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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진홍토끼풀밭에 밤이 내리면 / 경 번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24.04.23|조회수41 목록 댓글 0

단편소설

 

진홍토끼풀밭에 밤이 내리면

경 번

 

 

동운에게 전화가 온 것은 밤 열 시경이었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말러 5번 교향곡 4악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한 해의 시작과 끝이 모두 들어있는 겨울은 환(幻)의 계절이기도 하다’는 가벼운 탄식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쩐 일인지, 프랑스 브르타뉴의 눈 덮인 산을 그린 그림 이젤을 걸어놓은 채, 뜨거운 태양의 나라 타히티에서 죽은 화가 폴 고갱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었다. 그렇다면 언젠가 ‘내가 맞이할 마지막 순간에는 어떤 풍경이 떠오를까?’ 생각하며 어두운 방 안에 낮게 깔리는 선율에 취해 있었다.

“구스타프 말러…… 아다지에토네요.”

“……”

일 년 만이었지만 목소리에 섞여 있는 흐릿한 비음만은 여전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기뻐요. 선생님 방 안에 울려 퍼지는 말러 음악을 듣게 되어서요.”

설희는 자신이 듣고 있는 말러 CD를 동운이 선물했다는 것이 문득 생각났다.

“오해하지 마.”

“괜찮아요. 음악의 선율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향한 것이니까요.”

“그냥 우연히 틀어놓은 것뿐이야.”

“괜찮아요. 선생님은 아름다운 것을 느낄 줄 아는 분이잖아요. 첫눈에 알아봤어요. 지금도 생생히 떠올라요. 처음 선생님을 만났던 그 극장 말이에요. 영화를 보던 선생님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함께 연주회에 갔을 때도요. 선생님 얼굴에서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타고 환희가 일렁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지나간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설희에게 떠오른 기억은 동운의 말과는 달랐다. 언젠가 넓은 연주회장의 맨 앞에서 연주가 끝날 때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브라보! 외치는 동운의 모습에 얼마나 당황했었던가.

“그만해, 다 지나간 일이니까.”

“선생님께는 지나간 일이로군요. 늘 선생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면 저에겐 지금 일어나는 일만 같은데.”

더 이상 응대해서는 안 된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이쯤에서 전화를 끊어야 했다. 설희는 초조한 심정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마침 슬프게 느껴지는 현악기와 하프만의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희는 황급히 스피커 전원을 껐다.

“알고 계시잖아요. 결국 아름다움이 우릴 구원한다는 걸요. 선생님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일 년 전 그날 밤을 잊으셨어요? 선생님은 저의 열망을 깨워 주셨어요.”

“제발 부탁이야, 그만해 줘.”

설희는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벨 소리는 발작적으로 집요하게 들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잠시 끊기더니 다시 또 울렸다.

“정말로 난 너에게 할 말이 없어.”

설희는 전화기에 대고 정중하게 말했다. 길게 한숨을 토해내는 소리가 귓가에 잡혔다.

“저도 알아요. 저에게 이젠 아무 감정이 없다는걸. 하지만 내 심장이 자꾸 요동을 쳐요. 내 숨소리를 들어 봐요. 선생님과 함께라면…….”

흑흑 소리를 내며 촉촉한 눈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음악 소리마저 멈춘 방안에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는 동운의 흐느끼는 소리만 귓가에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양이 다르겠지만 각자에게 부여된 외로움의 몫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거잖아. 너의 그 참담한 마음도 들끓는 감정도 그럭저럭 견딜 만해질 거야. 가끔은 잊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설희는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다가 고요히 전화를 끊었다.

현석이 보고 싶었다. 현석과 함께하는 시간이 언제나 흡족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았다. 늘 쓸쓸하고 헛헛했다. 시대와 존재를 향한 허기로 신경이 바늘 끝처럼 뾰족해져서 서로의 정신을 할퀴기도 했다. 때로는 무력했고 쓸데없는 자의식만 치렁치렁했다. 연속되는 만남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꺼리고 피하면서도 의지했다. 왜냐하면 서로 닮은꼴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전혀 닮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정작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그러니깐 우리가, 그렇게 느꼈다는 데 있다고 생각을 이어갔다.

현석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감질날 정도의 시간만 허락되었다. 설사 함께 있어도 현석의 존재는 오롯이 설희에게 속해 있다고 느끼게 하지 않았다.

‘당신에게 난 도대체 어떤 의미야?’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 설희는 종종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이 시간만큼은 그가 온전히 내 것이었으면 생각들로 겹겹이 쌓이고 있었다.

