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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읽기

보고르식물원과 차밭 / 박정자

작성자김명아|작성시간13.05.29|조회수131 목록 댓글 0

인도네시아에서 온 편지 �___박정자

 

보고르식물원과 차밭

박정자

 

안녕하십니까. 박정자입니다.

뒤뜰의 야자나무 두 그루가 갑자기 눈에 들어온 아침입니다. 불과 2년 전 이 집에 이사 올 때는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언제 그렇게 자랐는지 놀랍고, 아침저녁 늘 대하면서도 몰랐던 것이 미안해서, 늠름하게 잘 자랐다고 칭찬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온도와 습도가 적당하기 때문인지 열대에서는 나무들이 정말 잘 자랍니다. 우리나라의 나무를 기준해서, 7~800년은 되었겠지 생각하고 물어보면 300년도 안 되었다는 나무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하늘을 가리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정말 식물들의 천국입니다. 건기에도 아주 마르지 않고 우기에도 크게 쏟아졌다가 그치는 비 덕분에 나무와 풀이 쑥쑥 자랍니다. 일년 내내 꽃을 달고 있는 나무를 보면 때로 지루할 때도 있지만, 철없어 보이는 그 모습이 사랑스럽습니다.

오늘은 사람의 손으로 가꾸는 녹색지대, 보고르식물원과 뿐짝(puncak ; 정상이라는 뜻)의 차밭에 대해 쓰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곳, 보고르식물원BOGOR, KEBUN RAYA

해발 290m, 보고르는 자카르타 시내에서 멀지 않은 도시입니다. ‘비의 도시’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일년에 300회 이상 폭우가 내리는 곳입니다. 기온도 자카르타에 비교하면 한결 서늘해서 별장이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 곳에 17,000여 종의 나무를 품고 있는 큰 정원(KEBUN RAYA)이 있습니다. 원래는 궁전의 일부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수천 마리 꽃사슴이 뛰어노는 대통령궁을 옆구리에 끼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열대의 나무들은 몇 번을 찾아가도 언제나 신기함과 신선함을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아침이면 닫혔던 잎이 열리면서 물방울을 비처럼 떨어뜨린다는 비나무(레인트리), 양초처럼 생긴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양초나무, 국수발처럼 공기뿌리를 뻗고 있는 스파게티나무, 부채처럼 펼친 잎으로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나그네나무(부채바나나나무), 닭다리를 닮은 꽃 때문에 손수건나무…….

‘왕의 나무’라고 불리는 맹가리스는 깔리만탄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 나무에서 꿀을 따 왕의 음식에 사용했다는 유래에서 그런 별명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또 ‘의붓엄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판다누스라는 나무도 있습니다. 나뭇잎이 몸에 닿으면 간지러움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아이가 귀찮게 울거나 하면 이 나무의 잎을 따서 몸에 문질러 울음을 그치게 했다는 데서 유래한 별명이랍니다. ‘의붓엄마’라는 자리는 모든 나라에서 별로 좋은 인상이 아니었나봅니다.

정말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붕아방까이(시체꽃, Bunga Bangkai)는 가장 큰 꽃으로, 가장 역한 냄새가 나는 꽃으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꽃입니다. 꽃의 지름이 1.5m, 높이가 2~3m에 달하며 썩은 생선냄새 같은 악취가 근방 100m까지 퍼진다고 하니 가히 이 식물원을 찾아가는 방문객들의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번식을 위해 독특한 형태로 진화한 그 꽃을 보고 있으면 생명을 이어나가는 저마다의 몸짓과 향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제 생김에 따라 이름 불리는 많은 나무들, 누가 나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면 어떤 이름일까. 갇히지 않고, 그 이름 때문에 더욱 자유로울 수 있는 나의 이름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느 날 어린왕자로부터 추방당한 나무일까요. 바오밥나무가 식물원의 가장 뒤편에 새끼 하나를 키우며 아직도 그 뿌리를 왕자의 별로 향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수선스럽다 싶게 많은 나무들을 만나며 지나온 길의 끝에서 바오밥나무는 왠지 저 혼자 외로워보입니다.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진 느낌으로 나는 한참동안 그 곁에 머뭅니다. 건너편 키 큰 벤자민나무에 바람이 수런거립니다. 저녁해가 내려앉고 있습니다. 곧 별이 뜨겠지요.

식물원이라고 해서 살아 있는 나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넘어져 누워 있는 나무둥치들이 여기 저기 눈에 띕니다. 죽은 나무의 몸통에서 새롭게 싹 트는 여린 잎들을 봅니다. 삶과 죽음의 이중주로 이어지는 세상의 법칙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 풍경 속에서 삶과 죽음은 나뉨의 경계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이어짐’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보고르식물원’은 생태계의 보고寶庫이고 인도네시아의 자랑입니다. 참으로 많은 말이 그 곳에 있습니다. 너무나 많아서 할 말이 없는, 오래된 침묵이 그 곳에 있습니다.

