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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시의 효용과 시인의 보람 / 이동희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20.03.20|조회수152 목록 댓글 0


시의 효용과 시인의 보람

이동희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빛더듬이> 등 8권, 수상록 <숨쉬는 문화 숨죽인 문화> 등 3권, 시해설집 <시의 지문> 등 3권. 문학평론집 <문학의 두 얼굴> 등 4권

 

 

프롤로그

 

과연 시는 무엇인가? 가장 초보적이지만 궁금한 사항이다. 시는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리듬 있는 언어로 표현한 글이라고 대답하면 그만일까. 시를 전공하는 사람[시인, 문학평론가, 문학교사, 출판업자…]이나, 시를 그냥 읽을거리로 즐기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다. 시는 그 많은 독서거리 중에서 사라질듯 하면서도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 동시에 시인은 도대체 무얼 하는 사람일까? 하는 의문도 함께 도지는 궁금증이다. 시인은 그냥 ‘시 쓰는 사람’이라고 답하면 그만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형편을 알고 보면 과연 왜 그런 시를 쓰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서점가에서도 그 자리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시, 시를 읽는 독자보다 시를 쓰는 시인이 더 많다고 회자되는 조롱 투의 힐난, 기울인 노력만큼 보상이 따르지 않는 시, 소수의 유명시인 말고는 시집 출판 비용조차 건질 수 없는 시, 그렇게 출판한 시집도 동호인끼리 나눠보거나, 시가 궁금하지도 않은 지인들에게 애써 나눠주면서도 좋은 소리 듣지 못하는 시를 시인들은 왜 줄기차게 써대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회의에 빠질 경우, 시의 효용성과 시인이 가질 법한 보람 같은 것이 궁금할 때가 있다. 몇 가지 참고할만한 귀띔에 먼저 귀를 기울여 본다.

“비판적인 태도가 유일하게 생산적이며 인간의 품위에 합당한다. 이것은 협동, 지속적인 발전, 살아 있음을 뜻한다. 비판적인 태도 없이 예술을 참되게 즐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의 말이다. 브레히트는 시[문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보았다. 그리고 이런 효용성을 가지지 못한 시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문학[시]의 소명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경건함에 질문을 던지고 반대 진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작가 수전 손택의 말이다.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온갖 우상에 현혹되어 자신을 귀속시킨다. 지배하는 자들은 언제나 경건함을 표방한다. 정치적 권력을 고귀함으로 포장하기를 좋아하고, 종교적 맹신이 절대 권력으로 탈바꿈하여 사람들을 굴종시킨다. 물신주의 풍토는 더 언급한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돈신 앞에 굴복하게 한다. 이런 가장된 ‘경건함’에 누가 나서서 ‘아니오!’라고 손을 들 수 있겠는가? 바로 문학[시]가 그런 효용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시는 언어의 한 현상 형태로 그 본질상 대화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유리병 편지’ 같습니다. ― 분명 그 희망이 늘 크지 않은 ― 믿음, 그 유리병이 언젠가, 그 어딘가에, 어쩌면 마음의 땅에 가 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입니다. 한 편의 시들도 이런 식으로 도중에 있습니다. 무언가를 마주해 있습니다.” 파울 첼란의 말이다. 무얼 마주해 있어야 하는가? 열려 있는 것, 점령할 수 있는 것을 향해서, 어쩌면 말을 건넬 수 있는 ‘당신’을 향해서, 말을 건넬 수 있는 현실 하나를 향해서, 시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현실들이라고 파울 첼란은 시의 지향성을 그린다. 첼란의 생각을 요약하면 그렇다. 시는 결국 타자의 고통을 연대하는 벨트이며, 상실된 낙원을 다시 찾는 ‘귀항의 행로’가 되는 셈이다. 이 행로-시가 사는 길은 시대를 관통하지만 초월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나만 더 보기로 한다.

“대낮에 광장에서 읽는 시가 되어야 한다. 책이란 숱한 사람들의 손길에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져야 한다.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며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의 견해다. 네루다는 시인은 ‘작은 신’이 아니라면서, ‘최상의 시인’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나는 이따금, 최상의 시인이란 우리가 일용할 빵을 마련해 주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곤 했습니다.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저 우리 곁 바로 가까이 있는 빵 굽는 사람 말입니다.” 그러면서 네루다는 사랑과 혁명을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로 생각하는 시를 생산해 냈다.

글의 첫머리에 이렇게 장황하게 시의 효용성과 시인의 사명에 관한 시인들의 주장이나 견해, 시관이나 시인관을 언급한 이유가 따로 있다. 여기에서 조명하고자 하는, 김자현 시인이 보내온 작품들을 정독하고 난 결과다. 김자현 시인의 작품들을 통해서 시의 효용성과 시인의 사명이 대체 무엇인가 다시 한 번 반추해 보는 것이야말로 김 시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지름길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우선 그의 작품을 보기 전에 그가 보내온 ‘체험적 시론’을 살펴봤다. 시를 어떻게 보는가, 시는 무엇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시인의 견해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람을 포함한 세상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눈, 사람을 포함한 그 모든 자연이 차별 없이 훼손되지 않고 공존해야 하는 지극한 시대정신, 미래를 가늠하여 제시할 수 있는 전 시대를 아우르는 역사성과 통찰력, 이런 것들이 혼합된 정신성이 전제될 때 그 토양에서 형질이 다른 각자의 시가 탄생을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바탕에서 나오는 것이 영혼의 작업이며 또한 시대를 앞서 가는 방향타가 될 것 아닌가!”(김자현의 「‘체험적 시론」)

