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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읽기

[시 두 편]동쪽으로 문이 난 방 / 최기준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24.04.11|조회수11 목록 댓글 0

에세이 특집

 

동쪽으로 문이 난 방

최기순

 

 

그 집은 지금으로부터 한 백 오십 년 전에 지어졌다고 한다. 한 농사꾼 부부가 겨우 눈비를 피할 수 있는 움막집에서 살며 평생 농사를 지어 모은 돈으로 지은 집인데 당시엔 꽤 자랑거리로 근동에서도 집구경을 왔었다고 한다.

 

몇 세대가 함께 살아 늘 시끌벅적했던 그 집도 이제는 너무 늙어 아예 입을 닫아버린 노파처럼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삭아가고 있다. 이가 맞지 않는 대문은 붉게 녹슬어 쇳가루가 묻어날 것 같아 선뜻 손을 대기가 꺼려지지만. 막상 밀고 들어서서 잡초가 키를 넘는 마당을 지나면 아무도 없는 대청마루엔 떠난 사람들의 얼굴로 가득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이들의 장례식을 치른, 어린 아기였던 사람들이 초로初老의 모습으로 돌아와 어떤 감회에 젖는 모습을 지켜보며 집은 조금씩 기울어져 갔을 것이다. 반질반질하던 문지방에도 좀이 슬어 이제는 부서져 푸스스 먼지가 날리는 그 방의 거미줄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 보려고 한다.

내가 태어나 강보에 싸인 채 처음 바라봤던 눈부신 햇빛, 아침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던 방, 그 방을 나는 훗날 ‘동쪽으로 문이 난 방’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방에서 유년과 소녀 시절을 보냈다.

 

이른 새벽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음성이 두런두런 들리고 괭이나 삽, 호미 같은 농기구들 부딪는 소리, 부엌문이 삐걱 열리고 아궁이에 재를 쳐 내는 소리, 쌀 씻는 소리……

안개 속에 부유하는 공기들의 서늘한 흐름, 마당 가 펌프가 철컥이며 물 쏟아내는 소리, 푸성귀 씻는 소리, 나는 창호지 문을 통해 비추는 햇살을 온몸에 가득 받으며 눈을 감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그 방은 안방이 있는 대청마루 쪽으로 문이 나 있기도 했지만, 동쪽으로 난 방문을 열면 화단이 있어서 자줏빛 모란이나 흰 백합, 봉숭아, 백일홍, 청보랏빛 아이리스 같은 꽃들이 철 맞추어 피어나곤 했다. 동네에서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할머니가 아침 일찍 밭에 나가기 전 물을 바가지로 한 바가지씩 퍼서 끼얹어만 주어도 담장 위 호박꽃은 황금색, 분꽃은 분홍색, 백합은 순백으로 저마다의 향기를 울안 가득 뿜어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성장 이후 다른 여건들에 의해서 삶의 목적이나 가치관 등이 변했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기저에는 태생적 습관이나 주변 환경에 대한 무의식적 수용이 깔려 있다는 생각이다. 당연히 무시될 수 없는 각자의 어떤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리라. 나 또한 멀리 가지 못하고 탯줄이 잘리던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 방은 아름답기도 하고 또한 슬프기도 한 곳이었다, 어릴 때 그 방에 대한 기억은 봄이면 엄마가 자주 앓아누워 있었고,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었던 나는 진달래를 한 아름 꺾어다가 보여주는 게 다였다. 그러면 창백한 엄마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웃음기가 보였다. 오후에 그 방은 빨리 어두워져서 컴컴한 아랫목에 허연 빨래 뭉치처럼 엄마가 누워있고 진달래를 안고 들어가도 분홍의 화사한 꽃 빛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음이건 혹은 몸이 아플 때 가끔 꿈을 꾸면 시커멓게 변한 은가락지를 낀 엄마의 손가락이 보이고 진달래를 안고 눈을 크게 뜬 채 캄캄한 방으로 발을 들여놓던 그때의 상황에 놓이곤 한다.

 

그래도 그 집에선 고모들의 싱싱한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그 방에서 내가 아는 만큼의 세계를 꿈꾸었고 사춘기의 감정 변화들을 겪었고 첫사랑의 느낌을 비밀스럽게 곱씹어 보곤 했었다. 네 살 위인 고모가 연애를 시작하고 첫 크리스마스 때 연인에게서 받은 ‘소월 시집’을 몰래 훔쳐 읽으며 나는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아마 그 시절엔 장래의 진취적인 생활을 위한 준비보다는 감성적 말의 매혹에 이끌렸던 것 같다. 실제로 새벽 세 시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어나서 새벽녘 한참 빛을 발하고 있는 별을 향해 내 꿈의 길잡이가 돼 달라고 빌었던 것 같다.

 

그때 그곳에서의 꿈들에 얼마만큼 부합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시를 쓰고 있고 더딘 움직임이나마 정진하며 삶의 어떤 충족감을 느낀다. 크게 이루지는 못했지만 나름 그 꿈을 이루어 간다는 생각이다. 사람마다 꿈의 크기가 있겠지만 내 꿈은 비교적 소박한 편이어서 내 생각들을 한 편의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요즘 좀 행복한 것 같다. 글의 크기와 깊이는 평생을 두고 해 나가야 할 업 같은 것일 테니까,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의미가 모호한 말들의 허세와 과장된 표현들을 시라는 프레임 안에서 호방하게 풀어놓던 지난날들에 견주어 보면 온갖 화려한 메이크업을 지우고 거울 속에 비친 말갛게 씻긴 맨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살아가는 일이나 글을 쓰는 일에 굳이 성급할 일이 없다는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지난 모든 일들이 하나의 영상처럼 스치며 때때로 그리움이란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어떤 인물이나 다정했던 사람보다는 생각지도 않던 사물이나 풍경이 우연히 시야에 들어올 때, 그때 놓여있던 나의 상황과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떠오른다. 어떤 상징물이 피워내는 옛 기억들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시점에 잠시라도 머물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리운 대상들이 많아진다고 한다. 젊을 땐 새롭고 낯선 곳을 동경하지만, 어느 만큼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를 추억하며 그리워한다. 그것은 지나온 시간 속에 박힌 자기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동물군인 인간이 타인을 향한 그리움이 그리 오랫동안 깊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옛집, ‘동쪽으로 문이 난 방’을 그리워하는 것도 그때 받았던 무한 보살핌과 안락함, 무엇이든 꿈꾸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의 나를 향한 그리움일 것이다.

 

이제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한가한 날들을 살고 있다. 다가오는 노년의 삶이 외롭고 두려움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저기 책꽂이 가득 꽂혀있는 책들을 마음 편히 천천히 읽어볼 수 있겠다 하는 기대를 해 본다. 눈이 푹푹 쌓인 겨울날 따뜻한 실내에서 담요를 덮고 책을 읽다 스르르 잠들 수도 있겠다는 느낌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대로 생을 마감해도 섭섭지 않을 것 같고 또 한 편으론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시류에 신경 쓰지 않고 부족하다고 느끼는 글쓰기를 차분하게 더 연마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다 괜찮다.

 

내가 시작된 곳,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 어둡게 저물고 있는 나의 옛집. 아름드리 목련 나무에 봄이면 새하얀 꽃들만 하릴없이 피었다 흩어지는 그 집, 내 꿈의 요람, ‘동쪽으로 문이 난 방’ “이제 안녕”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다. 우리는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어디에서 무엇으로 든 다시 만나질 것이다. 결국 세상 모든 것은 하나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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