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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우리 시대 서정시의 존재론 / 유성호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24.05.09|조회수26 목록 댓글 0

 

우리 시대 서정시의 존재론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의미와 소리의 결속으로서의 서정시

 

서정시는 짧은 언어로 스스로의 존재증명을 해온 오랜 역사를 거느리고 있다. 기억을 촉진하는 함축적 언어를 통한 촌철살인의 감동은 인간이 예술을 통해 전유하고자 했던 문화적 욕망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함축적 언어를 통해 인류의 경험과 지혜가 전승되어온 것은 단연 이러한 욕망이 구체화한 사례일 것이다. 또한 인간은 언어라는 것이 불완전한 도구임을 철저하게 자각해왔고 그래서 언어 ‘이전’ 혹은 ‘너머’ 상태를 열망하기도 하였다. 이러저러한 언어의 한계로 인해 진정한 감동은 언어 바깥에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종교적 전언이 이러한 속성을 대표하는 것일 터이다.

불가피하게 언어예술로서의 운명을 걸머진 서정시는 언어에 대한 이러한 이중 욕망을 동시에 표상해왔다. 말하자면 언어를 통해 감동을 주기도 하고 의미를 뛰어넘는 초월과 비약의 상상력을 중시하기도 한 것이다. “시 삼백을 한마디로 줄이면 생각에 사邪가 없다는 것”(공자)이라는 동양 선현 말씀에는 의미론적 욕망이 배어 있고,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쇼펜하우어)라는 서양 철학자의 언급에는 탈脫의미론적 욕망이 암시되어 있다. 그만큼 서정시는 의미론적 구심력과 원심력 사이에서 ‘시적인 것’을 구성해온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균형은 의미와 소리의 조화로운 어울림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의미에 중심을 두면 전언이 확장되어갔고, 소리의 손을 들어주었을 때는 형식 자체가 ‘시적인 것’의 수원水源이 되었다. 시인들은 자연스럽게 의미와 소리의 결속을 통해 내면적 파동을 그리면서 이때 성취되는 ‘시적인 것’이 서정의 가장 본원적인 목표임을 차근차근 증명해왔다. 물론 이러한 서정시의 존재론에 대한 명명이 탈脫사회성을 부추긴다든가 내면을 절대화한다든가 하는 지적은 수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정의 원리가 근대 자본주의 원리의 대척점에서 발원하는 것임을 망각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의미와 소리의 각별한 결속을 통한 ‘시적인 것’의 적공積功, 이른바 고전적 투명성의 점증 작업이야말로 서정시의 종요로운 몫이라고 강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존재론적 현현을 수행하는 ‘충만한 현재형’의 시간

 

우리는 서정시가 일상과는 다르게 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소설이나 극의 언어도 일상어와는 일정하게 구별되지만 서정시는 일상어와 다른 특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속성을 지닌다. 한마디로 서정시는 다른 장르보다 더 많은 것을 더 강렬하게 전달하려는 언어를 장착하고 있는 셈이다. 그만큼 서정시의 언어는 용어법이나 서술상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감각과 사유 차원에서 그 선택이 이루어지며, 그 결과 단순한 기술상의 언어가 아닌 일종의 존재내적 언어가 되어온 것이다. 그 속성을 두고 사람들은 ‘함축’을 핵심으로 하면서 일상어와 날카로운 단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해왔다.

그런가 하면 서정시는 시간에 대한 경험과 그로 인한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양식적 특성을 지닌다. 그만큼 기억 양상을 다양하게 다루는 서정시는 그 원리를 따라 삶의 원초적 경험에 대한 상상적 복원을 수행해간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 안에는 철저하게 사적私的인 경험과 기억이 담기게 마련이지만, 그것을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기억으로 승화시키는 원리가 동시에 포개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삶에 대한 유한자有限者로서의 관조와 고백이 그 안에 형상화되기도 한다. 이 침몰과 퇴행의 시대에 우리는 서정시가 이러한 존재론적 한계와 함께 포기하지 말아야 할 실존적 표정을 선명하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때 서정시는 감각적 충실성에 의해 사실적으로 재현된 기억이 아니라, 오랜 시간성에 의해 매개된 가치들을 준별하고 통합함으로써 사물 배후에 있는 본질에 대한 탐구를 수행해가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원리는, 그것이 내면을 다루든 풍경을 다루든, 시간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세계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을 투시하고 반성하려는 시선과 연관된다. 이때 시간이란 등질적이고 분절된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인지되는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이다. 물론 한 편의 서정시 안에 배열되는 사물은 시인의 시선에 의해 고스란히 채택되고 배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 자체의 풍경과 목소리를 고스란히 재현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을 우의적으로 활용하려는 욕망보다는, 풍경에 존재하는 시간의 파동을 통해 사물의 음영을 보여주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중요해지는 것이 시인의 심안心眼인데, 이때 시인은 ‘풍경 자체인 시간’을 바라보는 이가 되어가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복합적인 자의식을 담은 시편이나, 현실 깊이 자신의 심장을 개입시키는 치열한 언어들이 우리 서정시의 풍요로움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관건은 새로운 충격과 전율을 통해 미학적 경험의 새로운 파문을 깊이 있게 만드는가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정시가 절제와 여백을 통해 불필요한 수사를 제거하고 함축적 묘미를 살려내는 데 유일한 활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좋은 서정시는 언어의 경제학과 사유의 응집성을 결속하는 방향으로 씌어져갈 것임을 예감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는 최근 옹색해진 시단의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시의 감동이란 여전히 우리가 비평적으로 요청해야 할 호환할 수 없는 몫이라고 말하려고 한다. 물론 감동이란 수용자의 능력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의 우수한 서정시는 삶의 다양한 경험과 충동에 정서적 균형을 부여하고 인간의 삶을 보다 높은 존재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초월의 힘을 발휘하면서 순수한 삶의 순간적 회복을 가져온다. 그 섬광의 순간에 독자들의 능동적 참여가 이루어질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 서정시가 자신만의 존재론적 현현을 수행하는 ‘충만한 현재형’의 시간이 아니겠는가.