앞에서 언급한 시인들의 시론이나 시인관과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긴 그렇다. 시인이라면 앞에서 언급한 시-시인관이나 지금 살펴본 김자현 시인의 시-시인관이 다를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과연 그런 관점에 합당하는 [시]작품으로 그것을 반영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대표작 다섯 편과, 최신작 다섯 편, 그리고 그가 직접 보내온 두 권의 시집(『화살과 달』『앞치마를 두른 당나귀』)와 한 권의 수필집(『혜화동 썸머타임』)을 살펴보니, 자신이 체험적 시론에서 밝힌 시-시인관에 충실한 작품들을 엿볼 수 있었다. 시는 무엇인가와 시인은 또한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일말의 응답을 김자현 시에서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글쓰기의 의욕을 불러일으킨 동기가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로 미루어 보자면, 시는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는데 주저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맹종하는 우상이 만들어내는 경건함에 대하여, 그 경건함이 과연 옳은 것인가, 반대진술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는 ‘유리병 편지’ 같은 형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시기는 확정할 수 없지만]언젠가, [눈 밝은 독자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누군가에게 발견되어 그의 희망이 되고, 그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연대의 벨트가 될 수 있는 시여야 한다. 그러자면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서 시의 효용성에 응답할 수 없을 것이다.

 

반어反語-irony의 미학

 

김자현 시인이 자선한 다섯 편의 신작시들이 시는 무엇을 써야하는가, 시는 어떤 효용성을 위해 펜을 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응답으로 읽힌다. 다섯 편의 작품 중에서 다음 한 편만 들어보아도 그의 시세계를 짐작하는데 좋은 단서가 될 것이다.

 

이제 가자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가자

겪을 만큼 겪었으니 이제 가자 올 만큼 왔으니

우리 이제 돌아가자

포물선 그으며 별똥별 떨어지는 그곳으로

쇠꼬챙이에 산 사람을 걸어 놓는 인간 푸줏간 너머

우리는 빈손으로 가자 총균쇠와 돈신의 신당

모조리 부수고

총균쇠 좋아하는 놈들은 모두 떼놓고 가자

우리의 일을 빼앗는 AI와 놈들의 어미 아비들까지

모두 떼놓고 우리는 홀가분하게 가자

일회용이라고 이름 붙은 것은 모조리 일회용 컵에서부터

일회용 사람들, 사이비들도 모두 떼놓고

줄기세포도 모조리 두고

이승에 놓고 갈 썩을 목숨들만 함께 가자

여간해선 썩지 않을 똑바른 정신만 들고 가자

 

저 몽골 대초원을 넘어 해가 지면 으드득 떨릴지라도

말발굽 소리 대지를 흔들고 무노동

일확천금을 모르는, 허리 굽혀 이삭을 주울 줄 아는

도도히 다가오는 인생에

든든히 박차를 가할 줄 아는 우리 젊은이 잠시 쉬면서

필릴리 각주를 불고 있는 그 언덕을 찾아가자

 

검은 구름도 셰도우 커튼도 없이

밤이면 모깃불 연기 자욱한 마당에 멍석을 깔고

새파란 하늘에 두레박 드리우고

퍼올리고 퍼올려도 바닥 드러나지 않는 은하수 강가에서

별을 건지는 그리운 그곳으로 우리는 가자

찰랑거리는 은하수에 별 둘을 건지면 이웃에 나눠주고

별 셋을 건지면 하나는 공동의 곳간에

갈무리하는 마을

똬리에 떨어지는 물방울 훔치며 물동이 이고 가는 숙이를 만나러

우리는 거기로 가자 쑥부쟁이며 마타리

다리 긴 개미취 흔들리는 들판에서 눈 맞은 남남북녀

꽃반지며 화관을 끼워주고 씌워주는

선남선녀 합궁의 밤, 축제가 열리는 마당을 우리는 찾아가자

집집마다 북두칠성의 눈을 한 아이들

산에 들에 봄꽃이 피어날 때

칠 형제 칠 공주 칠 남매 나와서 파종을 하고

종마를 길들이는 흑백의 마을

흑백필름을 천천히

영사기 돌리는 그곳을 향해서 우리는 모두 가자

- 김자현 「썩을 것들만 함께 가자」 전문

 

이 작품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위협받는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여기에서 그려내는 진술에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곧 앞에서 언급했던 ‘경건함’을 신봉하고 추앙하는 자들일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 이 시를 담고 있는 [유리병]을 만나게 된다면 어쩌면 이렇게 넋두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맞아! 정말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았어!’라고 자탄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잊고 살게 된 원인을 이 작품은 여지없이 홀대하며 비판한다. ‘~빈손으로’, ‘~모조리 부수고’, ‘~모두 떼어 놓고’, ‘~모조리 두고’ 가자고 한다. 잊지 말고 살아야 했을 소중한 것들, 잊고 살아온 잘못된 삶을 청산하자는 것이다.

이 작품은 크게 두 개의 대립 항을 보이고 있다. 하나는 ‘썩지 않을 것’과 ‘썩을 것들’ 그러나 [여간해선 썩지 않을 똑바른 정신]만은 ‘썩지 않을 것들’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 하나는 머물러 있는 ‘여기[현실]’과 돌아가야 할 ‘저기[이상향]’이다. 현실은 현대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나 혹은 비인간적 현상들이요, 이상향은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친화적 삶의 원형을 말한다.