 

사나운 바람이 십이월 마지막 날 밤을 통과 하는 중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전등들이 띄엄띄엄 만들어 놓은 고립된 빛의 공간들이 설희를 지켜보았다. 입김 사이로 술집의 유리문이 뿌옇게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설희의 시선을 맞은편 현석이 붙잡았다. ‘조금만 기다려’ 그는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저 널브러져 있는 술집 구석 테이블에서 무엇을 더 기다리란 말인가, 따지고 싶었으나 설희는 그대로 앉았다. ‘단지 견뎌보란 뜻이었을까. 진창 속을 견디고 견뎌 마침내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나듯이 너를 향한 마음을 꽃피워 내란 뜻인가.’ 그러나 지금, 동운의 몸은 욕실 바닥에 누워 싸늘하게 식어 있을지도 모른다.

“견뎌봐, 조금만 더 견뎌봐.”

어젯밤 설희는 수화기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핸드폰 저편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물소리에 섞여 동운의 흐느끼는 듯한 음성이 멀어졌다.

“완전히 잃느니 한 부분이라도 가지고 갈게요. 미안해요.”

“넌 슬픔이 잉크처럼 번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인 것 같아.”

“더 욕심내지 않고 멈췄어야 했는데, 바보 같이…… 내 마음이 머물 수 있는 곳이 이젠 없어요.”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마침내 현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벽에 기대 있거나 엎드려 있던 이들도 주섬주섬 일어났다. 벽시계를 보니 오전 여덟 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푸,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서 설희는 먼저 술집 밖으로 나왔다. 맞은편 상가 건물은 윤곽이 완연히 뚜렷해져서 우람한 몸체로 서 있었다. 건물 앞 공터에는 자동차들이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납작 엎드려 있었다. 밤새 진눈깨비라도 내린 것일까, 보도블록은 여기저기 사금파리를 깔아 놓은 듯 반짝이며 빛났다. 밤새 칼날 같은 바람이 먼 포도로부터 달려와서 미끄러지듯이 구르는 자동차 뒷바퀴에서 갈라졌다. 보도에 닿자마자 녹는 눈, 소나기처럼 묵묵히 사라져 버리는 지나가는 눈이었다.

잿빛 구시가지가 삽시간에 희끗하게 지워졌다. 그러고 보니 새해 아침이었다. 설희는 마흔이 넘으면 삶의 여정이 선명한 윤곽으로 드러나리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정갈한 마음으로 손을 씻고 새해 아침을 맞이하리라 했던 다짐은 도대체 언제 적 것이었던가. ‘무슨 상관이야.’ 멀리 한옥 지붕들 사이에서 나무의 빈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래, 상관없어.’ 설희는 고개를 주억거려 보았다.

‘동운이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말이야. 그것으로 충분하지.’

현석의 까칠한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완연했다. 설희 또한 눈두덩에 납덩이처럼 들러붙는 피로를 느꼈다.

“이제야 다 보냈어.”

현석이 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던 반감을 설희는 꿀꺽 삼켰다.

“갑자기 새벽에 나오라고 하더니 이렇게 기다리게 해.”

“그래, 미안해.”

현석은 팔을 둘러 설희의 어깨를 감쌌다. 설희는 살며시 기댄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품은 따뜻했다.

“동운이라고 내가 아는 애가 있는데…….”

오랫동안 참았던 말이 그제야 나왔다. 제 딴에는 감정을 절제한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목소리는 떨렸다.

“그 애가 나를 자꾸 찾아. 아니… 죽었을지도 몰라.”

현석은 흠칫 놀라는 듯했으나 설희의 어깨에 두르고 있는 팔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깨에 느껴졌던 미세한 진동은 어쩌면 지나가는 바람이었는지도 몰랐다.

“듣고 있어? 그 아이가…….”

“그래, 알아들었어.”

그의 팔이 어느 틈에 설희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우리 일단 자리를 옮기자. 좀 따뜻한 곳으로…… 그곳에서 천천히 얘기하자. 그래, 그게 좋겠어.”

설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차선을 따라 쭉 뻗은 인도, 그 인도들이 만나는 상가 옆 골목골목을 고갯짓으로 둘러보았다. 동운이 사는 집은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 비좁은 골목길을 지나 창이 낮은 오래된 한옥 처마 밑을 지나면 보이는 파란 대문의 집. 더디게 밝는 푸르스름한 빛으로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골목길에서 마주한 파란색 대문은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대문의 색깔조차도 가로등 불빛에 언뜻 그렇게 보였다는 희미한 기억뿐이었다.

현석이 차도에 성큼 발을 내딛고 건너기 시작했다. 몇몇 차들이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휙휙 지나갔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는 경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길을 건넜다.

설희는 문득 자신이 새벽에 했어야만 했던 일은 술집에서 밤새 그 무리 속에 끼여 현석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희미한 기억일망정 골목길을 뒤지고 또 뒤져서 동운을 찾아내는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동운의 집 주소를 몰랐다는 것은 어차피 핑계일 뿐이었다.

