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지난호 읽기

[시 두 편]찬비 긋는 트렁크 / 박몽구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24.02.06|조회수78 목록 댓글 0

신작시

 

 

 

찬비 긋는 트렁크

박몽구

 

 

입술 선을 읽는 아이들 더디게 걷던

구화학교 골목길 지나다

처마까지 켜켜이 쌓인 트렁크들에 시선을 빼앗긴다

키 작은 집들 헐리고

몇 달째 월세 밀린 끝에

몸만 허물 벗듯 빠져나간,

쑥쑥 올라간 다세대 반지하 창가

트렁크에 다 담지 못하여

울룩불룩 삐져나온 옷가지,

멍든 구두코들

들이치는 비에 젖고 있다

 

덜덜 떨고 있는 트렁크를 한참 보고 있으니

찬 기운이 팔목으로 옮겨진 듯 시리다

 

카자흐스탄, 우즈벡에서 온 청년들

험한 일 하는 데는 이골이 났다

불룩거리는 근육으로 이삿짐을 옮기고

건설 현장 가파른 비계를 타고

외식 집 주방에서 튀기는 기름에 데여도

희망의 주소를 외며 견뎌왔다

그나마 중국발 얼어붙은 경기 탓에

일자리마저 빼앗겨

공치는 날이 많단다

 

몇 달째 월세를 밀린 끝에

새 보금자리 마련할 돈이 없어

최고장에 셋방을 떠나며

반지하 창가에 짐을 두고 떠났다

 

켜켜이 쌓인 트렁크 사이로

언 손으로 닌텐도 게임기 두드리며

이방인 친구들이 죽인 시간

얼음에 데인 듯 아프게 다가온다

 

개발 붐에 밀려 쫓겨난

구화학교 아이들

빈자리에 끼어 살던 외국인 청년들

트렁크만 찬비에 맡긴 채 숨어버린

마포 강변 동네

 

이제 누가 지키나

무거운 짐 옮기느라 휘청거리는 어깨

훤히 드러낸 채

죽죽 비 긋는 트렁크 앞에서

내 기운 어깨도 차갑게 젖는다

 

 

 

 

 

에어팟 블루투스 헤드셋

 

 

요즈음 들어 부쩍 외계인들이 늘고 있다

 

안양역 발 출근 지옥철

비명을 연방 질러도

헤드셋으로 완벽하게 귀를 덮은 외계인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달라붙는 슈트 장착한 채

밀착한 사람들 사이,

쓰윽 빠져나가

미끄러지듯 단숨에

빈자리 찾아 털썩 앉는다

 

그들에게만 닿는 너튜브 방송

외계와 은밀하게 소통하는 헤드셋

나도 하나쯤 갖고 싶다

 

다음 시그널은 무엇일까

 

붐비는 틈을 타

모르는 남자가 밀착해오자

젊은 여자가 획 뿌리치며 악을 써도

방음이 완벽하여 귓바퀴에 걸리지 않는다

너튜브로 블랙핑크 숏컷 돌리기에 바쁜

외계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계

벽을 허무는 일은 노코멘트

 

그렇게 혼자 잘 사는 외계인들

쓰윽쓱 퍼지는 사이

슬그머니 미국을 건너

원산지 표시 페인트만 지운 채

우크라이나로 날아간 155밀리 대포알

몇 배 큰 맷집으로 돌아올지 모르는데도

누구 하나 귀 기울이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는

외계인들이 더 늘어났다

한겨울에도 찜통인 만원 전철

제자리를 확보하느라 발 디딜 틈 없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