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지난호 읽기

[수필]할아버지와 비카스 / 가산 해강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24.04.23|조회수21 목록 댓글 0

할아버지와 비카스

가산 해강

 

 

보드가야 대탑을 가로질러 작은 상점들 사이에, 눈에 띄지 않는 낡은 아쉬람이 있다. 원래 기웃거리기를 좋아하는 내가 이 아쉬람을 지나칠 이유는 없었다.

도대체 뭘 하는 아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낡은 시멘트 건물로 지어진 2층 건물에는 가난한 순례자를 위한 허름한 방 예닐곱이 늘어져 있고, 넓은 마당은 밭으로 잘 다듬어져 이런저런 채소들과 바나나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사실 이 아쉬람을 방문했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보드가야에서 티베트불교 한 종파인 까규파 묀람(기도)이라는 환생자 까르마파(린포체) 스님이 이끄는 큰 기도가 있다고 해서 구경삼아 가게 되었다. 남대문 동대문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사람이 부닥거리던 보드가야 그곳에서 구걸을 하는 수많은 빈민 아이들 중 하나인 비카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 아이와 하루 이틀 사흘 놀다 보니 비카스는 종일 누나와 동생, 그리고 길거리 친구들을 데리고 자기의 본분인 구걸을 잊은 채 내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녀석들은 구걸보다 5루피(100원) 정도 했던 아이스크림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아이는 아이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척 보아도 똑똑해 보이는 아이를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시키고 싶은 마음이 자연히 들게 되었다. 하지만 나 또한 길거리 행색으로 10여 년을 떠돌다 보니 마음뿐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한국 스님으로부터 기웃거리던 아쉬람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스님이 그곳에서 방을 얻어 벌써 한 달 정도 머무는데 그곳 아쉬람 원장님을 소개해 준다고 해서 찾아뵙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분이 바로 드와르코 수드라이 할아버지였다.

아쉬람 원장이기도 한 할아버지는 아주 어렸을 적, 비카스의 나이 때쯤 처음으로 간디 선생님을 만났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간디 선생님을 추종하는 인연들과 살다 보니 자연히 당신의 길이 그렇게 정해졌다고 한다.

평생 아쉬람을 간디의 신념으로 이루어 놓고 사신 할아버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단다. 그 이유는 결혼해서 아이들이 생기면 혹시 아쉬람을 운영하면서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그래서 행여 나쁜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하니 일반 사람들은 생각도 못 할 큰 어른임이 틀림없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방은 언젠가 간디 아쉬람에서 보았던 간디 생애에 쓰던 방과 너무 똑같았다. 장식이 없는 방, 선풍기 그리고 낡은 철제 침대 하나, 플라스틱 의자 하나, 그게 다였다. 음식도 꼭 아쉬람 아이들과 함께 똑같은 것으로 드시고 있었다.

당신이 아쉬람을 운영하며 평생 지켜온 신념이 있다면 그건 첫째가 간디 선생님이고, 두 번째는 재정의 투명성이었다고 하면서 작은 기부금에도 영수증을 손수 챙기셨다.

그런 할아버지가 원장으로 계시는 아쉬람에는 50~60명의 고아들이 있는데 무료로 숙식과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아쉬람은 크게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간단한 수술로 눈을 뜰 수 있게 하는 개안 수술이었다.

두 번째는 수없이 많은 보드가야 고아들을 모아 말 그대로 고아원을 운영하는 일이었다.

일 년이면 상당량의 성금이 인도 전역에서 모이는데 그중 95% 이상은 개안 수술을 위해 쓰인다고 했다. 한 해에 많이 하면 3,000명이 넘게 수술을 해서 세상을 볼 수 있게 한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고아들이 무료로 숙식과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다음 날 무작정 비카스의 손을 잡고 아쉬람으로 갔다.

내가 비카스의 손을 잡고 원장 할아버지께 갔을 때 비카스에게 할아버지는 이곳에 오면 절대 구걸은 안 된다고 했다. 그 뒤로 한 20여 분간 8살 난 비카스와 힌디어로 이야기를 나눈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으시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비카스의 대답이 내 뒤통수를 쳤다.

자기는 엄마와 누나, 그리고 동생이 둘 있는데 자기가 구걸하지 않으면 누가 그들을 돌보느냐고 눈물을 글썽였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내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엄마도 있고 형제도 있는 아이를 내 생각에만 미쳐 고아원을 생각하다니, 그 잘못된 생각이 혹시 내가 선행을 하고 있다는 잘못된 자긍심은 아니었는가! 그랬을 거로 생각하니 부끄럽기 한이 없었다.

8살 된 아이의 대답은 내 상식을 깨기에 충분했다. ‘누가 이 어린아이에게 삶의 무게를 걸어놓았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카스는 정말 그랬을 거라고 믿는다. 구걸을 해서 모은 돈으로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짜파티도 해 먹고, 짜이도 끓여 먹을 수 있는 자기의 능력, 이 일이 가족에게는 정말 필요했을 것이다.

비카스의 집엔 가보지 못했지만, 그 아이의 몸 상태를 보면 어떤지 가늠이 되었다. 빈대에게 물려 온몸이 부스럼투성인 비카스가 하루에 버는 돈은 생각보다 많았다. 한 가족이 생명을 부지하기에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순례객들 눈에 보이는 연민심이 그 어린아이들을 자꾸 길거리로 내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도 막일 노무자 일당보다 순례객들에게 손만 내밀면 2배 이상 더 벌 수도 있다는 것이다.

8살 비카스가 학교로 갈 일을 막는 일은 위대한 연민심이 만들어 낸다는 생각에 오히려 고사리 같은 손에 돈을 들려주는 순례객들이 미웠다. 돕고 싶으면 제발 시설이나 단체를 통해 도와달라고 인도 거리에서 외치고 싶었다.

어린 나이 간디 선생을 만나 평생 봉사의 삶을 사신 할아버지와 어쩌면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를 비카스가 오버랩되며 생활에서 우리가 만나는 환경과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