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지난호 읽기

[시인특집]장미여관 / 기혁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23.04.18|조회수70 목록 댓글 0

 

장미여관

기 혁

 

 

1

코스모스, 해바라기, 백일홍,

국화, 구절초, 달리아, 맨드라미,

목련, 접시꽃, 쑥부쟁이, 베고니

아…

 

당신이 부르지 않았더라면 모두

장미가 되었을 꽃잎들

 

2

말끝마다 가시와 꽃잎을 떨구는

가을의 복화술사처럼

자연이 어감의 담장 너머로 넝쿨을 뻗는다

 

순수, 동경, 그리움, 청순, 가

을 여인, 감사, 헛된 장식, 첫

사랑, 풍요, 기다림, 뜬소문…

 

가을 여인과 기다림조차

구별 못 하는 입술로

미친 사랑을 나누고

식어가는 차를 마시는 동안

 

용케도 장미의 정원을 다듬는 이국의 정원사여,

 

그의 도시에선 식물이라는 말이 없다

꽃이라는 말도

무의식을 심어 태어난 모든 존재를

 

그토록 장미라고 부른다

 

3

당신이 부르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존재라는 여정의 싸구려 여관방처럼

 

타인의 체취로 가득한

꽃말의 이불을 덮어쓰고서 서럽게

서럽게 흐느끼고 싶다

 

 

 

 

 

* 김춘수, 「꽃」

 

 

 

호명呼名

 

  당신이 나의 등에 집을 새겨놓았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았지만 인기척이 날 때마다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담장이 조금 허물어지고 오가는 사람 누구나 집의 내부를 상상하는 것 같습니다 포위된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하늘을 보듯이 처마 끝 허공에는 간절함의 무게가 가득합니다 이따금 우편물이 되돌아오면 낮은 발소리에도 소름이 돋습니다 고백은 빈 편지를 보내고 다시 입구를 뜯어 할 말을 보태는 빈틈인가요 오래된 집일수록 빈틈이 사람을 닮아갑니다 익숙한 외로움은 집안일만큼 티가 나지 않습니다 나도 집주변을 서성이는 불한당처럼 당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당신, 당신의 뒷모습도 안심이 되진 않을 테지요 노을에 물든 새들이 내부의 추락을 버티면서 날아갑니다 어쩌지 못하고 밤새 강아지 한 마리를 풀어놓습니다 겨울바람이 주인처럼 문을 열고 이불 속 등허리에 와닿습니다

 

 

 

 

 

 

사유의 슬픔을 연기하는 한 방식

 

 시인은 자신의 시도가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는 마술이 아니라면 결국 시인의 모든 시도는 연기演技에 불과하다. 실패와 체념이 반복되자 시인은 부재한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밀어붙이는 착란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시인의 연기는 단지 상식적으로 배치된 현실을 재현하고 그 재현을 벗어나는 움직임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연기는 단순한 복사複寫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에서 무를 창조하는 순수한 창조의 표현 또한 아니었다. 닮았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간격 사이에 머무르는 행동. 시에서의 연기란 가장 유사한 사태와 감정을 끌어와 이접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시적 진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 존재하지 않는 배경은 견딜 수 없이 쓸쓸한 것인데, 수많은 부대낌 사이에서 홀로 있음을 망각할 틈조차 잊어버린다. 이를테면 돌담의 안쪽과 바깥쪽, 오직 자신만이 아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선에서 울고, 웃고, 냉소하며 말들을 뱉어낸다. 앞선 말들은 수습되지 못한 채 아귀가 맞지 않는 은유를 만들어낸다. 시인은 어리둥절한 관객의 귓가에서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의미 없음을 고백한다. 그것은 흡사 돌멩이가 굴러가는 소리를 닮았다. 어쩌면 프로메테우스를 묶었던 바위산이 굴러가는 소리일 수도 있다. 이따금 하늘에서 항의하는 돌들이 떨어지곤 하지만 우주의 오래된 민원처럼 지구가 굴러가는 소음은 담당 기관이 폐쇄된 지 오래다. 시인은 장엄하고 웅장하게 돌담을 딛고 서서 균형을 잡기 위해 온몸에 힘을 준다. 시인은 자주 식은땀을 흘리며 울어보지만, 다시 내려올 수도 그대로 망부석이 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세로 결국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 해본다. 그림자에 집중하는 동안 시인은 돌담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 그것은 시인이 드러낼 수 있는 내부의 한도를 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인의 소리는 가장 어두운 부분에서 나온다. 어둠은 밤과 다른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종이 위에 그려진 나무 상자 속에서 어린 왕자의 순한 양을 키울 수도 있고, 해가 뜨고 지는 우주를 택배 상자에 담아 배송할 수도 있다. 그러면 독자의 속내에도 군데군데 어둠이 얼룩지고 서로 다른 소리가 난다. 누군가 엉겁결에 ‘사랑’이라는 말을 발음해본다. 그러나 홀로 있을 땐 엉겁결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엉겁결에 뱉어낸 말들도 실은 고도로 계산된 불협화현不協和絃의 결과다. 시인에게서 시인이라는 말이 엉겁결이 나온다. (무심코 떨어트린 성냥 하나가 극도의 고독을 딛고 선 사람에겐 전 생애를 울리는 고백처럼 불타오른다는 거짓말.) 누구라도 그림자를 만지작거리면 희미한 부분이 생겨날 것이다. 약간의 밝음 속에서 꿈결 같은 것이 흘러나올 무렵 시인은 그것을 천사의 날개인 양 경이롭게 바라본다. 시인은 천사를 본 적이 없지만, 날개를 구분할 줄 안다고 믿는다. 날개는 어떻게 나는가? 시인은 돌담 위에서 위태롭게 양팔을 벌리고 움직여본다. 지나가던 초등학생들이 멀리서 작은 돌멩이며 나뭇가지를 던진다. 시인은 계속해서 양팔을 휘젓는다. 새들이 위태로운 유기체 쪽으로 배설물을 떨어뜨린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시인의 몸이 뜬다. 시인은 거짓말처럼 거짓말이다. 시인은 돌담에 묶여있고 거짓말처럼 세상이 떠오른다. 참을 수 없이 가볍게. 거짓말처럼 사는 일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텅 빈 몸통에 날개만 매단 시인이 멀어져가는 세상을 올려다본다. 세상에서 흘린 바람과 빗물, 진리의 수화물들이 수직으로 시인을 관통한다. 시인은 계속해서 양팔을 움직인다. 시인은 움직일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