‘썩지 않을 것들’은 1연에 집중해서 진술되어 있는 세계요, 썩을 것들은 2연과 3연에 분산해서 진술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진술의 포인트를 헛갈리면 안 되겠다. 부정하면서 긍정하는 반어irony의 세계를 읽어내야 한다. 썩어야 할 것들은 주구장창 버티며 현실적 권위와 강인한 경건함으로 현대의 우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썩지 말아야 할 것들은 너무도 쉽게 현실의 권위와 경건함에 매몰되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가자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가자”고 설득한다. ‘~할 만큼 했고’, ‘~겪을 만큼 겪었고’, ‘~올 만큼 왔으니’ 이제는 돌아가자는 것이다. 어디로? 우리가 잊고 살았던 이상향으로!

또 하나의 중의重義는 ‘썩을 것들’에 대한 것이다. 유기체의 속성은 한 숨 생명으로 호흡하다가, 한 숨 호흡이 멎으면 썩어야 정상이다. 지수화풍이 어떤 인연으로 인해 모였다가 , 인연이 다하면 결국 지수화풍이 흩어지면 끝이다. 지수화풍의 소멸은 곧 ‘썩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한 생을 마감한 유기체라면 제대로 썩어야[죽어야] 제격에 맞는다. 그게 진리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썩어야 할 것들이 썩지 않아서 제대로 썩을 수도[죽을 수도]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 원인이 바로 1연에 집중되어 있다. 앞에서 시적 화자가 홀대하고 비판했던 대상들이다. 이를테면 이런 현상들이다. ‘인간 푸줏간’, ‘총·균·쇠와 돈신의 신당’, ‘AI와 놈들의 어미 아비들’, ‘일회용 컵 사람들’, ‘사이비들’, ‘줄기세포’들은 모조리 빈손으로, 모조리 부수고, 모두 떼어놓고 [썩을 목숨들만] 함께 가자는 것이다.

떼어놓고 부숴버리고 가야 할 것들은 소위 현대문명의 산물이라는 것들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적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현대’는 ‘현실’이 되었다. 현대사회는 과학·기술 만능이 된 현실이다. 그런 의식이 과학 기술로 만들 수 없는,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들까지 만들려고 넘보는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들은 썩을 줄을 모른다. 썩는데 백년은 고사하고 오백년 천년은 되어야, 지구가 멸망하고 다시 리셋 될 때까지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끔직한 일이다. 썩어야 할 것들이 썩지 않음으로써 벌어지는 이 참혹한 현대-현실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 중에 인간까지 그렇게 될 날이 머지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시는 경건함에 대하여, 우상에 대하여 질문하고 비판하며, 새로운 반대진술을 만들어 내야 한다. 비판적 태도 없이 예술을 즐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 않았는가. 시의 효용성은 바로 이 대목에서 발견될 수 있다. 현실에 젖어 사는 사람들에게 그 젖은 삶의 실상을 귀띔해 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전경을 열어갈 수 있는 사유의 단서를 제공하는 길, 그 핵심이 바로 시의 효용성과 닿아 있을 것이다.

썩지 않을 것들-떼어놓고 가야 할 것들에 대한 2연과 3연의 진술 내용은 이렇게 전개된다. ‘무노동 일확천금을 모르는, 허리 굽혀 이삭을 주울 줄 아는’ 젊은 인생이 지향하는 신명나는 삶의 언덕이다. 젊은이들의 패기가 사라진 시대는 불운한 시대임에 틀림없다. 젊은이들이 복권이나 긁어대는 현실은 비극적 상황이다. 현실의 부조리에 비판의 목소리를 돋울 수 있어야 예술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2연에서는 현실이 잃어버린 것들을 보여준다면 3연에서는 잃어버린 과거를 회복해서, 분단을 청산하고 이념의 갈등과 체재의 부조화를 겨레의 원형질을 통해서 회복하자고 설득한다. 공동체의 미덕을 회복하자고, 나눔의 정신을 되살리자고 호소한다.

‘최상의 시인’은 현실의 굶주림에 빵을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 공동체에 가장 절실한 과제는 바로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보다 더 시급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이것을 부정하는 자들이 바로 썩지 않는 것들이고, 경건성에 맹종하는 부류이며, 썩지 않아야 할 정신마저 썩은 자들이다.

현실에 빵을 제공하려는 최상의 시인은 굶주림의 상태를 해소하고자 한다. 그 길이 바로 분단의 극복과 동질성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 길에 서는 방법은 과거에 존재했으나 잃어버린 것들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별을 건지는 그리운 그곳’, ‘공동의 곳간에 별을 갈무리하는 마을’, ‘축제가 열리는 마당’, ‘북두칠성의 눈을 한 아이들’, ‘종마를 길들이는 흑백의 마을’로 갈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대-현실은 휘황찬란한 총천연색으로 도색되어 사람들을 현혹한다. 그러나 순수태의 자연은 흑백의 농도를 가질 뿐이다. 흑백의 세상이 낙후되고 퇴락하여 추한 것이 아니라, 고유하고 순수하며 옛것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여기-현대’가 아니라, ‘저기-이상향’의 모습은 총천연색으로 도색된 환락의 세계가 아니라, 흑백 필름으로 간직하고 있는 자연일체의 세계라는 것이다. 옛 시대를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독자들이여, 그 기억의 필름을 돌려보라고, 그러면 ‘지금-여기-현실’이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다.

