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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읽기

[시인특집]피를 뒤집어쓰다 / 윤유나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24.04.11|조회수11 목록 댓글 0

피를 뒤집어쓰다

윤유나

 

 

풀숲을 봅니다

갑자기 칼날이 깨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거리 섶나무 등등

지난 계절 등등

풀 마디를 봅니다 웃다가 갈비뼈가 부러졌다

타자기 두드리는 엄지손가락 아래로 검은 거미가 지나간다 그 회사에서 파는 싹쓸이잡초제거 예초기를 본 적 있습니다 교회 오빠한테 문자가 왔다

‘할아버지 산소 벌초하고 아버지랑 나란히 앉아 있어’

‘응. 벌 없어?’

교회 오빠가 학교 선배의 코 뼈를 부러뜨렸다

걷잡을 수 없이 우거져 있군

지나간 것들은 모두 목소리를 지녔군요

코피가 사랑이 무섭고 아름답고 가끔 젖어요

젖어요는 족보 있는 풀이예요

나무만 그런 게 아니고요? 조팝나무 같이요.

젖어요

젖어요

풀 베면

젖어요

여기

저기

 

눈 코 입,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 짐승을 누가 데려다 놓은 게 아니라면

스스로 찾아들었거나 뭐, 말 못 하는 짐승의 ‘죽을 자리’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죠 바람, 몸을 배회하는 벌레와 사람들의 목소리 혹

시라도 낳아놓은 새끼가 있다면

빛에 형체가 스미는 장면과 스치는 소리

 

부디 이곳에 안식이 깃들기를

속에서 눈 감아요

 

숨을 멈추고

잠시

영원

 

스치는 소리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내 자리

깎인 풀들로 뒤덮인

눈 코 입은 어디로 사라질까 얌전히 지내다 짖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는 저 사라진 얼굴이 내 자리

 

뿌리가 약한 것들은 뽑히기도 합니다 겁에 질렸고 땅은 부드럽죠 빽빽한 곳에서는 회전이 많아야 합니다

소원하다 잔디의 세력이 약해지고 있어요

베어 물다

백로 경에 자라난 풀들은 새로운 마디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한겨울 지나 봄이 와도 자라지 못할 테죠

 

첫마디를 내뱉고 눈먼

잡목과 풀밭

그들이 하릴없이 새기는 면을 읽습니다

 

속에서 눈 뜨는 모임

 

 

 

 

 

아름다운 피부과

 

살결 너머로 분명 첨벙거렸는데

나는 허우적거렸지

 

불을 켜뒀잖아

매미가 날아올 것이고

 

나의 개입이 어째서 자연의 섭리가 아닐 수 있어

어느 날의 행운과 변수를 담아

 

아주 어여쁘구나, 고스란히야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서 진화해

날아가렴, 너의 뜻대로

 

참 살가운 마음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자는 동안 나는 휴지로 뭉갠 날벌레의 다리를 자세히 보았다 맨 윗다리 한 짝을 길게 뻗은 것이 꼭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았다

 

책을 읽어봐 심호흡을 크게 하던지

 

뒤척이는 이이

책에서 만나 내가 오래 때린 아이

치명상을 입었고 가끔 이렇게 옆에 와 눕는다

 

옆방 부부가 사랑을 나눈다

 

괜찮아?

괜찮아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피부 뿐이야 피부를 벗고 잘 순 없어

 

유리 접시에 진주알 굴러다니는 소리가 밤새도록 들려왔다

 

 

 

 

 

그냥 바다

 

말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해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런 표정이 아니다. 나는 내 눈동자에 담겨 나를 바라보지 않는 바다를 보았다. 봉고차에 앉아 내 안의 우울감에 만족하던 찰나에 바다가 눈앞에 나타났다. 바다는 그냥 바다였다. 물이 들어오는 때의 바다였고 아직 갯벌인 바다였지만 바다는 그 어떤 바다도 아니었다. 바다는 그냥 바다구나. 의자에서 엉덩이를 살짝 떼 창밖의 바다를 더 멀리 바라보았다, 난 정말 몰랐어. 바다는 그냥 바다야. 그냥 거기에 있는 아무렇지 않은 바다야.

나 지금 여기에 내 의지대로 놓여있지만 그냥 바다를 보는 사람으로 봉고차 안에 있다. 바다를 보자마자 그냥 웃었어. 바다다. 웃음이 났어, 미치겠다, 하며 털썩 웃어버렸다. 갈매기가 하늘에 떠있고 밀물에 배들이 동시에 출렁이는 경치. 물이고 빛이며 잠인 바다는 시간에 출렁이고, 모여서 물방울이 자꾸만 모여서, 빛이고 물이고 잠이었다. 이 바다를 나는 용서하고 사죄하고 숨 쉬고 보자마자 나를 빼앗겨 버리고 목소리를 내보고 웃는다. 난 정말 몰랐어. 이게 다잖아. 내가 바다에 살지 못하는 것, 이게 다다. 나는 바다를 보고 있고 바다에 살지 못한다. 살 수 없는 걸 보는 마음에 나는 웃음이 난다. 그냥 바다니까. 잠시 머물 수만 있고 생활할 수 없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글자 없는 바다.

달리는 차에서 보는 바다는 금방 끝이 났다. 바다를 보기 전의 나는 이제 여기에 없다. 달리는 차에서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나는 바다를 보았던 사람. 계속 바다를 보고 있는 사람. 그냥 바다를 보고 그냥 웃었던 사람. 그리고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기가 끝난 것을.

언젠가 바람을 친구 삼아, 물먹은 바람을 동물 친구 삼아 같이 길을 걸으면서 쓴 시가 있다. 몸통이 바람인 동물 친구와 했던 내기. 먼저 사라지는 쪽을 살아가기로 했던. 먼저 사라지는 쪽이 분명해졌다. 좋아하는 마음. 그런 물먹은 마음.

말하는 바다. 말하고 있는 바다. 글자 없이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바다 앞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바다의 말을 구연했을 때 바다는 잠깐 사라졌다.

바다가 눈앞에 있는데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 없었고 쓸쓸해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는데 나는 이 마음을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마음이 먼저 사라졌고 내기는 끝났다. 좋아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좋아하는 마음을 살아갈 차례다.

그렇다. 그냥 바다. 그냥 마냥 좋아하는 마음.

한 번도 본 적 없는 경치. 나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 전체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바다. 없는 바다. 비로소 눈앞에 나타난 바다. 검고 깊고 어리석은 바다. 이것은 그의 작은 기쁨이 될 수 없고 그가 무심히 지나치겠고 그가 마주 보며 울겠고 그런데 그냥 바다. 수다로 가득 찬 물. 수다로 가득 찬 바다. 물속. 출렁인다. 네 눈동자와 내 눈동자에 살며시 얹혔다가 출렁이고는 시간 지나 보이지 않는 바다. 교차하는 동안에 듣고 있다. 영영 모른다. 모르듯이. 영영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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