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세계의 문학산책 / �
비난할 수 없는 그녀
──체호프 「귀여운 여인」,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대하여
김영귀
■톨스토이와 『귀여운 여인」
체호프(1860~1904)는 열아홉 살의 가난한 의학도로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지방신문에 짤막한 유머단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글 쓰는 작업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이미 단편의 유명작가가 되어 있었다. 일찍이 작가로서 인정을 받고도 그는 줄곧 시골 의사라는 자신의 생업에 충실했다.
체호프는 온화한 작가이다. 그에겐 피조물 일체에 대한 연민이 있다. 미국의 비평가 헤럴드 블룸은 그가 선별한 100명의 세계문학의 천재들 가운데 체호프를 모든 문학적 천재들 가운데 가장 덜 다이몬적이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문학은 어떤 특정한 사상을 밑에 깔고 그 사상의 시선으로 사물들을 바라보는 사상의 문학이 아니다. 어떤 경향이나 전망을 제시하려고 하기보다는 삶 자체의 문제에 천착하여 삶의 진리를 다룬다. 우리가 여기에서 다루게 될 「귀여운 여인」(1989)을 포함하여 다른 체호프의 작품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열린 결말은 이러한 체호프 시학의 일반적인 속성이다.
톨스토이는 체호프를 무척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 모두를 냉혹하게 평가하는 톨스토이였지만 체호프에게만큼은 변함없는 애정을 갖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작가이자 인간으로서 체호프를 좋아했다. 톨스토이는 체호프가 소설이나 희곡의 위대함을 뛰어넘는 인간적 위대함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톨스토이는 체호프의 작품 가운데서도 「귀여운 여인」을 특히 좋아했다.
주인공 올렌카는 항상 누구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여자다. 첫 남편은 극장 주인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그 직업을 포함한 남편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 남편이 죽자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 사람의 직업은 목재상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녀는 남편과 그 직업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사랑했다. 두 번째 남편도 잃게 되자, 그녀는 세 들어 살던 유부남인 수의사를 사랑했고 그의 아들에게 온갖 사랑을 쏟았다.
주인공 올렌카는 동시대 여성문제에 대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고리키, 레닌, 톨스토이의 견해는 여성에 대한 동시대의 의견을 내포하고 있다. 고리키는 혁명적 관점에서 올렌카를 비난한다. 그는 올렌카에게서 종속적이고 의존적인 여성의 노예근성을 보았다. 레닌은 어제는 누구와 무엇으로 살았는지를 쉽게 잊어버리고 자신의 의견과 사랑의 대상을 쉽게 교체하는 올렌카를 정치적인 입장을 원칙 없이 바꿨던 한 당원과 비교하여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반면에 톨스토이는 「귀여운 여인」을 읽은 후에 작품의 후기를 쓰면서 올렌카의 형상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헌신적인 사랑의 여인으로 묘사한다.
쿠킨이라는 성도, 그의 병과 그의 죽음을 알려주는 전보도, 목재상도, 수의사도, 아이도 웃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전 존재를 헌신하는 ‘귀여운 여인’의 영혼은 우습지 않고 성스럽고 놀랍기까지 하다. (……) 작품의 밝고 희극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의 몇 부분을 눈물을 흘리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포기할 정도로 충분히 쿠킨을 사랑하고, 또한 쿠킨이, 마찬가지로 목재상이, 수의사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내용과 더 나아가서 어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때 그녀는 혼자 남아 괴로워한다는 내용, 결국에는 그녀가 여성의 모든 힘, 모성의 감정으로 미래의 인물에게, 즉 커다란 모자를 쓴 중학생에게 끝없는 사랑을 전해준다는 이 소설은 나를 감동시킨다.