두 가지 대립 항의 앞의 항목[썩지 않을 것들-여기-현실]을 버리고, 뒤의 항목[썩을 것들-저기-이상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에 대한 시적 진술이 성립한다.

 

풍유諷喩-allegory의 미학

 

김자현 시인이 자선한 신작시 다섯 편은 모두 그의 시세계가 시의 효용성에 대한 응답으로 보일만한 작품들로 보인다. 어느 작품을 예로 보이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신랄한 반어의 진술로 현대인들의 가슴에 섬뜩한 찬바람을 일으킬 만한 작품을 소개한다.

 

최저임금, 비정규직보다 싼 노동을 구할 곳은 없소

왜요, 난민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난민을

내국인과 똑같이 대우하라면서

법으로는 금하고

불법으로 그들이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루트를 슬쩍 열어놓으면 됩니다

정치가는

추방하겠다고 겁을 주고 난민을 탄압하란 말이군

그 틈에 기업은

불법 체류자를 잽싸게 고용하는 겁니다

체류비를 빼면 껌값 정도 남을 값으로

임금을 책정하는 것이죠

인간은 본시 차별과 계급을 좋아 하지요

내국인 노동자는 그보다 약간만 차등을 두면

불평이 없죠

그리고는 그 난민의 나라에는

평화가 없도록 지속적으로 이간질하여 교란하고

정부군과 반군이 계속

전쟁하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무기도 팔아먹고

일석 이삼사조의 이득이 발생하는 겁니다

불법과 불의로 책정된 임금 아닌

착취와 갈취라는 노다지를 주울 수가 있죠

기업하고는 밀실에서 악수를 하고

애국은 그렇게 하는 겁니다 난민은

끝없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국경을 넘어오겠죠

- 김자현 「애국의 길」 전문

 

시사주간지의 칼럼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이를 고려하면 문재인 정부에도 아쉬움이 크다. 부동산을 포함하여 부자들에 대한 증세는 지지부진했고 가장 가난한 계층에 대한 지원도 한계가 많았다. 포용국가를 말했지만 복지급여의 기준이 되는 중위소득의 인상률은 이전 정부 때보다 낮았다. 또한 노동시장의 심각한 임금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도 충분하지 못했다. 정부는 대통령의 말처럼 평등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정책을 실천해야 한다.”(이강국 「강남 좌파든 강북 좌파든」 『시사인』 628호에서)

칼럼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찜찜한 구석이 있다. 최저임금 몇 푼 올리는데도 재벌, 기업, 수구 언론, 언필칭 야당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한사코 반대하는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라고 무슨 요술방망이라도 가진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핵심 역시 아마도 그럴 것이다. 노동자이자 소비자들의 소득이 보장되고 인상되어야 기업에서 만들어낸 생산물을 소비할 것이 아닌가? 겨우 목구멍에 풀칠할 정도의 임금을 주면서 소비를 촉진한다는 것은 연목구어가 아닌가? 언제까지 저임금 구조를 유지한 채,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여 성장만을 고집할 것인가, 납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칼럼에서도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 효과가 없음을 비판하되, 소위 ‘애국세력들’의 허구성도 함께 지적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자현 시인은 ‘애국의 길’에서 시의 효용성을 실감할 수 있는 진술을 토해낸다. 이 글의 앞머리에서 언급했던 브레히트의 시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현실감이 있으며, 브레히트의 시를 읽는 듯한 공감력을 발휘한다. 하긴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거칠고 위험하다는 뜻일 것이다. 이 작품에는 반어와 풍유가 범벅되어 맹목적이고 불합리한 애국주의의 허구성을 맹폭한다.

시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경계한다. 시는 애국주의의 위험성을 동시에 경고한다. 시는 인류 보편의 진리를 향한 외침이어야 한다. 시는 인도주의의 선봉에 서야 하며, ‘사랑과 혁명’을 지지하되, 혁명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혁명을 노래하는 것을 숙명으로 가지고 있다. 그게 시의 사명이자, 시의 효용성이다.

얼마 전에, 소위 야당의 대표라는 이가 외국 노동자들의 임금을 내국인들보다 낮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무안을 당한 일이 있다.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가 진술한 그대로 실현될 뻔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아니라, 지금 우리나라에서 그런 비인도적이요, 비경제적인 일들이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외국노동자들의 임금을 공식적으로 낮게 책정한다면, 기업이나 생산자들이 굳이 임금이 높은 내국인-현지인들을 채용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애국주의의 맹점을 외면한 쇼비니즘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기껏 내놓는다는 정책이 차별과 계급주의의 편협성이라니. 이 작품은 그런 실태와 인간이 지녀야 할 인간주의 참 모습과 태도에 대해서 전혀 설명하거나 내보이지 않는다. 시 작품 전체에 걸쳐서 시치미 뚝 떼고 ‘애국주의’를 설파한다. 이런 알레고리의 세계를 담고 있는 [유리병]을 [언젠가] [누군가] 발견하고 읽게 된다면, 일말의 자책이, 그의 삶을 진동시켜 새로운 전환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의 불명확하지만 기대할 수 있는 효용성의 한 축이다.

