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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계간평]비루한 일상, 도도한 생활──김애란, 『침이 고인다』 / 김나정

작성자조영미|작성시간08.09.08|조회수1,447 목록 댓글 0

비루한 일상, 도도한 생활

──김애란, 『침이 고인다』

 

 

김나정

 

 

 

『침이 고인다』는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로 평단과 독자의 주목을 받았던 김애란의 두 번째 작품집이다. 김애란은 80년대생 답지 않은 진중함과 80년대생 다운 발랄함을 동시에 지닌 작가다. 생을 보는 시선은 진지하되, 그것을 소설화시키는 방식은 참신하다. 그 상반되는 요소의 기묘한 조화가 그녀 소설의 매력이다. 김애란의 소설은 수난의 가족사나 일상의 곤궁함을 경쾌하게 들어올린다. 이를테면, 보증을 잘못 선 아버지 탓에 부도가 났다. 차압딱지가 집안 곳곳에 붙고 값나가는 가재도구들이 팔려나간다. 아빠는 달아나고 언니는 휴학계를 내고 내 피아노는 빚 탕감을 위해 끌려나가게 생겼다. 곡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암담한 상황이다. 상황이 심각하니 만큼 소설도 의당 이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듯싶다. 그러나 작가는 시치미 떼고 이 당연한 공식에서 엇나간다.

 

아빠는 오토바이 ‘쇼바’를 잔뜩 올린 채 도로 위를 달리며 울고 있었다. 아빠는 오토바이 속도가 최절정에 다다랐을 때, 앞바퀴를 들며 “얘들아 너흰 절대 보증서지 마!” 오열했고, 비닐하우스 옆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속도위반 딱지를 뗐다고 했다. 벌금은 고스란히 만두 가게서 일하는 엄마 앞으로 전가됐다.

──「도도한 생활」 일부

 

김애란은 상황에 대해 진부한 해석을 거부한다. 문단 내에서 자잘한 반전들이 거듭된다. 이런 상황에 대한 생뚱한 반응이 소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정보원은 수첩 위에 ‘몸이 약해서리’라고 적은 뒤, 볼펜을 주머니에 넣어다. 그런 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었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여기, 회 잘 뜨는 집이 어디입니까?”

──「플라이데이리코더」 일부

 

정보원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상식’에서 벗어난다. 이렇듯 뒤통수치는 장면들이 소설집 곳곳에 등장한다. 이런 상황에 대한 진부하지 않은 해석과 반전들이 소설에 탄력을 준다. 아버지가 구치소에 들어가자 딸은 “아빠 콩 좋아했잖아.” 의뭉을 떤다. 생뚱맞고 엉뚱하다. 진지 대신 딴전으로 대응한다. 가족들은 텔레비전에 구치소가 나오면 ‘하하하’ 웃으며 채널을 돌린다. 이런 발랄한 어긋남에서 발생하는 유머가 심각한 상황에서 한걸음 물러서게 만든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더불어 발랄하고 참신한 비유들도 글맛을 살린다. 고시원에 놓인 슬리퍼는 추레하다. 그러나 “충치를 앓는 환자처럼 빨간 리본을 동여맨 삼선 슬리퍼”는 참신하다. “여자의 옷차림은 스카프를 둘러맨 오리처럼 어정쩡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주인공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자처럼, 후배가 저지르는 작은 실수들을 숨죽여 기다리게 되었다.” 작가가 고안해낸 갖가지 비유들은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보게 만든다. 상황에 대한 남다른 해석과 참신한 비유가 진부한 상황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이 작품집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은 하나같이 팍팍하다. 재수생, 실직자, 취업준비생, 9급 공무원 준비생, 방 한 칸에 사는 오누이, 광복절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어달리기를 하고 꼭짓점 댄스를 춰야 하는 학원 강사 등이 등장한다. 소설이 배경으로 삼는 공간도 신림동 고시촌, 영등포 여인숙, 노량진 재수학원, 회기역, 개봉동 이모집 등 서울 변두리에서 맴돈다. 언저리의 삶에서 벗어날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옥탑방에서 반지하방으로 이사 가듯, 이 언저리에서 다른 언저리로 옮겨갈 뿐이다. 삶은 좀처럼 업그레이드되지 않고, 해뜰 날은 기약 없다.

 

그들의 하루하루는 다들 어슷비슷하다. 매년 재탕되는 성탄특선 영화처럼 지루하다. 맥컬리 컬킨이 비명을 지르는 것은 도둑 때문이 아니라, 지겨워서란다. 생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다. 재수생활을 털고 대학에 들어가면 만사가 해결될 줄 알았는데 취업이 안 된다. “모든 것이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는 재수생활을 끝냈다. 그러나 생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63빌딩처럼 수직상승하는 대신 국철에 올라탄 듯 노량진에서의 재수생활로 취업재수생 시절의 현재로 평행 이동할 뿐이다. 직장을 얻으면 남들처럼 크리스마스를 그럴싸하게 보낼 줄 알았는데 서울 시내를 아무리 싸돌아 다녀도 모텔 방 한 칸 잡기도 어렵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삶은 그런 삶을 감당하는 것이다.