“제 손에 뭐가 있는지 알아요? 면도칼이에요. 후후후, 도루코 면도칼은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거든요. 가볍게 한번 쓱 긋고서 눈 딱 감고 욕조 안에 누워 있으면 돼요.”

‘지금이라도 동운의 집을 찾아내야 한다. 하루 종일 볕이 들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이층 방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물이 철철 넘치고 있는 욕조 가득 흥건할 붉은 피를 떠올리는 순간 심한 욕지기를 느꼈다. 도망치듯 설희의 발걸음은 어느새 현석을 따라 골목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보도블록 위에는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골목길 안 음식점들은 거의 문을 닫고 있어서 휑하니 찬 바람만 불어댔다. 밤새 술을 마시면 습관처럼 해장국집을 찾는 현석의 뒷모습이 태평스러워 보였다. 설희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 적의를 느끼며 보도블록을 밟았다. 살얼음 위의 햇살이 그런 설희를 조롱하듯 발밑에서 번뜩였다. 뻣뻣해진 고무 대야 위의 쓰레기 더미를 지나 저만치 김이 나는 커다란 화덕이 보였다. 현석은 화덕 앞에 멈추어 서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그는 콩나물국밥 두 그릇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그래, 무슨 일이야?”

현석의 되물음에 어이가 없었다.

‘이미 두 번이나 말하지 않았던가.’

현석의 동공은 이미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간밤에 현석과 그 무리들은 소주 아홉 병에 맥주 스무 병 정도를 해치운 터였다.

“누가 죽었다며.”

기억을 해냈는지 현석은 다시 말했다. 무심한 목소리였다. 설희는 맥이 풀렸다. 현석을 향해 곧추세웠던 적의가 실밥 터지듯 툭 터지는 듯했다. 마침 국밥과 소주가 날라져 왔다. 단출한 밥상이었는데도 그의 눈은 생기를 띄었다.

“우선 먹고 보자고. 어서 들어.”

그는 지금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눈앞의 음식을 먹어치우는 일이라는 듯이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카-아 소리를 내며 소주도 한 잔 마셨다. 설희에게도 권했지만 도리질했다. 현석이 다시 내민 소주를 한 모금 입 안으로 넣었다. 뱃속이 울렁거리더니 다 넘어올 것 같았다. 두 눈을 찡그리며 설희는 한 모금의 소주를 다시 입 안에 넣고는 꿀꺽 삼켰다. 작은 파도 같은 울렁거림이 한번 지나가자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고 요동치던 속의 움직임이 순하게 가라앉았다. 설희는 잔에 남아 있던 소주를 단번에 다 마셔버렸다.

눈앞이 핑그르르 돌더니 음식점 안의 사물들이 완만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벽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고 테이블이 둥둥 떠올랐다. 테이블 위의 그릇들은 쟁그랑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쳤다. 어느 틈에 알몸인 동운이 설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알아요. 경멸을 감추느라 눈꺼풀이 실룩거리고 있는걸요. 저는 그냥 웃어요. 바보처럼 말이죠. 누가 저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 너무 괴로워요.”

동운은 불쑥 왼쪽 팔을 내밀었다. 살결이 흰 팔목 가운데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설희는 가볍게 도리질했다. 눈앞의 환영은 사라졌고 사물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현석이 술잔을 들다 말고 눈을 둥그렇게 뜨며 설희를 바라보았다.

“동운…… 이라고, 어젯밤에 전화가 왔었어. 둘만의 송년회를 하고 싶다고, 만나자 하는데 거절했어. 그랬더니 자기 손에 면도칼이 있다고, 죽을 수도 있다고…….”

설희는 밤새 입 안에 고여 있던 말들을 내뱉었다. 현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난감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표정이 일순간 얼굴을 뭉개듯 스쳐 지나갔다.

‘정말 그 애가 죽었다면…….’

설희는 매번 상황이 그렇듯 명확한데도 행동을 미루는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소심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소심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 대답은 안개가 진흙탕처럼 뭉클뭉클 꿈틀거리며 덮여있는 듯했다. 하지만 막이 아닌 안개를 걷어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순간 이건 현석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석과 동운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네 탓이야.’ 생각하는 순간 그 말은 주술처럼 뇌리에 달라붙었다. 불투명한 두꺼운 안개 속에서 분명한 어떤 실체가 일시에 드러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느낌은 또 한순간에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해.”

현석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런 설희를 지켜보기만 했다. 정지된 시선이었다.

“죽지 않았어. 그 앤.”

“뭐라고?”

“그건 일종의 쇼에 불과해. 죽을 사람이 전화하겠어?”

그의 가슴속에 있던 말들이 필사적으로 더 빨리 발효되었던 걸까.

“음…….”

