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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읽기

[시인특집]의식의 식 / 박규현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24.04.09|조회수12 목록 댓글 0

의식의 식

박규현

 

 

찾아 온 이에게 이제 더는 묻을 자리가 없다고 일러주는 것 관을 짊어지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대문을 걸어 잠그는 것 이따금은 잡초를 뽑거나 길에 사는 동물들에게 물을 챙겨 주는 것 길에 쌓인 뼛가루를 쓸면서 시간을 보내도 좋을 텐데

 

먼데서부터 누군가 또 태워지는 냄새가 나면 잠시 그쪽을 향해 서 있다가도

 

그뿐입니다

그뿐이라서

 

써지지 않는 것을 간신히 붙들어

상상해본다 세상의 모든 꽃이 동시에 피어버리는 장면 그러니까 재앙과

 

징후

아름다움을

목격하고 난 이후에는

 

힘겹게 펜을 들어

한 문장을 적어 내려가겠지

이제 그만하고 싶다

 

그때가 되어야 기운이 생겨날 것을 알아

누구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자연사 박물관

 

다녀오고야 말았다 오름에서부터 해안까지 섬 한 바퀴를 도는 동안에 몇 번이고 지나쳤던 거기

모두가 인증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고 일행은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 했다 주차장을 몇 바퀴나 돈 끝에 간신히 차를 댈 수 있었고

발을 들이자마자

탄성을 내뱉었다 사람들이 유리창 너머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들은 죽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누군가는

침대에 누워 양손을 포개어 가슴 위에 올려둔 상태였고 다른 누군가는 식탁에 앉아 자기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일행과 나는 한 줄로 서서 천천히 그들의 자세를 관람했다 쉼 없이

폭격이 일어나는 세상에 이러한 고요와 평화라는 것이

춥다

코끝이 찡하다

그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곧 지루해졌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을 구경한다는 건 생각보다 시시했다 그들은 판매 상품이 아니었고 큐레이팅도 허술하게 느껴졌다

그곳에 다녀왔음을 남길 수 있는 건 딱 한 군데뿐이었다 출구 벽면에 적힌 글귀 앞

서로를 원 없이 찍어주고 싶었지만 우리 뒤로 이어지는 행렬 탓에 그럴 수 없었다

훗날 휴대폰 앨범을 정리하다 본 사진에 문구는 너무 작아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일행의 얼굴도 초점이 맞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로 올라오는 비행기 안에서 속닥였다 그 사람들은 다 마네킹이나 모형이었을지도 몰라 자연사라는 게

가능하다는 게

나는 빌었다 무엇을 소원했는지는

일기에도 안 썼다 다만 그날 이후로

자기 전마다 몇 차례에 걸쳐 씻었고 얼굴 근육에 긴장을 풀어

헤치며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는 꿈을 꿨다 그곳에서 영원을 보내고 싶었다 영원 속에서 살며

매일 아침 식빵이 퍽퍽해 눈물

훔치는 척 했다

 

 

 

 

 

일희일비 금지 계절

 

올해가 가기 전에 만나.

지인들과 안부를 주고받을 때마다 매번 같은 문장으로 대화를 끝내게 되는 나날이다. 그들 모두를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올해 겪은 수고로움에 대해 추억하고 훗날에 찾아올 희망을 나누는 일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에 한해서만 공유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면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린다.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급격히 벌어지는 일교차에 아침저녁으로 등이 굽는 순간을 말이다. 계절이 변했을 뿐인데 이런 현상을 마음의 공허함으로 착각한 적이 많다. 내게는 따뜻하고 환한 순간도 남아 있다는걸, 내가 나에게 쉬지 않고 일러주어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이맘때 해야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옷장 정리다.

패딩은 개천절에 꺼내어 식목일에 넣어야 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이후부터 어떤 공식을 깨달은 사람처럼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10월 3일이 되면 겨울옷을 꺼내두고 4월 5일에는 가벼운 옷들로 서랍이며 수납장을 바꿔둔다. 솔직히 말해 옷장 정리는, 내가 나의 한심한 일면을 보게 되는 시간과도 같다. 자주 입는 옷가지를 앞으로 배치하는 일이 귀찮은 건 차치하고서, 옷장을 정리할 경우엔 꼭 버리는 옷들이 잔뜩 쌓이는 걸 목격하는 탓이다. 괜한 욕심으로 구매해 자리만 차지해서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옷가지들을 모아 두고 나면, 나는 내가 몹시 곤혹스럽다. 단지 내 눈에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나와 어울리지 않는 옷들은 그렇게 몇 년을 옷장에서 잠들어 있다가 나의 결심으로 인해 옷장 밖으로 나온다. 나에게 선택되었지만 내가 입는다는 선택지로는 가지 못한 옷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사는 곳과 조금 멀리 떨어진 동네에서 일정이 있어 부지런을 떨었다. 약간 두터운 재킷을 걸치면서 조금은 과하지 않을까 싶던 게 무색할 정도로 오늘 날씨에 적당했다. 이제는 이 옷을 입어도 되는구나. 뺨을 스치는 바람이 찼다. 옷장 정리를 해야겠다고 다짐했고 분기별로 내가 나를 정리하는 일이 버겁다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쓰고 싶은 시와 써 두었던 시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었다. 털어버려도 좋은 문장과 그럼에도 끈질기게 사유를 이어 나가고 싶은 구간들을 떠올렸다. 나의 변화와 나의 정체를 정리하자고. 옷장을 정리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하자고. 마음을 먹고 나니 내가 보내는 이 가을을 열심히 보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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