우리도 한 때는 난민이었다. 우리도 한때는 내란으로 인해 죽음의 고비를 넘어왔다. 그때 세계인들의 원조와 구호와 동참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우리도 없을 것이다. 인과응보의 심리만은 아니다. 휴머니즘은 인류의 보편적 진리다. 인종, 계급, 국경, 이념, 체재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이 존중하고 지켜가야 할 보편적 진리에 속하는 가치다. 시는 그런 세계를 진단하고 불협화음을 내서라도 비판하고 질문하며 반대 진술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냥 만드는 게 아니다. ‘본시 차별과 계급’을 좋아하는 인간의 심리를 정통으로 꿰뚫어 보면서 애국의 길을 알레고리로 드러낸다. 난민을 탄압하는 교묘한 술책, 내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교활한 임금정책, 난민의 나라를 지속적으로 분열시키는 책동, 착취와 갈취를 통해서 얻어지는 노다지, 불법 노동자들을 채용하는 기업과 국가의 암묵적 동맹으로 외국노동자들과 내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이 애국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적 진술에 눈을 뜨게 되는 독자라면 어떤 삶을 선택할까? ‘별 둘을 건지면 이웃에 나눠주고, 별 셋을 건지면 하나는 공동의 곳간에 갈무리’하는 삶을 선택하기를 바라며, 시인은 에둘러 [비뚤어진]애국주의를 설파하는 것이다. 풍유의 어법으로 시가 걸어가야 할 진정성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시인의 보람

 

시의 효용성에 대한 일말의 응답을 전제했다고 치더라도 또 남는 것은 ‘시인의 보람’이다. 시인들은 과연 인간의 모순과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우상의 권위를 허물어뜨리면서, 유리병 편지를 보내면서, 사랑과 혁명을 이음동의어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시인됨의 보람’을 만끽할 수 있을까?

이것만으로는 보람을 운운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판하고 파괴하고, 미래로 메시지를 보내고, 사랑으로 혁명을 이루는 것만으로는 시인의 보람을 상쇄할 수 없다. 이것을 능가하는 어떤 핵심적 기제가 있어야 오늘날 한국에서 시를 쓰는 대다수 시인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욕망’에서 찾아보았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시를 쓰는 행위도 욕망의 한 형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시 쓰기를 욕망과 관련지어 논할 때 시 쓰기의 원천과 시의 역할을 잘 이해하는데 심리학자 매슬로 ‘5단계 욕망 이론’이 적절하다. 잘 알려진 대로 인간의 욕구가 매우 다채롭고 복잡하지만 그 심층을 들여다보면 다섯 가지 욕구로 환원될 수 있다고 했다.

첫째 생존-생리적 욕구, 둘째 안전의 욕구, 셋째 사회적 소속의 욕구, 넷째 자아존중의 욕구, 다섯째 자아실현의 욕구가 그것이다. 그런데 첫째부터 넷째까지의 욕구는 외부의 무엇인가에 의탁해야 하고, 그들의 시선과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므로, 온전한 만족보다 ‘결여’를 품고 충족되는 욕망의 형태라는 점이다. 그래서 위 네 가지 욕구는 죽는 날까지 우리로 하여금 ‘결여’를 느끼도록 하는 긴장된 욕구다. 이에 반해 다섯 째 자아실현의 욕구는 그야말로 그 자체로 자발성과 자족감을 지닌 욕망의 형태다.

이 단계에서 자아실현의 욕구를 실현하려는 자는 비로소 다른 존재의 시선과 영향력을 초월하여 그 자신의 영혼과 독자적으로 소통하게 된다. 그들은 여기서 자기 자신을 살며, 그런 삶을 통해 스스로 노니는 자유自遊의 경지에 이른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사는 삶이나 그런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내적 구원을 위해 스스로 창조하는 생성의 삶이자 행위다. 이런 삶과 행위에는 주어진 한계와 강요되는 정답이 없다. 그는 스스로 창조하는 주체이자 생성하는 주인공이다. 이와 같이 자발적이고 영활한 삶과 행위가 이루어질 때 그 주변에는 아우라 같은 환한 기운이 감돈다. 이 기운은 존재의 심층을 밝힌 자가 보여줄 수 있는 에너지다. 이것이 진정한 자아실의 경지다.”

-(정효구 『붓다와 함께 쓰는 시론』)

이런 경지에 이른 경우를 찾자면 자발적 소외를 실행하는 고독한 수행자나, 종교적 신심에 빠져 신과만 소통하려는 구도자나, 세상을 등진 채 오로지 창작의 희열에 빠져 사는 예술가에게서 진정한 자아실현의 경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바로 시인이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들은 타인으로부터 ‘보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영활한 삶의 자유自遊로운 상태를 견지할 뿐이다. 시를 쓰는 일이나, 그렇게 쓴 시가 타인으로부터 응분의 반대급부를 노리지 않으면서, 스스로 즐기고, 스스로 자유로운 영혼의 자유를 만끽하는 보람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시집을 만들어 지인들과 나눠보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시인의 문학적 진실[사유의 깊이와 미학적 감동]을 전해주고 싶은 사람에게 건네는 것이다. 세속의 평가 같은 것, 타인의 상찬 같은 것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 선택한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것을 최고의 보람으로 여길 뿐이다.

