락하고 풍요로운 굴'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성 상징이란 바로 이렇게 자본주의의 타락을 경고하는 혹은 근대적인 미망에 반성적인 사유를 제공하는 것으로 구조화된 건물같은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러한 논리 자체의 이면에는 근대성이 거부하고 하고 있는 이미지나 사유의 틀 속에 여성성을 한정하고 역설적이게도 여성성 자체를 은폐하고 억압해 온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오히려 그러한 태도가 여성성에 상징 정치학(symbolic politics)이 되어 도식적인 성 정체학이나 규범적인 지형학을 양산할 가능성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19세기 작품들만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근대적인 것과 반근대적인 것,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 등의 구별이 확연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방식으로 그 관계를 다시 재구성하자 하는 흔적이 더 중요한 작품 내재적인 성격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판매자이자 상품이기도 한 창녀는 섹스의 상품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경제와 성욕,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 도구적인 것과 미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의 모호성을 나타내주는 지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성향은 근대도시의 오염, 질병, 사회적인 위계질서의 붕과와 더불어 감추어진 여성의 성욕을 표면화시킨 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계여성(machine-woman)의 경우가 이를 구체화시킨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지막으로 남은 구원의 여성이라는 일종의 여성 신화를 탈신비화 하는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기계로서의 여성은 여성을 기술적으로 지배하려는 가부장제적 욕망을 재확인하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으며 고분고분하게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여성 자동인형에 대한 환상과 인위적인 복제과정을 통한 모태없는 창조의 꿈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요소들은 단순히 보편적인 욕망의 재현이 아니라 특정한 문화와 시기의 성별 테크놀러지를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 테크놀로지 자체를 남근 중심주의(phallocentrism)에 길들여진 것으로 분석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조야한 여성주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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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은 여성의 이러한 성적 정체성의 모호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대표적인 영화다. 이 영화는 [델마와 루이스]류의 멜로적인 요소를, 혹은 지나치게 성 정체성에 집착하는 혐소한 여성성의 요소를 탈피하여 섬세하게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서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은 여성의 성 정체성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주의 영화들이 내걸고 있는 시위적인 모터와도 거리가 있으며 단순한 여성들의 사랑 이야기와도 다른 것이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오히려 권위적인 것, 혹은 분명한 것, 새련된 도시문화와 같은 것들 틈사이를 파고들어 치명상을 입히는 비권위적인 것, 불분명한 것, 은폐되어진 것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은행간부인 여자도 얼마든지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일탈된 사랑에 탐닉할 수 있는 것이며(마치 창녀와 같이) 최첨단 의술을 배운 산부인과 의사도 카드 점에 운명을 걸수 있고 아름다운 사랑만을 추구하는 동화작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 옆집에 이사 온 난장이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성들은 그 모호한 결렬의 지점들을 살아가는 자신들 나름대로의 방법들을 알고 있으며 그 모호성 자체를 삶의 중요한 지점으로 끌어 안는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과 심리적인 변화를 합리화시켜 자신 속에 내면화하지 않고 그 혼돈 자체를 생활의 일부로 치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물에 분산되는 자신의 실체를 낯설어 하면서, 놀라면서, 혼란스러워 하면서, 그저 주어진 일상에 몰입하면서 살아간다. 이 영화가 다른 페미니즘 영화와 차이가 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즉 극과 극의 지점을 설정하고 만날 수 없는 어떤 부분들의 점선을 돌아 결국 여성적인 신화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혹은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을 그대로 수용해가며 살아가는 인내하는 여성들, 모성성으로 회귀하여 구원의 이미지로 수렴되는 여성 이미지 조작의 프로그램과 이 영화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영화 [엘렌 브로코비치]도 이러한 시각의 연장에서 읽힐 수 있다. 약물오염이라는 문제와 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권력유착에 중심이 맞추어진 듯이 보이는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부분은 지배권력과 대치하고 있는 여성의 남성적인 힘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여성적인 성적 매력을 갖고 있는 마치 직업여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여성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지배문화적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지지 않고 다시 말하면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쉽게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오히려 여성임을 더욱 강조하면서 지배담론을 무너뜨려가는 그 행적에 있다. 섹시한 옷차림을 더욱 강조하면서, 자신이 세 자녀의 엄마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생계를 위해 돈을 벌고 남편과 맞지 않으면 얼마든지 헤어질 수 있는 여성. 그리고 그런 여성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대하는 것은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일 수 있으며 그 그릇된 시선이 인간을 얼마나 동물적인 관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 시종일관 섹시하게 드러난 그녀의 젖가슴은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에 싸여 있는 남성사회를 들쑤시는 건강한(?) 자극제가 된다. 그 젖가슴으로 진보와 발전의 논리에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사람들의 인권을 찾아준다.
