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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두 편]육십 세 / 한경희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24.04.18|조회수11 목록 댓글 0

육십 세

한경희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책처럼

삼십 세엔 삶을 그만둬도 괜찮겠다

생각한 적 있었지

 

삼십 세

아이들 낳아 키우고

사십 세

아이들 돌보고 세상을 살고

오십 세

육신이 망가져 버린

남편과 씨름하며 보냈네

 

육십 세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

걸음 서툰 아이처럼

산다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열어논 창문으로 도둑이 넘어오듯

언제든 슬그머니 그 순간이 오거든

 

애쓰지 않아

하늘이 흐리면 비가 내리고

절기 따라 얼굴 다른 꽃이 피고

아기의 웃음에 세상이 자지러지듯

거스를 수 없는 게 세월이란 걸

이 나이에 비로소 알게 되었네

 

뭐 괜찮아

그거라도 알게 됐으면

 

 

 

 

* 잉게보르크 바흐만(1926-1973). 오스트리아 시인. 소설 『삼십 세』 발표

 

 

 

 

 

그 집

 

그 집이 꿈에 보인다

하루종일 해조음 들리던 집

소도 없이 외양간만 크던 집

거칠게 만든 꽃밭에

달리아 용설란 국화꽃 피던 집

부엌 뒤 빌레 동산 장독대에 정화수 올리고

여름이면

멀구슬나무 보라색 꽃비 내리던 집

초가집 처마 에둘러 심은 양하 잎새 위로

가을비 내리던 집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 위로

별이 쏟아지던 집

정낭 걸쳐진 올렛길에

마농꽃 줄지어 하얗게 빛나던 집

흐릿한 호야불 아래 부엌에서

생솔가지 태우며

사박사박

눈 내리는 소리 듣던 집

지붕 낮은 집

초라하고 어둡던 집

이제는 세상에 없는 할머니 집

그 집

 

 

 

 

 

 

* 빌레: 너럭바위의 제주 방언

* 정낭: 제주도에서 대문 구실을 했던 나무

* 마농꽃: 흰꽃나도샤프란의 제주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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