 

내 안에는 늘 기타가 살지 삶이 늘 기타 등등 안에 있었으므로 파랑치는 생애의 이랑 이랑을 건너 뛸 때마다 달 아래 슬픈 짐승처럼 기타아 울린다네 기타아 둥둥 기타 등등

 

패전이 예정된 전장처럼 전승된 기억이리라 내 청춘의 밤은 불안의 전조등이 깜빡거렸지 어제도 불발이었던 생 내일도 불발일까 다시 돋는 열꽃 같은 불안 위로 밤은 지친 혀를 내밀고 떨림과 떨림의 입자 비집고 절망적으로 기타가 우네 아침이 온다는 것은 오십 미터 삼십 미터 그 전방에 시시각각 다가오는 패전을 향한 저격수 발소리 확인하는 것이었네 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의 관성이 붙을 때쯤 태양이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속도에도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지 나는 이제 불안이라는 전동자석의 구리선으로 기타아 줄을 맸다네 기타아 둥둥 기타 등등

 

내 안에는 늘 기타가 울지 불안과 초조가 건너는 간헐 사이에 체념이라 서명된 포기각서를 흔들자 기타는 이제 다른 음역에서 소리 낸다네 달맞이 꽃그늘 아래 우울이 기른 푸른 밤의 잔등을 타고 앉아 기타아 둥둥 기타 등등

- 김자현 「회상 또는 기타」 전문

 

김자현 시인이 자선한 대표시 다섯 편에 들어 있는 시다. 재미있는 시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만의 사유 세계를 재미있게 가지고 놀 수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고 영혼의 활력을 끌어낼 수 있을까? 이 시를 대하면, 시를 읽는 기쁨이 샘솟는 듯하다. 아하~ 삶을 이렇게 자유롭게 가지고 놀 수도 있겠구나! 하는 자각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자가 바로 시인일 수 있겠구나 하는 공감 때문이다. 시인은 타인에게[잠재적 독자마저도] 자신의 삶을 회상해서 들려주려는 의도를 먼저 내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울려대며 자신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삶의 리듬감을 끌어내려 할 뿐이다.

“언어는 리듬이 되려고 하는 본래의 경향을 갖는다. 마치 신비스러운 중력의 법칙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들은 자발적으로 시로 돌아간다.” 20세기 중남미를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옥타비오 파스가 한 말이다. 김자현의 시를 두고 한 말 같이도 들린다. 시적 화자인 시인의 가슴에서 리듬이 되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시적 정서를 이렇게 의미 있는 즐거움이 되게 하는데 시의 힘이 있다. 그 힘을 즐기면서 ‘자아실현’의 충만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시인의 보람이다.

시 쓰기는 위에서 언급한 제5단계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데 가장 큰 비중을 둔다. 시를 씀으로써 시단-문단에 소속될 수도 있고, 그 시단의 구성원으로부터 인정받는 사회적 기쁨을 누릴 수도 있으며, 간혹은 그것을 통해 직접적이지는 않으나 생존과 안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시인들에게 이런 것들은 모두 부차적이다. 자아실현의 경지에 든 예술가들에게 이런 것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간섭일 수 있다. 진정으로 자아실현의 경지에 든 시인들의 시 쓰기와 존재의 의미는 외부의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기만의 ‘자율적 정부’를 세우고 그 속에서 자족의 시인이 된다고 했다. 김자현의 이 작품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얻어지는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첫 번째 단계부터 네 번째 단계까지의 욕망이 충족됨으로써 얻어지는 보람은 바로 포만감飽滿感이다. 그러나 다섯 번째 자아실현의 욕구로 활동하는 시인들은 포만감 대신 충만감充滿感을 얻는다. 그게 바로 시인의 보람이다. 포만감의 농도는 시간 벨트를 따라 희석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충만감은 인생 벨트를 따라 지속되는 기쁨이요, 즐거움이며, 보람을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시적 화자의 내면에는 늘 자신의 삶을 울려대는 기타가 산다. 그래서 파랑 치는 생애의 이랑마다 슬픈 짐승처럼 울려댄다. ‘기타아 둥둥 기타 등등’ 앞의 기타아는 Guitar요, 뒤의 기타는 , 그 외의 어떤 것들이다. 자신의 삶이 요동 칠 때마다 울리지 않은 가슴을 지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가슴을 울리는 사건들이 어디 죽고 사는 문제뿐이겠는가? ‘ 등등’의 사건들이 이합집산을 하며 화자의 삶을 울려대는 격이다. Guitar로 은유된 진동의 실체가 바로 리듬감이다. 시인은 이 리듬감을 ‘언어로 환치’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시인 아닌 사람은 이 리듬감을 그저 ‘비 내리는 호남선’의 비극으로 느낄 뿐이다. 그래서 Guitar는 ‘둥둥’ 울려 소리시늉말이 되고, 는 ‘등등’ 열거하며 복수의 이름씨가 된다.

2연에서도 이런 진술의 맥락은 그대로 유지된다. 다만 ‘불안’이라는 시적 정서를 나이가 들어감[태양이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속도에도 가속도가 붙기 시작함]에 따라 ‘전동자석의 구리선’처럼 나를 진동시킨다. 매우 실감나는 비유다. 이런 비유 끝에 역시 Guitar는 둥둥 울고, 등등의 사건들이 시적 화자의 삶을 진동시키는 것이다.