여기에 남은 문제는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한 힘의 모호성이다. 지독히도 여성적인 부분들이 균열을 일으키면서 복잡한 변화의 양상, 차이들이 흩어져 공존하게 하는 내적인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대립 지점을 모호하게 흐리면서 근대적인 생산논리에 맞서 있는 여성의 모습은 그 자체가 대항문화적인 전략적인 지점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의 어떤 대립점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다층적인 의미를 양산하고 복잡하게 변형된 여성성의 이미지를 통해 사회가 앓고 있는 환부를 노회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전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근대성의 논의와 관련한 여성성의 문제는 이 지점에 대한 방법론적 성찰을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가부장적인 신화가 근대 이데올로기에 남긴 치욕과 오욕의 역사를 여성성이라는 또 다른 메스로 고스란히 오려 자기 살에 붙힐 가능성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적인 하위문화에 관심을 기울리는 것을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대단히 중요한 시각적인 전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특히 다양한 문화 제국주의, 문화적 다원주의, 복합문화주의가 슈퍼마켓 자유주의를 등에 없고 범람하는 지금과 같은 시점에서 근대성과 여성주의의 문제는 지배문화와 피지배문화 간에 존재하는 모호한 지점들, 혹은 혼성적인 특성을 공유하며 이질적인 문화 주체를 낳고 있는 부분들에 대한 관심을 더욱 집중 시켜야 한다. 그 모호성은 역설적이게도 남성과 여성의 성차를 분명히 하면서 여성성이 갖는 문화적인 전략적 코드를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차이를 분명히 하면서 차이를 지우는 그 이중적인 역할은 근대적인 것, 비근대적인 것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이에서 곪아 터져 생살이 돋아나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해서 벌어진 상처가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서로 다른 군력 위계질서 간의 상호작용과 잠재적인 모순을 부각시킴으로서 근대적 기능주의가 갖는 특정한 담론을 내파시킬 수 있는 정치적인 실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믿을 갖는 것 자체가 여성성 자체를 아무런 비판적 사유를 거치지 않고 텍스트 분석에 남발하는 그 오용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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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을 비롯한 역사철학에 대한 회의로 시작된 이 시대, 다시 여성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과연 어떠한 대답이 가능할까. 여성성은 혁명과 진보의 사이를 오가며 근대적인 역사 과정의 중심에 있었던 주체로서의 위상을 돈독히 해왔다고 대답해야 할까. 어쩌면 이러한 대답 조차 지금으로서는 성급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진보적인 이상 속에 있으면서도 '바깥의 사유'가 가능한 방법론적인 전략으로서 여성성의 문제를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획일적인 문화에 대한 경멸의 수사학, 혹은 서구 제국주의적인 역사와 소비문화에 길들여지기도 하고 빠져나오기도 하는 그 모호한 지점의 언술들을 물질적인 언술로 치환하는 것으로 나타나든 간에 상관없이 새로운 역사철학의 비판적인 힘을 다른 방식으로 다양하게 치환할 수 있는 문화 정치학의 가능성, 이를 타진하는 과정위에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주>
1) Christine Buci-Glucksmann, Catastrophic Utopia: The Feminine as Allegory of Morden, Representation, 1986, 14, pp.220-223.
2) 그러한 창녀의 이미지를 극대화킨 퍼포먼스의 한 예로 얼마전에 200분 동안 수십명의 남자와 공개 섹스를 한 옥스퍼드 대학 출신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인터넷 상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 시간 동안 전혀 힘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즐거웠다고 하였으며 그런 행위를 한 궁극적인 이유는 사회적으로 작용하는 성에 대한 정체성을 깨고 싶었다고 한 바 있다.
3) Donna Haraway, Simians, Cyborgs, and Women, New York:Routledge, 1991, 리타 펠스키, {근대성과 페미니즘}, 김영찬 외, 거름, 1998, p.48.
4) 리타 펠스키, 위의 책, p.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