 

 

3. 존재의 심연과 시원始原을 보여주는 방식

 

우리는 이행기에 처할 때마다 서정시의 위기를 줄곧 운위해왔다. 물론 그것은 대안 없는 자기 위안의 형식이기 십상이었다. 인간 역사 곳곳에 서정시가 위기 아닌 시대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더구나 서정시는 소수 애호가들 사이에서 창작되고 유통되어왔고, 근대 이후에 와서도 예술 장르 중 가장 적은 수요자들을 거느려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정시가 운명적으로 소수 독자를 가진다는 명제는 요즘 더욱 실감을 더하고 있다. 서정시가 독자 숫자에 집착했을 때 그것은 언어의 이완을 통한 감상벽癖에의 몰입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서정시의 위기를 말할 때 반드시 그 위기라는 말이 함의하는 내포를 눈여겨둘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서정시의 위기 담론이 적실성을 얻으려면 독자 숫자의 감소에 따른 소외 현상이 아니라, 정체성의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새로운 장르 인식 측면에서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서정시의 위기 운운하는 것은 때만 되면 비판과 수용을 거듭하는 저널리즘적 관행, 또는 비평적 고식姑息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서정시라는 배타적이고 자율적인 장르 규정이 유효성을 지속해간다면, 그 존재를 이루는 근거는 인간에 대한 끝없는 자기 질문이라고 믿는다. 서정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가 가지는 한계로부터 해방되려는, 또는 언어를 씀으로써 언어를 더 이상 쓰지 않으려는 역설적 지점에 존재 영역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소한도의 의미 충전 또는 언어경제학이 없이는 서정시의 존재 의의는 서서히 희석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정시의 행방은 어떻게 설계될 수 있을까?

시인들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들도 시간성의 형식이 아니고는 온전히 파악될 수 없다는 발견을 줄곧 언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형상이나 기제가 기억이나 흔적, 상처, 유적遺跡과 관련된 이미지일 것이다. 이처럼 시인들은 서정의 원리가 시간의 축적과 그것의 순간적 응축 속에서 가능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으며, 그래서인지 한결같이 자신이 지나온 시간의 마디들을 되살리면서 그 행간에 은폐된 시간의 흔적을 재구再構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가열한 내적 반성을 통해 시원始原의 형상을 복원하려 하기도 한다. 여기서 시원이란 공간적 유토피아나 시간적 유년기 등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지각 형식으로는 가닿기 어려운 신성神聖의 가치를 내재한 궁극적 본향이기도 하고, 훼손되기 이전의(역으로 일체의 훼손을 치유한 이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경지를 간접화한 형상이기도 한다. 시인들은 그것을 일상에서 발견하기도 하고, 아니면 그것의 회복 불가능성에 대해 절망하기도 한다. 이러한 탐구를 통해 서정시는 시원의 상상적 완성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하게 펼쳐지는 우리 시대의 서정시에는 시간성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욕망과 실천이 따라다니는데, 이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성숙하는 존재를 투시하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시선과 궁극적으로 연관되는 것일 터이다. 이때 시간은 등량화한 근대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삶 속에서 경험되고 인지되는 시인 자신의 주관적 형식을 띨 것이다.