설희가 보기에 동운은 그런 쇼를 할 정도로 영악한 타입은 아니었다.

“까짓것, 또 죽었으면 어때.”

낮지만 또렷한 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희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죽게 내버려 둬.’ 얼핏 그렇게 들은 것 같기도 했다. 현석이 바로 뒤이어 한 말인지 아니면 설희의 내면에서 들려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설희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정작 그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는 너무 심약했던 것뿐이야. 물론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심미안이 있기는 했어. 하지만 병적이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였어.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자기 파멸의 길로 치닫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설희의 안에서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자분자분히 달랬다.

“치사한 자식 같으니라고. 죽을 생각이면 조용히 죽을 것이지 왜 전화를 하고 지랄이야.”

현석의 욕설에 설핏 웃음이 나왔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었지?’

진짜 죽을 생각이었다면 누군가 미리 알아채지 않도록 비밀에 부쳤을 것이다. 그러나 설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방에서 욕실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과정을 소상하게 알리지 않았던가.

아침 햇살은 골목 안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듯 햇살은 어깨와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 내 곁엔 이 사람이 있어.’

현석의 얼굴은 다시 싱싱해져 있었다.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안도감 속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양 볼에 싸늘한 공기가 상쾌하게 와 닿았다. 현석은 어느 틈에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가봐.”

걸음을 멈추고 그가 말했다.

“이렇게 가라고?”

“하고 싶은 얘기 다 끝났잖아. 이젠 돌아가야지.”

어린아이를 달래듯 다정한 말투였다.

“새벽에 보고 싶다며 불러 놓고 한참을 기다리게 하고선.”

“얼굴 봤으면 됐지. 새삼스레 왜 그래?”

“혼자 있기가 좀 그래. 새해 첫날 아침부터 혼자서 거리를 배회하기도 싫고 우리 정말 오랜만이잖아.”

“이거, 참.”

그가 가볍게 혀를 찼다. 설희는 그런 현석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너는 또 내게서 달아나려는 거지. 집으로 가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설희는 팔을 꼭 잡은 채 그의 얼굴을 샅샅이 그리고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그런 설희의 시선을 피하며 현석이 말했다.

“그럼 한 시간만 기다려 줘.”

“한 시간?”

“그 정도면 될 거야. 잠깐 처리할 일이 있으니까. 한 시간 후에, 여기에서 만나. 추우면 어디 들어가 있던지.”

더 이상 그를 붙잡아 둘 순 없었다. 현석은 재빨리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뒷모습이 차츰 멀어져갔다. 설희는 뒤를 쫓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누르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설희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 잔 시키고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거리 쪽으로 향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건너편 공원에는 한겨울 나무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싹이 반짝이는 마로니에 나무그루로 에워싸인 기와지붕이 보였다. 추위에 지친 비둘기들이 재빠르게 날아올랐다가 공원 안 건물 사이로 사라지곤 했다. 길가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메마른 하늘을 흔들어 댔다. 설희의 시선이 창문을 통하여 거리의 이곳저곳을 선회하다가 시선이 멈춘 곳은 길 건너편의 이층 카페였다.

 

이 년 전 겨울이 시작되던 즈음에 갔던 곳이었다. 출입문과 가까운 구석 자리에 앉았다. 창문에 어깨를 기대고 시선을 멀리 던지니, 교차로가 눈에 들어왔다. 사방으로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 일정한 간격으로 명멸하는 신호등, 떠밀리다시피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그 위로 자욱한 회색 공기, 퇴근 무렵의 거리 풍경에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면서 온 신경은 출입문에 쏠려 있었다. 현석은 늘 약속 시간을 어겼다.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어떤 기대와 동시에 안타까움으로 가슴은 한껏 조여왔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면 심장이 쿵쿵 울려대는 것만 같았다. 여러 발걸음 소리는 몇 번이나 설희가 앉아 있는 구석 자리를 지나쳤다. 현석에 대한 그리움과 설렘은 그렇게 몇 차례나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거리에 불빛이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자욱한 매연은 안개처럼 낮게, 낮게 가라앉았다. 건너편 패스트푸드점 내부는 어둠 속에서 한층 또렷해졌다. 1, 2, 3층이 모두 통유리로 되어 인공조명 속에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따금 휘둘러보는 찻집의 어스레한 풍경은 대조적으로 우울해 보였다. 기다림에 지쳐 막막하고 무기력한 심정이 되어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때쯤 그가 불쑥 나타났다.

“많이 기다렸지?”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맞은편 자리에서 흘러나왔다. 설희는 창문에서 이마를 떼고 비스듬히 쓰러져 있던 어깨를 바로 세웠다. 현석의 얼굴엔 미안함이라고는 조금도 씌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설희의 마음은 그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재빠르게 생기를 되찾았다.

“나갈까?”