톨스토이는 올렌카를 통해서 자신이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여성상, 즉 가장 이상적인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여성상을 보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헌신적인 사랑의 여인이다. 여성의 사랑에 대한 모든 본성을 아주 섬세하게 잘 잡아내고 탐지해 내는 작품이라고 극찬한다. 그는 올렌카를 체호프의 창작의도와는 달리 지나치게 ‘정신적인 선의 이상’으로 보고 있다. 1905년 체호프 사후에 「귀여운 여인」을 자신의 선집에 새로이 출판하면서 원작으로부터 올렌카의 묘사 중 육체적인 부분과 관련된 텍스트를 삭제한 그의 태도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체호프가 보는 올렌카는 어떤 인물인가? 체호프가 묘사하고 있는 올렌카는 천진난만하고 모성애가 강하지만,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그것이 누구든 간에 항상 현재의 남편에게 충실하고, 그의 관심과 흥미에 모든 것을 집중시킨다. 남편의 의견이 곧 자신의 의견이기 때문에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남편이 죽고 수의사마저 떠나 사랑할 대상이 더 이상 없는 때는 자기 생각도 더 이상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불행은 자기의 주관이란 것이 전혀 없어진 것이었다. 눈으로는 주위의 여러 가지 대상을 바라보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정리하지 못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아무런 주관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가령 병이 하나 세워져 있다든지, 또는 비가 내리고 있다든지, 아니면 농부가 달구지를 타고 가는 것을 분명히 보고 있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그 병이 세워져 있고 비가 오고 농부가 어디를 가는 지를 자기의 생각으로는 말하지 못했다 1000루블을 준다 해도 말을 못하는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올렌카에게도 감동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것은 분명 희극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톨스토이는 올렌카를 가장 이상적인 정신적 여성상으로 받아들였지만, 작품 속에 묘사된 그녀는 희화화되어 있다. 체호프는 인간의 의지와 개성이 배제된 올렌카의 형상을 희극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다. 체호프는 자신도 한 편지에서 ‘유머단편’을 완성했다고 언급하며 자신의 작품이 희극작품이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체호프의 의도가 어떠했든 톨스토이에게서 올렌카는 제목 그대로 진짜 귀여운 여인이 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독자들도 자신의 방식으로 올렌카를 바라본다.
■현대의 시점에서 본 「귀여운 여인」
당대에서도 이미 여러 상이한 견해가 있었듯이 오늘날에도 「귀여운 여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줏대 없는 여인, 헤픈 여자라는 부정적인 시각이다. 새로운 사랑이 나타나면 마치 포맷을 한 것처럼 그녀의 마음에서 옛 사랑의 기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또한 홀로 당당하게 서서 열심히 자기계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오늘날의 현대 여성과 비교하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또한 그녀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거의 숭배에 가깝다. 상대를 동등한 위치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처럼 떠받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자신의 생각마저도 없는 올렌카는 독립적인 오늘날의 현대여성이 보기에는 답답할 뿐이다.
필자의 세계문학 강의를 듣는 학생들 가운데 많은 수가 이 작품을 읽고 난 다음 이와 같이 주인공에 대한 비난을 쏟아 놓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의 감상문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주인공에 대한 비난이 점차로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뀌고 심지어 주인공에 대한 부러움으로까지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몇몇 학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적지 않은 학생이 올렌카를 진짜 귀여운 여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대생인 그들은 물론 가부장제 하의 남성의 시각에서 올렌카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보고 있는 톨스토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렇게 본 것이다.
처음에는 올렌카는 줏대가 없는 수동적인 인물이라고 비판적인 면을 언급한다. 그런 다음,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내지는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과 같은 역접관계를 나타내는 접속구가 등장한다. 그러면서 올렌카는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순수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앞뒤로 계산하고 따지는 오늘날의 사랑의 방식을 반성하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 누가 올렌카처럼 완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바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학생들이 ‘올렌카는 헤어짐의 아픔을 통해 성숙해가는 과정이 없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랑만 한다’고 비판한 것에 대해서, 오히려 올렌카는 계산하는 사랑이 아닌 오로지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하는 것인 지도 모른다고 변호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을 잃었음에도 미련이나 후회 없이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현대에서 인간관계는 각박하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지만 소비적이고 일차적인 관계가 주를 이룬다. 이러한 현대인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올렌카는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거짓 없는 진실한 사랑을 한다. 그럼으로써 메마른 현대인에게 그러한 사랑을 권고하는 인물상이 되기도 한다. 하다못해 이런 올렌카와 만나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한 껍질 벗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인에게 올렌카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본받고 싶은 인물로까지 상승하게 된다.