보고르식물원에 가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부치지 못할 편지란 없다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순간, 그는 이미 그 편지를 읽고 있는 것이라고, 부추기는 나무 아래 앉아 편지를 씁니다. 다 쓰지 못한 편지를 나무 뿌리 옆에 묻고 돌아옵니다.

 

■초록오선지 뿐짝의 차밭

문화탐방 팀을 따라 나선 길, 우기에 접어든 하늘은 엷은 잿빛입니다. 어두운 구름이 낮게 깔렸습니다. 도중에 한두 번쯤 비를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아무도 비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랜만에 정다운 마음들 몇이 안부를 묻고, 이야기에 빠진 동안 버스는 뿐짝의 차밭을 향해 달립니다.

차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국립공원 구능 마스 아고르(Gunung Mas Agor). 해발 800미터로 연중 기온이 섭씨 20도 정도, 때문에 성장속도가 늦은 이곳의 차나무들은 향이 깊습니다. 서부 자와에서 제일 큰 이 차밭의 규모는 약 700헥타르, 차를 만들어내는 공장을 포함하여 1910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니 역사적인 가치만 해도 상당하다 할 것입니다.

차밭은 곡선의 이랑을 이루고 있습니다. 산비탈이라는 지형 때문인지, 이랑이 너무 길어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초록의 곡선은 서먹한 마음으로 찾아온 손님을 안심시킵니다. 은은한 차의 향기를 멀리서부터 몸으로 먼저 보여줍니다.

이랑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초록의 곡선과 어울려 오선지에 그려진 음표처럼 알록달록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감미로운 선율의 악보가 또 있을까요.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된 풍경, 자연과 사람이 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나는 재빨리 카메라 셔터를 누릅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순간의 악보이기에.

출발할 때 예상대로 비가 내리더니 폭우로 변했습니다. 초록빛 오선지를 연주하는 비의 리듬이 굵고 쾌활합니다. 폭우에 발길이 묶인 일행은 카페에 앉아 예정에 없던 풍경이 되었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예정에 없던 풍경이 되어, 예정에 없던 풍경 속에 갇혀버리다니…….

폭우 속에서 나무들, 풀잎들은 어쩌지 못해 온몸을 적시며 그 자리에 서 있는 줄 알았습니다. 생각의 오류 하나를 바로 잡았습니다. 나무들, 풀잎들은 취해 있었습니다. 빗줄기와 함께 춤추며 흥겨워하고 있었습니다. 빗속에서, 그들은 수동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능동태였습니다.

예정에 없던 풍경 속에서 우리는 이야기에 취했습니다. 이야기는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이어지고, 살아있는 시간은 이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스스로 감동합니다. 우리들은 수동태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능동태입니다. 생각의 오류를 하나 더 바로 잡았습니다. 삶은 이름씨(명사)가 아니라 움직임씨(동사)입니다.

어떤 비 오는 날

우리들은 여행을 떠났지

즐거울 거라고 행복할 거라고 했지

조금 이상한 여행이었지 춥다가

비 오다가 햇볕 나다가 다시

비가 왔지

우리는 카페에 앉아 젖은

마음을 말렸지 젖은

얼굴이 서로에게 아름다웠지

삶은 여행의 축소판이고

여행은 삶의 한 페이지라는

말이 생각났지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여행이었지

비 오고 해 나는 것

우리의 일상이니

우리는 카페에 앉아 젖은

마음을 말렸지 젖은

얼굴이 서로에게 따뜻했지

자연은 무수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 함께 부르는 노래입니다. 보고르에서 눈시리도록 나무를 읽고 뿐짝의 차밭에서 초록 오선지 위 한 점의 음표가 되었다가 돌아온 날이면 내 마음에도 적당한 온기와 습기를 머금은 경작지가 생깁니다. 깊은 잠에 빠지는 날입니다.

10월 초에 이 곳에서는 한국문화주간 행사가 일주일간 열렸습니다. 이번 문화주간의 주제는 ‘함께 나누는 문화’였습니다. 대형 쇼핑몰의 사방으로 툭 터진 장소에서 한국과 인도네시아 문화를 연결하는 많은 행사가 열렸고 한국 사람보다 더 많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지구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대를 살면서 만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인연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비단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의 관계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에게 휴식을 주는 관계가 되기 위해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이만 편지를 끝내고 밖에 나가, 저 혼자 훌쩍 커버린 주변의 나무와 풀잎들 하나하나에게 이름을 불러주어야겠습니다. 여기는 인도네시아입니다.

 

 

박정자 / 1957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으며 1991년 등단했다. 시집 『그는 물가에 있다』 외 6권이 있고, 현재 인도네시아에 살며 교민지 『한인뉴스』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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