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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한국 근대문학 110년, 계간 『시와산문』 30년, 우리의 나아갈 길 / 이은숙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24.05.09|조회수34 목록 댓글 0

2024년 봄호(121 / 30주년 기념호)

 

 

한국 근대문학 110년, 계간 『시와산문』 30년, 우리의 나아갈 길

 

이은숙(본지 편집장)

 

 

10억분의 1초를 다루는 나노(10-9) 시대에 10년, 30년, 50년 뒤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문학을 말해야만 하는 역설적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당장 시류에 굴복하여 ‘첨단시대에 종이책이 웬 말인가?’라며 백기를 들 것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종이책이 있어야만 하는 당위와 그 존속을 위한 대안을 제시할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챗GPT가 시詩를 만들기도 하는 시대이니 말이다.

4차산업혁명시대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코로나 팬데믹으로 삶의 모든 부분이 첨단 기술 의존적 삶으로 개편되었고, 음식점의 주문과 서비스부터 심지어 글을 쓰고 시를 쓰는 일까지 기계와 AI로 대체할 수 있는 세상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러한 시절, 첨단 기술 앞에 인간의 존재 근간이라 할 수 있을 종합적 사고능력부터 자기 효용 능력, 삶의 자율적 통제력까지도 무력해질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과잉된 자의식일까. 인간의 역할과 능력이 어디까지 쓸모가 있을지…. AI가 모든 일을 대체할 수 있다면, 과연 AI가 결코 복사할 수 없는 인간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특성과 능력은 무엇으로부터 찾을 수 있을까?

 

우리 인간의 두뇌는, AI와 같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알고리즘으로 분석할 수 없으며 모든 선택지를 꿰뚫어 결과를 예측한 채 행동할 수 없다. 그러나 ‘환경의 자극’이라는 양분을 먹고 진보하며 기능하고 행동하며 그 결과로 얻어진 경험에 또다시 영향을 받고 변화한다. 그리고 변화에 의한 우리의 반응이 다시 환경적 자극이 되어 또다시 반응하고 행동하고 즐긴다. 물론 그 경험 속에 불안이나 고통, 어려움도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마냥 아픈 것만은 아니다. 불안과 고통에 적응하고 통증에 아파하며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고 삶의 위험으로부터 도피한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부작용이 작용을 이길 수 없게 되어있다는 혹자의 말처럼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삶을 통한 ‘자극’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삶 속에서 만나는 부작용들 앞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스스로 작용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용의 첫 번째는 ‘즐겁고도 자극적인 정신활동’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 즐겁고도 자극적인 정신활동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많은 것을 예로 들 수 있겠지만, 그중 단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예술 창작과 문화 향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창의적 작용을 무언가가 대체했을 때 우리 삶에 결여 될 수밖에 없는 그 즐겁고도 멋진 자극을 AI에 편승하여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첨단시대에 우리의 ‘창작과 향유’를 ChatGPT에 결코 양도할 수 없다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그 창작과 향유가 영상이나 온라인 전자문서뿐 아니라 종이책이어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가 지나가는 흥미진진한 영상과 온라인 플랫폼이 적절히 이용하면 우리에게 편리함과 유익을 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모든 삶을 대체하고 우리의 정신이 그 영상 자극과 편리성에 매몰될 때 우리의 두뇌는 점차 과도한 자극을 추구하게 되고 그 지나친 자극은 도파민의 과분비를 유도한다. 도파민은 중독성이 있어서 점차 더욱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어있다. 마치 신생아가 모유를 접하기 이전에 젖병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는 분유를 경험하면 유두 혼선을 일으켜 각종 면역 물질 전달, 뇌세포 발달을 활발하게 해 주는 턱 근육 운동, 이를 통한 인내심 학습 등의 유익을 마다하고 모유 수유를 거부하여 가짜 젖꼭지만을 찾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극은 어렵게 얻어질수록 운동력이 생기고 운동력이 클수록 반응과 작용, 희열이 더해져 중독되지 않는 순기능적 자극이 되는 것이다.

 

종이책은 영상보다 정보 습득력이 더디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매우 작은 양의 지식밖에는 얻을 수 없지만 그 종이책은 우리를 운동하게 하고 반응하게 하고 행동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이책의 순기능으로 인류사회를 선도先導하는 것이 문학잡지와 같은 ‘페이퍼 미디어’의 역할이다. 또한 그 태생적 불편함에도 종이책은 문학적 가치의 여부, 시대적 흐름에서 반드시 고민해 볼 문제의식 등을 고려하여 지면 할애의 기준을 가져야 그 가치가 유지된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유명세에 따라 편향적 차별을 두지 않으며 문학적 가치가 있다면 유명하든 무명하든 충실히 작가와 대중을 연결해 주는 교각 역할을 감당할 때, 이 나노 시대에 종이책의 가치가 존중될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을 둘러싼 자연과 인문환경의 메커니즘을 돌아보면 언제나 다양한 도전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맞서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고 작은 숱한 도전에 응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반복적이고 악순환적인, 고질적 문제들에 대해 극복하고자 하는 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 발행인이었던 이충이 시인은 독서 인구가 급감하기 시작했던 90년대 초, 척박한 시절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투지를 가지고 계간 『시와산문』을 창간했으며 30년이 가깝도록 결호 없이 발행해 왔다. 그리고 선대 발행인의 투철한 의지와 문학정신을 계승해 나가고자 그의 제자인 장병환 시인이 스승에 대한 의리와 문학에 대한 충성된 마음으로 『시와산문』을 이어받아 헌신하고 있다. 개인의 이익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시대에, 스승에 대한 의리와 문학에 대한 충성된 마음으로 헌신하는 발행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일이다. 문학적 권력도 이윤도 탐하지 않고 오롯이 문학에 대한 밀도 높은 애정만으로 문예지사를 운영하고 있는 발행인이 있다는 것은 우리 『시와산문』의 큰 자산이다. 1대 발행인과 2대 발행인의 그 투지는 분명 30년 뒤에도 종이책을 보는 문학 향유자들이 큰 의미로 존재하게 하는 작용과 결과로 이어지리라 확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투지야말로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역사 속에서뿐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를 존속하게 하는 구동력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동안 많은 문예지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오늘의 문단을 이루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을 순간들에도 계간 『시와산문』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창조적 자극’을 계속해 왔다. 30년의 역사는 많은 눈물과 땀, 그리고 선배들의 열정이 얼룩져 있다. 이제 『시와산문』의 새로운 미래를 써 내려가야 할 책무는 오롯이 우리 것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영광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거룩한 채무감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역사는 빛나는 여정이 될 것이다. 『시와산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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