 

신림동 고시 인구가 2만 명 정도 된다던데. 여기를 지나간 이들 모두가 일제히 숨죽이며 살았겠구나. 2만 명의 침묵, 2만 명의 뒤꿈치, 2만 명의 불면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게 어떤 공간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몇십 년간 반복되었다는 것이.

──「기도」 일부

 

“속절없이 멀어져가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대체 나아진다는 게 무엇일까 생각했다.” 낙관의 증거는 도통 찾을 수 없고, 딱히 희망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라는 푸슈킨의 시구가 무색하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데서 가까스로 안도할 뿐이다. 삶은 그저 묵묵히 견디는 것이다. 삶이 진행형이기에 삶의 고민도 계속 이어진다. 살아있는 한 삶이 만만해지는 순간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 김애란 소설의 주인공들은 부지런히 ‘고민한다.’ 다들 삶의 자잘한 고민거리들을 끌어안고 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와 같은 거창한 번민과는 거리가 있다. 그들의 고민들은 사소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다. 「침이 고인다」의 주인공은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서 뒤척이며 이런 고민을 한다. 지각이다, 피곤하다, 더 잘까? 지각하면 벌금이다. 그런데 정말 피곤하다. 벌금을 내고 좀더 잘까. 잔다면 얼마나 더 잘 수 있을까?

 

누구나 해봤음직한 고민이다. 좋아하는 남자를 둔 여자의 이런 고민도 낯설지 않다.

‘그보다는 지금이 그런 얘기를 하기에 적당한 때인가? 이 사람, 자꾸 옛날 얘기를 하는 걸 보니 나를 부드럽게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만큼 내가 편하다는 뜻일까? 내일 영화를 보자고 해볼까? 그건 너무 상투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상투적인 게 최고가 아닐까?’

──「네모난 자리들」 일부

 

이런 고민거리를 안고 있는 주인공들은 희망도 소박하다. 10년 만에 10억 만들기와 같은 배포 좋은 야심을 품고 있지도 않다. 그저 남들처럼만 살고프다. 「도도한 생활」의 엄마가 딸에게 피아노를 사준 것은 딸을 피아니스트로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보통’의 기준을 따라가고 싶어서였다. 도도한 생활을 꿈꾸지만, 그런 꿈은 이내 접어야 한다. 그들은 그저 의, 식, 주의 해결과 성욕과 식욕이 해결되기를 원한다.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두 다리 뻗고 잠잘 수 있는 곳, 애인과 속편하게 몸을 섞을 수 있는 방 한 칸을 마련하는 것이 급하다. 아주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을 채우는 것, 벌어먹고 사는 일도 수월치 않다.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 남들만큼 사는 것도 만만치 않다.

김애란 소설에는 시련을 이겨내고 성공을 거머쥐는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여느 갑남을녀들, 일상인들의 삶을 다룬다. 소설 주인공들은 일상의 우리들과 닮아 있다. 일상의 비루함, 출구 없음은 우리 모두가 더불어 지니는 공통분모이다. 일상의 비루함과 삶의 팍팍함은 ‘나’혼자만 걸머지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자꾸만 주변부로 밀려났다. 나는 수학이 약하니까 꼭 들어야 하는데. 지난달 수업이랑 이어지니까 정말 꼭 들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곳에 있던 천여 명의 사람들에게도 그 수업을 꼭 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 일부

 

누구나 다 힘드니, 나만 특별히 힘들다고 엄살을 떨 수도 없다. 팍팍한 삶의 조건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배려한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의 연대감이라 할 수 있다. 일상적인 배려, 사소한 따뜻함으로 팍팍한 삶을 견디는 것이다. 상처자리를 서로 보듬어주고, 상대의 마음자리를 헤아려 할 말 못할 말을 고른다. 다 큰 오누이가 동거를 한다.

 

동생은 민망해질 상황이면 사내에게 재빨리 농담을 건넸다. 혹은 대놓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 뻔뻔함이 얼마나 큰 배려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혜이기도 했다.

──「성탄전야」 일부

 

국숫집의 엄마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던 손님은 혹시 식을까봐 자기 맞은편 국수에 빈 그릇을 엎어놓았던 사내였다. 뒤이어 나타난 여자와 그는 머리를 맞대고 조용하고 친밀하게 국수를 먹었다.

허나 남을 무조건 배려한다는 것이 실제로는 쉽지 않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침이 고인다」는 그런 배려의 곤란함을 보여준다. 한 학원 강사가 갈 데 없는 후배를 방에 맞아들인다. 하룻밤 재워달라는 나그네처럼 급작스레 나타난 후배는 그녀에게 어린 시절 도서관에서 버려졌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 고백이 상당히 부담스럽다. “그녀는 뭔가 참 익숙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구나 싶어, 그것이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후배의 불행과 상관없이 좀 피곤한 느낌이 들었다.”(59쪽) 후배는 엄마가 그때 건네줬던 인삼껌을 반으로 나누어 그녀에게 건네준다. 거짓말 같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후배의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었다.(61쪽) 후배가 마지막으로 했던 한 마디 때문에 그녀와 동거를 하게 된다.