3연에서 삶의 질곡에서 언제까지나 내가 나의 노예적 삶을 지탱할 것인가? 자유로운 삶은 놓을 때를 놓치지 않고 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체념이라 서명된 포기 각서를 흔들자 기타는 이제 다른 음역에서 소리를 낸다’ 했다.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 스스로 텅 빈 충만을 만끽할 수 있는 사람만이 실현할 수 있는 경지다. 역시 Guitar는 둥둥 울리며 등등의 인생사를 끌고 가는 격이다. 가슴을 울려대는 삶의 진동을 언어로 의역해 낼 수 있는 Guitar라는 악기는 그러므로 김자현 시인의 시적 리듬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유리병의 비유

 

이 글의 첫머리에서 시의 효용성을 언급하면서 시는 언어의 한 현상 형태로 그 본질상 대화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유리병 편지’ 같다는 파울 첼란의 시관을 소개한 바가 있다. 마침 김자현의 대표시 중에 ‘유리병’의 은유가 적절하게 차용된 작품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역시 김자현 시의 세계를 엿보는데 좋은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푸른 유리병은 비어 있어요 그들이 다 마셔버렸으므로 술이었는지 지하 몇 백 미터 암반수였는지 그건 나도 모르죠 내 생애 아직 남았으므로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 푸른 유리병에는 아버지 고장 난 풍차와 가락지마저 뽑힌 어머니 흰 손가락 들어있어요 어머니가 연지를 곱게 바르고 핀으로 머리를 높이 올릴 때면 아버지가 밟는 페달에 가속도가 붙을 때죠 돌다가 서다가 하는 아버지의 풍차말이에요

 

존 에프 케네디 암살 소식을 말하는 아버지의 두개골에서 총성이 들리던 어느 날 그 때쯤, 어제 이태리에서 직수입한 마카로니 기계가 공장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하루사이에 백골처럼 하가마가 된 아버지 돌아와 읊조리셨죠 그 후로 아버지 풍차는 내 푸른 유리병 속으로 거처 옮겼어요 동풍이든 서풍이든 바람이 불면 푸른 유리병 나는 기울이고 흔들어대요 석고가 되어가던 어머니 흰 손가락 아버지 대신 바람개비 건반처럼 눌러요 이승에 놓고 간 안타까운 박자에 유리병 노래를 해요 아직도 끝나지 않은 푸른 아버지의 풍차 말이에요

- 김자현 「아버지의 풍차」 전문

 

앞에서 파울 첼란이 ‘유리병’을 시의 비유로 끌어들였을 때, 그 유리병에 그 언젠가[시간], 그 어디엔가[공간] 어쩌면 마음의 땅에 가 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유리병에 ‘편지[詩]’를 담아 띄운다고 했다. 이 유리병 속의 편지[시]가 무얼 마주하게 될 것인가? 열려 있는 어떤 것, 점령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향해서, 어쩌면 말을 건넬 수 있는 ‘당신’을 향해서, 말을 건넬 수 있는 현실 하나를 향해서, 시에서 문제가 되는 건, 그런 현실들이라고 파울 첼란은 덧붙인다.

김자현 시인이 ‘아버지의 풍차’에서 보이는 ‘유리병’의 비유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이 시의 화자는 유리병 속에 다음과 같은 것들을 담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물론 시적 정서로 변용된 마음 그림이다. 그래도 첼란의 비유와 김자현의 비유가 ‘유리병’을 통해서 어떤 동질성을 띠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데 모자라지 않다. 이런 감상 과정들이 김자현의 시세계를 조망하는 유효한 길이 될 것이다.

첼란의 유리병이 만나야 할 것들은 바로 위에서 열거하였다. 김자현의 유리병에는 이런 것들을 담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고장 난 풍차, -가락지마저 뽑힌 어머니의 흰 손가락을 담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유리병에 담은 ‘풍차’와 ‘흰 손가락’에 이미지를 덧칠한다. -연지를 곱게 바르고 핀으로 머리를 곱게 올리는[흰 손가락], -[어머니가 그럴 때마다]돌다가 서다가 하는 아버지의[풍차]가 그것이다.

이렇게 중첩되던 이미지들은 다음과 같은 덧그림을 통과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삶의 기둥이 무너진[마카로니 기계를 도둑맞음] 아버지의 충격은 ‘케네디의 암살 소식만큼이나 충격’ 그 자체였다. 그 때부터 아버지의 풍차는 시적 화자의 유리병 속으로 들어왔다. -[어머니의 흰 손가락]을 아버지 대신 시적 화자가 건반을 누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구는 “이승에 놓고 간 안타까운 박자에 유리병 노래를 해요 아직도 끝나지 않은 푸른 아버지의 풍차 말이에요”

물론 시를 이렇게 시시콜콜 분석적으로 음미할 필요가 무어냐고 항의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시가 무엇이고, 시인은 무슨 보람을 위하여 풍찬노숙 하듯 시의 독립운동과 시인의 정부를 세우기를 마다하지 않는지 알아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임을, 필자는 옹색하게 변명할 뿐이다.

결국은 그렇다. 그 누군가, 그 어느 땐가 발견될 수[그 가능성을 짐작조차도 하기 어려운 것이 시의 운명이긴 하다] 있기를 바라면서 시인들은 오늘도 끊임없이 유리병 편지[詩]를 써서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에 띄우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착각하지 말자. 그 언젠가, 그 누군가를 위해서 유리병에 편지를 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편지[詩]를 쓰는 바로 ‘지금’, 편지[詩]를 쓰는 당사자인 ‘나 자신’을 위하여 무망한 희망을 띄운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은가? 난파선에서 떨어져 나와 무인도에 닿아 구사일생 목숨은 건졌으나 세상으로 돌아갈 연락망이 없는 조난자가 유일하게 지니고 있는 유리병에 구조의 메시지를 띄운다면, 그 메시지가 병을 발견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절박성의 그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가.