그는 늘 경쾌하게 말했다. 늘 그렇듯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찻집에서 나온 그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설희는 두세 걸음쯤 뒤에서 따라갔다. 그의 모습은 인파에 가려 사라졌다가 저만큼 앞에서 다시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그와의 거리를 애써 좁히려 하지 않았다. 발바닥이 참을 수 없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설희는 아무 데고 털썩 주저앉고만 싶어졌다.

현석은 그날 자꾸자꾸 걷기만 했다. 한참을 걷다가 이번에는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골목길 안은 더러웠다. 바닥엔 구정물이 고여 있었고 시큼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연이어 있는 식당들 문 앞엔 시커먼 버너가 푸른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 위의 커다란 솥 안에서 무엇인가 역한 냄새를 피우며 부글부글 끓어대고 있었다. 짙은 화장을 한 나이 든 여자들이 문 앞에서 손님을 끌었다. 비좁고 더러운 골목길을 배경으로 입가에 웃음을 베어 물고 손짓하는 나이 든 여자의 모습은 괴괴했다.

설희는 그만 되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의 단출한 방,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혼자서 맛없는 밥을 먹고, 벽을 향해 혼잣말하는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실 설희의 일상은 오래전부터 고여 있었다. 그 공간은 무엇보다 생명의 약동이 없었다. 혼자 있는 밤이면 어쩔 수 없이 그동안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 낼 수 없는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지는 연속의 날들이었다. 마치 인생 자체가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고단했다. 설희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자기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나 될까, 생각이 든 때가 많았다. 가던 길을 되돌아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현석의 걸음걸이와 고갯짓 하나하나가 골목길의 축축한 공기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설희에게 부드럽게 속삭였다.

“왜? 나랑 다니기 싫은 거야?”

귓가에 뜨거운 입김이 느껴졌다.

“아니, 이 골목길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현석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며 훑어보았다.

“둘만의 공간으로 가고 싶어.”

현석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설희의 손을 잡고 골목길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둘의 발소리가 좁은 골목길 위로 맞지 않는 박자처럼 울렸다.

방안은 고요했다. 농밀하게 무르익은 어둠 뒤의 가구들은 희미한 배경으로 물러나 있었다. 하나, 둘, 셋…… 설희는 누운 채로 천장을 향하여 숫자를 세어보았다. 숨소리가 낮고 불규칙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바로 곁에서 들려왔지만 동시에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방안 전체가 텅 비어버린 듯 공허했다.

“당신이 처음은 아니야, 아내가 아닌 여자와 잔 게.”

현석의 눈빛은 아래로 쏟아질 것처럼 위태롭고 낯설어 보였다.

“그동안 만났던 여자들은 모두 나를 좋아했어.”

현석은 설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만나는 사람은 없어?”

설희는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잠시, 거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순간적으로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의 손길이 내 볼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많이 보고 싶었어. 네가 자꾸 생각나더라고.”

그의 입술이 설희의 입술을 더듬었다. 현석과 설희는 필사적으로 상대의 혀를 찾았고 상처 입은 한 쌍의 짐승들처럼 서로를 어루만졌다. 숨이 막혀 질식할 정도로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현석의 떨리는 손이 가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때 설희의 눈앞에는 비 오는 붉은 핏빛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붉은빛 바다 앞에 두 사람이 알몸인 채로 서 있었고 거대한 바다가 두 사람을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핏빛 파도 주변에는 작은 물새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고 현란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거칠한 숨결이 이명耳鳴처럼 귓전을 맴돌았고 그의 손이 내 허벅지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핏빛 파도 주위를 맴돌던 작은 물새들이 하나씩 그 파도 속으로 자맥질하기 시작했다. 설희는 말하고 싶었다. 오래전 알고 있었던 남자의 이야기를, 다정했던 그와의 한때를. 그리고 그 남자가 한마디 말도 없이 자신을 떠나갔던 사실을. 아니, 무엇보다도 한번 사랑이 지나가면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현석을 처음 만난 것은 설희가 큐레이터로 근무했던 시립 미술관에서였다. 그해 여름 매월 정기적으로 여는 작가와의 만남에 초청된 금속공예 작가였다. 정작 그날 작가를 초대 한 관장은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고 마침 휴가철이라 강연이 시작되는 시간까지도 넓은 시청각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시간이 되자 몇십 명 빈자리를 드문드문 메워서 강의는 무사히 마쳤다.