 

“그날 이후로 사라진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말이에요. “지금도 침이 고여요.(61쪽)”

후배는 자신의 상처에 ‘관습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침이 고인다는 것은 즉물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다. 관념적인 말로 상처를 과대포장하지 않은 것에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얼마동안, 얼마만큼 받아들여줄 수 있을까. 배려와 환대가 말만큼 만만치 않다. 동거는 3개월 동안 지속된다. 그러나 남과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일상의 습관, 관계의 습관, 그 습관을 예상하는 습관까지 생긴다. 더군다나 후배가 자꾸 자신을 닮아가는 것이 뵈기 싫다. 학원버스 기사가 연단에 올라가 지루하고 식상한 「남행열차」를 불렀을 때 그녀는 “왠지 후배와 그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별을 통고하자 후배는 묵묵히 짐을 싸서 나간다.

 

“어쩌면 처음 해보는 남의집살이가 불편해 최대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서로를 조금씩 견디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223쪽)” 어쩔 수 없었다. 배려에도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다. 한때의 공감과 한때의 배려만 가능하다. 자신의 개인적인 공간에 남을 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조건적인 환대와 기한 없는 배려는 보살이나 성녀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일상적인 인간은 그럴 수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타인에 대해 배려를 해야 한다는 강박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에서 어긋난다. 검열과 의식적 배려는 내 삶을 힘들게 만든다. “나 스스로 누군가를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는 오래된 배려심이랄까, 그런 습관에 쫓기는 기분이다.(209쪽)” 타인에 대한 강박적인 배려와 습관적인 배려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에서 등돌리게 되는 것이다. 배려에 유효기간을 두고, 한계를 그어주는 것이 나와 남 모두를 배려해줄 수 있는 방편은 아닐까? 홀로 남은 방안에서 그녀는 후배가 건네준 인삼껌 반쪽을 씹는다.

 

첫 소설집의 중심에 ‘아빠’가 있었다면, 이번 소설집은 ‘엄마’의 삶에 중점을 둔다. 「달려라, 아비」에서 집을 뛰쳐나간 아버지에게 선글라스를 씌워 달음박질치게 했다면 작가는 이 소설집의 「칼자국」에서 죽은 엄마의 칼로 사과를 깎아 먹는다.

소설 속의 어머니는 늘 칼을 쥐고 있었다. 칼은 누구의 손에, 어떤 의도에 의해 쥐어졌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진다. 분노와 원한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칼은 남과 나를 해치는 살상도구다. 반면 엄마에게 칼은 생산의 도구였다. 생활무능력자에 바람까지 피는 남편 대신 엄마는 칼로 국숫집을 꾸려가고 자식에게 음식을 만들어준다. 하여 “어머니의 칼질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 한 가지 기술을 터득한 사람의 자부와 먹고살고 있다는 안도와 단순한 일을 반복할 때 나오는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155쪽)”

 

엄마는 일상을 감당하고 생활을 떠맡는다. 바람둥이 남편에, 칼국수 집을 꾸려나가는 것이 보통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엄마는 원한을 품거나 원망을 하거나 패악을 떠는 대신 칼을 잡아 요리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밥을 짓는 것’은 거르지 않았다. 하여 나는 배곯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 동안 감당해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생일이면 양지를 찢어 미역국을 끓이고, 구정에는 가래떡을 뽑고, 소풍날은 김밥을, 겨울에는 동치미를 만들어주었다. 그 사이 내 심장과 내 간, 창자와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음식에 난 칼자국들 역시 내 몸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나를 건드렸다.

──「칼자국」 일부

 

팍팍한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그럼에도 일상을 감당하고 자신과 타인을 위해 할 만큼 해보는 일이 아닐까. 원한과 분노의 칼을 타인과 자신에게 겨누기보다, 그것으로 따듯한 음식을 만들 듯 말이다. 일상의 비루함 속에서 하루치의 노동을 기어코 감수하고, 그 노동의 결과물로 ‘먹고 사는’ 것이 바로 삶에 다름 아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임신한 ‘나’는 칼국수 집으로 돌아와 엄마의 칼로 사과를 깎아 먹는다. 칼자국을 품은 음식이 아이를 기른다. 비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에서 치러내는 노동으로 우리는 ‘벌어먹고 산다’. 밥벌이는 피곤하다. 이 날은 저 날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의 반복되는 일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손에 잡은 칼로 또각또각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도도한 삶의 방식은 아닐까.

 

피아노 건반의 모양은 똑같았다. 그것은 희거나 검었고, 동일한 크기의 질감을 갖고 있었다. 나는 도의 위치를 자주 잊었다. (…)그렇게 도를 찾아낸 뒤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도를 다시 치는 일일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덩치 크고 내성적인 악기가 처음으로 낸 소리, 완고하고 편안한 그 도-의 울림을 좋아했다.

──「도도한 생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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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정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나 상명여대 교육학과, 2000년 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했다. 2003년 좮동아일보좯 신춘문예에 소설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가 당선되었으며, 2006년 『문학동네』에 평론 「성난 얼굴로 돌아보지 마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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