올렌카의 사랑을 너무 쉽고 지조가 없다고 섣불리 비난할 수 없다. 올렌카 뿐만 아니라 여느 인간의 삶에 비춰 볼 때, 우리는 상황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에 자신을 맞추고 산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삶의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에게 빠져 산 것이다. 올렌카처럼 계산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은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때는 자기 생각까지 없어지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올렌카는 자신만의 사랑, 자아로 확장하지 못하고 남편에 따라 변한다. 동네사람들은 올렌카가 하는 말만 들어도 그녀가 누구와 만나는지 유추할 수 있을 정도다. 나중에는 수의사의 아들인 어린 학생의 말까지 앵무새처럼 따라한다. 그것이 곧 그녀의 의견이 된다. 그러나 올렌카가 희화화된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안에서 우리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결혼만이 아니라 환경(친구, 가족)의 영향을 받는 우리네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떤 학생은 자신이 올렌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고백한다. 그 학생은 요즘 TV, 신문, 광고, 친구, 선생님, 부모님의 말을 한 치의 생각 없이 그대로 옮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올렌카와 같은 인물을 비웃고 있지만 우리 역시 올렌카와 같이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에 씁쓸함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체호프는 자신의 올렌카가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고백과 반성을 불러일으킬 것을 예상했을까?
■사랑을 하는 여자는 귀엽다?
체호프의 의도가 어떻든 올렌카는 희화화된 인물이고, 체호프의 의도가 어떠했든 소설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올렌카는 이리저리 쉽게 마음을 주고 또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슬픔을 잘 극복하는 인물로 비춰진다. 남자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상황에 따라 말이 바뀌는 그녀에게 마음이 가지 않게 묘사되어져 있다. 그런데 체호프는 올렌카를 왜 귀여운 여인이라고 했을까? 아이러니를 담은 제목일 수도 있고 톨스토이처럼 남성적 관점에서 이상적인 여인상을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올렌카는 남성적인 시각에서만 귀여운 여인일까? 작품 속에서는 꼭 남성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올렌카를 귀여운 여인이라고 부른다. 올렌카는 외모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친절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고, 다른 사람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귀여운 여인이다. 게다가 유부남인 수의사를 사랑할 때도 사람들은 올렌카를 비난하지 않는다. 아니, 사랑할 때 진정 살아있고 행복하며 생의 기쁨에 충만해 있는 올렌카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비난할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한 학생이 자기 친구의 이야기를 했다. 올렌카를 보면, 멋지고 똑똑하고 유머러스한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떠오른다고 했다. 귀엽고 똑똑한 그 친구는 사귀는 사람만 생기면 대화의 대부분이 그의 이야기뿐이고, 항상 핸드폰을 옆에다 끼고 살며, 아무리 그 남자친구가 잘못했어도 용서하고 다시 화해한다고 했다. 일단 사귀면 그 남자에게 올인 하는 타입이고, 헤어지고 나면 귀신같이 다시 남자친구가 생긴다고 했다. 지금 사귀는 남자친구도 옆에서 보면 완전 사기꾼 스타일인데도 그 친구는 방긋방긋 웃으며 그 남자 얘기만 한다고 한다. “헤어져라”, “네가 아깝다”라고 가까운 친구들이 조언하지만, 그녀는 자기 남자친구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지만 사랑한다며, 남자친구의 문자가 오면 얼굴에 화색이 돈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의 학생이 그녀를 보며 신기해하는 것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면 그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워 보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학생은 올렌카를 질타하는 이들에게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을 잘 보았느냐고 묻고 싶다고 했다. 정말 바보 같고, 자기 자신은 없어 보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를 버리고 떠나거나 상처 주는 남자는 자기가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까지 하게 된다고 한다. 귀여운 여인, 정말 바보 같은 여인, 그렇기에 그녀가 행복하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든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올렌카는 톨스토이와는 좀 다른 시각에서 여전히 귀여운 여인이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앞뒤를 재며 감정의 손익을 계산하고 상처 받기를 두려워하는 현대인들에게 올렌카는 용기 있는 부러운 여인으로 읽히고 있는 것이다. 헤럴드 블룸이 올렌카를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힘들고 거부하기엔 너무도 위험한 존재”라고 한 것은 바로 우리 현대인의 이러한 입장을 말한 것이 아닐까. 작가 체호프가 어떤 의미에서 올렌카를 귀여운 여인이라고 했는지 그 진정한 의도는 알지 못할 지라도, 진정한 사랑을 하기가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 독자에게, “올렌카는 우리들의 무정한 영혼에 대한 아이러니로 빚어낸 비난이다.”
김영귀 / 1964년 대전에서 태어났으며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및 동 대학원 독문학 박사. 현재 이화여대, 동덕여대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