현석의 첫인상은 수수함과 무심한 패션이 상대방에게 일종의 알 수 없는 위압을 주는 듯했다. 흡사 쥐스킨트의 소설에 나오는, 검정 외투를 입고 어디론가 바삐 걷는 좀머 씨를 연상시키는 그는 다소 심각하고 단호해 보이기도 했다. 마르고 핏기 없는 표정의 얼굴을 무채색의 옷 속에 감추고 고독의 무게가 내려앉은 발걸음을 옮기며 낮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강연을 마쳤다. 강연료를 전달하는 일도 설희에게 주어졌다. 강의가 끝나고 현석이 보이지 않아 미술관 구석구석을 찾아 헤맨 끝에 중앙 현관 앞에 서 있는 걸 겨우 발견했다. 오랜 시간 혼자만의 고독과 자유로운 삶에서 얻은 독창적인 사유의 결정들을 몸 안 가득 사리처럼 간직하고 있는 듯한 그는 안경 속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웃으며 설희에게 고개 인사를 했다. 그 눈빛이 서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너무 죄송해요. 이 더위에 힘든 걸음 하셨을 텐데.”

“괜찮습니다, 그게 뭐 댁의 탓도 아닌걸.”

그쯤에서 강의료 봉투를 전달해도 되었을 텐데, 설희는 그날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 마디 더 건넸다.

“여름 날씨 탓인 것 같아요. 더위는 사람들의 감정까지 게으르게 만드니까요.”

현석이 껄껄 웃었다.

“상관없다니까요. 게다가 난 유명하지도 않아서 아마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오히려 불편했을 겁니다.”

설희는 가볍게 머리를 숙인 후 강연료가 들어 있는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참!”

어색하게 봉투를 받던 현석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내게 시간 한번 내줘요. 그쪽이야말로 오늘 고생이던데 내 한턱내리다.”

거절하기에는 친근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서 잡아끄는 힘이 더 컸다. 더군다나 여름 내내 설희는 기획전시 들로 시달리고 있었다. 테이크아웃 한 커피를 마시며 미술관 정원을 걸으며 얘기가 이어졌다.

최근에 등산 장비를 새로 준비했다면서 산행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 흥겹게 말하는 그에게 설희는 왜 산에 가는 게 좋으냐고 물었다. 현석은 사우나를 한 것처럼 개운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고 했다.

설희는 얘기를 들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현석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일상을 슬쩍 지우고 사사로운 부딪침이나 여러 관계들을 전체적으로 보게 해주는가 하면 좀 더 너그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사물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되고 모든 게 맑아지는 느낌이 다른 무엇보다도 좋다는 걸까?’

그 후로 다른 작가들과 함께 만나기도 했다. 그는 늘 혼자 전시장에 나타나 전시를 보거나 뒤풀이 자리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다가 홀연 사라지기도 했다. 어느 날 둘만의 약속으로 만나서 밥에 곁들여 반주를 몇 잔 하고 노래방을 갔었다. 구석의 조명이 현란한 빛을 내뿜으며 돌아가고 있었다. 현석의 노랫소리가 밀실 안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듯 울려댔다. 소파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현석이 연달아 대여섯 곡의 노래를 부르는 동안 화면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며칠째 계속해서 내리는 비로 실내는 눅눅하고 끈끈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나뒹굴고 있는 빈 맥주 캔과 과일 안주가 놓여 있었다. 노래를 마친 현석이 설희를 일으켜 세웠다. 설희는 소파와 테이블 사이의 비좁은 공간에서 엉거주춤 안기는 자세가 되었다. 익숙한 노래 반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현석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노랫가락에 맞추어 설희의 상체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이제부터 서로 말을 놓기로 하지. 예의를 갖추면 난 하고픈 말이 나오지 않는 성미라서.”

현석의 목소리는 조금 퉁명스러웠다. 아마도 네 번째 만남 정도였다. 반말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었다. 밀실 안은 후덥지근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설희의 귓가에는 익숙한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남자의 품이 아늑했다. 설희는 현석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내겐 아내가 있어. 오래전에 자궁을 들어냈지.”

현석은 설희를 안은 채 한 바퀴 돌았다. 테이블 모서리에 설희는 무릎을 짓찧었다. 어지러웠다. 급하게 들이켰던 맥주가 갑자기 뜨겁게 올라왔다.

“몇 년 동안 우린 각방을 쓰고 있어.”

현석은 숨을 멈추고 설희를 바짝 끌어안았다. 설희는 그의 어깨에 부딪히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돌렸다.

“너도 외롭지? 외로운 사람은 둘 중의 하나야. 타인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지나치게 쌀쌀맞지. 지난번에 너는 내게 지나치게 친절했어.”

