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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읽기

[동인의 추천시]신성한 숲 / 황인숙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18.09.03|조회수133 목록 댓글 0


신성한 숲

황인숙

1958년 서울 출생.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등 다수.

 

 

 

이 숲.

들벚나무와 사시나무

뿌리 사나운 아카시아와 싸리나무, 소나무

뜻밖에 만난 놀란, 한 그루의 향나무와

밟은 적도 긁힌 적도 무수한

덩굴나무와 가시나무.

본 적은 있으나 이름 모를 나무들과

보지 못한 나무들

보지 못할 나무들

이 숲.

꿈틀거리는 나무 사이로

두려움 없이 내가

지나갈 수 있을까?

나는 새처럼 가볍지도 않은데

이들은 내게 적의의 새를 날리지 않을까?

이 숲.

나무의 무리 가득한

안개로

깊어지고.





푸른 숲의 공기가 그립다

김정숙

1959년 김천 출생.

 

 

 

제목이 ‘신성한 숲’이다. “어떤 사냥꾼도 그처럼 많은 자기의 적에게 둘러싸인 적이 없었으리라”는 제사 아래 펼쳐지는 이 시가 내겐 또 하나의 숲이다. 시를 읽는다. 글자들 속을 걷는다. 그 곳은 시인이 발견하기 전에도 있었을, 수천 년의 침묵과 정적이 깃든 곳일까. 아무도 침범하지 않아서 태초처럼 고고한 곳일까.

거기, 들벚나무와 사시나무가 살고 있다. 들벚나무! 들벚나무를 본 적은 없다. 시인이 어떤 비유와 상징의 의미로 그 이름을 칭명했는지 잘 모른다. 시인의 마음에 가까이 가고 싶을 뿐 결코 내가 시인의 마음에 도달할 수는 없으리란 건 안다. 들벚나무를 만난 적이 없으므로 오히려 그 존재에 대해 더 자유롭게 상상한다. 상상할수록 나무는 궁금증을 일으키고 다채롭게 그 의미를 확장한다. 신성한 숲에 기거하는 들벚나무이다. 산벚나무도 돌벚나무도 아니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큰 키와 대범한 야인의 기질을 가진 어떤 상징일까. 개인적 편견일 수 있으나 독자로서 해석의 권리를 누리며 나무 한 그루를 기어코 손으로 짚고 넘어간다. 들벚나무와 함께 사는 사시나무는 또 어떤 나무일까, 사시나무는 어떤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존재일까.

이 시에 나오는 뿌리 사나운 아카시아와 싸리나무, 소나무에 대해서도 평소에 아는 시각을 떠나 지식과 정보를 염탐해 본다. 뿌리가 사나운, 이 비유는 또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강하게 세력을 뻗어가는 의미일까. 빗자루와 회초리의 쓰임새를 지닌 싸리나무,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 이런 나무들도 다른 나무와 다른 외형과 개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이름도 개성도 다른 여러 종류의 나무가 한 자리에 산다는 것. 신성함이란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향나무의 향기에 내가 깜짝 놀라자 향나무는 놀라는 나를 보고 더욱 놀라 진한 향기를 뿜어낸다. 누군가 밟은 흔적을 보면 마음이 아픈 나무, 긁힌 적이 무수히 많은 덩굴나무와 가시나무는 쳐다볼수록 이제껏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본 적이 있으나 구태여 이름을 알아본 적 없이 무심히 지나쳤던 나무들도 숲속엔 많다. 너무 멀고 높은 곳에 있거나 내 발걸음이 닿지 않아 결코 볼 수 없는 나무도 있을 그런 숲, 한 발자국씩 다가갈수록 살아 있는 나무들의 꿈틀거림을 느낀다. 아무리 소리를 작게 내려 해도 고요함을 깨뜨리는 내 발자국 소리는 쿵쿵 울린다. 그들만의 평화를 깨뜨리는 듯해서 미안하고 탁한 먼지에 찌든 내가 부끄러워진다. 숨을 내쉴 때마다 나무의 푸른 호흡 속으로 내 회색의 숨결이 흘러든다. 이러한 나는 그들에게 침입자이거나 이방인이 아닐까.

나는 수많은 나무들의 군중 속으로 한 발 한 발 빠져든다. 저마다 색다른 나무의 격을 지닌 숲속, 나무들에게 말을 건네고 낱낱의 면모를 알아간다. 나무들의 숨소리와 호흡이 어우러진 안개가 깊고 자욱하다. 그 속으로 가라앉으며 길을 잃고 드디어 숲의 어느 지점에선가 발걸음을 멈춘다. 나무처럼 한 자리에 머무른다. 서 있는 자리를 지킨다는 한계성에서 하늘을 지향하는 가능성의 자세를 본다. 나무들의 몸짓으로부터 나무들의 삶을 배운다.

다시 나무에 대한 황인숙 시인의 다른 시 한 구절도 보자.

 

진정한 나무의

이마에서 뛰는 심장의

혈기방장한 이파리들!

― 「복받을진저, 진정한 나무의」 부분

 

나는 나무와 새의 시인으로 알려진 황인숙 시인의 이 시도 좋아한다. 숲은 그렇게 혈기방장한 나무들의 심장이 뛰고 있는 곳이다. 나무들의 박동소리는 살아 있는 생명의 원초적인 아름다움이다. 아무리 많은 나무들이 서 있어도 살벌하지 않고 키 큰 나무 아래엔 작은 풀잎들이 자란다. 저마다 서로를 존중하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자연의 경이로움이라 할 수 있겠다.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은 성자처럼 제 자리를 지키는 면면이 아름답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겐 그들만의 고유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전혀 모르거나 알 수 없는 사람이라 해서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되겠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영역을 인정하며 존중할 것을 다짐한다.

사회는 개발과 물질문명을 앞세워 도시화되고 있다.

성스럽기까지 한 숲이라는 공간이 점점 사라져간다. 사람들은 숲을 향한 침입과 훼손의 행위에 무감각해진다. 자연 속에 담긴 한 사람의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간다는 건 어떤 것일지 생각한다. 자연의 숲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면의 숲을 지키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탁한 공기 속에선 푸른 숲의 공기가 그립게 마련이다. 어지러운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신성한 숲의 한 그루 나무 같은 분을 정신적 지주로 모시며 그 청정한 모습을 닮고 싶다. 정화된 마음으로 정결한 행동으로 살고 싶다. 성실하고 진솔하면서도 당당하게 나라는 나무의 향기를 뿜어내고 싶다. 신성한 숲의 기운을 품은 가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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