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시____
용과 형식
김나영
수많은 쉼표로 만들어진 카페가 있다, 스타벅스를 지나서 커피빈을 지나서 이면지 같은 골목 사이에 숨어 있는 곳, 무명의 간판이 잘 보이지 않는 곳, 약속이 없어도 가는 곳, 내 마음의 보루가 되었다가 유배지가 되었다가 하는 곳, 가던 길 멈추게 만드는 곳, 스탬프 열 개를 찍으면 열 한 잔째 형식을 공짜로 주는 곳,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고 천천히 화첩을 넘기고 있으면 내가 없어지는 곳, 커피 잔의 온기와 커피의 쓴맛과 실내에 흐르는 음악과 그림 속의 선과 색감이 오감 속으로 스펀지처럼 스미는 곳, 없어진 나를 우연처럼 만나는 곳, 나를 둘러싼 모든 목적이 뿔뿔이 흩어지는 곳, 어느 날 갑자기 카페라는 형식으로 먼저 나를 이끌던 곳, 반 모금씩 아껴 먹어도 금방 줄어드는 커피에 그윽하게 담궜다가 오는 곳, 길을 잃고 싶을 때 쉼표처럼 도착하는 곳, 왜 갔는지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곳,
김나영 / 1998년 『예술세계』로 등단했으며 시집 『왼손의 쓸모』, 『수작』이 있다.
∥추천이유____
홀로 달리는 경기
김상숙
김나영은 생활 곳곳에서 시의 소재를 발견하는 시인이다. 시인의 예리한 시선이 닿은 대상은 그녀의 필터링(통찰)을 거쳐 차별화되어 섬세한 시안을 지닌 채 미지의(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바닥에 이를 때까지의 처절한 끈기는 상투적 인식과 일상적 의미를 뒤집어 심화시킨다.
“수많은 쉼표로 만들어진”으로 시작하는 「내용과 형식」의 첫 행을 보면 시인은 우선 커피를 무척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우후죽순 자라는 카페를 우연찮게 자주 보았을 것이다. 그곳은 내 마음이 우울하고 위태로울 때 나를 보듬어주는 “보루”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유배지가 될 수 있음을 선언한다. 그러나 “가던 길 멈추게” 하는 곳이 아니라 “멈추게” 만든다는 말은 유배의 억울함을 제공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수많은” 그곳에 있다고 슬쩍 밀어둔다.
약속이 매개가 되기도 하지만 약속 없이도 발걸음이 습관처럼 들어서는 그 곳, 테이크아웃으로 끌려나올 때까지 형식의 변천사를 휘돌아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는 커피콩은 허공의 내벽을 찢으며 쭉쭉 뻗어나간다. 그곳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만나는 진솔한 곳이기도 하다. 약속으로 두근거리는 곳이기도 하고 약속을 깨기 위한 비장한 곳. “스탬프 열개를 찍으면” 한 잔은 공짜! 들여다보면 공짜라는 형식은 이미 마셔버린 커피 열 잔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계산의 형식을 거치는 공짜는 공짜가 아니다. 이런 형식과 내용에 끌려 다니는 시인은 이미 스타벅스, 커피빈을 쭈우쭉 들이키고 있는 도심의 한가운데이다.
커피 한잔으로 푹신해져서 “흐르는 음악이 선과 색감이 오감 속으로” 스미어 포개지는 나는 이 도시의 쉼표다. 쉼표를 간판에 건 카페다. 남의 말 따위엔 관심 없고 눈총 따윈 없는 기호다. 찾아간 목적도 없고 딱히 앉아있을 내용이 없는 곳, 왜 하필 이곳에서 길을 잃고 싶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카페라는 형식”에서 만나 뿔뿔이 흩어져 더 이상 어느 것도 목적이 되지 않을 때, 긴장감을 털어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찾아오고 싶은 그런 곳으로 미루어둔 것인지 모르겠다.
“반 모금씩 아껴 먹”으며 약속(외로움)을 담보로 후르륵거리고 있는 장소사용료, 비싼 브랜드 값을 지불해야 할 시인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쉬어가는 장소로서만 인식한다면 이곳의 카페는 시인이 집중하고 있는 카페가 아니다. 목적도 없이 왔다가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곳” 내용도 없는 그곳에 끼어든 시인과 체인의 체인을 감고 세력을 넓혀 가는 카페라는 형식에 스펀지처럼 빨려 들어가긴 했으나 사실 그곳이 쉼표로 만들어졌는지 단지 기호(구호)에 그치는 것인지 다시 곱씹어 보는 것이다. 대로변을 장악하고 있는 괴물 같기도 하고 안락한 쉼표 같기도 한 그곳에 스며들어 살아가고 있는 시인은 시인을 비롯한 도시민들의 복잡한 일상과 그로인한 허무를 성찰의 미학으로 그려내고 있다.
김나영 시인의 말 중에 시쓰기를 마라톤(?)에 비유하며 여럿이 달리지만 결국 홀로 달리는 경기, 남들이 뭐라든 자신이 연마한 호흡법으로 자신이 터득한 지구력으로 전 생애를 밀면서 끝까지 가는 것. 독보적 어법으로 얼마나 깊이 있게 꾸준하게 치열하게 밀고 가는가. 대중의 박수가 없더라도 내가 만든 속도에 내가 심취하여 전 생애를 맡기고 갈 때, 나는 비로소 주인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김나영 시인을 추천하는 이유이다.
김상숙 / 시집 『강물 속에 그늘이 있다』, 『물렁물렁한 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