더운 입김이 귓가에서 속살거렸다. 노래 반주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햇살로 하얗게 달구어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미술관 정원에 있는 커다란 후박나무의 잎들은 누렇게 변해갔고 단풍잎의 붉은 색감은 선명해지고 있었다. 설희는 지난 상반기부터 얼마나 많은 작가와 만나고 얘기를 나누었던가. 기획전시들로 정리할 일이 번다했다. 그 사이에 비가 한 번 내렸고 미술관 마당은 비에 젖은 낙엽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한 달 동안 무수했던 행사 서류 정리가 거의 끝나자, 설희는 탈진할 것만 같았다. 현석에게는 오랫동안 연락이 오지 않았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술관 마당의 나무들이 빈 가지로 남아 싸늘해진 공기를 흔들어 댔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던 어느 날, 갑작스레 약속을 잡기엔 부담스러워 퇴근 후에 설희는 혼자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영화의 여운인지 내리는 비 때문인지 술 한 잔이 떠올랐다. 북적이는 큰길에서 벗어나 영화관 길 건너 좁은 골목을 걷다 보니 파란색 병 모양의 조명이 환하게 켜져 있고 그 병 위에 달이 올라가 있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출입문에 ‘혼술환영’이란 글귀가 반갑게 적혀 있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머리 위로는 벚꽃으로 만개한 장식이 음주 전부터 색다른 위안을 주는 듯했다. 테이블도 간격 유지가 잘 되어 있어서 부담 없이 적당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들어서는데 혼자 앉아 있던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남자는 설희를 안다는 듯이 반가운 눈인사를 보내왔다. 내 술병이 반도 비워지기 전에 그 남자와 합석했고 그는 예의가 바르긴 했지만, 말이 많았다. 자신이 보았던 영화며, 즐겨듣는 음악 얘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설희가 미술관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눈을 지그시 뜨며 웃었다.

“온종일 미술 작품들과 함께 지내시는군요. 참 부럽네요”

“글쎄요, 그건 생각보다 지루하고 갑갑한 일이에요.”

“예술을 가까이하는 이들, 미술 작가들을 동경해 왔어요. 막연하지만 관심이 있었거든요.”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동안 틈틈이 DVD나 음악 CD 그런 것들을 사 모았어요.”

왠지 멋쩍어져서 설희는 일없이 웃었다.

“그럼 나도 존경스러워 보이나요?”

“예. 아주 잘 어울려 보여요.”

설희는 젊은 남자와 함께 자주 시간을 보냈다. 그가 미술관에 와서 전시회를 관람하는 일요일도 있었고 퇴근 후에 함께 음악회며 극장에 가기도 했다. 그는 설희에게 지나치게 친절했다. 자신이 더 어린 듯하니 말을 놓아도 좋다고 했다. 그는 설희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설희는 문득 ‘이 남자가 외로운가?’ 생각했다. 그는 연말이 다가오는 즈음에 설희를 집으로 초대했다.

빛이 들지 않는 방이었다. 창문 밖은 옆 건물의 외벽이었고 그나마 창문 위에는 암막 커튼이 둘러쳐 있었다. 사면이 모두 LP, CD, DVD와 스피커로 에워싸여 있었다. 설희는 TV 화면과 마주하며 자리한 소파에 앉았다. 처음에는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설희도 이따금 듣곤 하던 엔니오 모리꼬네의 영화 음악이었다. 그는 천장을 가리키며 스피커의 성능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는 영화를 함께 보자고 했다. 태연함을 가장하며 사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남자의 부끄러움을 내면의 복합적인 감정으로 표현하는 내용이었는데 어느새 가슴 끝까지 밀려와 마음을 적시는 영화였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배경 음악의 여운이 한동안 귓가에 머물렀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눈빛은 강렬하게 타오르듯 하면서 촉촉하게 젖어있곤 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불을 껐기 때문에 방안은 어두웠다.

그 순간 설희는 갑자기 현석이 생각났다.

‘당신은 어디에 있는 거지?’

거친 숨소리가 발밑에서 들려왔다. 그는 소파 아래에서 무릎을 꿇은 채 간절한 눈빛으로 설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괴로운 듯 헐떡거리며 설희의 무릎에 뺨을 비벼댔다. 영화, 음악…… 세상과 격리된 것 같은 남자의 방, 그는 서툴렀고 감상적이었다. 그는 그동안 보았던 모든 영화의 장면들, 들었던 모든 선율의 절대적인 미를 음미하는 듯했다. 설희는 그의 도취에 차츰 빠져들어 갔다.

“당신, 참 매력적인 여자예요”.

그는 감격에 찬 얼굴로 설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너는 아름다워.”

설희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급류처럼 한바탕의 수치심이 지나간 뒤에 역설적으로 더 큰 쾌락에 열망이 싹 타올랐다. 쾌락의 끝은 죽음 같은 고요였다. 아무런 색채도, 소리도, 의식하고 있는 자신마저도 없었다. 수축한 동공 사이로 무언인가 명징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나올 때면 설희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손톱을 깊이 박았다. 단단한 살집이 손톱 끝에 느껴졌다. 그만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으로 숨이 막혀 오곤 했다. 둘 사이는 말이 적어졌다. 아니 말이 필요치 않았다.