시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과잉 친절하게도 먼 미래의 어느 날, 누군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편지[詩]를 쓰지는 않는다. 김자현의 시도 그렇다. 유리병 속에, 그것도 ‘푸른’ 유리병 속에 담아서 띄우고자 하는 시는 바로 ‘푸른 아버지의 풍차’요, ‘가락지 낀 어머니의 흰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일이다. 그렇게 건반을 눌러 부르는 노래가 <Home Sweet Home>이 되었건, <비둘기 집>이 되었건 그 노래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노래가 아니라, 바로 시적 화자의 노래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노래하면서 시인은 스스로 자아실현의 충만감을 원동력으로 척박한 시대의 백척간두를 슬기롭게 건너가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치열하면서도 조금도 낭비되지 않는 ‘시대의 정면’을 정통으로 통과하려는 것이다.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 무엇인가 우상의 경건함을 저 발아래 두고 당당하게 사유의 강을, 미감의 건반을 누르면서 노래하는 것이다. 시인이 ‘시의 나라’에 청지기가 되어도 좋을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에필로그

 

이 글의 앞머리에서 필자는 두 가지의 질문을 스스로 던져두었다. 하나는 ‘시란 무엇인가?’였고, 또 하나는 ‘시는 왜 쓰는가?’였다. 앞의 질문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시는 어떤 효용성을 지녔는가에 집중하였으며, 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시인이 시를 쓰는 진짜 동기에 대한 생각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이런 논의의 중심에는 김자현 시인의 시작품들이 동원되었다. 김자현 시인은 시를 어떤 효용성을 염두에 두고 쓰는 것일까, 김자현 시인은 무슨 보람을 누리자고, 세속에서는 별 인기가 없는 시를 애면글면 붙들고 몸부림을 하는지 살펴봤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과 시의 쓸모-효용성이 놓인 자리는 같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성에 모멸감을 주는 시대의 불의에 대하여, 경건함으로 과대 포장한 온갖 권력에 대하여, 과학기술을 모태로 한 비인간성의 위험에 대하여, 그리고 자연이 훼손되어가도 나 몰라라 외면하는 세태에 대하여 김자현의 시는 응답하고 있다. 은유와 반어, 알레고리와 풍자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시를 통해 발언한다.

시는 그렇게 의심이 가는 인간의 모순을 지적하고 반대하며, 질문하고 알리는 일을 사명으로 하는 글쓰기다. 시는 그렇게 세상 사람들 다수가 ‘예’라고 찬성의 편에 줄을 설 때, 시인만은 ‘아니오’라고 반대한 소수의 편에 서서 시대를 꿰뚫어 보아야 할 사명을 지녔다. 김자현 시인의 작품들은 그런 대안이자 고발이며, 질문이자 회의이며, 자기연민이자 인본주의의 본류를 담고 있다.

이런 지적이 시의 효용성에 대한 과장이 아니냐고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일종의 ‘정치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모든 글은 타인을 설득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조지 오웰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이미 역설한 고전이 된 말이다. 김자현의 시가 그런 의도에 충실한 것이 흠이 될 수는 없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만이 아니다. 김자현 시인이 자선한 <대표시>와 <최신작>들은 물론 그의 시집 두 권에 담겨 있는 작품들은 시가 과연 무슨 효용성이 있을까, 회의하는 사람들에게 일말의 메시지를 전하기에 충분했다.

이를테면 불의에 대하여 정의의 목소리[박제된 노동자를 구출하라]를 그림으로 보여준다든지, 위장된 경건함에 대하여 반어와 알레고리의 기법을 동원하여 경종[돈, 푸줏간]을 울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상을 속이고 사람을 돈으로 바꾸려는 농간에 대하여[말판] 걸쭉한 입담의 힘도 보여주었다.

이런 작업들은 필경 그가 시를 쓰는 동기이자 이유가 될 만하다고 보았다. 인간이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인 부류와는 다른 길을 걷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시인은 누군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일꾼이라기보다는 스스로 고독한 단독자의 삶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행복이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며,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려낸 인물 ‘그리스인 조르바’가 작품 속에서 하는 말이다.

김자현 역시 시인됨의 보람을 통한 자아실현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한다.

 

“엄마-구멍 난 중절모를 쓴 말 없는 엿장수 또 왔어요 우그러진 냄비, 광분이 찢어진 말표 고무신 서울사이다 병들이 리어카 앞으로 줄줄이 뛰어나와요 엿판 밑 나팔 달린 축음기에선 또 엔니오모리꼬네 걸어나와요 무릎뼈 허연 아이들 백동전 입에 물고 만화방 텔레비전 앞으로 달리던 날들이었죠 엄마는 황소 들랑거리는 문창호지 밖에 계셨어요 시래기국 끓이느라 할머니 드릴 참기름 바른 굴비를 굽느라구요”

-<김자현의 시 「엔리오 모리꼬네」 전3연 중 첫째 연>

 

그리운 것들이 많은 사람, 그리운 시절이 많은 사람,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지만, 스스로는 늘 텅 빈 충만으로 가득한 사람을 일러 우리는 ‘시인!’이라 부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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