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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읽기

[시 두 편]屯둔 / 김유진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24.02.13|조회수29 목록 댓글 0

 

김유진

 

 

모자를

오래 쓰고 있으면 모자 쓴 것을 깜박했지

 

걷는 일은 다리를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믿으며

거리에서 통화를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말과

걷는 속도 사이에

개망초 위를 맴도는 잠자리

진전없는

말과 말 사이에

다음날 그다음 날의 걱정과

우리를 주저하게 하는 것들 사이에

서 있는

개망초 위 잠자리

진전 없이

어제 지나간 길

오늘도 지나가네

길은 뱀처럼 누워

밟으면 꿈틀했다

그럴 때마다 길이 무릎을 물었다

전화를 끊으라고 네가 말한다

끊고 나니 무릎에 피가 통하기 시작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잠자리를 바라보던 나처럼

그들만의 향기를 뿜으며 나를 본다

돌무더기에 돌 하나를 얹었다

 

문 앞에 서니 센서 등이 켜졌다

유리에 비친 내가 모자를 쓰고 있다

 

 

 

 

창문을 열면

 

창문을 연다

 

너 때문이 아니야, 혼잣말을 하며 함께 찍은 사진을 책갈피에 꽂고 물 한 모금을 마신다 나는 대림동에 살았지만 아이들이 이곳에서 멀어지기를 바랐다 밖은 고요하다 비가 올 거라는데 바람 한 점 없다

 

창문을 열면

 

소나무가 보인다. 어떤 날은 까치가 나뭇가지에 앉아 날개를 털고 어떤 날은 풀밭을 쪼고 있다 레몬을 반으로 잘라 수저로 속을 파고 누르며 즙을 짠다 최선을 다한다 생긴 대로 즙을 짠다

 

창문을 열면

나는 자꾸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이 생각이 저 생각을 밀어내고 이런저런 생각

이 사라진 것을 모르고 밥을 먹을 때

창문을 열면

달라질 여지?

달라지면 밀려 나간 생각이 돌아올까?

그놈이 그놈이라고 말하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우리는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죽을힘을 다해 레몬즙을 짜는 건 다 너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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