설희는 그 순간 오랫동안 현석을 만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그의 방 창문에 어렴풋이 박명(薄明)이 걸리기 시작했을 때 설희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밝고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방바닥에는 벗어놓은 옷가지와 CD, DVD 등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옷을 입는 사이 그가 깨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설희에게 다가왔다.

“어젯밤 일, 꿈은 아니죠?”

남자의 목소리는 떨렸다. 설희는 알몸의 남자를 외면하며 말했다.

“나 일찍 볼 일이 있어서.”

설희의 목소리는 몹시 건조했다.

“우리 다시 만나는 거죠?”

“그럼,”

남자의 얼굴에서 떠오르는 환한 빛을 보는 순간, 설희는 자기 얼굴이 굳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다시 만나는 거죠?”

“그럼, 그럼, 그럼.”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설희는 도망치듯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처음이에요? 아니… 전 처음인데, 아무래도 좋아요. 늘 타인의 사랑을 엿보기만 했는데 제게도 그 사랑이 찾아온 거예요.”

간밤에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설희의 귓가에 달라붙어 있었다. 설희가 그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불꽃처럼 열정이 있는 그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순간이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을 기다리던 수 많았던 밤들이 그를 안고 있는 설희의 기억 속으로 흘러들었다. ‘아니었다고, 그 어느 밤도 사랑은 아니었다고, 다만 상처만……’ 깊어지고 있었다고 속삭였다. 그의 방에서 서둘러 나온 뒤 설희는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자줏빛 립스틱을 발랐다. 그러고는 거울 속에 보이는 립스틱 짙게 바른 여자에게 걷잡을 수 없는 환멸을 느끼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날 이후 동운을 만나지 않았다.

 

“와, 눈 온다!”

누군가의 외침에 카페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흰 눈이 점점이 흩날리고 있었다. 햇살은 얇은 구름 사이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눈발은 희뿌연 대기를 가득 채운 채 난무했고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눈송이들이 유리창으로 곤두박질하듯 달려들었다. 설희는 유리창에 손바닥을 댔다. 손톱만 한 눈송이들이 닿을 듯 다가왔다가 그대로 녹아버렸다.

설희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길 건너편 바람에 휘날리는 눈발 아래 현석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현석의 어깨에 여자의 어깨가 겹쳐 있었다. 그들의 어깨 위에서 눈송이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모퉁이에서 그들은 헤어지는 모양이었다. 현석이 모퉁이를 돌자, 여자는 가던 길을 다시 돌아왔다. 여자의 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녀는 새벽에 술집에서 설희의 옆에 앉아 있었던 여자였다. 설희는 여자의 모습이 멀어져서 작은 점 하나로 남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동안 한 번도 현석을 소유한다는 느낌은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사실 현석은 솔직했다. 자기의 말투와 행위들에서 알게 모르게 얼룩져 있는 다른 여자들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숨긴 적은 없었다.

“사랑은 순간 속에서 도달하는 영원과 같은 거야. 그 순간이 지나면 서로의 존재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지.”

현석은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유리창에서 떼어낸 설희의 손은 한동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무엇인가 움켜쥐려 했다가 놓친 것처럼 몹시 허전했다.

카페에서 나온 설희는 눈을 맞으며 길을 걸었다. 길은 현석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눈송이들이 미친 듯 휘날렸다. 뒤돌아보니 백지에 쓰인 먹글씨 같은 검은 발자국들 위에 다시 눈이 덮이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눈이 내리는 모습은 뽀얗게 설렜다. 비록 잠시 머물다 갈지라도 상처가 아물고 아프지 않게 하려는 듯 때맞춰 살포시 앉는 듯했다.

좁은 골목으로 길이 이어졌다가 다시 넓어졌다. 길 건너 골목 어귀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건물이 낮은 카페 간판 뒤로 줄지어 선 창이 낮은 한옥 처마들을 보니 갑자기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저 안에 있을 것이다. 녹슨 가로등, 파란 대문, 빛이 들지 않은 이층 방이 있던 곳, 저 안에 있을 것이다.’

설희는 걸음을 재촉했다.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걸음에 속도를 내었다. 갑자기 무엇인가 딱딱한 물체에 얼굴을 부딪쳤다. 순간 몸이 붕 하고 떠오르는 듯하더니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아무런 의식도 감각도 없이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바닥에 닿은 뺨에서 아리고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힘겹게 눈을 떠 보았다. 눈 위에서 조금씩 번져나가고 있는 것은 붉고 선명한 피였다. 바람이 소리 없이 눈을 몰고 지나갔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그리움도 열정도 꿈과 현실도 모두가 아득하게만 여겨졌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굵은 눈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설희는 입술을 열어 중얼거렸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 인사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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