우리는 서정시의 가능성 가운데 주체의 시간 경험을 사물의 풍경과 등가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존재의 심연과 시원始原을 보여주는 방식을 옹호해왔다. 시인들은 주체 중심의 인식론적 폐해를 경계하면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시간들과 닮은 풍경을 선명하게 제시해간다. 이때 그 풍경은 공간 개념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흐름이 덧입혀진 근원적인 것으로 몸을 바꾼다. 이처럼 신성 탐색, 시원 상상, 시간과 기억에 대한 메타적 성찰, 풍경과 상상의 결합 등은 우리 시대 ‘시적인 것’을 이루는 원초적 질료들일 것이다. 이러한 미학적 형상을 통해 서정시의 가치는 지속되고 있고 그 좌표와 행방은 설계되어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근대가 지워버린, 우리 기억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오래된 서정시의 위의威儀일 것이니까 말이다. 이 점, 여전히 근대의 역상逆像으로서 서정시가 존재하는 근본적 이유가 될 것이고, 서정시의 역설적 미래를 암시하는 지표가 되어줄 것이다.

 

 

4. 서정시의 가능성과 한계

 

서정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그것을 순간적으로 초월하려는 상상력 사이에서 펼쳐지는 언어예술이다. 따라서 합리적 이성으로 현실을 파악하는 과정과 특별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서정시의 두 축을 자연스럽게 구성한다. 그것은 복잡한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를 마련하여 그 경계로부터 새로운 삶의 자양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서정시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끝없이 질문하고 그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경험해간다.

“당신에게 위안을 주는 이라고 해서 그가 자신이 하는 말처럼 소박하거나 평탄하게 산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이 역시 어려움과 슬픔 속에 살고 있으며 당신보다 훨씬 더 지쳐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당신을 위안할 수 없었으리라.” 마음과 대상, 상처와 위안, 순간과 영원에 관한 시인 릴케의 사유에 공감하면서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에게 느끼곤 했던 존재의 넘침과 모자람을 동시에 생각해본다. 위안을 주는 사람이 사실은 위안을 필요로 했던 사람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고통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위안하고 누군가에게 위안을 받는 마음을 상상해본다. 주어가 사실은 목적어였다는 진실이야말로 서정시의 역설적 지점과 매우 닮았지 않은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그리하여 너희 사이에서 하늘 바람이 춤추게 하라/서로 사랑하라/하지만 그것으로 서로를 구속하지는 말라/그보다 너희 영혼과 영혼의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펼쳐 놓아두라/서로 잔을 채우되 한 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서로 빵을 나누되 한 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더불어 노래하고 춤추고 즐거워하되 모두는 스스로 혼자 있게 하라/현악기 줄이 하나의 음악을 울려도 저 혼자 하나이듯이/서로 가슴을 주되 그 안에 묶어 두지는 말라”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이러한 마음에는 집착과 자유라는 사랑의 양면성이 담겨 있다. 서로 함께하지만 둘 사이에 어떤 거리를 둠으로써 그 사이에 하늘 바람이 춤추게 하고, 영혼과 영혼 사이에 바다를 출렁이게 하고,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즐거워하면서도 스스로 혼자 있게 하라는 권면은 “현악기 줄이 하나의 음악을 울려도 저 혼자 하나이듯이” 다가오는 서정시의 존재론을 그대로 들려준다. 오직 커다란 생명의 손길만이 가슴을 간직하게 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 가능해지는 상상적 세계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발화를 통해 고요하고 아름다운 삶의 순간적 회복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생성되는 서정시는 그리움과 따뜻함을 주조로 하는 중용과 위안의 언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위무해간다. 그 순간적 충만함에 의해 우리는 시간의 가혹한 흐름 속에서 잃어버렸던 존재의 원형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가능한 것 역시 그 안에 서정시의 호환할 수 없는 위안과 치유의 아우라가 출렁이고 있기 때문인데, 바로 그 지점에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서정시의 역설이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서정시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언어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려는 열망이 있는 한 언제나 씌어지고 읽히고 소통되고 사람들의 체험 속에 굉장히 독자적이고 소중한 영역을 형성해갈 것이다. 다만 서정시를 이해하고 준별하고 평가하는 비평적 안목의 세련화가 더없이 긴요하다는 점에서 비평하는 이들의 어깨가 결코 가볍지 않다. 서정시는 아무튼 유용성과 영향력이라는 효용론적 사고의 저편에서 생성되는 만큼, 지금처럼 교환가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유력한 항체로서 더없이 귀중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제 AI와 인간의 협업을 통해 창작되는 작품이 만들어낼 새로운 서정시의 가능성은 필연적 경로로 보인다. 이로 인해 형성될 새로운 비평적 관점도 충분히 기대해봄 직하다. 특별히 디지털 문화에 더 익숙한 젊은 세대들과 함께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환경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서정시의 존재론에 대하여 토론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어쨌든 세상은 변한다. 문학도 역사도 모두 변한다. 그 변화해가는 시간의 가혹함과 덧없음을 서정시는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증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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